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졸붓
이삼우(2021.5. 신인상. 부산)
부임 후 첫 업무를 시작한다. 부속실에서 결재를 올린다. 나를 포함한 기관장 인사이동 관련 공문이다. 방금 출력한 듯 온기가 느껴지고 프린트 냄새가 신선하다. 상위 왼쪽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낸다. 뚜껑을 왼쪽으로 천천히 돌리며 은빛 펜촉이 드러나기를 기다린다. 설렘이 손끝에 모이면서 내 이름이 담긴 사인으로 결재를 한다. 진청색의 잉크가 펜촉으로 흘러나오면서 종이 위에 서걱거리는 감촉이 상큼하다. 짧은 순간에 만감이 교차한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삼십여 년의 공직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몽블랑 만년필은 내가 나에게 내린 셀프 포상이다. 바람 잘 날 없는 공직사회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낸 가상함에 대한 보상이다. 아내가 먼저 축하기념으로 선물하겠다는 것을 굳이 만류하고 백화점에서 직접 구매한 만년필이다.
유년 시절, 만년필은 나의 로망이었다. 교복 윗주머니에 파카 만년필을 훈장처럼 꽂고 다니던 형들이 얼마나 멋있고 부러웠는지 모른다. 공직에 있으면서 언젠가 기관장이 되는 꿈을 이룬다면, 명품 만년필로 첫 결재를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꿈은 현실이 되었고, 소망은 이루어졌다.
몽블랑 만년필을 눈여겨보면 다비드의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성근 머릿결, 푼더분한 얼굴, 살짝 삐져나온 배 둘레, 다부진 몸매가 옹골차다. ‘별 모양의 하얀 눈’ 로고를 선명하게 머리에 새기고 까맣게 윤기가 흘러내리는 허리춤에 혁대를 두른 채 알프스산맥의 몽블랑에서 설한을 견디며 단련한 몸이다. 묵중한 위엄이 서린다. 상의를 벗으면 몽블랑 문양이 새겨진 은빛 백금 촉이 푸른 눈을 뜬다.
평소에는 주인님의 안주머니에 매달려 결재의 순간을 기다린다. 기획문서나 공문의 최종 재가는 물론, 양해각서 등 주요한 의전에는 기품 있는 필체로 서명을 해야 한다. 직원의 표창 상신이나 승진 인사 등 좋은 일에는 시원하게 일필휘지로 처결하지만, 민원업무와 관련된 시행문은 꼼꼼히 따지고 수정하며 결재를 유보하거나 퇴짜를 놓는 날도 더러 있다.
세상이 변했다. 편지나 글 쓸 일이 점점 줄어든다. 서류결재가 사라지고 키보드만 툭 치면 전자결재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권위와 위엄으로 결재서류를 뒤적이던 높은 양반들로서는 싱겁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글씨 쓰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 만년필의 가치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더러 고집스러운 문인들이 만년필로 글꽃을 피우고 있어 예스러움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출근할 때마다 안주머니를 더듬어 그의 안위를 확인해 본다. 몇 년 전에 갑자기 사라져 크게 상심한 적이 있었다. 제때 밥을 챙겨주지 못해 굶긴 적은 있었지만, 그것이 불만이었을까. 무단가출로 행방이 묘연했다. 한 해가 다 가도록 애간장을 태우더니 침구를 옮기면서 기적 같은 상봉이 이루어졌다. 침대 밑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라져 있는 그와의 해후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집 나간 자식이 고개를 떨구고 부모 품에 안기는 기분이랄까.
그는 나에게 대체 어떤 존재일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명품이기도 하지만 내 숨결과 손때가 묻어 있는 애장품이자 애물단지 같은 녀석이다. 전투 중 부상으로 몽블랑 제조공장까지 후송전력이 있는 역전의 용사다. 책상에서 굴러 떨어져 만년필촉이 꺾이는 사달이 일어나 후송 헬기에 실려 독일로 날아갔다. 달 반 가까이 지나서야 성한 몸으로 돌아왔지만, 기력이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속상하고 애잔하다. 철없는 가출로 속을 끓이고, 큰 부상으로 안절부절못해 싹튼 애증의 강이 펜촉 끝에 뚝뚝 흘러내린다. 악기를 생명처럼 다루는 연주가처럼, 글을 쓸 때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시종 애만지고 그윽해진다.
