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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經世遺表)
부공제(賦貢制) 7
방부고(邦賦考)
우리나라 법에는 공(貢)은 있어도 부(賦)는 없다. 무릇 온 관청에 공상(供上)하는 물품은 모두 토공(土貢)을 거두며 군ㆍ현에서 바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무릇 세공(稅貢)하는 물건을 징수한 것은 다음해 6월을 기한으로 해서 상납한다.” 하였다.
“전세(田稅) 외에 공물은 2월을 기한으로 한다.” 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세말(歲末)마다 여러 관청에 상납된 공물의 수량을 고찰하는데, 여섯 관청 이상에 납부하지 못한 수령은 계문(啓聞)해서 파출(罷黜)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토공하는 법은 지금에 밝힐 수가 없다. 그러나 오례(五禮)에 소용되는 것 외에도 외잡(猥雜)한 여러 가지 물품은 연산군(燕山君)이 황음(荒淫)하던 그때에 생긴 것이 많고, 모두가 조종(祖宗)들이 옛적에 정한 것은 아니었다. 무릇 상납하는 물품은 비록 쌀ㆍ팥ㆍ비단ㆍ베 따위라도 오히려 퇴짜를 놓고 뇌물을 요구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생선ㆍ생복(生鰒)ㆍ갓끈ㆍ관(冠)끈ㆍ모피(毛皮)ㆍ가죽ㆍ약초(藥草) 등속이겠는가? ‘크다’, ‘작다’, ‘신선하다’, ‘묵었다’라고 해서 서리들이 마음대로 조종하고 간사한 짓을 행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속담에, “공물은 꼬지에 꿰어 바치고 뇌물은 짐바리에 실어서 몰고 간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토공을 상납할 때에 여인(輿人)들이 원망하는 말이니 그 폐단을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선조(宣祖) 15년(1582 : 壬午) 가을, 구월에 우찬성(右贊成) 이이(李珥)가 상소해서 공안(貢案)을 개정하길 청했다.
그 상소는 대략, “이른바 공안을 고친다는 것은, 여러 고을에 토지의 대소와 인민의 많고 적음이 같지 않고 혹 동떨어지게 다르건만 공안에 정해진 것에는 심한 차등이 없으니 괴로움과 편리함이 고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토산품 아닌 것이 많고 온갖 물품을 모두 마련해서 각 관청에 갈라바치는데, 수량이 점점 많아지는 폐단은 해가 백성에게 돌아가도 이(利)는 서리가 취할 뿐이고 나라 용도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또 근래에는 세가 가벼워져서 맥(貊)의 도(道)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1년 수입으로써 지출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매양 옛날에 저축했던 것을 보태어 씁니다. 그리하여 200년 동안이나 축적해오던 나라에 지금은 2년 동안 먹을 것도 없습니다.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니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지금에 부세를 더하고자 하면 백성의 힘이 벌써 다했고, 전일의 규정만 지키면 오래지 않아서 나라 재물은 반드시 다 없어질 터이니 이것은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약 공안을 개정하자면 능숙한 솜씨를 지닌 자에게 맡겨서 잘 규획하도록 하고 다만 그 땅에 생산되는 것으로 균평하게 배정한 다음, 한 고을에서 상납하는 것이 두세 관청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수입하는 원래 수량은 별로 줄어들지 않으면서도 백성의 허비는 열에 아홉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백성의 힘을 너그럽게 펴주고, 백성의 심정을 위로해서 즐겁게 한 다음, 알맞게 요량해서 세를 증가한다면 나라 용도는 점점 넉넉해질 것입니다.
공안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사실 백성만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경비를 위한 것입니다.” 하였다.
살피건대, 당시의 법에 무릇 생선을 바치는 이는 봉상시(奉常寺)ㆍ사옹원(司饔院)ㆍ예빈시(禮賓寺)ㆍ양현고(養賢庫)ㆍ사재감(司宰監)에 바치는데, 백성이 이것 때문에 폐해를 받는다. 만약 아울러 봉상시에 바치고 그곳에서 여러 관청에 분배하도록 한다면 그 폐해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약재(藥材)는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의정부(議政府)ㆍ종친부(宗親府)ㆍ충훈부(忠勳府)ㆍ의빈부(儀賓府)ㆍ중추부(中樞府)ㆍ기로소(耆老所)에 바치는데 백성이 또한 폐해를 받는다. 만약 아울러 내의원에 바치고 그곳에서 여러 관청에 분배하도록 한다면 그 폐해를 덜 수 있을 것이다. 또 군ㆍ현의 크고 작음으로써 공액(貢額 : 공물의 수량)을 가감하면 백성의 바치는 것이 약간은 고르게 될 터이니 이 때문에 공안을 고치자고 하는 것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윗사람에게 손(損)이 되면 아랫사람에게 익(益)이 되고, 아랫사람에게 손이 되면 윗사람에게 익이 됨은 천하의 정리이다. 그러나 전부의 폐단은 유익함이 위로 나라(公)에 있지 않고 아래로 백성에게도 있지 않다. 한 물건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좀벌레가 되어서, 위로 영양(榮養)이 깎이고 아래로 고혈(膏血)이 착취된다. 예부터 충성스런 뜻을 가진 사람이 그 입이 쓰고 마음이 괴롭도록 반드시 없애고자 한 것은 무릇 이것뿐이었다. 노(魯)나라의 삼가(三家)와 한(漢)나라의 척리(戚里)와 우리나라의 서리(胥吏)는 그 귀천은 비록 다르나 그 중간에서 가로막은 것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유자(有子)가 철법(徹法)을 쓰도록 청하면서, “임금이 백성과 함께 족(足)해진다.” 했고, 문성공(文成公 : 이이의 시호)이 공안을 개정하길 청하면서, “임금이 백성과 함께 족해진다.”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그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다(또 상고하건대, 율곡이 《東湖問答》을 지은 것도 또한 이 뜻이었으니 참고함이 마땅하다).
