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 명시감상: 천양희 이성복 김광규 이경림 이영식 노천명 백석 이용악 최연홍

[애지사랑]

반경환 명시감상: 천양희 이성복 김광규 이경림 이영식 노천명 백석 이용악 최연홍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 박수 소리 같은-- 바위들이 몰래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모든 학문의 목표는 사상과 이론의 정립이며, 이 사상과 이론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세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사건과 사물들을 새로운 언어로 명명하고, 이 새로운 언어에 의해서 새로운 진리가 탄생을 하게 된다. 이미 알고 있거나 친숙한 것은 악이며, 이 낡은 것은 최고의 선이 될 수가 없다. 새롭고 낯선 것만이 최고의 선이며, 언어가 새롭다는 것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다는 것을 뜻한다. 시의 새로움은 두 가지 차원에 걸쳐져 있다. 하나는 형식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명인과 명장의 차원이다. 형식의 차원에서의 새로움은 현실주의와 초현실주의, 또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에서처럼,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의 차원이고, 명인과 명장의 차원은 기존의 기법을 더욱더 정교하고 세련되게 정식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혁명가는 너무나도 파격적이고, 그 목소리가 거칠 수도 있지만, 명인과 명장들은 장중하고 울림이 크며,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는다.

천양희 시인의 [직소포에 들다]는 명인과 명장의 차원에 해당되고, 그의 언어 사용 능력은 한국시문학의 역사상, 대단히 비범하고 탁월하며, 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절창의 경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천양희 시인의 [직소포에 들다]를 수없이 되풀이 읽어보면서 ‘천재란 레오나르도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라고 자기 자신의 붓을 꺾어버린 그의 스승인 베르키오를 떠올려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우고, 산꿩이 놀라 뛰어오른다. 솔방울도 놀라 툭, 떨어지고, 다람쥐가 꼬리를 쳐들자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라고 베토벤의 [영웅 탄생]과도 같은 ‘절창의 한 대목’이 울려 퍼진다.

절창이란 아주 뛰어난 시 작품을 뜻하고, 다른 한편, 아주 뛰어나게 잘 부른 노래를 뜻한다. 도는 가까운 데 있는 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를 먼곳에서 찾는다. 절창은 관음산 정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이 아닌 피안의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절창도 직소포에 있고, 피안도 직소포에 있고, 백색정토도 직소포에 있다. 피안도 이렇게 가깝고, 백색정토도 이렇게 가깝고, 시인과 직소포도 드디어, 마침내 하나가 된다. 천하가 다 내것이니 더 이상 탐할 것도 없고, 천하가 다 내것이니 더 이상 다툴 일도 없다. 무소새들이 무소유로 날아가듯이, 모든 것이 자유롭고, 모든 것이 자유로우니까,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마저도 환한 수궁水宮을 만든다.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키고, 시인의 언어(노래)가 만물을 깨운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 박수 소리 같은” 삼중주三重奏에 수천 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바위들이 일어나 춤을 춘다. 절창은 직소포이고, 절창은 시인이다. 절창은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관음(도)이며, 절창은 모든 고민과 고통이 사라진 백색정토이다. 절창은 사랑이며, 절창은 평화이다. 직소포가 하늘이고, 직소포가 피안이다. 시는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데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를 먼곳에서 찾는다. 시는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우 듯이 오고, 시는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 듯이 온다. 시는 솔방울이 툭, 떨어지 듯이 오고, 시는 다람쥐가 꼬리를 쳐들 듯이 온다. 시는 오솔길이 몰래 환해지듯이 오고, 시는 “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처럼 온다.

“나는 다시 배운다.” 배우고, 또, 배우면, 호머라는 고산영봉도 별것이 아니고, 배우고, 또, 배우면 셰익스피어라는 고산영봉도 별것이 아니다.

“나는 다시 배운다.” 배우고, 또, 배우면, 대영제국도 별것이 아니고, 배우고, 또, 배우면 미제국주의도 별것이 아니다.

천양희 시인의 [직소포에 들다]는 득음의 경지와 득도의 경지를 통해 모든 고민과 고통이 사라진 백색정토, 즉, 극락의 세계에 입문한 것을 뜻하며, 더 이상 비교가 불가능한 ‘절창의 시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오, 우리 한국인들이여, 언제, 어느 때 그대들은 그대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버리고, ‘독서중심글쓰기 교육’, 즉, 나의 천재생산의 교수법을 받아들일 것인가?

