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전]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일어나라, 어명이니라. (연산군의 말)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음을 걸으시옵니까? (김처선의 말)
자신이 섬기던 임금의 손에 베이고 찔러 죽어간 내시 김처선. 대체 무엇 때문에 김처선은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당했을까?
내시는 왕조의 역사만큼이나 긴 내력을 갖고 있지만, 역사의 그늘의 가려서 들어나지 않았던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만나볼 내시 김처선은 유독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왕조 역사상 왕이 내시를 죽인 사건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것도 활로 쏘고, 칼로 찌르고 베어서 참혹하게 살해했다. 아마도 폭군이라고 불리는 연산군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하지만 우발적 참사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김처선의 죽음은 그 뒤로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다.
내시 김처선이 죽은 직후, 조선의 촉망받는 엘리트 선비였던 권벌은 예상치 못한 통지문을 받는다. 통지문은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었다. 과거합격이 취소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시험 관문인 책문까지 당당히 통과하여 문과에 급제한 권벌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합격이 취소된 걸까? 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이곳에 권벌 종택에서 그 내막을 알려주는 옛 기록을 찾았다. 권용철(권벌 19대손)의 말을 들어보자.
“‘선생게서 27세 도던 해에 책문으로써 과거에 합격 하였으나 오히려 삭제(합격 취소)되었다’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다.”
합격취소 이유는 권벌의 글과 연보를 수록해 놓은 문집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유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연산군께서 명령하기를 모든 문자에서 ‘처’와 ‘선’자를 쓰지 말도록 하였다. 그런데 선생의 과거 답안지 중에는 ‘처’자가 있었으니 이런 까닭으로 삭제(합격 취소)되게 된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단 하나의 글자 바로 이 ‘처’자 때문에 과거 합격이 낙방으로 바뀐 것이다. 연산군으로 무슨 까닭으로 별안간 ‘처’자를 못 쓰게 한 걸까? 연산군일기를 검색해 봤다. 놀랍게도 연산군은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대신들은 모두 고치게 했다.
“‘처’자는 곧 죄인 김처선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는 ‘처’자를 쓰지 말라. 알겠느냐?” - 연산군일기(1505. 7. 19.) -
김처선을 연상시킨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심지어 모든 공문서에서 ‘처’자는 쓰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갑작스런 ‘처’자 사용 금지령은 파란을 몰고 왔다. 조정대신이 고문을 받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임금께 올린 교지에서 ‘처’자가 발견된 것이다. 교지를 쓴 날짜를 조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확인결과 금지령 이전에 쓴 교지임이 밝혀졌다. 뒤늦게 국문을 받던 관리는 풀려났다. 김처선을 향한 연산군의 분노는 집요했다.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처’자가 들어간 것은 바꾸어 버렸다. 24절기에 하나인 처서는 ‘처’자를 빼고 갈조자로 바꾸어 조서라 고쳐버리게 했다. 연산군이 즐기던 처용무마저 풍두무로 바꾸어 쓰게 했다. 신병주 박사의 말을 들어보면,
“김처선의 이름자를 영원히 없애고 했던 것은 그만큼 연산군의 김처선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정말 컸던가 그리고 김처선이라는 이름자조차도 어떻게 보면 앞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영원히 쓰이지 못하게 하는 그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그런 처절한 분노가 이러한 연산군의 명령에 반영되어 있다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대체 김처선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은 뒤에도 이처럼 가혹한 처벌을 받았을까?
“신하가 임금을 섬기면은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야 하거늘, 요사한 간사한 내시 김처선이 나의 은혜를 잊고 변변치 못한 마음을 품고 분부를 꺼리고 나를 꾸짖었으니 신하로써의 죄가 무엇이 이보다 크랴” - 연산군 일기 1505. 4. 4. -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임금을 꾸짖었다’는 실록의 기록된 김처선에 죄목이다. 그러니까 김처선이 연산군의 바른 말을 하다가 분노를 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내시 김처선이 바른 말을 한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조선의 행정구역까지 바뀌어 놓았다.
