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원주 치악산(雉嶽山) 등정(登程)
말등 바위 전망대 / 세렴폭포 / 사다리병창 / 비로봉 불탑 / 등산 안내도
1. 치악산(雉岳山)의 사찰(寺刹)
치악산은 산자락마다 사찰들이 있는데 치악산의 명칭이 유래된 상원사(上院寺)를 비롯하여, 구룡사(龜龍寺), 석경사(石鏡寺), 국형사(國亨寺), 관음사(觀音寺), 성문사(星門寺), 입석사(立石寺)가 있다. 그리고 절터만 남아있는 법천사(法泉寺), 거돈사(居頓寺), 흥법사(興法寺) 등 사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우리나라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불교의 성지(聖地) 중 한 곳이 이곳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2. 치악산(雉嶽山) 명칭의 유래(由來)
치악산(雉嶽山)이라는 명칭(名稱)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說話)가 전한다.
까마득한 옛날, 활을 잘 쏘는 한 젊은이가 꿈을 이루고자 한양(漢陽)으로 가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원주(原州) 인근의 이곳 적악산(赤岳山-치악산의 옛 이름) 자락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커다란 구렁이가 꿩 두 마리를 칭칭 감고 잡아먹으려 하는 중이었다.
젊은이는 재빨리 화살을 날려 구렁이를 죽여 버리자 꿩 두 마리는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저녁이 되어 하룻밤 묵을 곳을 찾다가 마침 작은 암자를 발견하여 다가갔더니 예쁜 아가씨나 나오는데 하룻밤 묵어가겠다고 하자 바로 건너편 방에서 자고 가라고 허락을 한다. 감지덕지 방에 들어가 피곤하여 눕자마자 곧바로 설핏 잠이 들려는데 갑자기 숨이 막혀서 눈을 떠보니 아까 그 아가씨가 구렁이로 바뀌어 젊은이의 몸을 칭칭 감고 혀를 날름거리며 젊은이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까 네놈이 우리 남편을 활로 쏘아 죽였으니 나는 복수를 위해 너를 잡아먹겠다.’
그때 갑자기 바깥에서 ‘뎅~~’하고 종이 울렸다. 구렁이가 깜짝 놀라 멈칫거리는데 또다시 ‘뎅~~’
젊은이를 감고 있던 구렁이는 스르르 풀고는 사라져버렸다. 구렁이는 종소리를 들으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한다. (일설로는 종소리를 듣고 용(龍)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고...)
날이 밝자 젊은이는 종소리가 나던 곳으로 다가가 보니 꿩 두 마리가 머리가 터져 종 밑에 떨어져 죽어있었다. 꿩의 보은(報恩)에 감격한 젊은이는 서울 가는 것을 그만두고 그곳에 머물며 꿩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 이후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부르던 산 이름을 꿩 치(雉)를 넣어 치악산(雉岳山)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 암자(庵子)가 지금의 상원사(上院寺)라고 한다.
<장끼(수컷)와 까투리(암컷)>
꿩으로 부르는 이유는 울음소리가 ‘꿩~꿩~’하고 울기 때문인데 실제로 들어보면, 금속 양동이를 두드리는 것처럼 굉장히 높은 쇳소리처럼 들린다.
꿩의 수컷을 장끼라고 부르는데 몸길이가 80cm쯤 되니 제법 큰 조류로, 생김새는 닭과 비슷하지만 꼬리 깃털이 길고 발톱이 5개이다. 암컷은 60cm 정도인데 수컷과 암컷은 생김새도 제법 다르고 몸 색깔도 아주 다르다.
수컷은 흔히 얼굴이 붉고 빛깔이 화려하며 날개도 알록달록한데 암컷은 회갈색의 단색으로, 별로 볼품이 없지만 제법 통통하다. 단색의 알을 낳는데 잘 부화시키기 위하여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보호색이다.
꿩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날개짓을 하지않고 뿅~ 날아가는데 땅에 내려앉을 때 머리를 땅에 들이박듯 내려앉아 사방을 살피는데 사람이 잡으려 쫓아오면 바로 날지 않고 쳐다보다가 두 발로 달리는데 제법 재빠르다. 그러다 가까워지면 ‘꿔궝~’ 하며 푸드덕 다시 날아오른다.
그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꿩 치(雉)자에 화살 시(矢)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고, 보통의 새들이 그렇듯 꿩 또한 수컷이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암컷은 깃털 빛깔이 짙고 짧은 꼬리를 지녀 볼품이 없다.
꿩의 새끼는 꺼병이(꿩병아리)라고 하는데 조금 모자라는 사람을 가리킬 때 꺼벙이라고 부르니 새끼 꿩의 하는 짓이 약간 꺼벙(어리숙)한 모양이다.
원주의 치악산(雉嶽山)은 원래 이름이 적악산(赤嶽山)이었는데 꿩이 은혜를 갚으려고 머리로 범종을 들이받아 종을 울리고는 죽었다고 하여 은혜를 갚은 꿩의 아름다운 뜻을 기리기 위해 치악산(雉嶽山)으로 고쳤다고 했다.
