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탕 풍경 / 이태호
1시간 30여분 동안 예닐곱 번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옷장 번호를 부르면 이발사이거나 목욕관리사가 깎거나 밀 순서가 되었다는 알림이다. 직원이 직접 호명하면 일반적으로 안 좋은 상황이다. 여탕에서의 전갈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동행한 누군가에게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을 확률이 높다. 온천탕 통계로 보면 뇌졸증이거나 낙상사고가 주라고 했다. 그 때문에 호명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잘 안 들릴 때면 관리인에게 직접 찾아가 호명한 이름을 확인한다. 여탕에는 뇌수술 경력이 세 차례나 있었고, 두 번이나 쓰러졌던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왕복 2시간 20여분이 소요되는 온천탕을 찾는다. 아내의 첫 번째 뇌수술 이후부터 매주 어김없이 찾는다. 어느덧 20여 년의 단골회원이다. 가까운 대중목욕탕도 많다. 그런데도 먼 길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한마디로 “있다.” 환자에게 맹물보다는 온천물이 좋다는 조언 때문만은 아니다. 아내의 컨디션 작용이 컸다. 다녀오면 으레 이렇게 말했다. “나른했던 팔다리에 힘이 솟아요.” 이처럼 기분 좋은 말을 듣고 있으면 절로 힘이 솟는다. 일주일에 두 번을 요구해도 불만이 없을 것이다.
온천은 약산(藥山) 용봉산 기슭에 자리했다. 약수(藥水) 역시 지하 200m 암반에서 추출한 알칼리성 중탄산나트륨온천수라고 한다. 온천탕 내부 또한 넉넉하다. 9백여 평이나 된다. 한꺼번에 1,800명이 이용할 수 있다. 시설 면에서도 여니 목욕탕과 손색이 없을 정도다. 대 온천탕, 건, 습식사우나, 열탕과 온탕, 쑥탕, 약탕, 냉탕, 폭포 탕이 있다. 건, 습식 사우나도 있고, 체력단련 기구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즐겨 찾는 자연과 함께한‘노천탕’도 있다. 이곳저곳 자유롭게 이용하다 보면 아내와 약속한 시간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어제도 온천을 다녀왔다. 일주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달력에다 동그라미나 세모네모를 그려 넣지 않는다. 몸이 먼저 알려주기 때문이다. 습관이나 버릇, 취미가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를 알듯하다.
무인발급기에서 입장권 2장을 받는다. 현찰은 안 받고 외상만 허용한다. 검표원에게 입장권을 건네면 번호가 새겨진 옷장 열쇠를 준다. 그때마다 아내는 검표원에게 말한다. “앞 번호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쪽이나 중간, 뒤 번호가 목욕하고 무슨 관계가 있을까? 늘 궁금했다. 오늘도 아내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런 부탁을 했다. 아내에게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난주처럼 그냥 빙그레 웃는다.
남탕의 경우에는 옷장이 666개가 있다. 끝 번호가 예사롭지 않다. 요한 묵시록에 짐승의 이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 알고 있다. 이 짐승은 세상의 마지막 시기에 나타나게 될 그리스도의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터부시하는 숫자다. 왜, 하필 666일까? 직원에게 문의해 보았다. 수건뭉치를 나르던 중년의 직원은 별놈 다 보겠다는 듯이 빤히 쳐다만 보았다. 아마도 내 말을 하나님만이 아는 방언으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
1번에서 100번까지는 높이가 2m 정도로 길고 통짜로 된 옷장이다. 101번부터 666번 까지는 절반으로 나누어 상대적으로 짧다. 그렇다면 길고 짧은 옷장에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주관적으로 볼 때 100번까지는 외투나 바지의 옷 구겨짐은 덜할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옷장의 용도는 대동소이한 것 같다. 그런데도 아내는 왜, 앞 번호를 선호할까? 분명 남성들이 모르는 장점이 있을 것 같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알몸들이 부산하다. 물이 튄다고 짜증을 부리며 욕설하는 사람도 있다. 탕 안에서 물장구를 치거나 자맥질도 한다. 콧구멍이나 발가락을 후비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풍경을 내려다보던 천장의 물방울들도 서로 잡아먹기에 바빴다. 갑자기 숨이 막힐 듯 답답함을 느꼈다. 이럴 때는 노천탕이 해방구다.
제법 쌀쌀한 기온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자연 속 노천탕을 즐기고 있었다. 둘레에는 크고 작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공생하고 있었다. 짙푸른 잣나무와 봄을 깃는 상수리나무 두레박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곁에는 조릿대가 군락을 이뤘다. 뾰족한 이파리 끝이 마치 호위병이라도 되는 듯이 둘러서있었다.