이상호 기자가 내린 곳은 충남 연기군 전의면. 1505년 연산군은 당시 전의 면인 이곳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없애 버렸다. 바로 김처선이 태어나고 자란 전의 ‘김’씨의 본향이었기 때문이다. 아담한 농촌 마을인 충남 연기군 전의면 동교리. 이곳이 김처선의 고향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일대는 ‘전의 김씨’ 집성촌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에 보복이 시작되면서 ‘전의 김씨’는 종적을 감추었다. 임영수(연기향토박물관 관장)씨의 말을 들어보자.
“김처선이가 태어난 집이 여기에 존재했었는데, 그의 집을 아예 없애고 연못을 만들었다. 옛날의 대역죄인은 그 죄인의 어떠한 기운을 못 올라오게 하기 위해서 집을 파헤쳐서 물을 채워서 연못을 만들었다.”
김처선의 고향집은 파헤쳐져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연지(蓮池)라고 불러왔다. 17세기에 제작된 ‘전의현지도’에도 김처선을 향한 연산군에 보복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라진 집터에는 연못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내시 김처선이 자신이 보시던 연산군의 손에 처형된 지 500여년. 김처선에 집을 헐고 만든 옛 연못 자리엔 들풀만 무성하다. 이처럼 고향마을에서도 김처선의 자취는 연산군에 의해 남김없이 지워졌다.
연산군은 김처선을 죽인 뒤에 승정원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이토록 백성에게 잘 해왔건만 내시가 임금을 모욕할 줄이야 부끄럽고 아픈 마음이 극에 달해서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
‘분해서 바닷물에서 씻어도 한이 남는다’고 표현을 했는데 연산군에 김처선을 향한 분노가 뚝뚝 묻어나는 것만 같다. 사실 김처선은 역모를 꽤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을 해하려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김처선 사건을 다룬 과정을 보면 가혹하기 짝이 없다.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느껴진다고 할까, 대체 연산군에게 김처선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까지, 김처선은 연산군의 수라를 감독하는 상선내시로 근무했다. 상선내시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최고 권력자인 왕을 모시며 왕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막중한 지위다. 조선의 헌법이라 불리는 경국대전에 내시부 조직과 임무에 관한 규정이 들어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시부에 임무는 크게 4가지다. 궁궐 음식을 감독하는 대내감선(大內監膳), 왕명을 전달하는 전명(傳命), 그리고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守門)과, 궐 안을 청소하는 소제(掃除)들이다. 내시도 능력에 따라 진급했다. 품계는 말단 종 9품 상원에서 종2품 상선까지 두었다. 그중 상선은 왕의 절대적 신임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내시부의 최고 자리였다. 그런데 왕은 가장 믿음직한 내시를 상선에 앉히게 된다. 왜 그랬을까?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전통시대 대부분의 쿠데타나 이런 것은 내부 쿠데타입니다. 왕을 독살 시키면 간단하거든요. 왕을 독살할 수 있는 사람은 왕 측근에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사실은 정규병력 수십만 이상으로 왕의 음식 또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들을 호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상선은 바로 왕의 사생활 또 왕의 음식 이런 부분들을 지켜내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상선은 더 직접적으로 왕의 생명과 직결되고 또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선내시 김처선은 내시부의 수장으로 200여명의 내시들을 이끌고 연산군을 보필했다. 연산군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상선 내시 김처선의 주요임무였다. 그렇다면 김처선은 어떤 과정을 거쳐 상선내시에 오른 걸까? 단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째 되던 1453년. 내시 김처선이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유배 중이던 김처선은 그해 10월 귀양지에서 풀려나 내시부로 복귀한다. 김처선은 단종 임금 때부터 내시에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김처선이 내시가 되어 모신 왕은 단종임금부터 연산군까지 모두 5명. 다시 궁으로 돌아온 김처선의 내시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귀양을 간 것만 두 차례. 세조 때는 왕의 행차에 늦어 곤장을 맞기도 하고 국문까지 받는 일까지 있었다. 내시 직은 사소한 실수까지도 용납되지 않았다.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내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왕이 건강하게 잘 살게 옆에서 보호해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에 관련된 나쁜 소문 같은 것, 나쁜 버릇 같은 것 알아도 말하면 안 되고 왕이 나쁜 음식 먹지 않도록 특히 독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지 않도록 잘 보호해 주어야 한다. 왕이 어디 가다가 습격을 받았을 때 최종적으로 왕을 보호하는 사람도 사실은 내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째든 왕을 잘 보호해 주는 게 내시의 역할이죠.”