남해 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것은 좀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내가 있고 세계가 존재한다’에서 ‘세계가 있고 내가 존재한다’까지의 거리는 영원히 좁혀질 수 없는 거리라고 할 수가 있다.

때때로 사랑은 자기 자신의 마음과 육체까지도 허락하고, 이 ‘사랑의 힘’으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맹세한다.

하지만, 그러나 남녀는 서로가 서로를 잘못 알고 있다. 여자도 그녀의 이상만을 사랑한 것이지, 그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남자도 그의 이상만을 사랑한 것이지, 그 여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의 비극이며, [남해 금산]의 ‘이별의 드라마’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은 그 여자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는 사랑이 ‘남해 금산’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었다는 것은 그 여자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사랑에 내가 끌려 들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남해 금산의 기암괴석은 아름답고 장엄하며, 남해 금산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절경’에 속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다는 것은 나로 인한 그 여자의 실망감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뜻한다. 천둥과 벼락이 치고, 산이 무너지고, 수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했다. 홍수는 천재지변이며, 그 여자와 나 사이에도 두 번 다시 함께 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상과 현실도 함께 할 수 없고, 나와 그 여자도 함께 할 수 없다. 로미오와 줄리에트, 피라무스와 티스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단테와 베아트리체, 성춘향과 이도령, 백석과 자야, 오델로와 데스데모나 등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모든 드라마는 이별의 드라마이며, 이별의 드라마만이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고, 나는 그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참고 견디며,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게 된다.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은 ‘사랑의 노래’이자 ‘이별의 노래’이며, ‘이별의 노래’마저도 이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여자와 내가 그 ‘이별의 드라마’ 속에서 남해 금산의 풍경 자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영산靈山

김광규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므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여기에 없다고 한다

사십이 불혹도 새빨간 거짓말이고, 오십이지천명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육십이이순도 새빨간 거짓말이고,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도 새빨간 거지말이다.(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사십에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오십에 천명을 아는 사람도 없다. 육십에 남의 말을 순순히 다 듣는 사람도 없고, 칠십이 되어서 마치 도인처럼 그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공자도 없고, 맹자도 없고, 노자도 없고, 장자도 없다. 부처도 없고, 예수도 없고,시바도 없고, 제우스도 없다. 모든 경전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의 산물이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저작물이 아니다. 문자가 보편화되고, 어느 누구나 책을 쉽게 읽고 책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지난 수천 년 이래, 그 옛날의 경전보다 뛰어난 글을 쓴 저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경전은 단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다듬고, 또 다듬어 온 최고급의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산]은 있다. 공자와 맹자와 노자와 장자도 영산에 살고, 부처와 예수와 시바와 제우스도 영산에 산다.

[영산]은 없다. 공자와 맹자와 노자와 장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부처와 예수와 시바와 제우스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산]은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고, [영산]은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신앙과 모든 믿음은 의지박약하고, 자기 철학이 없는 어릿광대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그 어릿광대들의 힘으로 살아간다.

[영산]은 없다.

김광규 시인의 [영산]은 이 판단력의 어릿광대들, 즉, 우리 종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사망선고라고 할 수가 있다.

자정

이경림

가죽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의 끝에서 나는 보았네 加恩이라는 유리문을. 나는 보았네 그 속에서 수 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이 보여주던 무성영화들. 나는 보았네 똥 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네, 할머니는 방안에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마에 간대라 불을 단 광부들이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놓여 있었네 한 떼의 개미들처럼 나는 보았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 자지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꽃,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었네. 그 아래, 누렁개 한 마리가 뉘엿뉘엿 먹이를 찾아 다녔네. 아버지는 눈만 반짝이는 광부들을 지휘하고 있었네. 황금빛 해가 옥녀봉 꼭대기에 우스꽝스레 걸려 있었네. 나는 보았네 멋쟁이 신 선생이 도래실로 가는 모롱이에서 어떤 키 큰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봉암사 상좌승은 시주바랑을 메고 북쪽으로 가는 길 위 놓여 있었네. 나직한 돌담 너머 집들이 비틀 서 있었네

