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설탕·밀가루 독점해 큰돈 울산 전역서 사들인 토지·건물 상속
연세대학 졸업했던 장남 종웅씨 영어·일어 능하고 매우 똑똑했지만 각종사업 실패·자선사업·보증으로 유산 모두 날리고 병상에서 지내
지난 달 천재 피아니스트 김희자씨와 관련된 내용의 글이 이 지면을 통해 보도되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남편 이종웅씨에 대한 안부를 물어왔다. 그는 현재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1960~1970년대 울산에 살았던 사람들은 성남동 구 주리원 백화점 앞에 있었던 ‘천지상회’를 기억할 것이다. 요즘의 대형마트 역할을 했던 이 상점은 울산에서 제일 큰 잡화상으로 울산시민들에게 필요한 일용품을 모두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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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70년대 울산의 가장 큰 잡화상이었던 천지상회를 운영했던 이종웅씨는 이 무렵 전국 사찰과 청송교도소를 오가면서 불사와 죄수 교화에 많은 돈을 썼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워 나중에는 경제적으로 고생을 하게 된다. 1989년 봄 지리산 대원사를 방문했던 이씨가 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 상점은 병영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이규봉씨가 해방을 전후해 옥교동에 세웠다. 이 상점이 돈을 많이 벌수 있었던 것은 설탕과 밀가루를 독점해 울산 인근의 다른 상점에 팔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설탕과 밀가루는 소비에 비해 생산량이 적어 일단 물량만 확보하면 상점에 들여다 놓을 시간도 없이 차에 실린 채 다른 상점으로 팔려 나가곤 했다. 울산에는 설탕을 파는 상점이 둘 있었는데 이 중 한곳이 제일제당 설탕을 독점해 팔았던 천지상회였고 다른 한곳에서 나중에 울산의 대표적인 야당 인사가 되는 박규동씨가 삼양설탕을 팔았다.
천지상회가 현대식 3층 건물을 올린 것은 6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만 해도 울산 도심에는 3층 건물 높이의 개인 건물이 없어 울산사람들은 물론이고 경주와 포항 등 외지에서도 천지상회 새 건물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천지상회가 당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나 하는 것은 초창기 이 상점에서 경리로 일했던 진철호 외식업중앙회 울산지회장(67)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제가 근무할 때만 해도 천지상회는 매일 라면 박스로 3~4통이나 되는 많은 돈을 벌어 이 돈을 밤에 모두 셀 수 없어 궤짝에 넣어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세었다”면서 “당시 제가 매일 이 돈을 상점의 차로 부산까지 싣고 가 은행에 저금한 후 돌아왔다”고 말한다. 이때 천지상회는 경리, 기사, 점원, 창고지기 등 직원이 20여명이나 되었다.
김희자씨도 당시 시아버지가 돈을 너무 많이 벌어 경상도 말로 돈에 ‘언기증’이 났던 사람이다. “제가 시집을 오니 시아버지가 하는 말이 ‘요즘 장사가 잘 되어 이틀만 장사하면 부동산을 하나씩 살 수 있다’면서 ‘이제부터는 너가 주인이니 매일 번 돈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돈 관리라는 것이 매일 아침 직원 10여명이 방에 앉아 돈을 세면 그 돈을 누가 가져가지 않나 감시하는 것이었는데 이 일을 일주일 정도 해 보니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시아버지에게 ‘나는 피아노가 전공이니 레슨을 하겠다’고 간청해 간신히 그 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후 이씨는 상점 관리를 잠시 장남 종웅씨에게 맡겼다. 그러나 종웅씨는 당시 부인이 시작한 피아노 레슨이 너무 잘되어 많은 돈을 벌자 장사를 소홀히 해 아버지 이씨가 상점 문을 닫았다. 당시 김씨는 레슨을 하면서 레슨비로 1인당 10만원씩 받았는데 이 금액은 일반 레슨비에 비해 3~4배가 높았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집에 피아노 5대를 두고 하루에 1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규봉씨가 천지상회 문을 닫고 세 명의 아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던 것이 이 무렵이었다. 이씨는 장사를 하는 동안 논밭은 물론이고 건물과 심지어 산을 울산 곳곳에 사두었기 때문에 자식들이 큰 재산을 물려 받았다. 진철호씨는 당시 이씨가 울산에 부동산을 많이 사두어 부동산 서류만 해도 두 박스가 넘었다고 말한다.
재산을 물려받기 전 종웅씨가 한 사업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그가 처음 취직한 곳이 삼성 이병철 회장 비서실이었는데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일이 싫어 일주일 만에 그만 두었다. 부산고를 거쳐 연세대학을 졸업했던 종웅씨는 고교 때는 영어와 수학을 잘해 교내 수석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특히 그는 대학 시절 친구가 학생회장에 출마했을 때 영어로 찬조 연설을 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 당시 연세대에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아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는 영어 연설을 해야 했다.
