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 근무, 나의 직장
김재하
“할아버지가 밥해”
다섯 살 손자의 한마디에 깜짝 놀라면서도 나는 며느리와 미소를 지며 손자를 쳐다본다. 며느리가 모처럼 일찍 퇴근하였다. 엄마가 주방에서 일을 하는 걸 보고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한 말이다. 손자의 이 한마디가 모두를 당황하게도 만든다. 나는 지난해 9월부터 아들집으로 손자와 같이 와서 지낸다. 평소에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아들내외를 대신하여 아침과 저녁을 챙겨주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데려온다. 할아버지가 밥을 하고 차려주는 모습이 손자에게는 일상적으로 비추었나 보다. 모처럼 일찍 들어온 엄마와 놀고 싶었던 손자였는데 저녁을 차린다고 주방에서 일을 하는 엄마를 보며 할아버지에게 던진 한마디이다.
90년대 미국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유명배우 로빈 윌리암스는 남자이다. 만화영화 더빙 성우이며 거리낌 없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다니엘(Daniel Hillard: 로빈 윌리암스 분)은 주변 사람들을 늘 즐겁게 해준다. 특히, 그의 아이들에게 아빠는 영웅이다. 그 또한 세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나 그는 실직을 거듭한다. 경제적인 면에는 빵점인 것이다. 한편, 매사가 정확한 아내 미란다(Miranda Hillard: 샐리 필드 분)는 그의 장점이라 여겼던 것들이 현실 생활에선 단점이 될 뿐임을 깨닫는다. 미란다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되며, 진지한 대화는 매번 다니엘에 의해 회피되어진다.
결국 14년 결혼생활의 인내는 무너지고 만다. 세 아이의 양육권은 미란다에게 주어지고, 다니엘에겐 주1회 방문만이 허락된다. 토요일만 기다리며 사는 다니엘이 어느 날 미란다의 가정부 구인 광고를 보게 된다. 갑자기 묘책을 떠올린 다니엘은 분장 전문가인 남동생에게 소리 지른다. "나를 여자로 만들어 줘!" 미란다와 아이들 앞에 나타난 은발의 가정부 할머니 미세스 다웃파이어(Mrs. Doubtfire)는 폭소 터지는 실수와 해프닝을 연발한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다니엘로서 듣지 못한 미란다의 진심을 알게 되고, 다니엘로서 뚱뚱한 할머니 분장으로 이혼한 자녀 셋과 생활하는 영화의 줄거리이다. 전에 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며, 아버지로 해주지 못한 가족의 울타리 역할을 해보게 된다. 이혼한 남편이 가정부 할머니로 변장하여 목소리도 바꾸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가정부로 위장 취업한 영화로 부인을 속인 채 같이 생활하는 영화이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를 그렸다. 주인공은 51년생으로 63세인 2014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좋아하는 외국 배우였다.
6070 시대에 육아는 여자들, 어머니들의 전유물이었다. 7080시대 맞벌이가 시작되는 시대였으나, 그래도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아내들의 희생이 있었다. 나도 육아는 등한시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일념만으로 직장 일에만 정열을 바치며 살아왔다. 직장 일에 80%의 열정과 가정일에 20%의 보살핌은 훌륭한 직장인의 표본이었다. 요즘은 직장 40%, 가정 40%, 자기 계발 20%이면 훌륭한 직장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이 변화한다. 삶의 패러다임도 짧은 기간에 빠르게 변화한다. 패러다임은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머스 쿤(Thomas Kuhn)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2)에서 새롭게 제시하여 널리 통용된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쿤은 패러다임을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 또는 개념의 집합체로 정의하였다. 본래 패러다임은 자연과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자연과학뿐 아니라 각종 학문 분야로 파급되어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회현상을 정의하는 개념으로까지 확대되어 사용되고 있다.
한 예로 육아 휴직을 여러해 전부터 남자들도 한다. 시험 승진을 하는 공무원의 경우 육아휴직도 경력 산정에 끊어짐이 없이 지속되어 경찰관들은 휴직하고 아기 보면서 다음 시험공부를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소아과 병원에서 만난 또래 할머니는 손자와 함께 있는 나에게 ‘자기 남편은 간호사를 하는 딸네 집에서 손녀가 백일 때부터 4년간 돌봐주고 왔다’고 했다. 나보다 육아 선배들이 많이 있었다.
다섯 살 손자는 할아버지를 밥을 해주고 자기를 돌봐 주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옛날 가부장적인 시대는 갔다. 말을 붙일 수도 없었던 무서운 할아버지, 아버지가 아니다. 손자, 손녀가 귀한 시대이고 요즘은 결혼해도 자식을 일찍 낳지를 않는다고 한다. 경제적인 여건이 혼자 벌어서는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나는 육 남매, 우리 아내는 칠 남매 가족이다. 우리 때는 오 남매, 육 남매, 칠 남매, 팔 남매가 보통인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하나 낳기도 버거운 세상이 되었다. 우리가 살던 시대는 자기가 먹을 식량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하던 시대였다. 그러다가 우리가 어른이 되자 가족계획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캠페인 하던 시대로 변했다.
육아,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함께 살지 않아 아이를 돌볼 수 없는 핵가족 시대가 된지 가 오래되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는 정부가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시대이다, 학교에서도 방과 후 학습을 초등학교 저학년 중심에서 전체 학년으로 확대하고 출산 부모들이 경제 활동과 출퇴근을 자유롭게 하도록 해야 하겠다. 출산이후의 영유아를 책임지는 탁아소 정책도 더 강화되어야 한다. 나는 그나마 손자를 돌볼 수 있다. 다행이다. 퇴직 공무원으로 연금을 받아 노후 생활이 안정된 셈이다. 자식들에게 부담이 안 되는 상황에서 손자를 돌볼 수 있는 형평이다. 나는 이제, 국가와 가정과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육아이고 손자, 손녀들을 보살피는 일이 직업이 되고 직장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밥해!”
나는 손자를 위해서 밥해 주는 일쯤이야, 마음껏 할 수 있다. 그보다 보람된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퇴근한 엄마와 놀고 있는 손자를 위해 밥도 해주고, 세탁기에 빨래도 해주고, 진공청소기를 돌려도 괜찮다. 어느새 난 퇴직 후, 육아와 가사도우미가 되는 직업인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 때때로 시도 쓰고 수필도 쓰는 여생을 보낸다. 내가 손자에게 밥하는 할아버지로 비춰져도 괜찮다. 재택 근무하는 직장을 가진 할아버지여서 나는 행복하다.
첫댓글 김재하 할마버지 만세입니다.
손자에게 1등 할아버지이십니다.
좋은 수필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