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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시대 | 정치 기반 | 지위결정 요인 | 사상 | 정치 행태 |
진골 | 고대 | 중앙 | 신분에 의존 (골품 제도) | 교종 | 고대 주도 |
호족 | 중세 | 지방 | 신분 중시 (→문벌 귀족화) | 선종 (풍수지리설, 유교) | 하대에 독립 세력화 |
6두품 | 중앙 | 능력 중시 (과거 제도) | 하대에 반신라 경향 |
다음은 호족이 고려 시대에 어떻게 변신하면서 시대를 이끌어 가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시대구분 | 신라 말 | 고려 전기 | 고려 후기 | ||||
고려초기 | 고려중기 | 무신 집권기 | 원 간섭기 | 고려말 | |||
변화상 | 중앙 | 호족 | 중앙 관리 (←호족 통합) | 문벌 귀족 (←혼인) | (무신) | (권문 | 세족) |
지방 | 호족 | 향리(←지방관 파견) | 신진 사대부 (←과거제도) |
※ 괄호안의 ← 표는 변화를 초래한 요인임
이렇게 호족의 변화 양상을 정리하면 그대로 중세의 시대 구분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전기는 (1) 처음부터 시무 28조(최승로)가 채택되어 국가 체제의 정비가 완료되기까지의 시기를 초기(호족 연합기), (2) 성종부터 무신 정변(1170)이전 까지의 귀족 문화의 전성기를 중기(문벌 귀족집권기)로 세분합니다.
후기는 (1) 무신 정변으로부터 내침한 몽고족에 저항해 강화에 천도한 무신의 저항이 이어지는 시기(무신집권기1170~1270), (2) 몽고(원)에 굴복해 그 간섭을 받던 시기(권문 세족 집권기1270~1351) (3) 친원․보수적인 권문 세족에 신진 사대부가 도전하는 고려 말의 시기로 세분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을 조금 고생시켜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무조건 다음의 고려 국왕을 순서대로, 시대 구분해서 암기하시기 바랍니다.
★10세기(초기): 자주적 진취적 분위기
① 태조(918~943)-② 혜종-③ 정종-④ 광종(949~975)-⑤ 경종-⑥ 성종(981~997)--⑦목종
★ 11세기(중기):보수적 문벌 귀족사회
① 현종(1009~1031)-⑨덕종-⑩정종⑪문종(1046~1083)⑫`순종⑬선종⑭헌종⑮숙종(1095~1105)
★ 12세기(중기): 보수적 문벌 귀족 극성기
15)숙종 16)예종 17)인종(1122~1146) 18)의종(1146~1170)
★무신집권기(1170~1270)
19)명종 20)신종 21)희종 22)강종 23)고종 24)원종
★원 지배기(1270~1351):자주적 민족의식 강화
25)충렬왕 26)충선왕 27)충숙왕 28)충혜왕 29)충목왕 30)충정왕
★자주성 회복기(고려말)
31)공민왕(1351~1374) 32)우왕 33)창왕 34)공양왕(1389~1392)
2.고려초의 안동역사와 문화
고려 건국초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군내 병산에서 싸울 때 고을 성주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권행(權幸)이 고을민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그 공이 컸으므로 부(府)로 승격하고 안동으로 고쳤다(태조 13년:930년). 고창 전투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놀이 가운데 안동차전놀이가 있다.
이와 관련된 유물이 태사묘에 있는 보물451호인 안동 태사묘 삼공신 유물 일괄과 보물 451-1 안동 태사묘 삼공신 유물 일괄 - 주칠탁잔이다.
그 후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가 성종 14년(995년)에 길주(吉州)로 하였다가 현종 3년(1012년) 안무사를 두었다가 동 21년(1030년)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명종 27년(1197년)에 남적(南賊) 김삼(金三) 효심(孝心) 등이 주군(州郡)을 겁탈 노략하니 차사(差使)를 보내어 평정하였는데 부(府)가 공이 있다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신종 7년(1204년) 동경(東京:경주)의 야별초 (夜別抄) 패좌(悖佐) 등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번에도 이를 진압 하는데 공이 있었음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
충렬왕 34년(1308년) 다시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다가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왕이 남쪽으로 행차하여 이 고장에 머무를 때 고을백성이 충성을 다해 왕을 봉공하였으므로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하고 인근 17개 군현(郡縣)을 관할하게 했다.
우왕 9년(1383년)에는 안동도(安東道)로 개칭하고 원수(元帥)겸 부사(府使)를 두었다가 동 14년(1388년)부사제(府使制)로 환원하였다.
통일신라시대 화엄종 확산의 전진 기지였던 안동은 신라 말 고려 초 과도기에 미륵 신앙이 크게 성행하기도 하였다. 그 신앙은 제비원 미륵불의 건립으로 표현되었다. 11세기경에 제작된 보물 115인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 그것이다. 이 불상과 같이 머리 부분은 별석(別石)으로 조각하고 거대한 암석에 신체를 조각한 예는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것으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보물 제93호)이라든가 공주 계룡산 마애불 등을 들 수 있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주위에 있는 이천동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은 각 부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비원 미륵불이 세워진 곳은 우리나라 성주 신앙의 본향으로 여겨진 곳이다. 성주풀이의 성주신은 오늘날 건축신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당시에는 삼태사를 대표하는 성주 김선평을 가리켰다. 이후 점차 성주 김선평에서 고유명사 ‘김선평’은 빠지고 보통명사인 ‘성주’를 신격화하여 성주신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비원 미륵불 조성에 삼태사 등의 토착 정치 세력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고려 후기의 안동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 온 공민왕 일행이 다리가 없는 냇물을 건너게 되었을 때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어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는 것을 기념하여 만든 안동놋다리밟기 같은 놀이는 고려 왕실과 안동 지역민이 맺은 관계를 상징한다. 예능에 특별한 자질을 가졌던 공민왕은 안동 지역 문화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로 알려진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여러 불교 건축물이 이때 보수되거나 재건되었다. ‘영호루’ 현판 및 ‘안동웅부(安東雄府)’란 현판도 공민왕의 글씨로 전한다.
삼태사의 후예인 안동김씨와 안동권씨의 중앙 진출은 고려 중기에야 이루어졌다. 즉 원나라 간섭기 안동 출신의 김방경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안동 지역 출신들의 중앙 진출이 두드러졌고, 특히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을 왔던 인연으로 안동 지역 출신들이 중앙 진출의 호기를 잡게 되었다.