그 다음해 봄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이가 또 계하기를, “군적(軍籍)을 개정하는 것은 비록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비록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방책이 반드시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이(利)가 십(什)이 못 되면 옛 것을 고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경장(更張)한다는 빈 명칭만 있고, 변통한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예전대로 할 뿐입니다. 아아! 공안을 개정하지 않으면 백성의 힘이 끝내 펴질 수 없고 나라 용도도 마침내 넉넉할 수가 없습니다. 논의하는 자는 혹 소요(騷擾)스러움을 걱정하나 공안을 개정하는 등의 일은 조정에서 상의(相議)해서 결정할 뿐입니다.
백성은 한 되의 쌀, 한 자의 베도 허비함이 없는데, 무엇이 백성에게 관계되기에 소요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만약 양전(量田)을 한다면 백성을 조금 소요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이에 거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개정하는 것을 반드시 양전보다 뒤에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진실로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 고르게 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전한 다음이라고 해서 전결의 증감에 어찌 큰 차이가 생기겠습니까? 먼저 공안을 개정하고 뒤따라서 양전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전결에 비록 남고 모자라는 작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찌 지금 공안이 전결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잘못 정한 것과 같겠습니까?” 하였다.
살피건대, 당시 공법도 반드시 전결로써 근본을 삼았기 때문에 상소한 바가 이와 같았고, 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전결로써 쌀을 거두었다.
선조 27년(1594 : 甲午) 봄에 공안을 상정(詳定)하도록 명령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보감(寶鑑)》에 이르기를, “왜란 후에 공법이 더욱 무너졌는데 옛 공안을 줄이고, 한결같이 토산(土産)에 따르도록 명했다. 증가나 감손을 다 개정하지 못하고 중지했으나, 공물을 쌀로 변경한다는 논의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살피건대, 갑오년은 만력(萬曆) 임진 계사의 다음해(1594)였다. 이때는 왜구가 물러가지 않았으니, 법을 제정할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명(成命)이 비록 내렸으나 개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상소하여 공안을 상정하기를 청했는데 그의 논의에, “각 도의 민결(民結)에 쌀과 콩을 고르게 부과해서 모두 경창(京倉)으로 실어오도록 하고, 각사(各司)의 공물 및 방물 진상도 물품을 계산해서 값을 정합니다. 제용감에 진헌(進獻)하는 모시와 베의 값을 무명[木]으로 하는 예와 같이 하고, 유사(有司)를 시켜 무역해서 쓰도록 합니다.
군자(軍資)가 부족하거나 국가에 특별히 조달할 일이 생기면, 공물과 방물 진상의 액수를 요량해서 적당히 감합니다. 그렇게 하면 곳간에 갈무리한 쌀과 콩으로 번거롭게 바꿔서 만들지 않더라도 취해 쓰는 데에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중국에는 외방에서 진상하는 일이 없고, 다만 13도(道)의 속은(贖銀 : 벌금으로 받은 은)을 광록시(光祿寺)에 교부(交付)하여 모든 진공(進供)하는 물품을 사서 쓴다 합니다. 만약 특별히 소용되는 일이 있으면 특명으로 선수(膳羞)를 줄여서 그 값을 인용(引用)하기 때문에 먼 지방 백성이 실어나르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공장에서 만든 온갖 물건이 경도에 모여들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은 그 법 세운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였다.
생각건대, 유문충(柳文忠 : 유성룡의 시호)이 말한 바가 곧 대동법(大同法)이었으니, 대동에 대한 논의는 문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가?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던 해(1608 : 戊申)에 상신 이원익(李元翼)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해서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청했고, 먼저 경기(京畿)에 시험하였다.
그 법에, “매년 봄 가을에 민전(民田) 한 결(結)마다 쌀 8두를 거두었다가 시기에 따로 각사(各司) 사주인(私主人)에게 갈라주고 상공(上貢)할 물품을 스스로 무역해서 바치도록 하고, 그 수량을 넉넉히 남도록 해서 주인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하고 이외에는 한 되의 쌀도 민호에 더 징수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광해가 기내(畿內)에 먼저 시험하도록 했는데 거실과 호민(豪民)이 방납(防納)하는 큰 이(利)가 없어지자, 온갖 방법으로 훼방놓았다. 그리하여 광해가 여러번 파하고자 했으나 경기 백성이 편리하다고 함으로써 시행되었다(李植의 《澤堂集》).
생각건대, 지금 토공(土貢)은 모두 혁파되었고 오직 인삼공(人蔘貢)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방납하는 법이 있다. 그 법은, 무릇 나삼(羅蔘)을 공(貢)하는 자는 나삼 한 냥마다 돈 400냥으로 값을 정해서 내의(內醫)의 집에 바치는 것이다. 내의는 그 10분의 1로써 삼을 무역해서, 제가 바치고 제가 받으면서 남은 10분의 9를 먹는데 이것이 소위 방납이다. 그때에는 온갖 물품의 공(貢)이 모두 이와 같았으니 백성이 어찌 견뎌냈겠는가?
인조(仁祖) 원년(1623 : 癸亥) 가을, 9월에 영의정(領議政) 이원익이 아뢰어서, 3도 대동청(大同廳)을 설치하고 낭청(郞廳)에 네 사람을 두어서 그 일을 분담했는데, 먼저 강원도에 시험하였다.
이보다 먼저 광해 때에 이원익이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청했으나 기내에 시행되었을 뿐이고 끝내 여러 도에 파급하여 시행하지는 못했다. 이때에 와서 이 법을 8도에 두루 시행하기를 청했으나, 도하(都下)의 터무니 없는 논의 때문에 관동(關東)에만 시행하였다(《寶鑑》 및 《택당집》).
생각건대, 토공이 변해서 대동이 된 것은 천하에 옳게 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행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그 이해를 미리 요량하기 어려운 것에 있어서랴?
