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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어가기 2. 무자성과 중도의 문제 3. 인연법 중심의 세계에서 공 중심의 세계로 4. 인연법과 공의 상호 인과 관계적 해석 5. 인연법을 포섭한 공의 성품과 위상 6. 인연법과 단절된 대승 불교의 수행법 7. 마무리 |
1. 들어가기
1.1. 공(空) 사상은 용수의 《중론》에서 시작된 것이다. 《중론》은 아함경의 핵심 내용을 체계화하고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상세히 해설한 문헌이다. 그럼에도 《중론》은 아함경과 비교할 때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아함경에서 중도는 ‘있다는 주장’이나 ‘없다는 주장’과 같은 양극단의 견해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함경의 모든 경전이 중도의 관점으로만 서술되어 있지는 않다. 인연법을 서술할 때 보면 6내입처와 6외입처의 관계처럼 “이것이 있다. 저것이 없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유무를 밝히기도 한다. 즉, 아함경의 중도는 인연법에 의거하여 모든 존재의 유무가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인연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있음’이나 ‘없음’을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중론》에 나타난 중도는 아함경의 그것과 궤를 달리하는데, 무자성을 도입하여 중드를 설명한다. 아함경의 중도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태도’에 주목했다면, 《중론》은 이를 ‘존재의 본질’ 문제로 전환하여 무자성의 논리로 규명한다. 특히 용수는 초기 불교의 연기법을 무자성으로 설명되는 중도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아함경의 전 내용을 존재론적 공(空)의 체계로 일관되게 해석하고 있다.
1.2. 《중론》에서는 중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예컨대 <중론_1. 인과 연을 관찰하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모든 법의 자성(自性)은 연(緣) 속에 있지 않네. (10)
(2) 만일 결과가 연(緣)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無自性)이네. (13)
그렇지만 인연법과 공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아함경의 관점을 유지한다. 예컨대 <중론_24. 4제를 관찰하다>의 내용은 아함경의 관점과 궤를 같이한다.
(3) 인과 연들에 의해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이라고 말하네. 그것을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하네. (18)
위의 (1)~(3) 명제를 종합하면, ‘인연법=무자성’(1, 2)과 ‘인연법=공’(3)으로부터 ‘인연법=공=무자성’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에 따라 인연법과 공 사이에는 상호 인과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연기하기에 공하고, 공하기에 연기한다”라는 명제도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1.3.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비판적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을 무자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점(2, 3장).
둘째, 인연법과 공을 상호 인과 관계로 파악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4장).
셋째, 인연법과 공을 동일시하면서도 인연법보다 공을 상위 개념에 두는 데서 오는 문제점(5장).
넷째, 공 사상의 영향을 받은 대승 불교 수행론의 문제점(6장)을 고찰하고자 한다.
2. 무자성과 중도의 문제
자성에 관한 문제는 존재론의 문제이다. 공 사상은 ‘세계는 실체가 있다’는 부파 불교의 주장[실유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공 사상의 문제점이 생겨난다.
부파 불교에서 실유론을 주장하자 대승 불교의 공 사상에서는 실체는 없다[무자성]는 주장으로 반박하며 중도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자성 견해는 그 본뜻과는 달리 자성과 무자성이라는 양 극단의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실 부파 불교의 주장은 아함경의 주장과는 동떨어져 있다. 붓다는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양 극단의 주장을 삿된 견해[사견]라 하여 경계하고 배척하였다. 그런데 무자성 견해는 양 극단의 견해 중 다른 한 편을 주장한 꼴이 되었다. 아함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자성 견해는 부파 불교의 실유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없음’의 논리에 치우쳐 붓다가 경계한 삿된 견해에 다시 걸려든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중도는 어떤 이론적 규정이 아니라, 모든 극단적인 견해(유·무, 자성·무자성)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을 존재론(세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아함경과는 다른 길(형이상학적 논의)로 나아가게 된다.