70년대 말 전국 의사·변호사와 함께 ‘우정의 사절단’으로 미국에 갔을 때도 미국 언론을 상대로 홍보 활동을 펴고 영어로 인터뷰 했다. 그는 영어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일어를 배울 때는 당시 현대가 생산한 포니를 타고 매일 경주로 가 일본 여행객들을 상대로 가이드 활동을 하면서 일어를 마스터했다.
일어를 잘해 그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가 대학을 다닐 때 당시 부산 최고의 재벌이었던 동명목재 강석진 사장의 아들 정남씨가 한 반이었다. 그런데 정남씨가 일본 출생으로 우리말을 못했는데 이때 서투른 일본말로 정남씨와 사귀었던 그는 강 사장의 총애를 받았다. 이 후 강 사장이 그의 아들과 함께 동업을 권장해 강원도에 산을 사 해바라기를 심었는데 태풍으로 해바라기 묘목이 모두 떠내려가는 바람에 빈손으로 나왔다.
상속을 받은 후에도 그는 각종 사업으로 많은 돈을 날렸다. 그가 울산에서 처음 시작한 사업이 은행나무 식재였다. 당시 척과에 엄청나게 큰 산을 소유했던 그는 이 산에 은행 묘목 수만 그루를 인부를 동원해 심었다. 그런데 은행 묘목을 심은 다음날 장마로 수해가 나면서 산 위 저수지가 터지는 바람에 묘목들이 모두 떠내려가 돈만 날리고 말았다.
이처럼 사회적응력이 떨어져 각종 사업에 실패했던 그는 불심을 갖게 되었고 이때부터 시작한 일이 청송교도소 수감자 교화였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청송교도소를 방문해 죄수들을 상대로 법문을 가르쳤다.
법문을 갈 때는 항상 죄수들이 먹을 음식물을 차에 가득 싣고 갔다. 이후 그는 무려 28년간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울산에서 청송까지 가 죄수들을 교화시켰다. 그는 수감자들을 교화만 시킨 것이 아니고 이들이 석방되면 일정기간 돌보았다. 청송교도소 수감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중에 그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수감자들 중에는 그에게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힌 사람들도 적지 않다.
80년대부터는 스스로 승복을 입고 반 승려가 되어 전국 사찰을 순회하게 되는데 이때도 그는 불사에 많은 돈을 시주했다. 상북 고은사와 경주 흥륜사, 지리산 대원사는 그가 자주 찾았던 사찰이다.
특히 그는 흥륜사 해혜(海慧) 큰 스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흥륜사가 90년대 금강산 신계사 단청 사업을 할 때는 거금 700만원을 희사했다. 이에 앞서 그는 울산에서 서예전을 열었는데 이때 들어온 돈을 모두 흥륜사 종각을 건립하는데 바쳤다.
해혜 스님은 필자를 만날 때 마다 “울산에 법복은 입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인물이 종웅처사”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이처럼 가족 모두가 버는 일 없이 쓰기만 하다 보니 2000년대에 들어서서 가족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게 된다.
그런데도 그는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했다. 상속으로 받았던 성안동과 울산대공원 인근의 임야가 모두 남의 손으로 넘은 간 것이 이 무렵이었다. 현재 현대중공업 영빈관 터도 옛날에는 종웅씨 소유의 땅이었다. 김희자씨는 “내가 시집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님이 ‘동구에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땅이 있다’면서 나를 데리고 갔는데 그 곳이 현 영빈관 자리였다”고 말한다.
이씨가 마지막까지 갖고 있었던 땅이 신정동 태화공업사 뒤 집터였다. 이 터는 이규봉씨가 살았던 집터로 대지가 300여평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 땅도 그가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집터가 넘어갈 때 가족들이 회의를 열었다. 이때 자녀들이 “우리는 모두 길 거리에 나가 앉아도 되지만 어머니는 전세방이라도 하나 있어야 된다”면서 “집을 판 돈으로 빚을 모두 갚지 말고 어머니에게 전세방을 얻을 돈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이씨에게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이씨는 “우리가 재산은 날렸지만 다행히 모두 손재주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일하면 굶어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집을 처분한 돈으로 빚을 모두 갚은 후 자신은 친구가 운영하는 사찰로 갔다. 이후 그는 중병을 얻어 울산으로 다시 왔고 현재 신정동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필자는 최근 요양원을 방문 그를 만났다. 10여명이 한꺼번에 사용하는 방에 누워 있는 그는 오랜 투병 생활로 몸은 상해 있었지만 정신은 맑았다. 병상은 그의 딸 나정씨가 지키고 있었는데 “평생 남을 도우면서도 가족과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의 돈도 손이 떨려 쓰지 못했던 아버지가 왜 쉽게 죽음을 맞지 못하고 이렇게 고생하는지 알 수 없다”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에 대한 세평은 두 가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 있나 하면, 자기 것만 챙기는 요즘 사회에서 보기 힘든 자선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를 ‘기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나정씨는 “아버지가 세상 물정에 어두워 계산 없이 남을 돕다보니 정작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경조사는 찾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장례식에 참석할 친구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면서 아버지 장례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