그후 3년이 지난 병인년(1626)에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서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자 이에 원익이 말한 법에 따라 온 도의 전역(田役)을 평균하고 고르게 분배하여 혈법(絜法 : 명백한 법)으로 한 다음, 문적에 기록해서 갈무리하였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무인년(1638) 가을에, 관찰사 김육(金堉)이 그 문적을 보고 감탄하여,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하고 이에 그 법을 부연하여 더욱 상세하게 한 다음 치계(馳啓)하기를, “대동하는 법이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긴절합니다. 신이 도내 전결을 총계하여 결마다 면포(綿布) 한 필, 쌀 1두를 내게 했더니, 진상하는 공물 값과 본도에 쓰는 온갖 요역(徭役)도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어 다시 재촉하여 징수하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묘당(廟堂)에서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위에서 시행하도록 특명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생각건대, 나쁜 법을 변경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우니 후세 사왕(嗣王)은 이런 점에 감계(監戒)해야 할 것이다. 《보감》에 이르기를, “인조 17년 기묘년(1639) 겨울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청하므로 허가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이 글은 비록 이와 같았으나 그때 실상은 시행되지 않았고, 숙종(肅宗) 초년에 와서야 영남에 시행되었다.
효종(孝宗) 2년(1651 : 辛卯) 가을, 8월에 비로소 상신 김육의 논의를 채용하여 대동법을 호서(湖西)에 시행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던 해 11월에 우의정 김육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왕정(王政)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백성이 편한 다음이라야 나라가 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동하는 법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으니, 또 양호(兩湖 : 호서와 호남)에 시행할 것 같으면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유익하게 함이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대저 1년 동안에 실시(應行)하는 요역은 한 결마다 면포 10여 필을 소비하게 되며, 적더라도 7, 8필 이하는 아닙니다. 그리고 뜻밖에 횡출(橫出)하는 역(役)은 또 이 한정에 들지 않았으니 백성이 어찌 고달파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한 결마다 봄에 면포 한 필과 쌀 2두를 내고 가을에 쌀 3두를 내도록 하면 총 10두가 되는데, 전세 외에 진공하는 공물 값과 본 고을에 바치는 것이 모두 그 중에 들었습니다.
한번 바친 다음에는 그 해가 다 가도록 편히 쉬게 되니, 경기에서 선혜청에 1년 동안 바치는 16두와 비교해도 훨씬 수월합니다. 양호의 전결이 모두 27만 결이니 면포가 5천 400동(同)이고 쌀이 8만 5천 석이 됩니다. 능숙한 솜씨를 지닌 자에게 맡겨 규획(規劃)해서 조치한다면 쌀과 면포에 가외 수량도 반드시 많아서 공장(公藏)과 사축(私蓄)의 위아래가 아울러 풍족할 것이니 뜻밖의 요역에도 또한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먼저 호서에 시험한 다음, 8도에 고르게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효종 원년 경인(1650) 봄에 이조판서 김집(金集)이 상소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당초 우의정 김육이 호서 지방에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했을 때 경재(卿宰)와 대각(臺閣)으로서 명류(名流)라 일컫는 자는 모두 불편하다고 말했다. 안방준(安邦俊)은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라고 배척하기까지 하므로 상(上 : 임금)이 집(集)에게 하문하자 집도 불가하다고 말했다. 그후에 집이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순방(詢訪)하여 불차탁용(不次擢用)하기를 청했는데 육(堉)이 또 불가하다 하여, 이로 인해 두 사람의 논의가 화합하지 못했다.
육은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면서 “신의 고조(高祖) 식(湜)이 기묘년의 화(禍)에 걸려든 이후로, 화살에 상처 입은 새는 굽은 나무만 보아도 놀라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지금에 또 시인(時人)들의 꺼려함을 당했으니 목숨을 구하기에도 부족한데, 어찌 감히 어진 사람이 진출하는 길을 오래도록 방해하겠습니까?” 하였다. 집도 이로 인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소장을 올리고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집의(執義) 송시열(宋時烈)이 계하기를, “김집은 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옛적에 범중엄(范仲淹)이 내침을 당하자 윤(尹)ㆍ채(蔡) 여러 사람은, ‘사우(師友)가 진퇴(進退)하는 마당에 의리상 혼자만 다르게 처신할 수 없다.’ 하여 함께 폄출(貶黜)되기를 청했습니다. 지금 집이 이미 갔는데 신의 도리상 홀로 머물러 있기는 어려우니 체직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임금은 세 사람을 타일러서 양쪽으로 화해시키고 다시 승지(承旨) 윤강(尹絳)을 보내어 집에게 머물러 있기를 권유했으나 집은 곧 시골로 돌아갔고, 육도 또한 여러번 사직해서 정승을 사면하므로 호서에 시행하려던 대동법이 드디어 중지되고 시행되지 못하였다(《보감》).
2년 8월에 김육이 다시 상언하므로 임금이 김육을 불러서 종일토록 대동법의 이해를 서로 말하고 육에게 먼저 절목(節目)을 꾸미도록 명하니 육이 물러가서 절목 한 통을 바쳤다. 상은 이에 이시방(李時昉)과 허적(許積)에게 그 일을 맡아서 급히 호서 일고(一路)에 시행하도록 명했는데, 야읍(野邑)에는 결마다 쌀을 내어서 배에 실어 상강(上江)으로 조운(漕運)하고 산읍(山邑)에는 쌀 대신 면포[柨]를 서울에 바쳤다. 어공(御供)ㆍ향사(享祀)ㆍ접빈(接賓)하는 수용(需用)으로부터 추간(芻稈 : 꼴과 곡식 줄기)ㆍ신증(薪蒸)까지 이것으로써 마련하니, 관에서는 넓히지도 좁히지도 못하고 아전도 감히 늘리지도 줄이지도 못했다. 모든 공안(貢案)에 여러해 묵은 교활한 폐단이 일조에 혁파되자 호서의 백성은 수화(水火)에서 벗어난 듯 고무(鼓舞)하지 않는 자가 없고, 전일에 불편하다고 말하던 자도 이에 도리어 입을 모아서 아름다움을 일컬었다.
‘호서대동절목(湖西大同節目)’
수납하는 쌀의 원수(元數)는 해마다 그때 기간(起墾)된 전결 숫자에 따른다. 한전(旱田)ㆍ수전(水田)을 통해 1결마다 봄ㆍ가을에 5두씩을 거두어서 서울과 외방의 1년 용도(用度)로 하고, 본도의 1년 동안 지출[應下]할 수량을 계산해서 제감한다. 그리고 그 고을의 대ㆍ중ㆍ소ㆍ잔(殘)을 분간해서 알맞게 요량하고, 여유의 쌀은 남겨두어 각 항의 쇄마(刷馬)와 과외의 요역에 응한다. 여유 쌀이 부족한 고을에는 여유 있는 이웃 고을의 쌀을 옮겨다가 충당해주며, 경청(京廳)에서 만약 불시에 특별히 복정(卜定)하는 일이 있으면 임시로 조달하는 비용으로 한다.