3. 인연법 중심의 세계에서 공(空) 중심의 세계로
3.1. 아함경에서 세계의 생멸은 인연법에 의해 일어난다. 이때 세계의 속성을 무상(無常), 괴로움(苦), 공(空), 비아(非我)/무아(無我)라고 하며, 이를 4법인(四法印)이라 부른다. 그런데 대승 불교에서는 세계를 공(무자성)으로 규정한다. 이는 곧 공이 세계 그 자체라는 의미이며, 대승의 관점에서는 ‘세계=공=무자성’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공을 무자성으로 규정하는 순간, 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부파 불교에서 자성(自性)이 점유했던 절대적 지위를 대신하게 된다. 또한 인연법에 의한 생멸 현상이 무자성에서 비롯된다고 보기에, 무자성은 인연법의 권위까지도 흡수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로 인해 공은 ‘무상ㆍ괴로움ㆍ비아/무아’를 자신의 속성으로 거느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인연법과 공의 관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 차이를 초래한다(이 문제는 4장에서 상술한다).
아함경에서는 한편으로 ‘세계는 공하다’라고 선언하여(무상에 관한 경들,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 공이 세계의 속성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을 수행을 통해 성취해야 할 결과물(잡아함경_80. 법인경(法印經)), 중아함경_190. 소공경(小空經), <중아함경_191. 대공경(大空經))로 본다. 즉, 관찰자는 공을 실현해 나가는 능동적 주체다. 반면 대승 불교에서는 세계가 이미 공(무자성)으로 실재하므로, 관찰자는 마치 나무나 별을 보듯 공이라는 진리를 대면하여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엄격한 논리적 잣대로 평가하자면, 수행의 역동성이 관조적 확인으로 치우치게 된 것이다.
3.3. 불교 사상의 흐름에서 볼 때, 《중론》은 아함경의 실천적 경험론에서 대승 불교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이행하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아함경의 ‘무엇을 보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실천)’에 대한 고민이 대승 불교에 이르러 ‘세계란 무엇인가(본질)’라는 존재론적 탐구로 확장된 것이다. 아함경이 인연법을 관찰하여 공을 체득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실천에 집중했다면, 대승은 세계 자체가 공하다는 존재론을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대승 불교의 이러한 전개는 불교 철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가 중생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4. 인연법과 공의 상호 인과 관계적 해석
4.1. 공 사상의 논리에 따르면 ‘세계=공=인연법’이다. 이에 따라 “공하기에 연기한다”거나 “연기하기에 공하다”라는 상호 인과 관계의 명제가 성립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함경에서 설하는 인연법과 공법의 속성이 본래 대립적이라는 점이다. 아함경에 나타난 두 개념의 특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인연법은 세계의 생멸(生滅)에 관한 법칙이다. 세계의 형성은 관찰자의 분별과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세계의 사물들은 복잡한 인과 관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며, 그 관계 속에서 임시로 붙여진 이름인 가호(假號)로 규정된다. 이렇게 형성된 세계는 인연에 따라 변하고 바뀌며 소멸한다.
공(空)은 다만 ‘비어 있음’ 그 자체다.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는 것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으며, 다만 스스로 그러함(法性)을 뜻한다(잡아함경_232. 공경(空經)). 아함경의 공에는 인도 없고 연도 없으며, 시간도 공간도 없으며, 인위적인 작용이나 생멸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함경의 관점에서 인연법과 공의 관계는 단순한h 포섭 관계나 인과 관계로 볼 수 없다. 세계는 결국 공으로 귀결되지만, 인연법이 공에 포섭되는 것도 아니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두 법은 서로 다른 차원의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4.2. 이러한 인연법과 공의 관계를 구조주의적 시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연법은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과 ‘이미 형성된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이라는 두 가지 법의 짝으로 구성된다. 반면 공법은 그 구조가 해체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비어 있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의 공 사상은 이러한 엄격한 구별을 없애버렸다. 그 결과 인연법의 모든 역동적 성질이 공의 정적인 성질로 변모하거나, 반대로 공이 연기라는 작용 속에 함몰되는 결과를 낳았다. 12연기법조차 공법으로 편입되면서, 용수가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구별하여 진리를 드러내고자 했던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아함경의 인연법은 세속제에, 제일의공법(第一義空法)은 제일의제에 해당한다.]