엄격한 내시부 규율은 옛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내반원기>는 조선의 대학자인 김종직이 성종에 명을 받들어 만든 내시부의 지침서에 해당한다. <내반원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내시들의 정신무장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태만함이 있으면 어찌 죄가 미치지 않겠는가? 임금의 은혜가 어찌 바랄 것이며 무서운 위엄을 어찌 피하겠는가?” <내반원기 중에서>
내시는 고자가 된 어린아이들을 선발해 철저한 교육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어린 내시들은 19살이 되면 관직을 받았는데 1년에 네 차례 시험을 거쳐 고과에 반영했다. 그중에는 인내력 테스트도 포함됐다. 왕에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김처선도 그런 훈련과정을 거쳤다. 성종 임금 때 마침내 그 능력을 인정받아 상서내시가 되었다. 궁 안에 비상이 걸린 성종 9년(1478년). 김처선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인수대비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전의가 각가지 좋은 약과 침을 놓았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처선은 지극 정성으로 약을 달여 인수대비를 간호했다. 인수대비의 병이 낫자 김처선은 그 공을 인정받아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른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신병주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성종은 또 파격적으로 당시 김처선이 상선이라는 종2품직 바로 이 내시로서는 최고의 직급에 올라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품계를 하나 더해서 정2품의 자헌대부 직까지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신하들이 이런 너무나 파격적인 조치에 매우 반대를 하기도 하지만 성종이 이를 관철시킬 정도로 김처선에 대한 신임은 매우 각별하였습니다.”
성종이 세상을 뜬 뒤에도 김처선에 입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연산군 3년까지 김처선은 성종의 능에서 시릉내시로 시묘살이를 한다. 새 왕인 연산군은 국정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김처선이 대신 시묘살이를 한 것이다. 시능관은 왕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에게 맡기는 게 조선의 관례였다.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김처선은 연산군이 하사한 말을 타고 궁으로 돌아갔다. 김처선이 내시부에 복귀했을 때 상선 내시 직은 그대로 비어 있었다. 김처선은 이때부터 8년 동안 연산군의 손발이 되어 상선 내시로 근무한다.
“그동안 참 고생이 많았네. 처선” (연산군)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전하.” (김처선)
상선내시는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관직이었습니다. 김처선이 성종임금, 연산군 2대에 걸쳐 상선내시를 지냈다는 것은 그만큼 왕으로부터 능력을 인정을 받고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김처선의 죄목을 보면 왕의 지시를 거부하고 꾸짖기까지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내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임금의 명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과연 상선내시 김처선과 연산군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왕위에 오른 직후 연산군과 대신들 사이에 첫 충돌이 일어났다.