영남일보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8] 공민왕과 ‘왕의 나라’ 2011-09-08
태조 왕건이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가 930년에 벌어진 안동의 고창(古昌)전투다. 이 전투에서 안동의 호족인 삼태사 김선평(金宣平)·권행(權行)·장길(張吉, 또는 장정필) 등이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안동이 고려의 국운이 걸린 일에 또 한번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데, 그때가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이끄는 10여만명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시작된 1361년(공민왕10) 10월이다.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 등이 이끄는 4만명의 홍건적이 침입한 1차 때와 달리 파죽지세로 남진을 거듭한 홍건적은 11월24일 수도인 개경을 함락시켰다. 다행히 개경 함락 이전 11월19일 이미 공민왕을 비롯한 왕실은 몽진길에 나선 후였다. 왕의 일행이 몽진(蒙塵)하는 한달 동안 백성은 물론 관리마저 도망가 버리고 없어 먹을 양식마저 구하기 힘들었다. 관리 한 명이 어렵게 구해 온 쌀 두 말로 일행이 연명을 하는 등 어렵고 힘든 여정으로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거쳐 12월 임진일에 복주(안동)에 다다른다.
공민왕을 중도에서 맞이한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1287∼1379)에게는 왕이 궤장(杖)과 초상화를 선물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공민왕의 몽진 당시 김봉환 목사와 안동 사람들이 국왕을 극진해 예우해 모시자 공민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널 때 안동의 부녀자들이 등을 잇대어 인교(人橋)를 만든데서 유래했다는 ‘놋다리밟기’는 안동의 백성들이 공민왕을 극진하게 환대한 것을 보여주는 전설같은 민속놀이다.
한편, 왕은 안동에 머무는 동안 총병관으로 정세운을 임명해 홍건적을 격퇴한다. 이때를 전후해 진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가 정세운의 휘하에서 홍건적을 물리친 공로로 공신이 됨으로써 후일 이 가문에서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 배출되는 계기가 됐다.
이와 같이 공민왕이 머물고 간 안동에는 관련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공민왕이 하사한 백옥대와 옥관자, 금대 비단 등을 비롯해 안동웅부(安東雄府)와 영호루(映湖樓) 현판 등은 물론 왕을 모시는 사당, 민속놀이, 왕모산성 등 다양한 유·무형 문화재가 전승돼 오고 있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해 머문 기간은 1361년 12월 임진일로부터 1362년 신축일에 이르기까지의 70일 동안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흔적은 이후 안동 지역 사람들의 삶 속에 700년의 세월동안 유·무형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안동의 문화적·정신적 모태가 되고 있다.
지난달 24~28일 성황리에 공연된, 공민왕의 안동 몽진 시절을 배경으로한 산수실경(山水實景) 뮤지컬 ‘왕의 나라’는 출연진에서부터 제작까지 중앙이 아닌 지역의 역량으로 만들어졌기에 지역 공연 및 문화관광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일조하며 지역 문화산업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앞으로 공민왕 관련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승해야 하는지가 우리 후손들의 과제다.
4. 고려 후기의 안동문화재
(1)불경
『취지금니묘법연화경(翠紙金泥妙法蓮華經)』(보물 제314호)은 서후면 광흥사에 있던 것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는 『묘법연화경』으로, 청색 종이에 금색 글씨로 옮겨 쓴 것이다.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권3과 권4, 2책이 남아 있다.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취지에 금색 글자가 선명하고 제목 주위에 금가루로 화려한 보상화무늬를 장엄하게 장식하였다. 재료로 쓰인 종이를 취지(翠紙_청색 종이)라고 하였는데 감지(紺紙_감색 종이)가 퇴색한 것으로 보인다.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 (보물 제315호)은 흰종이에 먹으로 직접 글씨를 쓴 것으로, 전체 권1∼7중에서 권1과 권3이 남아있다. 권3의 끝부분에는 이 책을 만들게 된 경위를 적은 기록이 있는데, 고려 창왕 1년(1389) 장씨부인 묘우(妙愚)가 돌아가신 부모와 모든 중생들을 위해 책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서 개인공덕을 기리기 위해 불경을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흥사에서 경주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2)봉정사의 국보와 문화재
①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다는 봉정사는 국보와 보물로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을 비롯해 대웅전(국보 제311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대웅전 후불탱화(보물 제1614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 영상회 괘불도(보물 제1642호), 아미타설법도(보물 제1643호) 등 문화재를 무려 14점 보유하고 있다.
②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8년 앞서 1368년 중수된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기둥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다.
③대웅전은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라 추정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대웅전에서 현존하는 국내최고의 후불벽화인 '미륵하생도(微勒下生圖)'가 발견 되었다.
④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교학을 공부하는 장소로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17세기에 중수되었는데 스님들의 강학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⑤보물 제449호인 고금당은 극락전 앞 서쪽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⑥영산회상벽화는 2009년에 보물 제1614호로 지정되었다. 봉정사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지붕아래 종보받침에서 '1428년(조선 세종 10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 와 '1435년(세종17년)에 대웅전을 중창했다.'는 내용이 적힌 묵서를 발견되어 지금까지 1476년(조선성종7년)에 조성된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의 후불벽화보다 최소한 40-50년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본존 왼쪽상의의 금구장식과 왼쪽 팔꿈치의 Ω모양의 옷주름, 대의에 세필로 그린 그림의 세련된 둥근 꽃무늬와 옷깃의 보상당초무늬 등 고려시대 불화의 대표적인 특징이 선명하게 간직된 국보급 벽화로 평가되고 있다.
⑦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은 여러 개의 나무들을 접합한 접목조기법(接木造技法)으로 이루어졌으며 눈은 수정을 감입하였다. 사찰에 전하는 대웅전관음개금현판(大雄殿觀音槪金懸板)과 1753년의 중수원문(重修願文)을 통하여 1199년에 처음 조성되어 1363년에서 1364년 사이와 1751년에서 1753년 사이에 중수된 상임을 알 수 있다.