1. 본도에 실지 전결이 12만 4천 746결 영(零)이니 한 결마다 쌀 10두를 거두면 8만 3천 164석이 된다. 이 안에서 서울에 상납하는 쌀이 4만 8천 280석이고, 선마(船馬) 값이 3천 962석이며, 본도에 남겨두는 쌀 3만 932석 영이다.
1. 28개의 관청에, 원 공물 및 전세조(田稅條) 공물, 호조(戶曹) 작지(作紙)ㆍ역가(役價), 기인 세폐 상차목(其人歲幣上次木), 각 관청의 경주인(京主人)ㆍ방자(房子)의 품삯, 예조(禮曹)와 관상감(觀象監)의 각양 지지(各樣紙地), 공조(工曹)의 칠전(漆田)과 전칠(全漆), 조지서(造紙署) 닥밭(楮田)의 소출(所出), 장원서(掌苑署) 과원(果園)의 결실(結實), 전생서(典牲署)의 황우(黃牛), 비변사(備邊司)의 유지의(襦紙衣),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는 대ㆍ소맥(大小麥)과 생면(生麵), 각 전(殿)의 삭선(朔膳)과 월령(月令)ㆍ탄일(誕日)ㆍ동지(冬至)ㆍ정조(正朝)의 납육 진상(臘肉進上), 내의원(內醫院)이 우황(牛黃)과 약재(藥材), 삼명일(三名日)의 진상마(進上馬), 공조의 붓대, 내궁방(內弓房)의 어교(魚膠)ㆍ정근(正筋), 영접도감(迎接都監)의 경비(京婢)와 방자가(房子價)를 모두 쌀로 마련하는데, 본청(本廳)에서 1년 동안 꼭 상하(上下)할 액수를 통계한 것이 4만 6천 266석 영이다.
1. 전방병선(戰防兵船)을 신조(新造)하거나 개삭(改槊)하는 것과, 진상하는 방물로서 백면지(白綿紙)ㆍ유둔(油芚)ㆍ소호지(小好紙)ㆍ갑주(甲冑)ㆍ약환(藥丸)과 감영(監營)ㆍ병영(兵營)ㆍ수영(水營)의 영수(營需)와 각 고을 관수(官需)로서 기름ㆍ꿀ㆍ지지(紙地)와 사신(使臣) 및 감사에 대한 지공(支供)과 석전(釋奠)에 올리는 폐백(幣帛)ㆍ우포(牛脯)와 사직(社稷)ㆍ사액서원의 폐백 등 각 항 상하(上下)를 아울러 쌀로 계산하면 2만 2천 918석인데, 모두 본도에 유치한 쌀에서 제감해도 오히려 8천여 석의 쌀이 남아 있게 되니 이것으로써 과외의 별역(別役)에 조달하는 밑천으로 한다.
1. 해변과 강변 고을은 쌀을 상납하고 산중 고을은 면포를 상납해서 수운(輸運)하는 폐단을 없앤다. 쌀이면 먹을 만한 쌀을, 면포는 닷새(五升)에 35척으로 하는데, 풍흉(豊凶)을 막론하고 쌀 5두를 면포 한 필로 계산하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정한다.
1. 두ㆍ곡ㆍ승ㆍ척은 한결같이 호조에서 사용하는 규식대로 본청에서 만들며, 낙인(烙印)하여 본도에 내려보낸다. 본도에서는 또한 견양(見樣)을 만들어서 각 고을에 갈라보내고 이것을 행용(行用)하도록 한다. 호수(戶首) 등이 사사로 낙인 없는 두ㆍ곡ㆍ승ㆍ척을 사용하는 자는 적발해서 중하게 다스린다.
1. 서울에 상납하는 쌀ㆍ면포를 수운하는 뱃삯과 말삯은 수납한 쌀의 원수 안에서 계감(計減)하는데 면포는 정월 안에, 쌀은 4월 안에 상납하며, 기한 내에 미납한 수령은 해유(解由)에 모두 방애(妨礙)를 받는다.
1. 각 관청 공물로서 제향ㆍ어공과 잔폐(殘弊)해서 형편없는 관청은 당년 안에 상하(上下 : 회계함)하고, 그 밖의 각 관청은 모두 다음해 봄에 상하하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한다.
1. 각 고을에 모두 은결(隱結)이 있는데, 그 은결은 아울러 신결(新結)에 넣는다. 그리고 조만간에 발견되면 아울러 율에 의해서 중하게 따진다.
생각건대, 여기에, “봄ㆍ가을에 각각 5두를 거둔다.”는 것은 초창기의 법이었다.
효종 9년(1658 : 戊戌) 봄, 2월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호서대동법을 모방해서 호남에 시행할 대동법의 절목을 강정(講定)하도록 명하였다.
가을 9월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육이 유소(遺疏)를 올려 호남의 일을 말하면서,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천거해서 그 일을 부탁했으나, 신이 만약 죽고 나면 하루 아침에 도움이 끊겨서 중도에 폐지될까 염려됩니다.”고 했는데, 그 뜻은 대개 호남에 다시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상은 비답(批答)하기를 “호남 일은 알맞은 사람을 구해서 맡겼는데 무엇을 걱정하며 무엇을 염려하는가?”고 하였다. 그후 상이 육을 생각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해서 흔들리지 않기를 김육같이 할 사람을 구하겠는가.” 하였다.