몽블랑 만년필은 장인정신의 혼이 담긴 예술품이라 생각한다. 검집에서 전광석화같이 칼을 뽑아 상대를 겨누는 것이 검법의 생명이라면, 몽블랑 만년필은 뚜껑 윗부분을 천천히 돌려 삼각편대 일지창一枝槍이 드러낼 때까지 느림의 미학을 추구한다. 인생을 관통하면서 마주치는 결단의 순간, 글을 쓰거나, 서명할 때도 ‘거스르며 서둘지 말라.’라는 우생마사牛生馬死의 뜻이 펜심을 여는 나선 결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촌철살인, 촌철활인같이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펜의 위력은 검보다 강하다고 한다. 글을 쓸 때 심사숙고하며 진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펜촉이 마음 길 따라 뭉근하게 흐른다. 품어내는 글 속에는 은은한 잉크 빛 묵향이 초근하다. 책을 보다가 맘에 와 닿는 글귀에 밑줄 쓱쓱 그어가며 읽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가. 문득 떠올린 시상을 놓칠세라 메모지에 갈겨쓰는 묘미는 또 어떻고. 우리말 사전에서 만년필을 ‘물이 졸졸 흐르듯 붓 가는 대로 써진다.’라는 의미로 ‘졸졸붓’이라고도 한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우리네 팍팍한 삶도 졸졸 흐르는 붓처럼 순항했으면 좋으련만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모듬살이이다.
나는 부모의 손길이 닿은 유품을 단 한 점도 물려받지를 못했다. 추모의 마음뿐, 추억할 옹이 하나 없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나는 훗날 무엇을 남기면 좋을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속내 같아서는 내 만년필로 써 내려간 수필 한 권과 졸졸붓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다. 하지만 그게 어디 예사로운 욕심인가. 갓 걸음마 수준의 필력으로 오달진 생각을 품어본다. 나도 까치밥나무 우듬지에 걸린 홍시처럼, 어버이를 그리워할 추억 한 마당 정도는 남겨도 되지 않을까.
오늘도 졸졸붓 진청색 물빛으로 오래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곳, 고향의 언덕을 그리움으로 써 내려 간다.
첫댓글 이삼우 선생님. 2021년 5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미리 축하드립니다.
거스르며 서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졸졸붓 진청색 물빛으로 순항하시길 바랍니다.^^
@@@신인상 등단 작품은 원고 도착 순서로 올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ㆍ제가 아시다싶이 초보라서요
이곳으로 찾아 오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글 등재하시느라 수고 하셨고 축하감사합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ㆍ많은 지도바랍니다
이삼우 선생님.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문운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ㆍ신입이라 어리둥절합니다
이삼우 선생님, 평소 열심히 하신 보람 큽니다. 더욱 문채형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삼우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교수님
반갑습니다 ㆍ글 고주박이 신춘문예당선축하드립니다ㆍ고주박이 수필집 잘 읽고있습니다
많은 지도 바랍니다
이삼우 선생님 등단을 축하드리며 일취월장하시기 바랍니다~
반갑네요 ㆍ
이곳에서 작가님의 댓글을 보다니요
이삼우 선생님, 권위있는 수필전문지 월간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만년필이 '졸졸붓'이라는 예쁜 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등단작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건필하십시요.
회장님
신입 인사올립니다
바쁘신데도 일일이 회원들 챙기시니
역시 우리들의 회장이십니다
이삼우 선생님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이름이 낯설지 않습니댜 ㆍ
감사합니댜
이삼우 선생님,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성함이 단박에 외워지네요.
행복한 수필가가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_()_
이영주 선생님
매번 감사합니다ㆍ이름이 낯설지않습니다
부산회원 맞죠?
@이삼우 선생님께선 약주를 좋아하지는 않으신가봅니다. ㅎ~
양주라는 글자보다, 영주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신걸보니.
학교 다닐 때 부터 제 이름은 특히 남선셍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답니다.
저 보시면 "아 ~ 소주, 성은 고가로 하면 어떻겠나. 고량주 조옿지."
그리고 저는 거제회원입니다. ^^
제가 선생님의 귀한 성함을 잘못 사용했네요
제시력을 나무라 주세요 ㆍ대신 오랫동안 잊지않을 이름으로 기억할게요
저 약주 좋아합니다 ㆍ
이삼우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졸졸붓> 등단 신인작품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때는 만연필만 보면
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졸졸붓으로 사인한번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