양식적으로도 이 관음보살상은 아직 고려적으로 변모하지 않은 이국적인 풍모, 마치 배흘림기둥을 연상시키듯 맵시 있게 땋아 올린 보계(寶髻), 어깨 위에서 중첩된 고리모양을 이루며 늘어진 보발(寶髮)의 표현, 긴장감 넘치는 옷 주름, 세련된 조각기법과 균형미 넘치는 비례 등에서 중국 남송대의 불상이나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나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과 비교 된다. 따라서 이 상은 <대웅전관음중수현판기>에 기록된 대로 승안(承安) 4년, 즉1199년(高麗 神宗 2) 무렵에는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관음보살상은 고려후기 새롭게 대두하는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양식 불상의 시원적 형태를 간직한 상으로 이러한 불상 양식의 성립과 전개과정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한 상으로 평가 된다.
⑧2010년에 지정된 보물 1642 안동봉정사영산회괘불도의 화면구성은 기본적으로 경상도 지역 영산회괘불화 도상과 유사하나 좌우 8구의 협시보살을 비교적 크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앙에 커다랗게 표현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8보살과 10대 제자가 둘러싸고 있는 간단한 구도를 취하고 화면에 도상들을 부각시켜 꽉차게 묘사하였다. 이 작품은 18세기 괘불탱 중에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풍도 뛰어난 작품이다.
⑨2010년에 지정된 보물 1643 안동봉정사아미타설법도는 조선조 후기 아미타설법도상의 규범이 되며 또한 17세기와 다른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어 불교회화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1713년 도익(道益) 등이 조성한 아미타불화로서,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제자, 벽지불, 사천왕, 팔금강 등을 배치하였다. 다른 불화에 비해 본존의 비중을 작게 함으로서 다수의 권속들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원만한 상호묘사와 균형 잡힌 신체묘사, 유려한 필치, 금니의 화문 등 동일한 화승이 제작한 1731년 수다사 영산회상도 및 삼장보살도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⑩봉정사는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다녀가면서 유명해졌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또 대웅전 오른편의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은 영산암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 배용균 감독), ‘동승’(2003년 주경중 감독)이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3)보물 제1571호인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1571호인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은 도산면 서부2리 산50-7번지의 보광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보살상이다. 2008년 8월 28일에 보물 제1571호로 지정되었다. 13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이 시기의 보살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하겠다.
또한 10종 194점에 이르는 복장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복장전적 중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과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의 인출시기는 불상 조성시기인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한 목판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또한 ‘범서총지집’은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선사 사원(思遠)이 교정하여 개판한 간행기록이 있어 서지학·밀교사상·다라니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지질 및 판각술은 고려 인쇄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경전류도 대개가 고려시대 인본들로 가치가 있다. 복장유물 중 ‘저고리’는 현전하는 예가 드문 고려시대의 저고리로 복식사 및 직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초기 안동불교 문화재
보물 242인 안동개목사원통전은 조선 초기에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뒤, 맹인이 많은 안동 지방에서 더 이상 맹인이 생기지 않도록 절의 이름을 개목사로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 1457년(세조 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변형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Ⅳ.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1.조선시대 안동의 역사
조선시대 안동 지역은 읍으로서의 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경상도의 중심 지역으로 존재하였다. 세조 때는 잠시 진(鎭)이 설치되어 부사가 병마절도부사를 겸하기도 하였다. 당시 안동 지역의 토지는 척박했으나, 풍속은 농상에 힘쓰고 예양과 절검을 중히 여겼다고 한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안동부의 호구수는 847호 6,859인, 예안현은 174호 1,445인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고려 후기 이래 정치적·학문적으로 중시되었고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렸다. 또 선비들의 동족마을이 많이 있어서 여러 성씨들의 명문(名門)이 대를 이어 살아 천년(千年)의 명촌(名村)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였다.
1576년(선조 9) 안동부 관내에 패륜아가 그 어머니를 죽인 변이 있어 안동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581년(선조 14) 고장 사람들의 상소로 다시 안동부로 회복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또한 김해(金垓)와 류종개(柳宗介) 등이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776년(영조 52) 도현(道縣)의 역변(逆變)으로 다시 안동현으로 격하되었고, 1785년(정조 9) 다시 안동부로 회복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8도를 폐하고 전국을 23관찰부로 고치면서 안동에 관찰부를 두고 경상도 동북부 17개 군을 관할토록 하였다. 다음해인 1896년 8월 4일 23관찰부를 폐하고 13도로 개편하여 안동관찰부는 만 1년 1개월 만에 폐지되었는데, 이때 안동군과 예안군이 분리되었다. 또한 감천면은 예천군에, 내성면·춘양면·소천면·재산면은 봉화군에 각각 편입되어 읍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는 재지사족이, 그들이 가지는 사족으로서의 신분과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통해,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지배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자치적으로, 또는 수령의 읍정(邑政)에 참여함으로써 수행되었지만, 양자의 관계는 사실상 중첩되어 모호한 형태를 보였다.
유향소·향규·향안·동계·동약 등의 조직과 규약 등이 자치적인 영역이라면, 사실상 민에 대한 형벌권이기도 한 교화(敎化)와 이와 표리관계에 있던 부세 운영에의 참여는 수령권과의 타협을 통해 수령의 읍정이 위임된 것이거나 그 일부로서 행해지던 것이었다. 이 같은 향촌 지배는 물론 사족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이라는 차원에서 추구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재지사족 가문으로는 안동김씨, 안동권씨, 의성김씨, 풍산류씨, 전주류씨 등이 있었다. 이들 가문은 각자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고, 근동의 토지 등을 장악하여 경제적인 기반을 닦았는데, 중앙 관직에까지 진출한 가문들의 경우 지역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컸다.
2. 조선전기 안동의 역사와 문화재
(1)권주
①보물 549 권주 종가 고문서(權柱 宗家 古文書)는 연산군 때의 학자인 화산 권주(1457∼1505)선생의 종손가에 대대로 전해오는 문서들이다. 권주는 성종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중국어를 잘하여 요동에 질정관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후에 도승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연산군 10년(1504)에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평해로 귀양한 뒤 극형을 당하였다. 중종반정이 있은 후 우참찬에 추증되면서 억울하게 되집어 쓴 누명을 벗게 되었다. 문서는 2건으로 하나는 「한성부황화방소재가대매매문서」이며, 다른 하나는 「재산양도문서」이다.