현종(顯宗) 원년(1660 : 庚子) 가을, 7월에 전남도(全南道) 산중 고을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4년 봄, 3월에 전남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이보다 먼저 효종이 일찍이 양호(兩湖)에 대동법을 세워서 백성의 곤란함이 펴지도록 명하여 먼저 호서에 시행되었으나, 호남에는 미처 시행되지 못했다. 상이 즉위하던 처음부터 선왕의 뜻을 반드시 이루고자 하였으나, 조정 신하는 그 불편함을 서로 말했다. 그리하여 경자년에 먼저 호남 산중 고을에 시험하여 시행하기도 하고 철폐하기도 했는데, 이때에 와서 소민(小民)은 모두 편리하게 여기고 오직 호민(豪民)에게만 불편하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고, 드디어 온 도에 두루 시행하도록 명하여 전지 1결마다 가을에 쌀 7두를 거두고 봄에 6두를 거두었다. 본도 전결(田結)이 총계 19만 855결인데 복호(復戶)한 2만 1천 84결을 제외하면 실결(實結)이 16만 9천 771결이고, 결마다 13두를 거두어서 14만 7천 134석이나 되었다. 이 중에서 경창(京倉)으로 조운(漕運)하는 것이 6만 1천 280석이고 본도에 쌓아두는 것이 8만 5천 916석인데, 이것으로써 중외의 수용에 대응하는 것이었다(《보감》).
생각건대, 여기에, “가을에 쌀 7두를 거두고 봄에 또 6두를 거둔다.”는 것은 초창기의 법이었다.
살피건대, 《비국요람(備局要覽)》에, “효종 무술년(1658)에 전라도 해변고을에 시행했고, 현종 임인년(1662)에는 김좌명(金佐明)의 상언(上言)에 의해서 전라도 산중 고을에 시행했다.” 하였는데, 《보감》에 기재된 것과 같지 않으므로 지금은 《보감》에 따른다.
현종 7년(1666) 겨울 10월에 전라도 대동미(大同米)를 봄ㆍ가을에 거두던 것을 합쳐서 봄에 거두도록 명했는데, 관찰사 홍처후(洪處厚)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보감》).
숙종(肅宗) 3년(1677 : 丁巳) 이조판서 이원정(李元楨)의 말에 의해서 영남(嶺南)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숙종 7년(1681) 6월에, 선혜청에서는 양남(兩南)에서 진공하는 사전(四殿) 삭선(朔膳)의 각종 물품값 및 감영ㆍ병영ㆍ수영과 각 고을 관수(官需)와 사객지공(使客支供)ㆍ전선(戰船)ㆍ병선 값 등의 쌀 수량을 재감하고 구별(區別)하여 녹계(錄啓 : 기록하여 啓聞함)해서 정식으로 하였는데 이는 나라 용도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호남 대동미의 원수(元數)가 총 6만 200여 석이었는데 감해진 것이 1만 5천 600여 석이고, 영남의 원수가 총 4만 석 중에 감해진 것이 9천 580여 석이었다.
숙종 9년 가을, 7월에 영돈령 민유중(閔維重)이 말하기를, “양호 대동미는 모두 12두로 정해져 있는데 유독 영남만은 13두로 정해져 있습니다. 나라를 경영하는 데에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 불과한데, 지금에 비록 1두를 줄이도록 허락하더라도 경용(經用)을 지탱할 수는 있습니다.”고 하자,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살피건대, 숙종 3년에 재상(災傷)으로 견감하여 경기와 양호에 거두는 대동미에 차등이 있었고, 영남에도 재를 당한 고을에서 진상하는 호표(虎豹)의 가죽과 군기(軍器)ㆍ월과미(月課米)ㆍ기인가포(其人價布)ㆍ제용감정포(濟用監正布)는 아울러 전부 감면하도록 명했는데, 대개 이때 영남에는 대동법을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건의는 이해에 있었으나 시행된 것은 숙종 4년이었다.
살피건대, 선왕의 제도에는 두 가지의 공(貢)이 있었는데, 첫째는 민공(民貢)이고, 둘째는 후공(侯貢)이었다. 민공이란 《주례(周禮)》에 이른바 구공(九貢)으로서 농자(農者)는 구곡(九穀)을, 포자(圃者)는 초목(草木)을, 목자(牧者)는 조수(鳥獸)를, 형자(衡者)는 산물(山物)을, 우자(虞者)는 택물(澤物)을, 빈자(嬪者)는 포백(布帛)을, 공자(工者)는 그 기물(器物)을, 상고(商賈)는 그 물화(物貨)를 각각 공(貢)했는데 이것이 한 공(貢)이었다.
후공이란 우공편(禹貢篇)에 이른바 구공으로서 연주(兗州)에서는 칠(漆)과 실(絲)을, 청수(靑州)에서는 소금과 갈포[絺]를, 서주(徐州)에서는 하적(夏翟 : 오색 깃을 갖춘 꿩)을, 양주(楊州)에서는 구곤(璆琨 : 아름다운 옥)을, 형주(荊州)에서는 우모(羽毛 : 새의 깃과 짐승의 털)를, 예주(豫州)에서는 칠과 모시[枲]를, 양주(梁州)에서는 구(璆)와 철(鐵)을, 옹주(雍주州)에서는 구림(球琳 : 아름다운 옥)을 각각 공했는데 이것도 한 공이었다.