나는 보았네 어린 고염나무가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버거운 식구들을. 분홍 양산을 쓴 처녀들은 위험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네. 도랑마다 물이 넘치고 둑방에는 문득 몸메꽃이 피어 있었네 검은 숲이 검은 새들을 날리고 있었네 나는 보았네 바람난 옥자가 검은 새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고통처럼 길고 질긴 가죽혁대가 그녀가 날아간 허공에 떠 있었네

*가은, 도래실,-경북 문경에 있는 마을 이름

*봉암사-문경에 있는 사찰

----{애지}, 2018년 봄호에서

여우는 죽어갈 때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연어는 그토록 머나먼 망망대해를 거쳐 자기가 태어난 모천에서 산란을 하고 죽어간다. 그토록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전세계를 다 돌아다녀도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생득적이며, 자기가 태어나서 살던 곳을 잊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어느 고장 사람이라는 표지는 나의 존재의 정체성을 보증해준다. 고향은 나의 젖줄이고 생명선이며, 고향은 나의 영원한 존재의 보증수표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향수병자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고향을 생각할 때는 더없이 맑고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그 생각은 회고적이 된다.

가죽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은 무성영화의 필름이 되고, ‘加恩이라는 유리문’을 통해서 무성영화를 보면, 지나간 수세기가 내 몸을 돌아나온다.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 등이 나타나고, 똥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 아버지가 나타난다. 주정뱅이 아랫마을 김영감도 나타나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삼는다. 할머니는 방안에서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마에 간대라 불을 단 광부들은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서 있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는 도라지꽃들이 만발해 있고,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고, 한 떼의 사람들은 구호물자를 받으려고 줄을 서 있다. 그 아래, 누렁개 한 마리가 뉘엿뉘엿 먹이를 찾아 다니고 있고, 아버지는 눈만 반짝이는 광부들을 지휘하고 있고, 황금빛 해는 옥녀봉 꼭대기에 우스꽝스럽게 걸려 있다. 나는 멋쟁이 신 선생이 도래실 가는 길모퉁이에서 어떤 키 큰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보았고, 나는 봉암사 상좌승이 시주바랑을 메고 북쪽으로 가는 것과 나직한 돌담 너머의 집들이 비틀거리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린 고염나무가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버거운 식구들을 보았고, 고향 탈출을 꿈꾸는 분홍양산을 쓴 처녀들이 그토록 위험한 레일 위를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랑마다 물이 넘치고 둑방에는 몸메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고, 검은 숲이 검은 새들을 날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드디어, 마침내 바람난 옥자가 검은 새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은혜와 은혜를 더해주는 加恩----, 하지만, 그러나 이 아름다운 이름은 하나의 이름일 뿐, 그 실체가 없다. ‘加恩이라는 유리문’을 통해 바라보는 삶의 내용들은 온통 삶의 막장뿐이며, 검은 숲과 검은 새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검은 숲은 음침하고 죽은 숲이며, 검은 새들은 저승사자의 새들처럼 그토록 흉흉하고 불길한 울음을 울고 있다. 똥장군을 진 장수아버지, 주정뱅이 아랫마을 김영감, 국수를 삶는 어머니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구호물자를 받으려고 줄을 선 사람들과 악동 형태, 눈만 반짝이는 광부들과 그 광부들을 지휘하는 아버지, 멋쟁이 신 선생과 키 큰 남자, 봉암사의 상좌승과 어린 고염나무처럼 조랑조랑 버거운 식구들을 매달고 있는 사람들, 그토록 위험한 레일 위를 걷고 있는 분홍양산을 쓴 처녀들과 검은 새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간 옥자 등은 미래의 희망이 삭제된 ‘加恩이라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나 왜, 이경림 시인은 너무나도 진지하고, 너무나도 서정적인 그리움으로 ‘加恩이라는 무성영화’, 혹은 그 막장드라마를 육십 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데, 왜냐하면 [자정]은 모천회귀의 시간이며, 최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정]의 시간은 회고적인 시간이며, 그리움의 무성영화를 되돌려 보는 시간이다. 그리움은 마술같은 힘을 지녔고, 이 그리움의 색채를 입히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고,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변모된다. 검은 숲과 검은 새는 아름답고 넓은 터전과 길조吉兆가 되고, 고통처럼 길고 질긴 가죽혁대는 이 세상의 행복을 연주하는 삶의 역사가 된다. 이제 [자정]의 시간은 고통처럼 길고 질긴 가죽혁대의 시간을 벗어나 은혜에 은혜를 더하는 加恩의 시간이 되고, 이 세상의 막장드라마와도 같았던 加恩은 천하제일의 걸작품인 무성영화가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이란 망원경으로 지난 날을 되돌아 보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이란 망원경으로 모든 삶의 막장들을 ‘加恩’이라는 이상낙원으로 연출해내는 사람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학자가 글을 쓸 때,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리움이라는 색채로 그 짧은 순간들을 천년, 만년의 행복으로 채색해 놓게 된다. 시는, 예술은 그 어떤 마약이나 알콜보다도 더욱더 강한 중독성을 갖고 있고, 이 중독성은 그 어떤 고통과 슬픔마저도 다 낫게 만들어 준다. 서정시의 그리움이란 “왔노라, 보았노라, 나는 나의 행복을 완성했노라”라는 모천회귀의 영원한 인생찬가라고 할 수가 있다.