보물 549-1 권주 종가 고문서 - 분깃문기
보물 549-2 권주 종가 고문서 - 가대문기
②보물 제1002호 권주 종가 문적 (權柱 宗家 文籍)
성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문신 권주(1457∼1505) 선생의 종손가에 소장된 고문서와 전적이다. 총 9종 14점이다. 고문서로는 15∼16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문과급제를 알리는 교지, 권주가 충청관찰사였을 때 받은 교서, 관찰사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유서, 자식에게 재산과 노비를 나누어주면서 작성한 분배기록인 분재기로 총 4종 7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적으로는 성균관 생원, 진사들의 시문을 모은 『동방록』, 권주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글들을 모아놓은 『경수첩』, 『선세수찰』등 총 5종 7책이 있다. 크기는 연도와 내용에 따라 다르다.
이 가운데 고문서는 15∼16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경제사연구의 역사적 자료가 되며, 전적류는 당시 사회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권주가 직접 쓴 책들은 그 필체가 훌륭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 농암 이현보
①보물 872 이현보초상 (李賢輔肖像)
농암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시조 작가로 1498년(연산군 4)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곧은 성품으로 직언을 함에 따라 안동으로 일시 유배되는 등 정치적으로 기복이 심한 생활을 하였다. 76세 때인 1542년(중종 37)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인 예안(禮安)으로 돌아와 89세에 사망하기까지 자연을 벗하여 시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강호 시조의 대표로 꼽히는 「어부가(漁夫歌)」를 비롯하여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를 남겨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현보는 1612년(광해군 4) 향현사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으로 옮겨졌다. 「이현보 초상」은 1986년 10월 15일 보물 제872호로 지정되었다.
「이현보 초상」은 이현보가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던 1536년(중종 31) 팔공산 동화사의 옥준상인(玉埈上人)이라는 승려가 그렸다고 전한다. 규격은 126×105㎝이다. 후손들이 영정(影幀)의 마모를 염려하여 1827년(순조 27) 소당 이재관(李在寬, 1783~1837)으로 하여금 모사하게 한 별본영정(別本影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과 함께 전하고 있다.
②보물 1202 이현보종가문적
그의 종손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교지 고문서와 전적류, 회화류 등이다.
고문서 23장, 전적 7종 8책, 회화 1폭 등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이성원이 소장하고 있다. 고문서류는 주로 국왕의 교지(敎旨)로서 농암 가문의 관직 이력을 살펴볼 수 있다. 전체 23장이며, 1498년에서 1560년(명종 15) 사이의 것으로 이현보(14장), 이파(李坡:1장), 이문량(李文樑:8장)과 관련된 교지들이다.
③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
임진왜란 당시 선조(宣祖)를 호종(護從)한 공로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던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손자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인이다.저서로 『간재집(艮齋集)』 등이 있다.
(3)의성김씨 천전파 관련
의성 김씨 천전파는 김만근이 안동 내앞(川前)에 처음 안주하면서 형성되었다. 청계 김진은 약봉 극일, 귀봉 수일, 운암 명일, 학봉 성일, 남악 복일 등 다섯 아들 모두를 과거에 합격시킨 중흥조이다. 특히 학봉은 퇴계의 정맥을 이은 인물이다. 의성 김씨는 서산 김흥락, 김대락, 김동삼 등 독립운동 유공자만 38명에 달한다.
보물 450 안동의성김씨종택,
보물 1221 김진초상 (金璡 肖像) 김진초상은 김시습(金時習)초상, 이현보(李賢輔)초상 등과 같은 계열의 조선 중기 평량자형 입제(笠制)의 야복본(野服本) 초상화 계열로서 관복을 갖추어 입은[正裝官服本] 정형화된 형식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선조 5년(1572)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선생의 성격이나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이현보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안동지역의 사대부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4)퇴계 이황
진성 이씨는 퇴계의 숙부 송재 이우와 퇴계의 형 온계 이해, 퇴계 이황에 이르러 가문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저술을 남긴 학자만 50여명이고, 5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명문이다. 또한 이육사, 향산 이만도 등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집성촌인 안동 예안 하계마을은 무려 2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보물 210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보물 211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보물 548 이황필적 - 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 ,보물 548-2 이황필적 - 선조유묵첩
전주 류씨 수곡파의 안동 무실마을 입향조인 류성은 청계공 김진의 사위가 된다. 아들 기봉 류복기는 외삼촌인 학봉의 문인이 되었고, 류복기의 아들인 우잠(종파), 득잠(연암위), 지잠(용암위), 수잠(경곡위), 의잠(밀동위), 희잠(참판위)대에 분파되어 후손들이 현달한다.
풍산 류씨는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 이후 관찰사 류중영과 아들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에 의해서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특히 서애에서 시작한 9대에 걸친 벼슬길은 풍산 류씨 대종가인 겸암에서 분리하여 소종가를 형성했다. 서애파는 서애 류성룡-우복 정경세-수암 류진-류원지로 연결되어 학봉파와 더불어 퇴계학파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여헌 장현광은 인동 장씨 문중이 배출한 대유학자로, 류성룡이 그의 학식에 감복하여 아들을 그의 문하에서 배우게 할 만큼 뛰어난 학자였다. 만회당 장경우와 함께 구미 동락서원에 배향되었다. 퇴계-학봉-경당으로 이어진 학맥은 경당 장흥효의 딸 정부인 장씨에 의해서 재령 이씨 영해파 운악 이함 가문으로 이어진다.
특히 갈암 이현일은 퇴계정맥을 이은 숙종대의 대유학자로, 이 학맥은 이황-김성일-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남한조-류치명-김흥락으로 연결되면서 퇴계의 학맥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명문가를 이룬 선조들과 후예들과의 교류는 지도층의 각종 '리스트'로 얼룩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라 할 수 있다.
갈암과 밀암 이재의 학맥을 이은 이상정은 고려의 호장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는 한산 이씨이다. 한산 이씨의 중흥은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가정 이곡(稼亭 李穀·1298~1351)과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 이색의 아들대인 종덕, 종학, 종선대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들 3대의 업적이 후손들이 성장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한편 이들 3대의 이름에는 가문의 성장사가 숨겨져 있어 재미를 더해 준다. 먼저 이곡의 형제 이름은 가축이나 곡식을 재배하고 기른다는 의미의 배(培), 축(畜), 곡(穀)이다. 가정 이곡이라는 이름은 정자 부근에 곡식을 심는다는 의미이고, 아들인 이색은 거둔다는 의미의 색(穡)이다. 이색은 여기에 더하여 아들의 이름을 덕과 학문과 선을 베풀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씨를 뿌린다는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으로 작명했다. 이들 3대에 걸친 노력에 의해 한산 이씨는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색의 장자 종덕은 4자인 맹진(孟畛, 판중추공파)의 계열에서 현달했는데, 이 가운데 17세기 초에 수은 이홍조(李弘祚)가 외조부인 서애 류성룡의 권유로 서울에서 낙남하여 안동에 정착하는데, 이홍조의 현손이 퇴계의 적통을 이은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1711~1781)이다. 대산의 모친이 갈암 이현일의 손녀이며, 밀암 이재의 따님이었다.