한 나라 이후의 공법은 전하는 것이 없다. 지금은 오직 당ㆍ송ㆍ원ㆍ명 때 여러 주(州)의 공안서 사책에 기재되어 있어, 무릇 천지간에 진기한 물건은 공을 바치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부세에 대한 폐단은 세대마다 논의된 바가 있으나, 토공(土貢)에 대한 폐단은 사신(史臣)의 논의한 바가 별로 없고 간신(諫臣)도 의논한 바가 없다. 대개 공하는 여러 가지 물건의 대소ㆍ경중ㆍ장단ㆍ후박은 아울러 법령(法令)이 있었다. 현령은 민호에 거두고 감사는 군ㆍ현에 거두며, 서울 관청에서는 여러 도에서 거두는데, 그 헌납하고 영수하는 즈음에 법을 상고해서 그 방식에 맞게 하면 서리와 하례가 감히 그 사이에서 농간하지 못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기강이 한결 같아서 습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편하게 여겨서, 토공하는 일로써 별다른 민막(民瘼)은 생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일을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연경(燕京)에 세폐(歲幣)를 바쳐온 지가 400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예부(禮部)의 서리가 폐물(幣物)이 나쁘다는 이유로 탈을 잡아 물리쳤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무리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목동(牧童)이 차기에도 부끄러워할 작은 칼과 구걸하는 손으로 가지기 부끄러워할 나쁜 부채 따위 두어 가지뿐이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물건과 기이한 보화를 저들인들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니건만 법식이 한결같이 구비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감히 요구하지 못한 것인데, 이것이 토공에 폐단이 사라지게 된 까닭이다. 외국에 바치는 것에 이미 이와 같이 폐단이 없어졌으니 군ㆍ현에서 공하는 것은 더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우리나라 토공하는 법도 반드시 포학한 정사는 아니었으나 특히 법령이 엄하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아서 서리가 퇴짜를 놓는 권한을 잡고, 호족이 방납하는 이(利)를 함부로 하여 아름다운 물건도 물리침을 당하니, 방납하는 값은 드디어 점점 많아지기에 이르렀고 안팎이 화응(和應)하여 억울함을 펼 수 없었다. 어진 신하와 현철한 정승은 옆에 있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습속이 이미 고질로 굳어져서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니, 이런 때를 당해서 그 법을 보존하면서 그 폐단만 없애는 것은 비록 성인이라도 능히 하지 못할 바가 있다. 그런데 그 형세를 따라서 그 뿌리를 뽑는 데에는 오직 슬기 있는 자가 먼저 그 기틀을 살필 것이니 이것이 토공을 없애고 대동을 설시한 것이다.
대동이란 방납하는 형세로 인해 방납하는 뿌리를 뽑아서 방민(坊民)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 법은 비록 잘 변했으나 기강을 진작시키고 호귀를 억제하는 것이니 능히 못할 바가 있었다. 또 토공하는 법은 군ㆍ현에서는 민호에 수납하고 감사는 여러 군ㆍ현의 공을 받아 도합해서 호조 바치면 호조에서는 받아서 여러 관청에 갈라주는 것이니, 그 폐단이 이에 이르지는 않는다.
오직 감사가 그 하솔(下率)들을 금단해서 제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하도록 하면 토공하는 법을 비록 남겨두더라도 가하다. 또 나라를 잘 경영하는 자는 반드시 명목을 바르게 해야 하는데, 실상은 비록 같더라도 그 명목은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세(田稅)는 10분의 1로 하는 것을 극한으로 하는데, 10분의 1보다 많으면 명목이 못 되지만 10분의 1에 미치지 못하면 그 명목은 정당하다. 우리나라 전세는 100분의 1도 되지 않으며, 비록 대동을 보태더라도 40분의 1세에 불과하니(남방에는 30분의 1세이다) 무엇이 덕(德)에 부끄러워서 감히 명목하지 못하겠는가? 바로 전세를 증가해서 결마다 20두로 하면 명목이 이에 정해질 것이다. 전묘(田畝)를 헤아려서 부세하는 것을 성인이 나무랐으니 어찌 반드시 그대로 따르겠는가?
지금 《대전(大典)》을 상고하니, “전지 1결마다 전세가 4두이고 대동이 12두이다.”고 하였다. 세는 가볍고 부는 무거워서 군자(君子)가 병통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법을 고치던 당초에 다 잘하지 못함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대동법을 시행하던 당초에 나라에서 백성에게 약속하기를, “여러 관청에서 요구하던 것은 한결같이 정지한다. 이 쌀만 한 번 바치면 그 해가 다 가도록 편하게 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여러 관청에서 요구하는 것이 날로 더하고 달로 많아졌으며, 그 중에는 저류미(儲留米)가 있다. 저류미에는 회감(會減)하는 것이 있고 바로 구걸(求乞)하는 것이 있는데 군ㆍ현에서도 이것을 빙자해서 민고(民庫)를 설치하고 전세와 대동미 외에 또 전결로써 돈과 곡식을 불법으로 거두는데 그 수량이 댓갑절이나 된다. 그리하여 회감한다는 것은 관청 낭탁(囊槖)으로 돌리고, 회감하지 않는 것은 아전이 제 굴혈(窟穴)로 차지한다. 조정에서는 눈여겨보면서도 구원하지 못하고 수령은 제 마음대로 양을 늘려 내므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서 견디어내지 못한다.
만약 선조ㆍ인조 적의 어진 신하와 어진 정승이 직접 이런 일을 보게 된다면 그 입술이 타고 발을 구르며 상한 듯 앓는 듯 걱정함이 당시보다 반드시 열 갑절이나 더 했을 것이다. 아아! 토공에 대한 폐단은 서울 관청에서 생겼기 때문에 수령이 원망하므로 묘당에서 듣고 이에 개혁하는 날이 있으련만, 민고(民庫)의 폐단은 하읍(下邑)에서 생겼으므로 수령은 이롭게 여기고 묘당에서는 무심하게 여겨서 장차 벗어날 기한이 없으니 이 점은 또 생민이 깊이 슬퍼하는 바이다.
숙종 34년에 황해도에 대동 규례를 모방해서 상정법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 “상정법은 대동의 규례를 모방해서 매결에 쌀 15두를 거두어(원래부터 거두는 쌀이 12두이고, 별도로 거두는 쌀이 3두인데 합해서 15두임. 旱田에는 小米 즉, 좁쌀을 거둔다) 그 영(營)과 고을의 1년 수용으로 하는데, 진상가미(進上價米 : 500석)는 선혜청에 바치고 공물가미(貢物價米 : 즉 별도로 거두는 쌀로서 해마다 本曹에서 작정한 수량대로 상납하는데, 결수가 많으면 남는 쌀을 남겨서 저축하고 결수가 축이 나면 남는 쌀로써 그 부족한 액수에 충당하는 것이다)는 본조에 바치며 그 남은 쌀은 또 저치(儲置)한다.”고 하였다.
《보감》에는, “해서 어사(海西御史)가 본도에 별도로 거두는 쌀을 제감하는 일로서 계문하자(해서에는 당초에 毛文龍 장군을 수응하기 위해서 1결마다 특별히 5두를 거두어서 들여보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하고 있다) 묘당에서 계하기를, ‘이것은 공물 값이고, 원래부터 과외의 거둠이 아니었으니 본도에 물어서 처리하기를 청합니다.’ 했으나 상이 특명으로 파하였다.”고 하였다(숙종 9년조).