고통처럼 질기고 긴 가죽혁대는 무성영화의 필름이 되고, ‘加恩’이라는 유리창을 통해서 그 영사기를 돌리면 한 편의 무성영화가 서정적인 분위기를 띠면서 그 옛날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모든 사물들과 모든 인간들이 검은 숲과 검은 새들이 되고, 이 검은 숲과 검은 새들이 加恩이라는 하늘을 날아오른다. 고통마저도 즐겁고 기쁘고, 이 세상은 바슐라르의 말대로 ‘찬탄의 총화’가 된다.

[자정]의 시간은 이경림 시인의 시간이며, 가은의 시간이고, 삶의 완성의 시간이다. 시인은 삶의 찬양자이며, 이 시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항상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고 살아가게 된다.

분홍양산을 쓴 처녀들이 날아오르고, 옥자가 날아오르고, 멋쟁이 신 선생이 날아오르고, 봉암사 상좌승이 날아오르고, 검은 숲과 검은 새들이 날아오른다.

“왔노라, 보았노라, 나는 나의 행복을 완성했노라!”

최후의 시간, 구원의 시간, 자정의 시간이 날아오르고, 이경림 시인의 행복의 시간이 날아오른다.

달은 감정노동자

이영식

달은 노동자라네

외발자전거 바퀴로 중천에 기어올라

천지간에 달빛 퍼주는 거라

달항아리 같은 지구를 돌면서

음과 양, 생체시계 조절하고

달거리를 맞춰주는 거라

그래야 첫울음 터뜨리며 아기가 태어나고

거북이도 수북하게 알을 낳는 거라

달은 비정규직이라네

38만4천km를 내달려온 파견근로자

사계절 출퇴근시간 다르고

대체인력이 없어 파업도 못한다네

뒤통수의 그늘 깊지만

서비스정신 투철하게 벙글거리는 달

주머니 탈탈 털어봤자 6펜스뿐인

몽상가의 턱이나, 시인의 가난한 창가에

날밤 새우는 비정규직의 일당은

최저임금도 비켜가는 거라

달은 감정노동자라네

달빛을 아이쇼핑하는 자들이여

손님은 왕이다

달에게 삿대질 하라

무릎 꿇게 하라

차고 기울면서 감정을 조절하는

달의 코밑까지 침 튀기며 甲질 해서

우울증 걸리게 하라

그러나, moon이자 門인 달

당신의 삶이 외통수에 걸렸을 때

궁지에서 탈출할 배 한 척이

머리 위에 정박하여 대기 중임을 잊지 마시라

----{애지}, 2018년 봄호에서

이영식 시인의 [달은 감정노동자]이며, 외발자전거를 타는 배달부이고, 그의 임무는 온천하에 달빛을 퍼다 주는 것이다. 달항아리 같은 지구를 돌면서 음양의 생체시계를 조절해주고, 우리 인간들에게 달거리를 맞춰주는 산파이다. 달거리에 의해 임신이 가능하고, 달거리에 의해 첫울음을 터뜨리며 아기가 태어나고, 거북이도 수북하게 알을 낳는다.