한산 이씨는 이색의 손자대에 13개파로 분파하는데, 이 가운데 토정의 가계는 이색의 3자 이종선의 셋째 아들인 이계전(李季甸)을 파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에 속한다. 한편 이종선의 장자 이계주(李季疇)의 아들이 사육신으로 유명한 이개(李塏)이다. 이계전과 이개는 숙질 간으로 정치적인 운명을 달리하여 이계전은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되고 조카인 이개는 사육신으로 멸문지화를 당한다.
토정비결의 토정은 이곡-이색-이종선-이계전으로 이어지는 이색의 7세손이다. 토정의 형인 성암 이지번(省菴 李之蕃·1508~1575)의 아들이 선조대 대북파의 영수였던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1538~1609)이다.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은 바로 이산해의 사위로, 이산해의 직계는 이산해-이경전-이구로 이어지면서 모두 문과 급제했다. 이후 19세기 말 고종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순국의사로 유명한 수당 이남규(李南珪·1855~1907)로 이어지면서 13대 동안 문과 급제자 7인, 사마시 입격자 12인을 배출하면서 기호남인의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편 형과 달리 토정의 자녀는 장자가 요절하고, 이후 세 아들인 산두는 벼슬이 없었고, 산후는 요절하고, 산룡은 후손이 없는 무후였다.
토정은 스승인 화담 서경덕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화담 서경덕(1489~1546)의 학풍은 북송대 장재와 소옹의 성리학풍을 수용하고 역학의 상수학(象數學)을 강조한 것으로 토정비결은 주역에 바탕한 상수학의 성과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
(5)보물 475 안동소호헌 (安東蘇湖軒)과 관련내용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懈)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련내용
①. 대구서씨의 중흥조 ‘행정의 달인’ 약봉 서성
대기원 시보칼럼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2012.09.26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를 통과하면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조탑동 오층석탑(보물 제57호)이 국도변에 서 있다. 여기서 1.5㎞ 정도 가다가 대구 방향으로 틀어 국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망호리에 이른다. 이곳이 ‘소호리 마을’이다.
현재 보물 제475호로 지정돼 있는 소호헌(蘇湖軒)은 함재 서해(涵齋 徐懈, 1537~1559)선생의 분가(分家)고, 약봉 태실(藥峰 胎室)은 함재(涵齋) 선생의 아들인 서성(徐省)이 태어난 집인데 소호헌의 내당이다. 태실은 특이한 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직접 세우지 않고 평방 모양으로 귀틀을 짜 돌리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점과 기와에 새겨진 쌍비룡문(雙飛龍汶)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는 대구서씨(大邱徐氏)가 이곳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 명종때 함재 서해로부터 비롯된다. 그 이유는 한양(漢陽)에 사는 함재(涵齋)가 임청각을 세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 고성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소호헌에서 태어난 서성은 자가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약봉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태생이 화려했다. 조선 초 명신 양촌 권근의 사위인 서미성의 5세손이요 30년 가까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대 대제학을 역임한 서거정(徐居正)의 종현손(從玄孫)이다.
증조는 목사 서팽소(徐彭召), 조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 아버지는 서해(徐嶰), 어머니는 청풍군수 고성이씨 이고(李股)의 따님이고, 배위는 송녕(宋寧)의 따님 여산송씨(영의정 송질의 증손녀)로 숙부 서엄(徐崦)의 슬하에서 자랐다. 5대조 이래 대과에 급제한 이가 세 분이다.
약봉의 외가도 명문이다. 그의 외조 고성이씨 이고는 안동의 명절(名節)로 이름난 임청각(臨淸閣) 이명의 아들이다. 또한 약봉의 장인인 광주목사(廣州牧使) 송영(宋寧)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宋軼,1464~1520)의 손자다. 하지만 그는 매우 외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생후 1년 반이 못 되어(명종14년, 1559) 부친이 2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집안에는 이십대 초반의 어머니 고성이씨와 중부(仲父)인 춘헌공 서엄 내외만 있을 뿐이었다. 서엄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부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다.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는 없었다. 약봉은 세 살 때 모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다. 약봉이 서울살이를 시작한 것은 춘헌공 서엄의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던 약현(藥峴)으로(현 서울 아현동 서울역 뒤 중림동 천주교회가 있는 자리) 그곳에서 10여 년간 서엄에게 글을 배웠으며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약봉은 어린 시절 중부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워 성장한 뒤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宋翼弼, 1534년∼1599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세(1586) 때 알성문과에 급제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학자로서보다 관료로 더 이름을 떨쳐 고건총리와 같이 ‘행정의 달인’이라 불리어진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의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개성유수,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의 벼슬을 수행했다. 그리고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중신인 고명칠신(顧命七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광해군때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뒤에 판중추부사(중추부의 종1품 벼슬)에 이르렀다. 서성의 네 아들 경우ㆍ경수ㆍ경빈ㆍ경주 형제 중에 맏아들 서경우(俆景雨)는 우의정에 올랐고, 차남 서경수(俆景需)의 현손(玄孫) 서종제(俆宗悌)의 딸이 영조비(英祖妃) 정성왕후가 되었으며 서종제(宗悌)의 현손(玄孫) 서용보(俆龍輔)는 영의정을 역임했다. 넷째 아들 서경주(俆景周)는 정신옹주(貞愼翁主:선조왕의 장녀)와 혼인하여 선조의 부마(駙馬)가 되어, 그의 후손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배출되어 서경수(俆景需)의 후손과 함께 명문(名門)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영의정 서종태(俆宗泰, 1652~1719), 좌의정 서명균(徐命均), 영의정 서지수(俆志修)의 3대 정승이 배출되고 서명응(俆命膺, 1716∼1787)ㆍ서유신(俆有臣)ㆍ서영보(俆榮輔)ㆍ서기순(俆箕淳) 등이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북학파의 시조이자 대학자인 서명응(1716~1787)의 아들 서호수(1736~1799)는 문과에 장원급제한 대단한 천문학자였고, 서호수의 아들 서유구(1764~1845)는 농업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13권 54책의 방대한 분량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대구서씨 서성가문은 3대 정승을 배출한 청송심씨 노당 심덕부가문(심덕부・심온・심회), 청풍김씨 관복재 김구가문(김구・김재노・김치인)에 비견되고, 대제학 서하 이민서(李敏敍)・좌의정과 대제학 병산 이관명(屛山 李觀命)・대제학과 우의정 노포 이휘지(老圃 李徽之)를 배출한 세종의 아들인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 6세손인 영의정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 가문과 비견될 만하다.
