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LO … ‘한 번뿐인 인생’ 즐기는 데 지갑을 열다
[소비 트렌드] 저성장 시대 ‘나를 위해 쓴다’
올 한 해 소비 행태를 꿰뚫는 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셀프(Self)’다. ‘나 자신’ ‘스스로 한다’는 뜻도 있고 급격히 늘어나는 1인 가구와 싱글족,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어느 때보다 ‘나, 내 인생’을 위로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는 2016년 본격적인 ‘욜로(YOLO)’ 트렌드로 이어졌다. ‘You Only Live Once(한 번뿐인 인생)’. 불황이 길어지고 나서야 한 번뿐인 인생의 가치에 눈을 뜬 사람들은 한층 자기 주도적인 소비로 욜로 라이프를 실천했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모습들이 있다. 노후 준비할 돈은 없다고 하는데 명절 연휴 때마다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로 공항은 북새통을 이룬다. 연봉이 오르지 않아 돈 쓰기가 겁난다고 하면서도 1만원이 넘는 고급 커피나 1만3000원짜리 수제 햄버거에는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돈을 쓸 곳과 안 쓸 곳을 철저하게 나눈다는 얘기다. 돈을 쓰는 곳은 어디일까. 이 지향점을 설명하는 말이 ‘욜로’다. 내 생활에 기쁨을 주는 소비, 남들은 이해 못하더라도 나를 나답게 하는 소비가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욜로는 완전히 새로운 말이 아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니 후회 없이 즐기라는 의미답게 미국을 중심으로 젊은이나 여행족들 사이에서 인사로 쓰여왔다.
한국에서는 최근 몇 년에 걸쳐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소비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는데 올해는 ‘나에게 주는 가치’가 보다 중요한 소비 기준으로 떠올랐다. 철저히 미래에 들어갈 돈을 고려해 이뤄지던 소비의 시점도 ‘현재’로 이동하고 있다.
미혼인 안지선(33·가명)씨는 회사를 휴직하고 2000만원을 들여 세계 여행을 하고 왔다. 안씨는 “엄마는 언제 결혼할지 모르는데 거금을 써버리면 어떡하느냐고 화를 내셨지만 그동안 직장 생활에 너무 지쳤다”며 “통장 잔액은 제로가 됐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이라고 했다. 남들이 ‘아재’라고 부르는 평범한 직장인 김현규(48)씨도 마찬가지다. 최근 1500만원이 넘는 이탈리아의 명품 자전거를 장만했다. 그는 “애들 대학 등록금이나 노후 자금에 보태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도 됐다”며 “하지만 지금껏 나를 위해 쓴 돈은 거의 없는 것 같고 ‘드림바이크’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소비는 경제 상황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경기사이클이 뚜렷하던 시절엔 호황기에는 많이 쓰고 불황기에는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저성장이 ‘뉴노멀’로 자리 잡으면서 소비 패턴도 변했다. 과거 고성장·고물가·고금리 시기에는 지금 덜 쓰고 돈을 모아 집을 사 두면 가격이 크게 오르고 은행에 저축만 해둬도 잔액이 불어나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으로 재산이 불어나는 시대는 지났다. 예금 금리는 물가를 감안하면 제로나 마찬가지다. 통계청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의 평균소득 증가율은 2.4%로 3년 전인 2012년(5.8%)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친다. 소득 증가율은 앞으로도 2% 초반대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를 희생하면 풍요로운 미래를 누린다는 보장이 희미해진 것이다.
이런 경제 상황은 1인 가구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저성장으로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지면서 젊은이들은 취업이라는 사회의 첫 관문을 넘지 못하고, 넘더라도 소득이 정체돼 큰 비용이 들어가는 결혼과 그 이후 출산·양육을 꺼리고 있다. 자가(自家)든 전·월세든 1인 가구 비중은 지난해 27.2%로 역대 가장 높았다. 세 집 중 한 집은 혼자 산다는 얘기다. 대형마트 진열대에서 깐 양파 2개짜리 포장을 보고 “아이고 이걸 이 가격에 누가 사?”라며 혀를 차던 60대 주부 고객이 20~30대들이 너도나도 이 상품을 집어 가는 것을 보고 놀라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세계 정치와 경제 역시 유례없이 불안하다. 자식에게든 직장에서든 젊어서 한 고생을 늙어서 보상받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저성장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지금 나를 위한 소비’, 즉 욜로 트렌드는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지 모른다.
욜로 트렌드는 ▶1코노미(1인 단위의 경제) ▶가성비 ▶소비의 편의성 ▶일상의 재미 등 4대 트렌드와 맞물려 대세가 되고 진화했다. ‘혼자라도 괜찮아’ 정도로 퍼져 나갔던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은 이제 어엿한 식문화 중 하나가 됐다. 꼭 혼자 살지 않더라도 내 일정, 내 입맛, 내 기분에 맞게 자유롭게 식사하고 한잔 하는 문화가 자연스러워졌다.
커피전문점들은 1인 손님을 위한 바(bar) 형태의 긴 테이블을 늘리는 추세고, 혼자 오는 고객을 위한 고깃집 등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메가박스 코엑스점은 양 옆 좌석 사이에 테이블을 설치한 ‘싱글석’을 선보였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1인 가구 소비지출 규모는 2010년 60조원에서 2020년 120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2030년엔 194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는데 이는 전체 민간 소비의 2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싼 가격이 핵심이었던 가성비는 성능(품질)이 더 중요한 쪽으로 진화 중이다. 나와 내 인생의 가치에 방점을 두는 욜로 트렌드의 영향이 크다. 한 번뿐인 인생에 나를 위한 소비인데 고가의 명품 브랜드는 사지 못하더라도 품질이 좋거나 유명 브랜드를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가 커졌다. 올해 TV홈쇼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F&B(푸드&음료)가 아니라 F&B(패션&뷰티)였다.
브랜드의 가격은 상품에 따라 10만원 근처에서 50만원대까지 넘나든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프리미엄’이 붙은 가성비를 선택했다. 간편식 역시 고급화·다양화하고 있다. 욜로족들은 아무리 싸고 간편해도 ‘품위 있는’ 삶을 지향한다.
욜로족들은 자기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소비를 한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에 맞는 다양한 소비 영역과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활용한다. 올해는 ‘OO페이’ 등 각종 간편결제시스템이 본격 출시되면서 모바일 쇼핑이 완전히 일상화됐다. 이에 따라 음식 배달 정도였던 O2O(온라인 to 오프라인) 앱(애플리케이션)은 콜택시,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숙박, 부동산 중개, 세탁, 농산물 유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다.
스마트폰이 개인 맞춤형 놀이터가 된 지금 소비자들은 ‘카카오프렌즈’나 ‘라인프렌즈’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캐릭터들을 말 그대로 친구처럼 여기며 소소한 재미를 찾는다.
체험형 소비도 욜로의 철학에 부합하는 트렌드다. 소유 자체보다 보고 듣고 느끼는 체험과 경험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강원도 속초에서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 고(GO)’를 할 수 있다는 얘기에 수천 명이 속초로 몰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자기 집, 자기 차에 대한 소유 의식이 강하지만 2016년은 공유경제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한 해다. 경제적으로 소유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면도 있고, 공유를 소유보다 합리적·민주적·친환경적인 ‘개념 소비’라고 여기는 인식이 퍼진 영향도 있다. 한슬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공유경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사회적인 환경과 인프라 수준, O2O 플랫폼은 공유경제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며 “법 제도 등이 보완되면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중앙선데이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