“어찌 수륙재(죽은 이를 위로하는 불교의식)를 올리려 하십니까.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대신의 말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을 위해 불교의식인 수륙재를 지내려하자 신하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선왕께서 비록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또한 선왕을 위하여 행하였으니 나도 마땅히 대흥왕을 위하여 행해야겠소.” 연산군의 말
하지만 연산군은 수륙재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짐은 수륙재를 지낼 것이니 경들은 가서 제문을 지어오시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연산군의 말
그러나 유학자인 대신들은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연산군이 버티자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성종이 불교를 멀리했으니 수륙재를 지내는 건 효도가 아니라는 반대논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연산군은 결국 한발 물려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을 견제하는 조정의 국정 시스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연산군은 왕의 명령을 승정원에 전달하는 내시인 승전색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왕권강화를 위해 내시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승정원을 무시하고 승전내시를 이용해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보호하도록 했다.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제도상으론 국가의 모든 정보가 공문서가 승정원에 모여서 승지가 그것을 왕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청와대 비서실에 온갖 국가 정보가 모이면 대통령에게 보고 하듯이 그래서 지금 저희가 청와대 비서실이 힘이 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도 기본적으로 비슷하거든요. 지금과 다른 것은 무엇이냐면 승정원과 왕 사이에 승전색이라는 내시가 또 있습니다.”
대신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승전내시를 우대하는 절목까지 만들어 공포했다. 승전내시에게 승명패를 부여한 것이다. 승명패의 힘은 막강했다. 대신들도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대신들도 승전내시를 무시하지 못했다. 연산군은 승전내시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워 조정대신들을 압박한 것이다.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내시를 높여준 왕들은 대체로 왕권을 높이려는 것이다. 연산군뿐만 아니라 다른 왕들도 그렀고요. 그 왕 승명패를 가져갈 때 내시를 높이려는 것은 내시가 높은 게 아니고 왕이 높다는 것이죠. 왕의 명패만 가지고 있어도 왕처럼 존경하라는 것이니까요. 자기 왕권을 높이는 노력이라고 하겠죠.”
당시 연산군이 신임한 승전내시는 김자원이다. 대신들도 김자원을 통하지 않고서는 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왕명출납을 맡은 뒤로 김자원은 가는 곳마다 뇌물을 받았다. 조선은 내시의 정치개입을 금지한 나라지만 연산군 시대의 김자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다. 김자원은 내시부 수장인 상선 내시 김처선의 통제권에 벗어나 있었다. 김처선은 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연산군이 내시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지만, 김자원처럼 악용하지 않았다. 그저 상선 내시의 본분을 묵묵히 수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연산군 10년(1504년 1월 16일). 상선내시 김처선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뭐라 했느냐. 당장 내관 김처선을 하옥하라.” 연산군의 말
연산군이 김처선을 옥에 가둔 것이다. 왕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처선이 하옥되기 4개월 전 연산군에게 피 묻은 적삼이 전해졌다. 연산군에 생모가 남겨둔 죽을 때 남겨둔 적삼이었다. 왕위에 오른지 10년 만에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죽어간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분노한 연산군은 직접 폐비 윤씨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피 바람을 일으킨 갑자사화(연산 10년 1504년)의 시작이었다. 폐비 윤씨 사건의 연루된 사람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미 죽은 자는 무덤을 파헤쳐 다시 죽었다. 침묵을 지킨 사람들도 화를 당했다.
연산군의 피의 보복은 광기로 치달았다. 성종 때부터 상선내시를 지낸 김처선도 폐비 윤씨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성종 10년(1479년) 연산군의 생모인 중전 윤씨는 후궁을 투기한 죄로 쫓겨났다. 그로부터 3년 뒤 폐비윤씨는 사약을 받았다(성종 13년 1482년). 평민으로 강등된 후에도 반성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접수되자 성종이 사약을 내린 것이다. 그때 연산군의 나이 7살. 김처선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외롭게 자란 연산군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처선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폐비윤씨 사건 진상만큼은 함구했다. 연산군에게 그런 상선내시 김처선은 자신에 생모를 죽인 아버지 성종 임금에 충복에 불과했다. 신병주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소위 말하는 연산군의 광풍이 몰아치는 것이죠. 특히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소위 말해서 폐비에 관련된 그 논의에 참여한 조금의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그 사실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와서 사약을 주거나 처형을 시키는 이런 정말 아주 강한 정국이 초래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산군의 입장에서 보면 김처선이란 내시는 성종 때에도 상당히 고위직에 있었던 내시고 당연히 왕명을 전달하거나 또는 대비 전에 수시로 드나들었던 그런 까닭으로 당연히 그 어머니의 죽음에 깊이 또는 소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갑자사화의 피 바람을 일으키는데 연산군이 김처선을 옥에 가두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곧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다. 옥에 가두라고 한지 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처벌 지시를 바꾸어 내린다.
