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황원갑 <역사소설가>
최근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다시 읽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에 이어 대하 러시아 소설을 다시 읽었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원작소설과 영화의 사실 왜곡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영국의 감독 데이비드 린이 만든 영화 <닥터 지바고>는 여러 차례 보았고, DVD로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원작소설에서는 지바고의 이복동생이 영화에서는 이복형(알렉 기네스)으로 나온다. 이러고도 야 영화가 1966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의상상을 받았다.
이런 황당무계한 경우는 전에도 있었다. 어윈 쇼의 소설 <젊은 사자들>을 영화화한 것을 봤는데 주인공 노아 애커만(몽고메리 클리프트)이 전쟁이 끝나자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그린 것이었다. 원작소설에서는 독일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좀 다른 경우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7년에 나온 국산영화에 <낙화암과 삼천궁녀>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영화 포스터에 여주인공으로 나온 궁녀가 팔목시계를 찬 사진이 그대로 포스터에 나온 황당무계한 꼴을 보고 두고두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닥터 지바고>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리 지바고는 시베리아의 부유한 실업가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0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 고아가 된 지바고는 모스크바의 상류 계급 지식인의 가정에서 자라난다. 그때는 마침 러시아혁명의 파도가 휩쓸기 시작할 무렵으로 철도 노동자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1905년에는 모스크바의 프레스냐 지구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난다.
지바고는 의학을 공부하고 토냐와 결혼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종군의사가 되어 참전했다가 전선에서 부상을 당해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라라를 알게 된다. 라라는 어린 시절에 악덕 변호사 코마로프스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 이후로도 계속 강제 성관계가 있었는데, 라라가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 지금 라라는 코마로프스키와 헤어져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그 남편도 전쟁 통에 행방불명이 된 상태였다. 이윽고 지바고와 라라 사이에 숙명적인 사랑이 싹튼다.
얼마 뒤 전쟁은 혁명으로 이행되어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전국으로 번져 간다. 지바고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모스크바로 3년 만에 돌아와 혁명 직후의 혼란스러운 모스크바 생활을 뒤로하고 가족과 함께 황폐한 러시아를 가로질러 우랄의 시골 마을로 피난한다. 그러나 그 땅에도 안식은 없었다. 시를 쓰고 싶어 한 지바고는 우연히 도서관이 있는 이웃 마을에서 라라와 재회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불타오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라라에 대한 정열이 지바고의 생활을 어긋나게 한다.
그는 아내 몰래 라라에게로 가던 도중에 빨치산의 포로가 되어 강제로 의사로 일하면서 시베리아 각지를 떠돌게 되고, 그의 아내와 아이는 추방되어 파리로 간다. 빨치산으로부터 도망친 지바고는 다시 라라의 곁으로 돌아와 애정이 넘치는 공동생활을 시작했으나 그것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혁명군의 지도자가 된 라라의 남편이 군법회의에 회부될 위기에 처해 탈주하다가 총살당했다는 사건이 알려지자 라라도 위험한 상황에 몰려 극동 이르쿠츠크로 도망을 친다. 라라와 헤어져 외톨이가 된 지바고는 걸어서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지병인 심장발작을 일으켜 죽는다.
<의사 지바고>는 역사의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도는 지바고와 라라의 비극적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지바고와 라라에게도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지바고는 고아가 되었지만 모스크바의 지식인 가정에서 자라나 상류 계급과 그 문화의 전형적인 구현자가 된다. 그래서 뛰어난 의사이면서도 감수성이 유연해 철학이나 문학을 연구하고, 이 장편의 마지막에 24편의 시가 발표되어 있는 것처럼 시를 쓰기도 한다. 그리고 시인의 눈으로 자연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지바고는 자신을 혼돈 속으로 휘말려 들게 한 전쟁과 혁명을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정신적 독립을 지키려 한다. 전쟁도 혁명도 그의 정신 속까지는 침투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런 변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채 생활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혁명이 그의 정신에 철저한 복종을 요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자유를 선택하고 추구하게 된다. 그 자유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라라와의 사랑이었다. 여기에는 파스테르나크 자신의 인생관과 아내 이외의 여성을 사랑한 경험 등이 반영되어 있다.
파스테르나크는 정치를 일시적인 외적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정신과 감정, 창조성을 본질적인 요인으로 간주해 이를 왜곡하고 파괴하는 정치적 힘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다. 혁명의 폭력에 반대하며 “부드러움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지고지순한 선에 이를 수 있다”고 했고, 마르크스주의를 “사실에서 멀리 떨어져 그 기반이 불확실한 자기 중심적인 운동”이라고 했으며, 권력자는 “자기의 신화”를 주장하기 위해 “진실을 무시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고 단언한 지바고의 말은 파스테르나크의 견해이기도 하다.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 모스크바의 유대계 예술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 삽화를 그릴 정도로 명성 있는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결혼 전까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모스크바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독일의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으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음악과 시였다. 이십 대 초반에 이미 문예지 <서정시>에 시를 발표했고, 1914년에는 첫 시집 <먹구름 속의 쌍둥이>를 출간했다. 상징주의 시의 대가인 알렌산드르 블로크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방책을 넘어서>, <나의 누이여, 삶은>, <주제와 변주>, <제2의 탄생>, <새벽 열차를 타고> 등 대표시집을 출간했다. 시인이었던 그가 산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십 대 후반부터. 1957년 십 년 만에 탈고한 소설 <닥터 지바고>는 그가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작품의 관점이 사회주의 혁명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소련작가동맹에서 제명되고 정치적인 위협에 시달리자 결국 수상을 거부했다. 2년 뒤인 1960년 5월 30일 페레델키노의 별장에서 폐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1988년에 소련 정부가 그에 대한 사면조치를 내리면서 소련에서 그의 문학작품을 출간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1989년에는 그의 아들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아버지의 노벨문학상 메달을 대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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