하지만, 그러나 달은 비정규직이며, 38만4천km를 내달려온 파견근로자이고, 사계절 출퇴근 시간이 다른 감정노동자이다. 대체 인력이 없어 단 한 번의 결근이나 파업도 하지 않았고, 언제, 어느 때나 뒤통수의 그늘이 깊지만, 서비스 정신에 투철하다. 주머니 탈탈 털어봤자 6펜스(서머셋 모음, {달과 6펜스})뿐이고, 몽상가의 턱(오현정 시집, {몽상가의 턱})이나 시인의 가난한 창가에서 날밤을 새우지만, 달의 일당은 최저임금도 비켜간다.

달은 감정노동자이며, 달빛을 아이쇼핑하는 자들은 언제, 어느 때나 제왕처럼 군림을 하며, 달에게 삿대질을 하거나 달을 무릎 꿇게 한다. 달은 차고 기울면서 감정을 조절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현대 서비스 산업의 주인공인 달에게 온갖 사나운 갑질로 더없이 괴롭고 힘든 우울증을 선사한다.

달은 자전거가 되고, 달은 달거리가 된다. 달은 비정규직 파견근로자가 되고, 달은 대체 인력이 없어 단 한 번의 결근이나 파업도 못한다. 서비스 정신에 투철한 달이 되고, 주머니 탈탈 털어봤자 6펜스 뿐인 달이 된다. 손님에게 무한한 갑질을 당하는 달이 되고, 그 갑질에 시달리다 못해 우울증에 걸린 달이 된다. 하지만, 그러나 “moon이자 門인 달”은 “당신의 삶이 외통수에 걸렸을 때” 당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배 한 척이 되어준다. 이 배 한 척은 푸르디 푸른 하늘의 돛단배이며,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없애주는 감정노동자의 구원선이 된다.

달은 moon이 되고, moon은 門이 된다. 상상력이 자유로우면 말들이 춤을 추고, 말들이 춤을 추면 달은 감정노동자로서 일인다역의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달은 감정노동자]는 이영식 시인의 상상력의 승리이자 그의 시인 정신의 승리라고 할 수가 있다. 상상력이 새로우면 말들이 새롭게 되고, 말들이 새로우면 앎(지혜)의 총체로서 제일급의 명시가 탄생을 하게 된다.

달은 감정노동자이고, 달은 사회적 천민이다. 그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며 온갖 사나운 천대와 멸시뿐이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직업에 남다른 긍지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 단 한 번의 결근이나 파업을 해본 적도 없다. 초생달, 상현달, 보름달, 그믐달의 ‘달의 운행’은 자연의 법칙이 되고, 이 자연의 법칙은 음과 양의 생체시계를 조절해주고, 달거리를 통해 모든 생산과 종족의 번영을 약속해준다. 값싼 임금과 값비싼 생활비와 값싼 운행은 무보상적이며, [감정노동자]로서의 그의 노역은 외줄타기의 광대와도 같다. 외줄은 외통수이고, 외줄의 생명은 추풍의 낙엽과도 같다. 감정노동자는 사교도 모르고, 감정노동자는 연애도 모르고, 감정노동자는 그 어떤 오락도 모른다. 언제, 어느 때나 외줄타기라는 목표를 향하여 그의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드디어, 마침내 그 사회적 천역을 고귀하고 위대한 문화적 영웅의 성역으로 승화시킨다.

달은 moon이 되고 moon은 문이 된다. 이 문은 달이 돛단배를 저어 모든 낙오자들을 구원해주는 문이며, 달이 창출해낸 신세계의 문이다. 비천한 것과 위대한 것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외줄타기의 양끝과도 같다. 공자, 맹자, 모세, 부처, 예수, 호머, 셰익스피어, 반고호, 모차르트,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등은 자기 자신의 사회적 천역을 통해서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된 문화적 영웅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달은 이상낙원의 창조주이며, 최고의 재판관이자, 단 하나뿐인 구원자이다.