“김처선은 무례한 일이 있으니 죄를 주어야하나 도살 리가 없으니 곤장 100대에 처하라.” 연산군의 말
하옥되었던 김처선은 곤장을 맞고 풀려난다. 궁궐 음식을 담당하는 선리를 감독할 사람이 없다는 게 연산군이 내세운 감형 이유였다.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연산군에 뜻에 거스르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당시 연산군의 폭정을 증언하는 금표가 경기도 고양시의 남아있다. 금표는 나라의 군사훈련 지역 등에 세워 일반인에 출입을 제한하는 금지표지다. 하지만 연산군 10년 백성들에 삶터에 세운 이 금표는 공포에 대상이었다.
“이 비석이 있는 금표 내에 ‘법입’ 즉 들어오는 자는 논 하건데, ‘기회제서율’이라는 법령에 의해서 ‘처참’ 즉 목을 치겠다.” “실제로 이 금표 구역 안에 들어와서 처벌을 당한 경우도 있나요.” “예, 금표 안에 들어왔다가 죽은 사람이 천동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은 연산군 제위 11년 때의 이야기인데 천동이란 사람이 들어오자, 목을 친 다음에 이 금표 들어오는 입구에 효시 즉 걸어두어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천동에 목을 보고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예도 있다.” 고양시 문화재 관리 위원인 정동일씨의 말
원래 이곳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연산군이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백성들을 쫓아내고 금표를 세운 것이다. 애써 지은 벼를 수확하러 금표 안에 들어왔던 백성들은 왕명을 억인 죄로 참살을 당했다.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점점 향락에 빠져 들었다. 흥청이라 불리는 기생들을 궁궐에 불러들여 날마다 잔치를 열었다. 급기야 흥청이 머물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민가를 헐었다. 이때 ‘흥청망청’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이 흥청을 끼고 놀면서 나라를 거덜 낸다는 백성들의 한탄이 만들어 낸 신조어였다. 상선 내시 김처선에 고민은 깊어 갔다. 연산군의 분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김처선에게 연산군은 바른 길로 가도록 섬기고 보필해야 하는 지존이었다.
김처선은 왕을 모시는 내시부 최고 수장으로서 누구보다 연산군이 성군이 되기를 기원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산군은 김처선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관리들에게 목에 신원패라는 것을 걸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이 신원패인데 여긴 이런 글이 씌여져 있습니다. ‘口是禍之門舌是斬身刀’ 즉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즉 신원패는 말을 잘 못할 경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자 협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산하 된 자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조선의 이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신원패가 목에 채워지면서 모든 왕명에 반하는 말과 행동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김처선은 언제라도 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내시였습니다. 하지만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서울시 노원구 초안산 자락. 이곳에 김처선에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무덤이 있다. 묘비가 남아 있어 무덤에 주인을 알 수 있다. 인조 임금 때 통은대부라는 관직을 지낸 내시 승극철의 무덤이다. 이상한 것은 묘비는 하나인데 무덤은 둘이다. 다른 하나는 누구의 무덤일까? 서울시 노원구 향토사학자 이정우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 비석에 보면, ‘통은대부행내시부상세승공극철양위지묘’ 이렇게 분명히 ‘양이지묘’ 즉 부부묘라는 게 윤각이 되어 있습니다.”
