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유정기(三有亭記)
······ 성현의 말씀을 종신토록 스스로 힘써야 더욱 마땅하리라(聖賢之言 尤宜終身自勉)
···················································································· 한포재 이건명 선생
한강이 노량(鷺梁)에서 나뉘어 둘이 되었다가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는데, 바위 봉우리가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으니 이름이 선유(仙遊)이다. 황조(皇朝) 만력(萬曆) 연간에 중국 사신 이종성(李宗誠)이 북쪽 벼랑에 “지주(砥柱)”라는 두 글자를 썼는데, 아마 황하(黃河)의 지주를 닮은 데다가 이 산의 돌이 모두 숫돌로 쓸 수 있어서인 듯한데, 황하의 기둥도 모두 숫돌로 쓸 수 있어서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글자의 획이 백 년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고, 지주의 남쪽에는 어가(漁家) 수십 가구가 벼랑을 깎아내서 살고 있다.
내 선인(先人)의 옛 정자가 그 가운데에 자리 잡았으니 산의 중턱에 해당한다. 정자 앞에 작은 물줄기가 있는데 동쪽으로부터 흘러와 굽이돌아서 서쪽으로 흘러 철진(鐵津)에 모였다가, 또 서북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간다. 큰 들판이 아득하게 수십 리 펼쳐 있고 관악산(冠嶽山)과 소래산(蘇來山) 등 여러 산들이 머리 숙여 인사하듯 열 지어 있어서 올라가 둘러보면 마음과 눈이 매우 상쾌하다.
나는 지난가을에 많은 사람들의 비방에 시달려 몇 개월 동안 나가서 옛 정자에서 지냈다. 정자는 기둥이 모두 여섯 개인데 남은 땅이 없기에 정자의 동쪽 빈터를 이웃 사람에게 사들였다가, 이번 가을에 사헌부 벼슬을 사직하고 다시 돌아와 다섯 개의 기둥을 새로 지었다. 아, 당구(堂構)의 오랜 뜻과 강호(江湖)에서 지내려는 만년의 계획을 지금 다 이루었구나.
정자를 다 짓고 나서 이름을 “삼유(三有)”라고 지었더니 간혹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정자를 지을 때에는 혹은 산에 혹은 물가에 혹은 들판에 지으니, 그 가운데 하나를 갖더라도 이름으로 삼을 만한데, 지금 내 정자는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 정자는 선인께서 지었고 이 땅은 할아버지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輿))께서 터를 잡은 곳인데 지금 나에게 전해져 3대에 걸쳐 소유하였으니, 또 ‘삼유’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산은 비록 작지만 중류에 우뚝 서 있어 꿋꿋하게 뽑히지 않는 기세가 있다. 한강〔大江〕의 북쪽 물줄기는 비록 등지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남쪽 물줄기가 구부러져 들어오는 모습은 몇 리 떨어진 곳에서도 아득하게 보인다. 앞쪽 물굽이에서는 씻을 수도 있고 수영을 할 수도 있다. 들판은 비록 높고 소금기가 있지만 지세가 넓게 뻗어 있어 청색과 황색이 뒤섞여 수놓아진 비단을 펼친 듯하니, 또 심고 거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아름다움을 우리 3대의 소유로 삼아 처소에서 휘파람 불며 읊조리니, 어찌 세상 근심 잊고 내 삶을 보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또 듣자니, 맹자(孟子)가 ‘천하에 달존(達尊)이 세 가지가 있다’고 논했는데, 연치(年齒)와 관작(官爵)은 요행히 이룬 자도 있으나 덕(德)의 경우는 자기 스스로 얻은 바가 아니면 힘써도 구할 수 없다. 지금 내 관작이 이미 분수를 넘었고 연치 또한 요절을 면했으나, 스스로 부끄러운 점은 엉성하고 배움을 잃어 늙도록 무지하여 말할 만한 덕이 없는 것이다.
만약 지금 이후로 명도(名塗)를 피하여 만년을 유유자적하고 젊은 날의 허황된 계책을 슬퍼하며 경전에서 구업(舊業)을 찾아 혹 만에 하나라도 얻어서 끝내 소인으로 돌아가게 됨을 면한다면, 이른바 삼달존(三達尊)을 소유한 것에 견주기를 바랄 수는 없더라도 조용히 스스로 수양하는 방도에 또 어찌 조금의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경치 좋은 풍광과 청전(靑氊)의 유물은 내가 이미 소유했으니, 성현의 말씀을 종신토록 스스로 힘써야 더욱 마땅하리라. 우선 아울러 써서 아침저녁으로 보고 반성할 자료로 삼노라.