이영식 시인은 키가 크고, 가장 노래를 잘 부르고, 그의 상상력은 푸르디 푸른 밤하늘의 돛단배가 된다.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천재는 시와 인간을 분리시켜 시를 모국어의 영광으로 삼고, 평범한 인간은 반신반의하며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평범 이하의 삼류 시인들은 인간의 잣대로 천재의 시를 짓밟아 버린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행동이 죄를 지은 것이지, 그의 뛰어난 시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산소’의 발견자인 라부아지에가 사형을 당했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지울 수는 없는 것이고, ‘만유인력법칙’의 명명자인 뉴턴이 조세국장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게 했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에드가 알렌 포우도 범죄자였고, 프랑스와 비용도 범죄자였다. 보들레르도 범죄자였고, 베를렌느도 범죄자였다. 도스트예프스키도 범죄자였고, 랭보도 범죄자였다. 따지고 보면 천재와 범죄자는 동일한 인물의 두 얼굴이었고, 범죄는 지극히도 인간적인 행위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천사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이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운 것은 그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다. 범죄의 아름다움과 범죄의 끔찍함도 있는 것이며, 범죄의 아름다움과 범죄의 끔찍함이 없다면 모든 예술과 모든 삶은 종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범죄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것과 함께, 무한한 관용과 용서의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천재 시인의 작품과 그의 정치적, 사회적 행위는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시는 시의 작품으로만 평가를 하면 되는 것이고, 그의 정치적, 사회적 행위는 그것대로 평가하면 되는 것이다.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아무튼 우리 시인들의 친일행위이나 반민족적인 사대주의는 더없이 추악하고 파렴치한 범죄행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업적을 무차별적으로 지우며, 야만적인 여론재판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반예술적이며, 반이성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분노와 흥분이 상품이 되는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봄볕 속의 잔설과도 같은 효과 밖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읽어보고, 너무나도 감동한 나머지 이런 말을 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사슴은 초식동물이고, 비공격적이며, 먹이사슬의 최저단계에 속하는 동물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모국어를 빼앗기고, 전통과 역사를 잃어버린 시인의 운명은 호랑이 앞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악명 높은 친일 행위와 북조선 찬양의 좌익활동은 마땅히 단죄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노천명 시인의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노천명 시인의 운명은 사슴의 운명이며, 그는 그 외롭고 높은, 아름답고 고귀한 관을 지킬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시인의 왕관을 쓰고 태어난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찬양자로서, 북조선 찬양의 남로당원으로서, 끝끝내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희귀병의 환자로서 46세에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었던 노천명, 이 노천명 시인의 슬픈 인생----그의 기회주의적인 삶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와도 똑같이 닮았다----은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와도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 궤를 같이 한다.

남부여대, 유리걸식----. 남양군도로, 사할린으로, 중앙아시아로, 하와이로, 멕시코로, 만주벌판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민족의 노예와 총알받이와 정액받이로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한국인들의 운명이 노천명 시인의 운명이고, 사슴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크나큰 상처는 오랜 후유증을 남기지만, 그러나 이제는 아픈만큼 성숙했고,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역사 철학적인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

물 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우리 인간들의 위대함의 기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억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망각 능력이다. 망각 능력이 상실되면 그는 과거에 집착하게 되고, 그는 궁극적으로 심리적 고착과 퇴행에 사로잡힌 정신병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루바삐 잃어버렸던 전설, 즉,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와 전통을 되찾고, ‘무척이나 높은 족속’, 즉, ‘시인의 관’과 ‘한국인의 관’을 되찾아 오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이상 모가지 길어서 슬픈 사슴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이 ‘사슴의 관’을 쓰고 그토록 처량하고 쓸쓸하게 비명횡사해간 노천명 시인의 한과 그 영혼을 위로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천년, 이천년의 거목을 베어버리기는 쉽지만, 그러나 그 거목들을 길러낸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하지가 않다.

시인은 약하지만, 시는 영원하다.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전진하고, 또 전진하지 않으면 않으면 안 된다.

문재인 정권도 국민보다는 이명박과 박근혜 편이다. 그들을 강제구인하여 검찰수사와 재판을 받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김정은이 그의 고모부 장성택을 총살한 것을 생각해보란 말이다. 공권력을 무시하고 조롱하는데도 재판받으라고, 검찰수사받으라고 쩔쩔매는 이유를 모르겠다. 전세계인들에게 물어보라, 그런 인간들을 전직 대통령 예우를 해주어야 하는가를......

흰 밤

백석

옛 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옛 성의 돌담에 떠오른 달과 묵은 초가지붕에 또하나의 달같이 하얗게 빛나는 박----. 이처럼 어스름하고 환한 달밤은 수절과부가 그리움과 외로움에 사무쳐 목을 매달아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백석 시인은 이미지스트이자 탐미주의자이다. 이미지스트는 언어를 사물화하고, 탐미주의자는 언어와 사물을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결합시킨다.