《비국요람》에는, “광해(光海) 때에 모문룡이 가도(椵島)에 진수(鎭戍)한 후 삼남(三南)에서 군량을 수운하는데 전지 1결마다 쌀 1두 5승을 거두면서 모량(毛糧)이라 일렀다. 길이 멀다는 이유로 양서(兩西 : 관서와 해서)의 공가미(貢價米)와 서로 바꿨는데 이것이 별수미(別收米)의 시초였다. 선혜청에서 호조에 잘라보내어[劃送] 원 공물 값을 지출하는 액수로 했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별수미라는 것은 서도 백성의 억울한 것이었다 처음에 모량이라고 하고 삼남 쌀과 바꿔서 바치던 것이었으니, 이는 배〔船〕는 옮겨갔으나 자취는 남아 있고[船移刻存] 새〔鳥〕는 지나갔으나 소리만은 남아 있는 격이다. 지금 삼남 대동미는 모두 12두를 넘지 않는데 유독 황해 한도만이 아직도 모량 3두를 더 바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만약 정조(井耡)하는 법이 마침내 시행되는 날이 있으면 이런 병통은 말끔히 없어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바삐 정파(停罷)해서 삼남과 같은 예로 함이 마땅하다. 그렇게도 못한다면, ‘칙수미(勅需米) 3두라’ 함이 오히려 가하다. 하물며 숙종이 이미 정파하도록 명하여 사책에 기록되었는데, 아직도 그 쌀을 징수함이 가하겠는가?
6도를 이미 같이 하여 또 고르게 배정[數]했는데, 혹 보태고 혹은 줄여서 모두 쌀 12두를 거두었다.
《속대전》에, “수전ㆍ한전을 통틀어 1결마다 쌀 12두를 거두는데(강원도 영동에는 쌀 2두를 더했고, 量田하지 않은 10고을에는 4두를 더했다) 산중 고을은 포(柨 : 즉 면포)로 만든다. 쌀은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쌀이고, 포는 정 닷새로서 길이는 35척, 너비는 7촌을 표준으로 한다.”고 하였다(麻布도 같다).
《비국요람》에는, “호서에는 산 밑 13개 고을은 면포를 바치고(靑山ㆍ永春 등) 야지(野地) 6개 고을은 쌀과 면포를 절반씩 바친다(淸州ㆍ木川 등). 호남에는 산 밑 21개 고을은 돈과 면포를 절반씩 바치고(南原ㆍ光州 등) 2개 고을은 돈과 마포를 절반씩 바친다(雲峯과 長水). 영남에는 산 밑 45개 고을은 돈과 면포를 절반씩 바치고(안동ㆍ상주 등) 4개 고을은 돈과 마포를 절반씩 바친다(한양ㆍ산청 등). 관동의 산 밑 7개 고을(淮陽ㆍ金城 등)과 영동의 9개 고을(양양ㆍ삼척 등)은 아울러 마포를 상납한다. 해서에는 진상가미는 선혜청에 바치고, 공물가미는 호조에 바치는데(별도로 거두는 쌀), 산 밑 4개 고을(谷山ㆍ遂安 등)과 장산(長山) 이북의 16개 고을(黃州ㆍ安岳 등)은 돈으로써 상납한다.” 하였다.
또 “쌀로 면포를 마련하는 법은 호서에는 쌀 6두이고(한 필로 마련하는 것이다) 호남에 쌀 8두이며, 영남에는 쌀 7두이고 관동에는 쌀 5두로 한다(마포 한 필로 하는 것이다). 무릇 상정하는 예는 쌀 1석 값이 돈 420이고 면포 한 필 값은 돈 200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조운하는 법은 매우 엉성하다. 배(船) 틈을 회(灰)로 때우지 않아서 스며드는 물이 샘물처럼 나오고, 나무 못이 힘이 없어 썩으면 부러지기 쉬우며, 거적 돛이 둔해서 급한 경우에도 수습하기 어렵고, 바다에 숨은 암초와 가로막은 돌을 깎아 없애지 않아서 한 번이라도 역풍을 만나면 실은 것이 반드시 물에 젖는다.
게다가 법령이 엄하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아서 사공과 선리가 훔치는 쌀이 반을 넘기 때문에 그 배를 파선시키는데, 세입(歲入) 10여만 석에서 수만석은 항상 물에 빠뜨림을 당한다. 물에서 건진 쌀을 강제로 배정하고 다른 쌀을 대신 징수하는데 백성이 그 해독을 당하며, 서울에는 용도가 모자라서 나라가 그 해를 받는다. 결국 정조하는 법을 시행하는 날이 오면 오직 경기ㆍ황해ㆍ양호의 쌀만 경사에 실어오고 영남 쌀은 머물러서 조운하지 말며, 공물 주인에게 외수(外受)하도록 해도(지금 西關에서 좁쌀을 본도에 유치했다가 공물 주인에게 除給하는 것을 외수라고 이른다) 또한 마땅할 것이다. 배 척수가 이미 줄어서 물에 젖어 썩는 수량도 또한 줄어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라 용도에 도움이 있을 것이며, 선가(船價)도 아울러 주므로(給) 요판(料販)하는 이가 또한 많을 것이니 공물 주인에게도 이익이 있게 된다.
《속대전》에, “선혜청에서 서울 각 관청에 공물 값으로 지출(應下)할 액수를 계산하여 각 도에 통지해서 본청에서 수납하도록 한 다음, 등급을 나누어 공물 주인에게 내준다.”고 하였다(돈ㆍ쌀ㆍ면포 중에 귀한 쪽을 좇아서 계산(上下)하는 것이다).
또 “봄ㆍ가을 두 동으로 나눠서 쌀을 거두는데, 삼남과 강원도는 다음해 봄에 죄다 모아서 상납하고, 선가와 말삯은 원수 안에서 계산 제감하며, 경기에서는 봄ㆍ가을에 상납하고 선가와 말삯을 보태서 징수한다.” 하였다.
또 “전세와 대동미를 혹 면포로 만들어서 상납할 때에 수령이 돈을 징수했다가 면포와 바꿔서 바친 자는 탐오율(貪汚律)로써 논죄하며 종신토록 금고(禁錮)한다.” 하였다.