비문에 내용에 따르면, 다른 또 하나의 무덤은 승극철 아내의 묘다. 북한산 자락의 중골. 이곳에서도 부부 내시 묘가 발견됐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무덤들. 이곳에서 확인된 무덤은 모두 45기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비석이 남아 있어 주인이 확인되었다. 무덤에 주인은 광해군 때부터 순종 황제 때까지 내시를 지낸 한 내시 집안의 가족 공동묘지였다. 숙종 때 상선내시를 지낸 임성익 부부의 묘도 이곳에 있었다. 내시도 결혼을 하고 아내도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 은평구 향토사학자 박상진씨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론 내시는 혼자서 궁중에서 생활하고 죽어서 그냥 혼자 묻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내시들도 결혼생활을 했다.”
묘시 뒷면에는 내시 임성익 부부에게 아들이 둘씩이나 있다고 적혀 있다. 두 아들의 각기 성은 다르지만 ‘만’자 돌림을 썼다. 내시 임성익은 양아들을 들여 대를 이은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족보실에는 특별한 족보 한권이 보관되어 있다. <양세계보>는 조선초기의 내시를 지닌 윤덕부를 시조로 하는 내시 집안의 족보다. 족보의 구성은 일반 족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가계도에 기록된 남자들의 성이 모두 다르다. 생식기능을 잃은 조선시대 내시들은 이처럼 양자제도로 대를 이었다. <양세계보> 서문에는 내시 족보를 만든 이유로 밝혀 놓았다. 비록 양자로 대를 이어가지만 낳은 은혜 못지않게 기른 은혜로 크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養育之恩)이다.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평상시에 가족이 있기 때문에 정치보다는 자기 가족 처자식들한테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정치에서부터 좀 멀어진다. 환관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거를 양반이나 왕이나 다 무서워한다. 만약에 가족도 없는 환관이 밤낮으로 정치만 생각하면 이기기 어렵다. 그 사람들은 정치 중독자처럼 아무 것 겁날 것 없이 정치만 달려들 수 있다. 처자식도 없고 겁날게 없죠. 정치에 몰두 할 수 있는데 가족을 두므로 정치에서 좀 멀어지고 자기 처자식에게 몰두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김처선도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단란한 가정이었다. 양아들도 드린 이공신 역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내시가 되었다. 매일 아침 궁궐로 향한 행복한 출근길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김처선의 출근길은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
폭풍전야처럼 궁궐의 현실은 위태로웠다. 연산군을 보필하는 김처선의 하루하루는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었다.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면서도 연산군은 백성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남산 인왕산에 잡인이 올라가면 궐 안과 성 밖이 모두 바라보이므로 매우 좋지 않으니 산기슭에 담을 쌓아 다니지 못하도록 하여라’는 연산군의 말이었다. 연산군은 향락 생활을 감추기 위해 아예, 궁궐 주변의 민가까지 헐어버렸다. 백성들은 삶터에서 쫓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 광주에서 연산군을 비판하는 한글 벽보가 붙었다. 벽보는 연산군을 향한 백성들의 경고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민심을 외면했다. 사건을 보고받고 반성은커녕 도리어 백성들의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다. 연산군의 폭정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처선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신하된 자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인가 아니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보고도 못본 척 침묵할 것인가 김처선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만약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가족에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김처선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민과 갈등 속에서 괴로운 나날들을 보냈을지 모른다. 내시를 남편으로 섬기며 살아온 아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도 있을 것이고 효자로 살아준 양아들에 대한 미안함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김처선은 남편이자 아비이기 이전에 어린 나이에 내시 교육을 받고 관직을 제수 받은 내시였다. 1505년 4월 1일. 김처선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왕을 진정으로 섬기고 지키는 내시의 길이 무엇인지 마지막 결단을 내리게 된다.