[주-1] 황하(黃河)의 지주 :
황하가 급류로 흐르는 곳인 맹진(孟津)의 강 복판에 우뚝 서 있는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산 이름으로, 격류 속에 서 있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고 한다.
[주-2] 지난가을에 …… 시달려 :
1712년(숙종38) 2월에 시행된 정시(庭試)로 인해 야기된 이른바 임진과옥(壬辰科獄)을 가리킨다. 동년 6월 7일에 지평 권익관(權益寬)이 상소를 올려, 이번 정시에 답안지를 시험 장소 밖에서 제술한 응시생이 있었는데 행부제학 이건명이 그 사실을 알고도 아뢰지 않았다고 하여 이건명의 추고를 요청하였다. 이 상소가 사건 확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소론 측에서 이건명을 압박하였고, 정시 의혹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차미희, 조선후기 숙종대 壬辰科獄 연구, 민족문화연구 제42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5》
[주-3] 사헌부 벼슬을 사직하고 :
1713년 윤5월 12일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7월에 사직상소를 올림으로써 체차되었다. 《承政院日記 肅宗 39年 閏5月 12日, 7月 22日ㆍ23日》
[주-4] 당구(堂構) :
집터를 닦고 건물을 세운다는 말로, 선조의 유업(遺業)을 후손이 이어받음을 말한다. 《서경》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5] 맹자(孟子)가 …… 논했는데 :
천하에서 공통적으로 존중하는 세 가지로, 관작과 연령과 덕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하에 달존이 세 가지가 있으니, 관작(官爵)이 하나요, 연치(年齒)가 하나요, 덕(德)이 하나이다. 조정에는 관작만 한 것이 없고, 향당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자라게 하는 데는 덕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주-6] 청전(靑氊)의 유물 :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놓고 가거라.[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출처 : 한포재집(寒圃齋集) 제9권 / 기(記)>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이주형 유영봉 (공역) | 2016
三有亭記
漢水自鷺梁分而爲二。至楊花渡。復合爲一。而石峰 o峙其中。名曰仙遊。皇朝萬曆。天使李宗誠題砥柱二字於北崖。盖倣於黃河之砥柱。而山之石皆可以礪。未知河之柱。亦皆以砥而名歟。今其字畫。經百歲不滅。砥柱之南。漁戶數十。鑿崖而居。余先人舊亭處其中。當山之半。前有小沱。東入爲匯。西會于鐵津。又西北入于江。大野微茫幾數十里。冠嶽蘇來諸山羅列拱揖。登眺足以快心目也。余於前秋。困于多口。數月出棲于舊亭。亭凡六楹。無餘地。乃買亭東隙地于隣人。今秋辭憲職復來。新營五楹。噫。余堂搆之宿志。江湖之晩計。今可以並諧矣。亭旣成。名之以三有。或 o有問其義者。余曰人之有亭。或於山或於水或於野。有其一。足以爲名。今吾亭。於斯三者兼有之矣。况斯亭也。先人之所築。斯地也先王考文貞公之所卜。今傳于余。爲三世有。則亦可謂之三有也。山雖小。屹立乎中流。凝然有不拔之勢。大江北流。雖背而不見。其南流之屈曲而來者。迎數里而謁焉。前之匯。可濯可泳。野雖斥墳。地勢曠迤。靑黃錯布如繡。又可以觀稼穡也。以此三者之美。爲吾三世之有。寢處嘯詠。豈不足以忘世慮而送吾生也。抑又聞之。鄒孟氏論天下之達尊有三。夫齒與爵。有幸以致之者。至於德。苟非 o己之所自得。不可力求也。今余爵已踰分。齒亦免夭。所自媿者魯莽失學。至老倥侗。無德可言耳。苟使從今以往。斂避名塗。優游晩境。悼前日之狂圖。紬舊業於遺經。或有萬一之得。終免爲小人之歸。則所謂三達之有。雖不可企擬。其於靜養自修之方。亦豈少補也哉。然則景物之勝。靑氊之舊。余旣有之。聖賢之言。尤宜終身自勉。姑幷記之。以爲朝夕觀省之資云爾。
<출처 : 한포재집(寒圃齋集) 제9권 / 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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