옛 성의 돌담에는 묵은 초가집이 화답하고, 밤 하늘의 달에는 초가지붕의 하얀 박이 화답한다. 옛 성과 묵은 초가집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을 뜻하고, 밤 하늘의 달과 초가지붕의 박은 아무런 효용가치도 없는 사물을 뜻한다. 역사의 시계바늘은 멈추어 섰고, 옛 성과 초가집과 밤 하늘의 달과 초가지붕의 박도 그 주연 배우들을 잃었으며, 다만, “언젠가 마을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수절과부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백석 시인의 [흰 밤]의 주요 무대는 폐허이다. 저절로 눈물이 핑 돌 만큼 아름다운 폐허이고, 수절과부처럼, 이 세상의 삶을 너무나도 처절하고 의연하게 마감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미지스트로서의 백석, 탐미주의자로서의 백석을 생각해보다가 나는 문득 말놀이를 하고 싶어진다. 언어와 사물이 연애를 한다. 언어가 사물을 사랑한다고 하면, 사물도 언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언어와 사물이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싸움을 한다. 언어가 사물의 외도를 질투하면, 사물도 언어의 외도를 질투한다. 언어와 사물이 다같이 동일한 사물과 동일한 언어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물이 “이제 우리 사이는 다 끝났어”라고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결별을 선언한다. 언어가 사물의 모습을 정반대로 표현했다면, 사물 역시도 언어의 모습을 정반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물의 영혼이고, 사물은 언어의 육체이다. 하지만, 그러나 언어와 사물, 또는 영혼과 육체는 일심동체이기보다는 불완전한 존재일 때가 더 많은 데, 왜냐하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이후, 서로가 서로의 짝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물을 그리워하고, 사물은 언어를 그리워한다.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된다. 이미지스트는 은유와 상징의 기법에 능하고, 은유와 상징의 기법에 능한 시인의 시는 그만큼 울림이 크고, 역사 철학적인 깊이를 갖게 된다.

언어와 사물의 연애, 언어와 사물의 질투, 언어와 사물의 말다툼, 언어와 사물의 대사기극과 치정, 언어와 사물의 대혈투와 전쟁----. 우리 인간들은 따지고 보면 언어와 사물의 영원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와 사물은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주인이며, 우리 인간들의 운명은 언어와 사물의 명령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가 있고, 사물이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다.

달 있는 제사

이용악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아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가정이 있고,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다.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는 점조직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정은 국가의 가장 작은 조직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국가나 사회 이전에 가정 속에서 태어나며, 이 출신성분은 그의 일생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가 태어난 것도 가정이고, 그가 밥을 먹고 자라난 곳도 가정이며, 그가 교육을 받고 자라난 곳도 가정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듯이, 가정이 화목하면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의 남편이며, 우리들의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가장이다. 누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가? 누가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가? 누가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우리 가정의 평화를 창출해내고 있는가?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아버지는 스승이며, 아버지는 최후의 심판관이다. 우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도 아버지이며, 어떠한 아버지를 두었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리를 짓는 동물, 즉, 사회적 동물은 가부장적인 사회이며, 그 모든 동물들은 절대군주제를 최선의 정치제도로 채택하고 있다. 들소나 영양의 무리도 그렇고, 늑대나 사슴의 무리도 그렇다. 개미나 꿀벌의 무리도 그렇고, 닭이나 하이에나의 무리도 그렇다. 절대군주제, 즉, 가부장적인 제도는 어떠한 전력의 낭비도 없이 사회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도이며, 그가 어진 군주라면 여러 사회적 재화들, 즉, 돈과 명예와 권력을 아주 공평하게 분배할 수가 있다.