1505년 4월 1일. 이날 김처선에 행적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온다. 출근에 앞서 김처선은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내 오늘 이 한 목숨 바쳐 주상전하의 마음을 잡을 수만 있다면 내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김처선은 말을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긴 체 죽음을 각오한 출근 길. 아내와 아들은 눈물로 김처선을 배웅했다. 김처선의 생각에 옳다고 믿었기에 가족들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김처선은 궁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처선은 내시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연회가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춤판을 멈추질 않았다.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김처선은 자신의 소임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전하, 이 늙은 놈이 네 분의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개 통하지만 고금에 전하같이 행동하는 이는 없었사옵니다.” 김처선의 말 “뭐라 했느냐. 네 아비처럼 여겨 지금까지 목숨을 살려주었것만 네게 지금 뭐라 했느냐” 연산군의 말 “이제부터라도 백성을 생각하여 바른 정치를 펴시옵소서. 주상전하” 김처선의 말 “이것이 입 닥치지 못할고. 여봐라. 이놈을 당장 끌어내어라.” 연산군의 말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연산군은 왕위에 올라서 그 전에 정치 관행을 다 무시하고 국왕 독단적으로 정치를 행해갈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저항하던 많은 삼사 관료들, 양반 대신들이 죽었습니다. 연산군이 그렇게 나가는 것을 누구도 막아내지 못할 때 아마도 김처선은 ‘이런 방식으로 하다가는 국가가 위험해 지겠다’는 그래도 성종 때 하던 방식이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는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그것은 지켜야겠다’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신병주 박사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처선의 직언에 연산군은 분노했다. 직접 활시위를 잡았다. 이미 죽음을 결심한 김처선은 피하지 않고 연산군의 화살을 받았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연산군의 말 “조정에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사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랫동안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전하” 김처선의 말 “뭐라” 연산군의 말
죽어가면서도 김처선이 직언을 계속하자 연산군은 다시 칼을 빼들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어명이니라.” 연산군의 말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음을 걸으시옵니까.” 김처선의 말 “뭐라. 그 놈의 주댕이 저승 가서 한번 날려보거라.” 연산군의 말
쏘고 찌르고 베어지만 김처선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바른 말을 거두지 않았다. 그것은 무너져 가는 연산군을 지키기 위한 내시 김처선의 마지막 충성이었다.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김처선은 계속 선왕을 잘했는데 당신은 ‘왜이러냐고’ 계속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아마 그 부분이었을 겁니다. 왜 나를 자꾸 아버지 성종하고 비교해서 나쁜 왕으로 못난 왕으로 이야기하는냐 그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느냐 아마 그 분노가 나중에도 계속되어서 연산군이 김처선 이름도 쓰지 못하게 하고 ‘처’자와 ‘선’자는 아예 그 이후로 금지된 글자가 될 정도로 연산군이 격노했다고 생각합니다.”
연산군의 서슬 퍼런 칼날이 무서워 누구도 바른 말을 못하던 암울한 시기. 내시 김처선이 직언을 한 것이다. 김처선이 죽은 뒤, 연산군 곁에는 더 이상 충언을 하는 신하도 죽음으로 왕을 지키고자 하는 측근도 존재하지 않았다.
왕에 측근에서 내시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또 내시가 왕의 명을 어기고 직언을 하는 것도 결코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내시 김처선에 비극적인 죽음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신하와 왕의 관계가 파탄을 맞을 때 일어났던 특수한 사건이었습니다. 역사의 평가는 엄정합니다. 연산군은 김처선에 대한 모든 것을 지우려 했지만 지워지지 않았고 김처선의 죽음은 기억됐습니다. 약 200년 뒤인 영조 임금 때 김처선은 신분이 복권되고 충신의 반열에 오릅니다. 대의를 위해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내시 김처선은 끝까지 왕을 지키고자 했던 왕의 남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KBS 한국방송에서 방영하는 한국사전에 저작권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한국 역사를 지면으로 보기 위한 분들을 위해 여러 시간에 걸쳐 글을 옮겼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마시기를 바라며, 많은 한국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되길 기원합니다.
# 김처선과 같은 올바른 직언을 하는 정부 관료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불안정한 정국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지금이라도 올바른 정책으로 어지려워진 이 시기를 바르게 이끌어 나가시를 부탁드리며....... |
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