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서 신유길교수님과 문자로 대화를 나눈 익명의 어떤 분을 통해서 교회에서의 무성한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잘 감지하지 못할 만큼 교회의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에 있었을 수도 있고 오랜기간 교회의 흐름에 묻혀서 둔감해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이너 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번 일들을 통해 무언가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건강도 좋지 않은데 공연히 불편함을 던지는 심술꾸러기는 아니실테니까요.
그럼에도 제 이야기는 느낌 그대로, 말그대로 제 이야기이지 진실이라든가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거나 하는 뜻이 아님을 미리 밝혀둡니다. 제 반평생을 살아온 교회이고 나의 교회이기도 하니 눈치보지 않고 얘기해 보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묵직하고 뭔가 체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ㅠㅠ)
-제가 느낀 것은 ...- 간증이 반복될 때 듣는 사람 편에서는 스토리가 약해지고 간증하는 사람이 그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위치는 희미해지며 때론 주장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 없는 예수가 최종적 복음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순간 하나님도 그 언어에 갇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어로 정의하는 하나님은 제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 언어의 감옥에 갇힐 수 있습니다.
개념은 생명을 잘 반영해야 하지만 그 자체의 속성 때문에 생명을 방해할 수 도 있습니다.
목사님의 표현을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고 자신의 삶과 공명을 일으키는가는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해도 중요하지만 생생한 느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언어와 개념과 정의를 통해 느낌이, 생명의 감각이 살아나지 않아서 못 먹겠다는 사람들은 어찌할까요? 그들은 목사님과 교회가 가는 방향을 거스르는 사람들 일까요?
채소가 아무리 몸에 좋다해도 먹기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일장훈계와 매끼니 마다 채소 반찬으로 도배를 하는 엄마는 과연 현명한 것일까요? (저는 성장클리닉에서 아이들이 채소를 길러보게 하고 채소로 장난감을 만들고 엄마와 함께 요리를 놀이로 만드는 법을 알려 줍니다. )
물론 목사님께서 마지막 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오신 예수의 손길을 이 한 문장으로 압축하여 전하려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마지막 진액을 짜내어 간증을 하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그나마 오랜 기간의 관계가 있어서 그런지 그 말씀을 반복하시는 심정이 이해가 되었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이번 일을 보며 반복의 아이러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반복은 화자에게는 중요성과 의미가 강화되지만 청자에게는 (듣기에 불편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더더욱) 강요나 폭력처럼 들릴 수 있고 중요성은 오히려 더 희미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반복이지만 화자에게는 또렷해지는 것이 청자에게는 희미해지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더 심해지고 이번 일도 그 영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레위기가 배려로 보이는 사람도 있고 잔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배려와 사랑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잔소리로 들리는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할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레위기를 배려라고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
저는 목사님의 생애와 말씀이 너무도 소중하지만 목사님의 말씀(그것이 유훈이라 할지라도)을 지키는 데 머물고 그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또 하나의 종교적 이념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도 당신의 생애가 이런 방식으로 전해지는 것을 전혀 원치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말을 외우고 지키는 것 보다 그 말씀을 하신 심정을 이해해야 그 상황을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릴 때 생명의 언어가 우리에게서 나갈텐데 자칫하면 네비게이토에서 하는 것처럼 상황별 암송문구가 앵무새처럼 반복된다면 우리교회의 존재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얘기를 쓰면서 한편으로 1)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사람 2)목사님 건강을 고려하지 않는 철부지 등으로 판단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제가 눈치가 없는 건지도 모릅니다.
목사님께서 모세 만큼은 사셔야 하지 않나 싶어서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편 반평생을 살아온 내 삶의 기초가 되는 교회에서 내가 안타깝게 느끼는 이 심정과 나의 이 걱정이 오버이고 기우였음을 확인하고 싶은 소망이 내게 있습니다.
앵무새의 합창이 아닌(비록 소수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본인들은 그런 생각이 추호도 없을 줄 알지만... 내가 말하는 내용보다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이 때론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이 복음이 만민을 향한 보편적 복음이라면 이 부분은 더욱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끼리 속닥하게 지내는 것이 목표라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만 가지 자기 음색으로 주님을 찬송해도 조화로운 웅장한 합창이 되는 교회를 그리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