<雉-꿩 치, 嶽-큰 산 악/ 赤 -붉을 적>
3. 치악산(雉嶽山) 등산로
원주(原州) 치악산(雉嶽山)은 서울에서도 그다지 멀지도 않고 산세가 수려(秀麗)함은 물론,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서 등산객이 무척 선호(選好)하는 곳이라 하겠다.
그뿐만 아니라 치악산 기슭에는 가는 곳마다 사찰들이 있을뿐더러 없어진 사찰의 흔적들도 몇 곳이 있는데 사찰들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아 치악산은 산행과 더불어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등산로 입구는 여러 곳에 있지만, 승용차를 가지고 고속도로로 오는 등산객들은 대체로 구룡사(龜龍寺)와 가장 가까운 신흥동 주차장에 주차하고 등산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입장료 5,000원.
우선 구룡사 앞에 있는 거북바위를 지나면 곧바로 구룡사가 나오고 지나서 조금 오르면 구룡소(龜龍沼)가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 1km쯤 오르면 출렁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세렴폭포가 보인다.
이곳에서 치악산 정상 비로봉(飛蘆峰, 1,288m)을 오르는 등산로가 두 갈래 코스로 갈라진다.
먼저 왼쪽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는 계단이 보이는데 이것이 사다리병창 코스로, 마치 사다리를 걸쳐놓은 듯 가파른 계단이 연속으로 이어지는데 무척 힘든 코스이다. 중간쯤에 말등바위 전망대가 있고 정상이 가까우면 더욱 가파른 깔딱고개가 나오고 이것을 지나면 마침내 비로봉 정상이 나타난다.
또 다른 코스는 세렴폭포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계곡길 코스인데 경사로가 급하지는 않아 힘은 조금 덜 들지만 제법 길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오르다보면 선녀탕이 나타나고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마지막 300m쯤 오르는 가파른 경사 데크로(Deck路)가 나오는데 무척 힘들다.
데크로를 오르면 바로 비로봉으로, 정상에는 비로봉 표지석과 함께 조금 떨어져 3개의 돌탑이 보이는데 석탑(石塔)이지만 사실은 불탑(佛塔)이라 부른다고 한다.
한 불자(佛子)가 부처님의 계시로 비로봉 정상에 3개의 석탑을 쌓고 용왕탑(龍王塔), 산신탑(山神塔), 칠성탑(七星塔)이라 하였다고 하니 우리도 석탑보다는 불탑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이겠다.
나는 이곳을 3번 오른 추억이 있다. 한번은 중학 1학년 아들 녀석이 친구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졸라서 데리고 왔는데 처음에는 등산이라면 자신이 있다고 두 녀석이 앞서서 쌩쌩 도망을 간다.
계곡길 코스였는데 집사람과 나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며 ‘어디 두고 보자...’하며 한 시간쯤 슬슬 따라 올라갔더니 두 녀석이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나무 밑에 앉아 헐떡거리고 있었다. ㅎ
나이 60이 넘어 집사람과 둘이 갔을 때 사다리병창으로 오르다가 정말 너무 힘이 들어 죽는 줄 알았다.
사다리병창에서 ‘병창’이라는 말은 이곳 말로 ‘벼랑’, ‘절벽’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사다리 절벽길’.....
어쨌거나, 치악산 등산은 왕복 7~8시간은 족히 걸리니 젊은 사람들도 단단히 마음의 채비를 해야 한다.
이제 70도 중반이 넘어선 나로서는 치악산 등반은 어림도 없는 일이겠다. 글이나 써야지.... ㅎㅎ
4. 구룡사(龜龍寺) 전설
치악산 구룡사 절터의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龍)과 한 스님(高僧)과의 겨루기 이야기....
스님이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우려고 하자 연못 속에 살던 용 아홉 마리는 살 곳을 빼앗기게 된다.
그러자 용이 스님과 겨루기(내기)를 제안하는데, 먼저 용들이 억수같은 비를 내리게 하여 스님을 익사(溺死)시키려 했지만, 스님은 끄떡도 하지 않고 견뎌낸 후, 부적(符籍)을 써서 연못에 던져 넣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용들은 뛰쳐나와 동해(東海)로 달아나서 스님의 승리..
그런데 아홉 마리 중 한 마리는 눈이 보이지 않아 가까스로 빠져나와 근처의 조그만 연못으로 도망갔는데 그곳이 지금 구룡사 옆에 있는 작은 연못 구룡소(九龍沼)라고 한다.
그 절의 처음 이름이 구룡사(九龍寺)였는데 세월이 지나며 점차 절이 몰락하기 시작하여 문을 닫을(閉寺)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마침 지나가던 고승(高僧)이 주지 스님을 찾아와 절이 몰락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입구의 커다란 거북 형상의 돌 때문이라고 하며 그 돌을 깨어버리라고 한다.
주지 스님은 즉시 그 거북바위를 깨뜨려 버렸지만, 신도(信徒) 수가 날로 줄어들고 더 몰락해갔다.
주지 스님은 나중 거북바위를 쪼갠 것을 후회하며 거북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거북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아홉 마리의 용’이라는 의미의 구룡사(九龍寺) 대신 거북 구(龜)를 써서 구룡사(龜龍寺)로 개칭(改稱)한 후 신도 수가 늘어나며 번창(繁昌)하였다고 하는 구룡사(龜龍寺)의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