살피건대, 경기에는 세율이 본디 가벼웠으므로 선가와 말삯을 별도로 징수했고, 전세는 원수가 본디 적기 때문에 선가와 말삯을 별도로 징수하였다. 그러나 이런 법제는 모두 얼룩져서 고르지 못했다. 만약 정조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저절로 통일되어서 억지로 미봉하는 자취가 없을 것이다.
《속대전》에, “각 영ㆍ읍에 1년 동안 지출할 액수를 계산하여 많고 적음에 따라서 획급(劃給 : 잘라서 줌)한다(강원도에는 매필에 6두씩을 본 고을에 남겨서 공비로 하고, 그밖에 또영의 수용을 제한 다음 나머지를 아울러 상납하도록 했다). 그 나머지 쌀은 각 고을에 쌓아두었다가 갑작스러운 공용에 대비한다.” 하였다(경기에는 칙사가 왕래할 때에 소용되는 인부와 말에 대한 비용을 民結에 따라 돌려가며 내는데, 관에서 그 값을 쌀로 준다).
또 “대동 저치미(大同儲置米)와 전병선치미(戰兵船置米)는 절대로 조적(糶糴)하지 못한다. 범한 자는 8년을 도형(徒刑)하고, 또 7년을 금고한다.” 하였다.
생각건대, 소위 저치미란 모두 아전들이 포흠(逋欠)한 것이었다. 어찌한 되 한 약(龠)인들 저치된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는데 이것이 사실상의 형편이었다.
《속대전》에, “산릉(山陵)의 역사(役事) 및 조사(詔使)가 왕래하는 외에는 일체 요역으로써 다시는 백성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생각건대,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먹는 것을 버리고 군사를 버리더라도 신(信)은 끝내 버리지 않고자 한 것은, 신이 없으면 백성에게 영(令)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른바 민고(民庫)라는 것은 모두 대동법을 시행한 이후에 생긴 것이니, 8도 여러 고을에 그 민고에 대한 절목(節目)을 모두 올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삼공과 육경이 정부에 모여서 삭제해야 할 것은 삭제하고(그 고을에서 시작된 것), 금지해야 할 것은 금지한다(서울 관청에서 시작된 것). 그리고 생각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저치미(儲置米) 중에서 회감하도록 허가하고 이에 정부가 회합 변통하여 재작(裁酌)한 다음, 여러 도에 시행할 절목을 만들어서 여러 도에 반포한다. 그리고 이 영이 내리기 전에 있었던 것은 다 석방해서 죄를 다스리지 않고, 이 영을 내린 후에 저지른 자는 특히 중한 율을 적용하면 백성이 거의 신용할 것이다.
평안도에서는 혹 전결에 대해 쌀을 거두고 혹은 모속(募屬)에게 포(布)를 거두어서 나라 역사와 공적 수용에 제공한다.
《속대전》에, “양서의 공물 값 쌀은 본조에서 주관해서 내주고, 북도의 공물 값으로 거두는 마포는 그 관청에서 각각 내준다.” 하였다.
살피건대, 패서(浿西 : 평안도) 한 도가, 모든 전부(田賦)에 내는 것은 죄다 조사(詔使)를 수응(酬應)하는 데에 들어간다. 그러나 전세가 몇 말, 대동이 몇 말이라는 상정을 두어 여러 도와 같은 예로 함이 마땅하다. 그런 다음에 몇 섬을 칙사수용(勅使需用)으로 하고 몇 섬은 공적 수용으로 한다는 것을 법 조문으로 갖춤이 당연하다. 지금 서울 관청에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전장(典章)에 나타난 법례마저 모두 없으니 어찌 한 시대의 왕이 다스림을 마련하는 방법이겠는가? 정조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매우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현재 시행하고 있는 조목이라도 법전에 나타냄이 마땅하다.
함경도에는 정전(正田)과 속전(續田)에 마포와 전미를 부과해서 서울 관청 공물 값과 진상하는 물품을 무역하는 값으로 한다(모든 刷馬 값과 공용 잡비가 모두 그 중에 들어 있다). 그런데 공물 값으로 각 관청에 상납하는 것은 아울러 마포로 한다(《속대전》).
또 “정전에 쌀ㆍ콩 따위 여러 가지 물건을 부과해서 그 영문(營門)과 고을의 공적 수용으로 하는데, 안변부(安邊府)에는 정전ㆍ속전을 통해서 부역을 고르게 낸다.” 하였다.
《비국요람》에는, “현종 계묘년(1663)에, 북관에도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했는데, 관찰사 민정중(閔鼎重)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하였다. 생각건대, 북관에 시행했다는 상정법도 《법전》에는 조금도 나타난 것이 없으니 보충해서 넣지 않을 수 없다.
[주D-001]오례(五禮) : 제사(祭祀 : 길)ㆍ상장(喪葬 : 흉)ㆍ빈객(賓客 : 빈)ㆍㆍ관례(冠禮 : 가)에 대한 다섯 가지 예.
[주D-002]공안(貢案) :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문서.
[주D-003]삼가(三家) : 춘추(春秋) 시대 노(魯)의 대부(大夫)로서 중손(仲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을 일컫는 말. 이들이 노나라의 정사를 제 마음대로 했다.
[주D-004]척리(戚里) : 원래 중국 장안에 있던 마을인데, 한대에 후비(后妃)의 친정이 그 마을에 많이 있었으므로 임금의 외척을 척리라 일컫게 되었다.
[주D-005]불차탁용(不次擢用) :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뽑아올려서 관직에 임용함.
[주D-006]해유(解由) : 수령이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되었을 때 관리하던 관물(官物)을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호조(戶曹)에 보고해서 책임을 벗던 일.
[주D-007]배〔船〕는 옮겨 …… 남아 있고[船移刻存] : 배를 타고 가던 사람이 칼을 물에 빠뜨리고 곧 빠뜨린 쪽 뱃전에다 표를 새겨두었는데, 배는 이미 옮겨갔으므로 칼 빠뜨린 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고사. 즉 사물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 모르는 것을 이른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