현대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고, 민주주의 사회는 자연에 반하는 제도이며, ‘애비’없는 후레자식들이 그 모든 전권을 휘두르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애비없는 후레자식들이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아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이라는 이용악 시인의 [달 있는 제사]의 그 한 맺힌 소망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아버지의 권위와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한없이 깎아내리는 반사회적인 풍토가 더 큰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조직체는 절대적인 서열제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서열제도를 부정하면 우리 인간들의 삶이 없어지게 된다. 제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고 해도 가장이 없는 사회와 대통령(왕)이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아버지는 스승이며, 아버지는 최후의 심판관이다. 모든 전지전능한 신들이란 이 아버지가 성화된 인물에 지나지 않으며, 이 아버지 숭배가 모든 종교의 근본목적인 것이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어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어 우리들의 행복을 창출해주기를 비는 것이 이용악 시인의 [달 있는 제사]의 가장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아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내리듯이, 그 기원의 간절함이 우리들의 어머니를 위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모든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아버지가 훌륭해야 가정이 화목하고 국가가 강대强大해진다. 어떤 민족이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인가는 어떤 아버지들(민족의 영웅들)이 있었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교육이 천재생산의 교육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받은 선진국민과 주입식 암기교육을 받은 우리 한국인들과의 차이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보다 더 크다.

날아가는 숲

최연홍

새들을 보고 있으면

숲이 날아간다

대나무 숲이

폭풍 앞에서

날아간다

참나무 숲이 날아간다

키 큰 대나무들이 휘어졌다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는

반동으로

숲 전체가 날아간다

날아가는 숲 속에서

사람들도

새처럼 날아간다

파리의 하늘을 날고 있는 샤갈의 연인들처럼

나도 날아간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숲에서 이 숲으로

아, 날아가는 숲 속에 반란군이 숨어있구나

혁명을 꿈꾸는 반란군들의 총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최연홍 시집, {별 하나에 어머니의 그네}(도서출판 지혜)에서

모든 새들은 땅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그 어떤 중력의 법칙에도 구속되지를 않고, 모든 경계들을 초월해 있다. 국가와 국가의 경계도 초월해 있고, 하늘과 하늘의 경계도 초월해 있다. 논두렁과 밭두렁의 경계도 초월해 있고, 철조망과 철조망의 경계도 초월해 있다. 새들은 자유이고, 새들은 혁명가이며, 이 새들의 날개짓에 의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에 반하여, 우리 인간들은 두 발로 걷는 동물이며, 너무나도 지나치게 중력의 법칙에 구속되어 있다. 이 중력의 법칙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겨우 손바닥 만한 땅을 두고, ‘네것과 내것의 경계’를 만들고, 이 경계를 토대로 하여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간다. 두 발로 걷는 동물, 중력의 법칙에 구속되어 있는 동물, 즉,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콤플렉스는 ‘비상 콤플렉스’이며, 따라서, ‘난다’, ‘날아다닌다’, ‘머나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라는 말보다도 더 아름답고 멋진 말도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제우스의 독수리와 헬레우스의 태양마차에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의 꿈이 담겨 있고, 부처의 극락과 예수의 천국에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의 꿈이 담겨 있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에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의 꿈이 담겨 있고, 플라톤의 이데아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도 우리 인간들의 비상의 꿈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작은 아테네를 세계제일의 국가로 만들겠다’라던 데미스토클레스의 꿈도 그렇고, ‘내 꿈은 천하통일’이라던 알렉산더대왕의 꿈도 그렇다. 알프스를 넘어갔던 한니발의 꿈도 그렇고, 하늘의 문을 열었던 단군의 꿈도 그렇다. 꿈 중의 꿈은 비상의 꿈이며, 모든 꿈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최연홍 시인의 [날아가는 숲]의 꿈도 비상의 꿈이며, 이 비상의 꿈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새들을 보고 있으면 숲이 날아가고, 새들을 보고 있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폭풍 앞에서 대나무 숲이 날아가고, 폭풍 앞에서 참나무 숲이 날아가고, 다시 키 큰 대나무 숲이 휘어졌다가 그 반동으로 숲 전체가 날아간다. 날아가는 숲속에서 사람들도 새처럼 날아가고, 날아가는 숲속에서 샤갈의 연인들처럼 나도 날아간다.

날개는 태풍이고, 혁명이며, 천지창조의 원동력이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저 숲에서 이 숲으로 날아 온다. 새들은 자유이고, 자유는 반란군이고, 반란군은 혁명군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불가능은 없다.

꿈은 날개이고, 꿈은 자유이며, 꿈은 모든 새로운 세상의 기원이다.

‘난다’, ‘날아다닌다’, ‘머나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최연홍 시인의 [날아가는 숲]은 우주왕복선보다도 더 빠르고, 빛보다도 더 빠른 ‘사물인터넷 세상’을 창출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오, 날아가는 숲이여!

오오, 날아가는 숲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