서성의 후손들은 문과 합격자 105명에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9명, 대제학(홍문관의 장) 6명, 당상관(정3품 상계) 28명, 정2품 이상 관리(판서급) 34명, 종2품(참판급) 15명. 3대 정승에 이어 3대 대제학 등 내리 6대에 걸쳐 최고위직 공무원을 배출한 이른바 조선시대 ‘공무원 사관학교’를 방불케 했다.
조선시대 ‘행정의 달인’으로 꼽히는 약봉 서성(1558~1631) 가문이 이렇게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세간에서는 이를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서씨 가운데는 약봉(서성)이 유명하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홍이상)이 유명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뛰어난 후손들을 배출한 소호리의 약봉 후손들은 안동에서는‘소호리 서씨’로 통하는데, 널리 알려진 양반이면서도 영남 남인(南人)의 구심지인 안동에서만은 인정받지 못한 처지다.
그 이유는 첫째 후손들이 대부분 조선후기 정계를 주도한 서인계열 쪽이었고, 둘째 서울로 생활 기반을 옮겨 안동에 뿌리를 공고히 내릴 여건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소호리 대구서씨들과 마주한 곳에 후대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산 이씨 문중(목은 이색의 10세손이며 서애 류성룡의 외손자인 수은 이홍조가 입향조, 양지마을이라 함)의 경우 약봉가의 성취와 비교할 때 열세지만, 안동에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소퇴계(小退溪)로 부르고 ‘소호리 한산 이씨’를 한 급 높게 친다. 그 이유는 대산이상정은 퇴계 이황(진성이씨)-학봉 김성일(의성김씨)-경당 장흥효(안동장씨)-갈암 이현일(재령이씨)-밀암 이재(재령이씨)로 이어지는 퇴계학통의 정맥을 이은 적전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 약봉가는 ‘勿怠爲善(물태위선)’을 가훈으로 쓰고 있다. “착한 일을 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결국 집안이 대대로 성공하고자 한다면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必有餘慶)이라는 경구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②. 신사임당에 비견되는 자녀교육의 모범 정경부인 고성이씨
대기원 시보칼럼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2012.09.20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은 국보(5)와 보물(35) 사적(2)등 국가지정문화재(76)와 도지정문화재(132)등 총287점의 문화재가 산재한 세계역사도시이다. 또한 주로 퇴계학맥을 이은 가문들이 학맥과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안동시내에서 안동댐으로 진입하다가 좌측에 보면, 보물 182호인 임청각과 국보 16호인 신세동 법흥사지 7층전탑(法興寺址七層塼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185호인 고성이씨 탑동종택이 있다. 이곳의 임청각이라는 고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이 태어났다. 왕산 허위, 우당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삼대 항일 명문가인 석주 이상룡 집안은 직계 삼대뿐 아니라, 아우와 조카까지 합치면 아홉 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고성이씨의 시조(始祖)인 이황(李璜)은 고려때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철령군(鐵嶺君)의 봉호(封號)를 받아 고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칠세(七世) 이존비(李尊庇, 1233~1287)가 진현전(進賢殿) 대제학(大提學)(현 대학교 총장 격임)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이존비의 손자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은 원나라의 농서인『농상집요 (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했다.
또한 서예에 능하여 당시 유행하던 원나라 조맹부(趙盟頫)의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꼽혔다. 이암(李癌)의 아들인, 이강(李岡)은 유명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장인(丈人)으로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초기의 고성 이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강의 아들이자,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이다. 이원의 일곱 아들(대, 곡, 질, 비, 장, 증, 지) 가운데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이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한편 임청각 이명의 손자 이용의 딸이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가로 출가한다. 이분이 서애의 형수인 고성 이씨이다. 이명의 증손 이복원의 큰딸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남의 명문가인 창평 고 씨 제봉 고경명의 맏며느리로 출가한다. 서애 이후 270년 만에 영남사람으로 흥선군 때 재상에 오른 서애의 후손 류후조의 외가도 임청각이다.
애국시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임청각 출신으로 퇴계의 진성 이 씨가로 출가한다. 이런 면에서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석주가 태어나기 300여 년 전에 이곳 임천각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함재 서해(涵齋 徐懈, 1537~1559)에게 출가하여, 대구 서씨를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다. 이 사람이 임청각을 세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 고성이씨 부인이다. 서성의 외조부인 청풍군수를 지낸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두었는데, 외동딸은 어릴적 홍역을 앓으면서 불행하게 눈이 멀게 되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서해는 장가를 들기 위해 고성 이씨 댁으로 향하던 중 주막에서 주모의 기절초풍할 말을 들었다.
“신부가 맹인인데 참으로 신랑이 아깝다”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에 신랑측은 즉시 파혼을 하고 돌아가자고 했으나, 도학자인 서해는 “이미 사주단자도 보냈고 장님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맹인인 처녀에게 장가들겠는냐” 며 반대하며 결국 결혼이 성사되었다.
서해의 쉽지 않은 이 선택은 결국 대구서 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계기가 되었다. 고성이씨는 비록 맹인이었으나 재색과 학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서해는 처가에서 물러 준 소호헌에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하면서 행정인 달인인 서성을 낳게 되어 손이 귀한 집안에 경사가 낳다. 현재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보물 475호인 소호헌에는 약봉태실이라는 현판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서해가 23세 되는 해 서성이 2세가 되던 해 1559년에 요절하고 말았다.