노천에는 편백나무로 제작한 널따란 정사각형 온천탕이 있다. 바로 곁에는 30여 미터 남짓의 직사각형 수영장도 있다. 배영이나 자유형, 평형과 접영보다는 개 헤엄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쩌다가 수영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특징은 과시를 앞세운다는 것이다. 멋진 동작으로 한두 번만 왔다 갔다 하면 될 것을, 숨이 턱밑에 찰 때까지 대여섯 번씩이나 돈다. 질세라 나도 끼어든다. 해병대에서 배웠던 엄청 빠르고 균형 잡힌 ‘전투수영’으로 과시한다. 나이테가 수십 바퀴나 돌았는데도 범인(凡人)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본다.
탕 안의 온도는 적당했다. 편백나무라는 인식 때문인지 향내가 코끝을 스친다. 좌욕자세로 앉아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껍데기를 벗은 알몸에는 거짓이 기생할 수 없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일 수도 있다. 이런저런 상처가 깊거나 얕은 사람, 피부에 탈력이 팽팽하거나 느슨한 사람, 키가 훤칠하고 몸피가 당당한 사람, 땅딸하고 야무진 사람, 허리가 굽고 하체가 가느다란 사람, 머리숱이 검고 풍성한 사람, 푸석푸석 흰머리, 듬성듬성 민둥 머리, 눈빛이 선하거나 눈동자가 바쁜 사람, 살펴보면 살아있는 예술품들이다. 문득,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이란 명화(名畫)가 떠올랐다. 그런 것 같다. 자연 속 목욕탕 안에서만큼은 가식 없이 자유롭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으리라.
마무리 샤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여생만이라도 훌훌, 껍데기는 벗어버리자. 더는 내밀(內密)할 것도 없잖은가.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서둘러 돌진하거나 막연하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기는 지났다. 그러므로 지금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사랑해야 한다.
오늘도 아내보다 10분 정도 먼저 나왔다. 시선을 출구 쪽에 고정해 놓고, 계단이 가파르다고 염려했다.
첫댓글 사모님 건강이 한결 좋아지신 이유를 오늘 옥고를 통해 알았습니다.
지난번 뵈었을 때 사모님 밝은 표정은 물론 이태호 작가님
얼굴 피부도 반들반들(?) 젊음을 유지하시는 비결을 알았습니다.
용봉산이라면 덕산온천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과거 출장 길에 그 온천을 여러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 유성온천도 혈액순환과 각종 질병에 효험이 좋지만
저의 기억으로는 덕산 온천수의 약효(?)가 유독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나오면 온몸이 상쾌하여
날아갈 듯하지요. 주변에 맛집은 좀 많은가요.
오늘 이태호 작가님 옥고에는 특별한 온천 정보에다가
건강 유지 비결, 그리고 부부금슬까지 배울 점이 많습니다.
네, 윤승원 수필가님 지금도 손자와 소통하는 인자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용봉산 자락의 온천탕과 인연은 오래 되었습니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등산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온천욕을 마치면 예당호 인근에서 어죽으로 끼니를 달랜 다음, 충의사와 추사고택도 방문한답니다.
아시다시피, 예산군은 가볼만 곳도 제법 많습니다. 다음주에는 내포 문화 숲길을 걸어볼 예정입니다.
건강이 우선이란 말, 절실하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평안하십시오.
반가운 글이 올라왔네요. 읽는 내내 지난 모임때 나란히 들어오시던 두분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보기만해도 따뜻하고 편안함을 느낍니다.
사모님을 향한 뭉근한 사랑이 행간마다 절절합니다. 가슴 따뜻해지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부부라고 생각합니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말 또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저는 예전에 함부로 뱉았던 말들에 대하여 후회 대신 교정하고 있답니다.
늘씬하닌 용모와 늘 웃는 모습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회장직을 맡으셨으니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을까? 회원으로서 고민하겠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모님이 여전히 고우시고 건강하셔서 마음이 좋았습니다. 두 분의 정겨운 일상이 그려집니다. 바깥의 것들에 정신이 팔려 정작 '사랑'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챙겨봅니다. 그런데 그 숫자는 질색이라 자동차 번호판이나 거리의 간판에서 우연히 보면 머리카락이 쭈뼛 섭니다.^^;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밖이 한산합니다. 놀이기구 소리도 멈추고
갈지 자 발걸음 소리도 간간히 들립니다. 그렇습니다.'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듣기 좋은 단어입니다.
666저도 동감입니다. 아름다운 저녁 되십시오.
선생님께선 아내를 향한 사랑이 참 깊으신 것 같아요. 아름답습니다.
사물을 보시는 눈도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시네요.
어떤 곳을 다 같이 한번 다녀와도 그 주변까지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분이 계신데 선생님도 그러신 것 같습니다.
글 쓰기에 아주 좋은 멋진 탈란트를 가지신 것에 박수드리고 싶어요.
목욕탕 안 사람들 표현에서도 언뜻 앵그르의 '터키 목욕탕'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디 다녀오면 한가지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제 입장에서는 아주 부러운 일입니다.
잘 아주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