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2시에 수업이 끝났다. 친구들은 웃으며 교문을 나선다.
집에 가도 쉴만한 공간이 없고 집 주위에 같이 놀 친구가 없어 난 도서관으로 향했다.
너른 도서관엔 사서교사와 나뿐이다. 오후5시, 닫히는 교문이 나를 나가라 떠민다.
꼬르륵 소리나는 배는 수돗물로 달래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한다.
<경남중학교>
1972년4월6일, 1학년 전학생으로 입학한 나의 모교이다. 경남중출신 문인들을 알지 못한다.
유명 정치인은 수두룩하다. 김영삼전대통령, 문재인대통령, 국회의원 김무성, 유기준 등등.
유기준은 동기이지만 같은 반을 하지 않아 잘 모른다.
몇년전 모교(고교) 박정희휘호석제막식때 만났ek. 그는 나를 알아본다.
아마 입대하기 전 남포동에서 만났고 그가 부산서 변호사할 때 서너번 만났기 때문이다.
중학교의 모습, 1972년도 5층 교사는 기억 속에 있고 지금 5층 교사는 눈망울에 있다.
(좌/부산대병원, 우/경남중학교)
시절에 따라 산천도 인걸도 변하는걸까?
<개다리시장>이 안보이다. 생활하천인 보수천은 오래전에 복개되어 차들이 다닌다.
구덕산에서 발원하여 대신동, 보수동, 충무동을 지나 송도에서 바다를 만나는 짧은 내이다.
개다리시장.
철창에 갖힌 개와 고양이들. 개는 보신용으로 고양이는 신경통 치료용으로 죽임을 당했다.
마른 지네와 청개구리, 비단개구리 등등 약재를 팔던 시장이었다.
피난민이 세웠던 <영락교회>의 첨탑은 예나 지금이나 하늘을 찌르고 있다.
하나님은 엉덩이가 따가워서 편히 쉴 수가 없겠다.
7,80년대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교회부설인 부민공민학교(초중고과정, 검정고시 합격해야 학력인정)건물도 그대로 있다.
서구 토성동을 지나 중구 보수동으로 들어왔다.
<보수동헌책방골목>의 규모는 예전만 못하지만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새 교과서와 완전학습을 70% 수준에 살 수 있었고 3월이 지나면 50%에 살 수 있었던 곳이다.
도서관 붙박이인 나에게 사서선생이 제안했다.
도서관 청소와 책정리를 하면 장학금과 용돈을 주겠다고.
2학년 때 중퇴하고 급사로 취업, 검정고시를 치려고했다. 그걸 안 사서선생의 배려였다.
수업료 면제. 공립학교는 수업료보다 기성회비가 6~70% 차지한다. 사립은 이와 반대이고.
장서가 10만여권, 부산소재 중학교 중 가장 큰 도서관이고 가장 많은 서적을 보유했다.
매월 법적으로 파기하는 헌책을 헌책방에 팔아 용돈벌이를 했다.
새 교과서와 완전학습을 각 학급(30학급)에 분배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남은 교과서를 보수동에 내다팔기도 했다.
학교에 필요이상으로 교과서와 완전학습이 공급되었다.
그 잉여분을 팔아 학교의 이런저런 비용으로 사용한 것 같다.
중3때 교감선생님이 부산시도서관협회장이셨는데 고교 때 박양기선생님의 부친이셨다.
책방골목입구에 <대교(감리)교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향기교회로 바뀐 것 같다.
동광성결교회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또 다른 교회탑이 대교교회이다.
70년대 유신반대를 외친 종교계는 카톨릭, 개신교 중에는 감리교였다.
왜정시대 조선은 몇 구역으로 나눠서 해외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경상도지역은 호주장로교의 선교지역이었고 미국 감리교은 중부와 이북지역이었다.
부산의 감리교는 피난민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에 부산지역에서 교세는 미미했다.
그리고 장로교에 비해 감리교의 교리가 진보적이었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했다.
(장로교는 예정론, 감리교는 자유의지론)
그런 탓인지 부산지역 재야인사는 감리교 목사가 제법 있었다.
대교교회, 시온(중앙)교회 정목사, 제일교회 임목사 등등.
중학교 때 제일교회(동대신동)와 시온교회(영주동)를 다녔다.
*중1땐 동대신동에서 살았고,
중2땐 범냇골 중앙시장에서 살았다.
중3때 동광동5가에 잠시, 영주2동으로 이사가서 1995년12월 김해로 이전할 때까지 살았다.
<카톨릭센타>도 70년대 초 건립되었고 재야인사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카톨릭센타 건너편에 <남일국민학교>가 있었다.
남일보다 조금 오래된 동광국민학교가 용두산공원 밑에 있었다.
수년전 이 두 학교는 합병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
메리놀병원을 지났다. 동광동5가이다.
덕원중학교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가면 박영택이 집이다.
전학 와서 점심을 쫄쫄 굶을 때 나에게 단팥빵을 내밀고 쌩하니 사라졌던 친구다.
어쩌면 나보다 더 형편이 나빴을 친구였을 것인데....눈물 젖은 빵을 그 친구덕에 먹었다.
부산상고로 진학하였는데 지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준 친구, 맛 있는 술 한 잔 나누고 싶은 그리운 친구이다.