졸지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과부가 된 고성이씨는 낙담했으나 외동 아들인 서성을 잘 키우는 것만이 요절한 남편에 대한 도리라 생각하고 자식교육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맹모삼천지교’와 같이 서성의 숙부 서엄이 있는 한양의 약현(현재 서울시 중림동)으로 1560년 이사를 결심한다. 이런 결정은 교육적인 환경과 학맥을 완전히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당시에는 연산군 이후 잇단 사화(士禍)로 인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에서 태생지도 중요하지만 성장지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여자의 사주팔자에서 직관력과 자식을 상징하고 음식솜씨 등의 재능은 식신(食神)과 상관(傷官)으로 표현하는데, 아마도 고성 이씨가 식신과 상관이 발달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고성 이씨는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대지 오천평에 일반 사가(私家)의 규모를 뛰어넘는 무려 28칸짜리 집을 짓는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아들인 약봉과 이씨 부인 단 둘에 불과했다.
친지들이 “식구도 적은 개인집이 대청 열두 칸이면 모두 28칸이나 되는데 너무 큰 규모이니 줄여서 짓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씨 부인은 “그 집이 지금은 사가로서 너무 크다고 하시겠으나 몇십년 가지 아니해 그 집이 클 것이 없고, 이후에 내가 죽은 후 삼년상에는 그 대청이 좁을 형편이고, 만약 손자 대를 내려가면 내 제삿날을 오히려 그 대청이 부족하여 다시 그 마루 앞으로 딴 마루를 늘려야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씨 부인의 예측대로 한 세대가 지나자 명절 때에는 그의 증손자들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등 집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들인 서성은 병조판서와 종1품 승록대부까지 올랐고, 그녀의 손자이자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과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고성 이씨 사후에 특히 손자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또 서명응·서호수·서유구의 3대는 다 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와 같이 임청각 출신의 한 여성이 외동아들을 잘 가르쳐 손자 4명, 증손 15명, 현손 53명의 대가족을 이루면서 모두 현달시킨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450여 년 전 이씨 부인이 보여준 결단의 리더십은 오늘날 가문 경영에서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약을 꿈꾸는 모든 여성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6)재령이씨 영해파
관련 칼럼 매일신문 [류동학의 동양학 이야기]2010.05.15
영남 남인의 명문가 재령 이씨 영해파와 영양 두들마을
이달 9일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 7개 가문(진성 이씨·여강 이씨·의성 김씨·풍산 류씨·인동 장씨·재령 이씨·전주 류씨)의 후손들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 조국 상실의 비애감을 표현한 민족시인 오일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문열, ‘숭선에서’의 전설적 작가 강준용 등 수많은 문인(文人)을 배출한 영양군에 모였다. 이들 7개 가문은 조선 후기 퇴계의 학문적 계승과 영남 남인의 여론형성을 주도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영양 석보면의 두들마을은 ‘주실마을’과 함께 영양군을 대표하는 문화마을로 재령 이씨 영해파(載寧 李氏 寧海派)의 세거지이다. 현재는 석계고택, 석천서당, 전통한옥 체험관, 정부인 장씨 예절관,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유서 깊은 이곳에 7개 가문의 후예 400여명이 스승과 제자로 연결된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고 우의를 다지기 위해 재령 이씨가 주관해 모였다.
재령 이씨 영해파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았다. 재령 이씨는 고려 성종 때 이우칭(李禹稱)이 경주 이씨에서 분적하여 황해도 재령에 세거하다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모은 이오(茅隱 李午)가 경남 함안 모곡리에 정착하여 낙남조(落南祖)가 된다. 영남일대에 거주하는 재령 이씨는 대부분 이오의 후예이다. 이후 이오의 증손 이애가 영덕군 영해 나랏골에 정착하고, 이애의 손자 운악 이함(雲嶽 李涵,1554~1632)이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충효당을 짓고 가문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운악 이함은 진성 이씨를 배위로 맞아 다섯 아들(시청, 시형, 시명, 시성, 시진)을 두어 집안이 번성하였다. 재령 이씨 영해파는 모두 운악 이함의 후예들이다.
이함의 3남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1590∼1674)과 정부인 장씨 장계향 부부는 아들 7형제(상일, 휘일, 현일, 숭일, 정일, 융일, 운일)를 두었는데 모두 다 학자로 이름이 높아 ‘7현자’(七賢者)라고 불렀다. 특히 석계 이시명과 그의 아들인 1남 정묵재 이상일(1611~1678) , 2남 존재 이휘일(1619~1672) , 3남 갈암 이현일(1627~1704), 4남 항재 이숭일(1631~1698) 그리고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1657~1730)와 6남 융일의 아들인 고재 이만(1669~1734)은 재령 이씨 ‘칠산림’(七山林)으로 불릴 만큼 학행이 뛰어났다. 석계의 장남 이상일(1611~1678)은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의 사위가 되었다.
석계의 3남 이현일(1627~1704)은 퇴계의 적전을 계승한 영남유학의 거두로서 무려 273회나 상소를 올린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남인의 정치적·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여, 임란 이후 영남인으로는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귀암 이원정(歸巖 李元禎)에 이어 세 번째로 판서직에 오른 인물이다. 갈암의 3남 밀암 이재(1657~1730)는 중부 휘일과 숙부 숭일에게 수학하여 퇴계학문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밀암의 학문은 외손인 한산 이씨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소산 이광정(小山 李光靖) 형제를 거쳐 다시 대산의 외증손인 전주 류씨의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 1777~1861)에게 전수되어, 퇴계의 학맥이 외손으로 계속 이어졌다.
재령 이씨 영해파는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가문들과 끊임없는 통혼과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퇴계를 추앙하는 남인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관계에 있어 ‘지고 밑지라’는 가풍을 실천하며 신의로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덕을 베풀면서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키워낸 영남 남인의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사회적인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관련 유물로는 보물 876에서 보물 876-12 재령이씨 영해파 종가 고문서가 있다.
3.임란시 안동인의 활동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이 안동 출신의 류성룡과 김성일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중앙 정계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노력하였다면, 김해와 류종개 등은 의병장으로서 안동 지역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안동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이 조직된 것은 경상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이었는데, 이러한 이들 지역의 사족들에게 적극적으로 토적의 대열에 나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문(招諭文)과 안집사 김늑(金玏)의 활동 때문이었다.
