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난곡마을 강감찬 굴참나무
하늘을 가를 듯 번쩍이며 으르렁대는 벼락은 참 무서웠다. 그 벼락이 죄지은 사람을 하늘이 응징하는 것으로만 알던 어린 시절 우수수 별이 떨어지는 여름밤이다. 모깃불은 하늘로 오르고 부채질 해주던 할머니는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아낙들이 우물가에서 밥쌀을 씻을 때 한 톨만 흘려도 뇌신님이 벼락을 때렸다’고 했다.
그래서 강감찬 장군이 나섰다. 그런 하찮은 일로 걸핏하면 어린 백성이 벼락 맞아 죽어서야 되겠느냐며 우물가에서 오줌을 쌌다. 당장 뇌신이 벼락을 때렸고, 기다렸던 강감찬은 칼로 벼락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때부터 잘려진 벼락은 함을 못 쓰고 어지간한 일에는 벼락을 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강감찬이 죽어서 하늘로 가자, 뇌신이 찾아와 따졌다. 하는 수 없어 강감찬은 둘로 부러진 벼락을 이어주려 했지만, 반듯이 이어줄 수 없었다. 결국 벼락은 ‘Z’처럼 엇갈린 모양이 되었다. 또 강감찬이 벼락을 칼로 자른 것은 전쟁터에서 벼락을 맞는 병사들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역시 그 무렵 중국 사신이 밤길에 별을 길잡이 삼을 때 문곡성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 강감찬이 태어난 것이다. 훗날 그 중국 사신이 고려에 와 강감찬을 만났다. 강감찬이 하인과 옷을 바꿔 입었는데도, 사신은 ‘문곡성께서 어디 계신가 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며 절을 했다. 강감찬이 태어난 집을 낙성대라 부르게 된 연유인데, 개경에서 살던 집도 낙성대이니 이는 하늘로 가실 때 별이 떨어진 곳이다.
서울 난곡초와 건영아파트 사이 움푹 파인 터에 우람한 굴참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강감찬이 이곳을 지나가다 지팡이를 꽂았는데, 싹이 터 자랐다고 한다. 장군이 938년에 태어나 1031년까지 살았으니, 나이가 천 살이 다 된 나무다. 하지만 현재의 나무는 첫 나무의 증손자뻘인가 싶다.
이곳 난곡마을은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다. 조선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의 장남으로 역시 선조 때 승지를 지낸 강서가 살았고 마을 이름 난곡은 그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강사상의 차남 강신은 중종 때 의정부 정2품 참찬을 지냈다. 이 강신의 아들 강홍립은 비운의 장군이다. 문신 집안에 태어난 강홍립은 글공부에 매진하여 선조 22년인 1589년 증광시 진사시에 3등 9위로 종5품 도사가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에 알성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했다. 1605년 도원수 한주검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명나라가 요동 반도를 침범한 후금을 토벌할 때인 1619년이다. 명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강홍립은 5도 도원수가 되어 부원수 김경서와 군사 1만3천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 휘하에서 싸우다 패전하여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강홍립, 김경서 등 10명은 계속 억류당했다. 그리고 인조 5년인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가 되어 입국, 강화에서 화의를 주선하고 국내에 남겨졌다. 결국 강홍립은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 당하고 난곡마을에 은거하며 난초를 키웠다.
아무튼 이곳 난곡마을의 굴참나무는 1018년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자, 고려 최고의 명장 강감찬의 기상과 위업을 오늘의 우리에게 이어준다. 현종이 금으로 만든 일곱 가지의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손수 꽂아 주며, 승전을 축하했던 것처럼 굴참나무 가지와 이파리가 햇빛을 받아 황금가지와 황금이파리로 빛나니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