동광동5가, 건국중/건국상고 올라가는 입구에서 살았다.
건국상고 출신 양정모가 하계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였을 때
이곳에서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작명철학원이 있는 곳이 내가 잠시 살았던 집이다.
건국중/상고 건물은 지금은 없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코모도호텔>
1970년대 완공된 호텔이다. 호주자본(?)이 들어와 전통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 호텔과 부산항까지 케이블을 설치하려고 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용두산공원의 부산타워도 완공되었다.
영주2동이다. 삼거리코너에 첫 사랑 그녀의 고모집이 있었다.
3층건물은 어디로 가고 그 자리에 화단이 있다.
멀리 시민공원의 충혼탑이 보인다.
집에 다 왔다. 2km 남짓된다.
책가방을 던지고 식은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지영이집에 마실 갔을거다.
아버지는 아직까지 초량중앙시장 난장에서 양말을 팔고 계실거다.
한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도와 리어커를 끌고 와야한다.
영주터널 위를 지나는 언덕배기, 아버지 혼자 리어커를 끌기엔 힘이 든다.
난 그걸 동생에게 맡기고 집을 나왔다.
오랬동안 살았던 집은 없어지고 빌라가 들어서 있다.
몇년 전에 왔을 때 있었는데....빌라 옆건물은 1회 김영호선배댁이다.
당시 소켓공장이었다. 김선배는 현재도 이곳에 살고 계신다.
동네 한바퀴 쌩하니 돌았다. 아버지의 리어커를 미는 것은 쪽팔리는 일이었다. 난 사춘기다.
형은 주간에 물류회사에서 급사로 일 하고 야간에 광성공고 전기과를 다니고 있다. 난 나쁜 둘째아들이다
86번 다니는 산복도로에서 그 위 또 다른 산복도로 가는 계단. 예전에는 시멘트길이었다.
지금은 계단과 모노레일이 있다.
부산엔 영주동, 초량동, 영도 등 3곳에 있고 중앙동 40계단에 있는건 엘리베이트식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덕원중과 덕원공고가 나온다.
덕원중은 그대로이지만 덕원공고는 부산디지탈고로 변했다. 이 학교 정문을 지나면 대청동이다.
대청동공영주차장 위에 전망대를 조성했다. 부산의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영도와 부산타워, 남항대교와 송도가 보인다. 물론 남포동도 보인다.
좌에 북항대교, 우엔 남항대교. 가운데 영도이며 봉래산이다. 공갈산이라고도 했다.
아침엔 안개로 산이 보이지 않다가 안개가 걷히면 나타난다. 그래서 그렇게 불렀다.
금수현의 북카페.
가곡 그네의 작곡가가 운영하는 모양이다. 아마 금수현씨는 금난새지휘자와 일가일거다.
박기종기념관.
몰랐던 역사를 알았다. 이런 분이 왜 역사교과서에 게재가 안될까?
개성학교(지금 개성중/고등학교)와 부산철도의 역사에 대해서.
교과서에 게재가 안되어도 참고로 부산지역 중등학교에선 가르쳤으면 좋겠다.
작은 기념관이지만 볼만 하다. 오후5시에 폐관을 하는데 그 시간에 들어갔다.
안내하는 총각의 퇴근이 조금 늦어졌다. 사진촬영도 가능하다.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왔다.
모노레일 안에서 셀카~^*^
내가 살았던 집의 뒷편, 실로암약국이 있었던 자리같다.
허름한 카페인줄 알고 들어왔는데 그게 아니다.
커피와 음식을 팔지만 매일 8시쯤 작은 공연을 한다.
클래식과 째즈. 입장료 5,000원이며 커피 값은 별도. 이곳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
차가운 방, 좁은 공간에서 동생들의 다투는 소리도 어머니의 잔소리도 듣기 싫다. 광복동과 남포동이나 배회하다가 와야겠다. 밤 10시엔 시온교회 가서 기도하고 잘거다.
교회엔 나와 처지가 같은 영복이와 나에게 동조하는 목사아들인 아존이가 있다.
광복동은 성탄트리 축제중이다.
부평깡통시장에서 어묵 여섯봉지 샀다.
어머니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부산어묵집이 가장 맛 있다고 한다.
나도 그냥 어머니따라 부산어묵집의 단골이다.
두 봉지는 전주 고모에게 보내고 또 두 봉지는 제주도에서 교사하는 친구에게 보냈다.
두 봉지는 배낭에 넣고 집으로 간다.
(20181214/토요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난뱅이라고 바가지를 긁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도 그 말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오부자(五父子)'라고 큰 소리를 쳤다. 4남1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적이 없다.
물론 세상사람들의 기준에는 가난했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사는 것은 죄이다."
난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게 죄이다. 하나님이란 곧 진리를 의미한다.
세상이 정한 부유와 가난에 대한 기준은 합리적이지 않은 막연함이다.
스스로의 가치기준을 정립한다면 이 세상의 막연한 기준은 의미없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하면 가난한 것이다.
스스로 가난하지 않다고 하면 가난한게 아니다.
삶이란 내가 가진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면 된다.
세상의 막연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어리석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난 아버지에 비하면 가난하다.
아버진 오부자였지만 난 이부자(二父子)이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난 가난하지 않다. 최씨(崔氏) 부자(父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