이후 7월 18일경에는 예안에서 김해가, 안동에서 배용길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7월 20일에 마침내 안동을 위시하여 예안·의성·의홍·군위 등지의 사림이 일직에 모여 동맹하고, 승문원정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정백(李庭栢)과 배용길을 좌우부장으로 삼아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이라는 연합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안동을 본진으로 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안동 향병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 지역의 각지에서 활동하였고, 관군과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명군의 남하와 왜군의 퇴각과 더불어 활동 근거지를 밀양·진주 그리고 경주 등지로 옮기고 있었다. 이 시기의 상세한 활동 내용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안동 향병장이 경상좌도 의병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3, 임란 전후 문화재
(1)류성룡 관련
풍산 류씨는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 이후 관찰사 류중영과 아들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에 의해서 명문가로 발돋움한다. 특히 서애에서 시작한 9대에 걸친 벼슬길은 풍산 류씨 대종가인 겸암에서 분리하여 소종가를 형성했다. 서애파는 서애 류성룡-우복 정경세-수암 류진-류원지로 연결되어 학봉파와 더불어 퇴계학파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국보 132 징비록 (懲毖錄) ,보물 160에서 보물 160-11 유성룡 종가 문적
보물 460에서 보물 460-3 유성룡종가유물
보물 306 안동하회양진당, 보물 414 안동하회충효당, 국보 121 하회탈및병산탈 (河回탈및屛山탈)
(2)약포 정탁 관련
보물 487 정탁 초상
보물 494에서 보물 494-13 정탁 문적 - 약포유고 및 고문서
(3)의성김씨 김성일과 김용
보물 905 김성일 종가 전적, 보물 906 김성일 종가 고문서
보물 484 김용 호종일기 (金涌 扈從日記)
김용 호종일기(金涌 扈從日記)는 조선조 관료인 김용(1557∼1620)이 임진왜란 때에 선조가 의주로 피난 중 임금을 호종하였을때 직접 쓴 일기이다. 김용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아버지는 귀봉 김수일(金守一), 숙부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다. 저술로 시문집인 『운천집』과 『당후일기(堂后 日記)』가 전한다. 작성기간은 1593년 8월∼1594년 6월까지 약 1년간이다. 표지에는『운천선조호종일기』라고 썼다. 이 자료는 후에 잊혀졌다가 1925년 9월에 발견되어 3책으로 장첩하였다. 호종일기는 평화시의『승정원일기』와 유사한 것이나, 임진왜란 중 행래소에서 사관들이 호종하면서 당시의 모든 정사를 기록한 것으로 일차적인 역사적 자료로서의 값진 기록이다.
(4)보물 880 이탁영 정만록 (李擢英 征蠻錄)
『정만록(征蠻錄)』은 선조 때 경상감사의 참모였던 이탁영(李擢英, 1541~1610)이 1592년에서 1598년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2권 2책이며 필사본이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이 수십 종에 이르고 자필본으로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와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적정과 아군의 병력 배치를 비롯한 전투 상황과 조야 관민의 사정을 상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교서는 물론 유서(諭書), 격문, 장계, 치보(馳報) 등을 아울러 등초해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 이외에 ‘정만록’이라는 서명이 선조가 정했다는 점에서도 보기 드문 책이다.
(5) 보물 553 안동예안이씨충효당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것이다.
(6)임동 충의사
전주 류씨 수곡파의 안동 무실마을 입향조인 류성은 청계공 김진의 사위가 된다. 아들 기봉 류복기는 외삼촌인 학봉의 문인이 되었고, 류복기의 아들인 우잠(종파), 득잠(연암위), 지잠(용암위), 수잠(경곡위), 의잠(밀동위), 희잠(참판위)대에 분파되어 후손들이 현달한다.
Ⅴ.일제강점기
1. 보물 182 안동임청각
고성 이씨의 산실 임청각과 대구 서씨의 산실 소호헌(매일신문 2010년 4월 3일 )
4대에 걸쳐 이상룡 등 독립운동가 9명 배출
이번에 혜명동양학연구회 회원 30여명과 안동지역의 역사문화탐방을 했다. 안동지역은 주로 퇴계학맥을 이은 가문들이 학맥과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임청각이라는 고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4대에 걸쳐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떠났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석주의 아우인 이상동(애족장), 이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인 이운형(애족장), 이형국(애국장), 이봉희의 아들인 이광민(독립장), 친아들 이준형(애국장), 친손자 이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고성 이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 용헌(容軒) 이원(李原:1368~1429)이 있다. 이원의 일곱 아들 가운데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이증의 둘째 아들 이굉이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수하는 와부탄에 귀래정(歸來亭)을 건립하고, 셋째 아들 이명이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이명의 막내아들 이굉(李肱)도 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하여, 이굉의 아들 이용이 만년을 보냈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임청각 출신 한 여성이 함재 서해(1537~1559)에게 출가하여, 대구 서씨를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 약봉 서성(1558~1631)을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보물 475호)에서 낳았다. 이 사람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이다. 약봉의 어머니는 약봉이 두살 때 남편이 23세로 요절하자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여 한양의 약현(藥峴)으로 이사하면서 자녀 교육에 앞장서 문과 급제자 105명, 3대 정승에 3대 대제학, 8대가 연속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등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대구 서씨의 산파 역할을 했다.
고성 이씨가 약봉 서성을 키우면서 만들어 판 것이 지금의 약주, 약식, 약과의 명칭이 되었다. 약봉은 부친이 퇴계학맥을 이었으나 본인은 기호학파의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의 학맥을 이어서 사계 김장생과 동문수학하여 5도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역임해 ‘행정의 달인’으로 통했다.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4형제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또 서명응·서호수·서유구의 3대는 다 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와 같이 약봉집은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간 정계를 주름잡았으며, 구한말 개화파의 서광범과 서재필 등을 배출했다. 현재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도 이 집안 출신이다. 임청각 출신의 한 여성이 외동아들을 잘 가르쳐 손자 4명-증손 15명-현손 53명의 대가족을 이루면서 모두 현달시킨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한편 임청각 이명의 손자 이용의 딸이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가로 출가한다. 이분이 서애의 형수인 고성 이씨이다. 이명의 증손 이복원의 큰딸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남의 명문가인 창평 고씨 제봉 고경명의 맏며느리로 출가한다. 서애 이후 270년 만에 영남사람으로 흥선군 때 재상에 오른 서애의 후손 류후조의 외가도 임청각이다. 애국시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임청각 출신으로 퇴계의 진성이씨가로 출가한다. 이런 면에서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택이라 할 수 있다. 임청각의 산실방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역사를 감상하는 것도 매우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