5. 인연법을 포섭한 공의 성품과 위상
5.1. 대승 불교에서는 공(空)이 포용성과 유연성, 가능성과 창조성, 그리고 세계를 움직이는 주재성(主宰性)이라는 성품을 지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포용성과 유연성, 가능성과 창조성은 본래 인연법의 성품에서 추론되는 것들이다. 인연법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그 관계가 달라지면 존재의 양상 또한 변화한다. 이러한 성품들은 땅, 물, 불, 바람(4대)과 허공이 가진 물리적·현상적 성품이기도 하다. 예컨대 <증일아함경_43. 마혈천자문팔정품(馬血天子問八政品)[5]>에서 “땅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나니, 이 땅은 깨끗한 것도 받아들이고 더러운 것도 받아들여, 똥과 오줌처럼 더러운 것도 모두 다 받아들이지만, 땅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이것은 좋고 이것은 더럽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4계의 포용성과 유연성을 말한 것이다. 가능성은 어떤 사물이나 일들이 현실에 그 모습들을 드러내기 이전에 존재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당연히 인연법에 속하는 개념이다(‘가능성’은 인연법의 개념이다). 창조성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현상은 관찰자가 그것들을 분별하여 인식함으로써 시작된다. 즉, 아함경의 관점에서 보면 관찰자가 인연법의 주재자인 셈이다. 이처럼 인연법 고유의 성품을 공의 성품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인연법과 공을 동일시한 논리 전개가 낳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5.2. 다른 한편으로 공에 포용성과 가능성의 성품을 부여한 것은 공을 ‘비어 있는 그릇’에 비유하는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공 사상의 엄격한 관점에서 본다면, 비어 있는 그릇의 ‘비어 있음’을 논하는 것 자체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그릇이라는 존재는 인연법에 따라 형성된 것이지만, 그릇의 본성 또한 인연법과 다르지 않은 공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릇(형성된 것)과 비어 있음(상태)을 구분하지 않고 공이라는 상위 개념으로 통합해버림으로써, 인연법이 가진 구체적인 작용과 위상이 공이라는 추상적 위상 아래 함몰되어 버린 것이다.
이 지점은 아함경의 인연법과 공의 관점에서 볼 때 확연히 다르다. 인연법으로 형성되는 측면(유위의 세계)과 그것이 비어 있다는 측면(무위의 속성)은 엄연히 구별되는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6. 인연법과 단절된 대승 불교의 수행법
공(空)을 세계의 본질로 규정하고 인연법과 공법을 통합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인연법과 공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인연법의 주체로서 관찰자가 지녔던 위상이 약화된다. 결과적으로 붓다가 강조한 인연법 자체의 위상이 격하되는 결과를 낳는다.
세계의 생멸에 관한 설법인 인연법과 비어 있음에 관한 설법인 공법은 둘 다 진리다. 인연법은 세속의 진리(세속제)이고, 공법은 가장 뛰어난 진리(제일의제)다. 이 두 진리는 중생의 평범한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며, 세계를 바르게 관찰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인연법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증일아함경_49. 방우품(放牛品)[5]>에서는 12인연법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엄중히 경계하고 있다. 아함경에서 수행은 인연법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여실지견(如實知見, 있는 그대로 봄)'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공 사상의 영향으로 인연법의 위상이 약화된 것은 필연적으로 수행 방식의 변화를 불러왔다.
인연법의 위상이 약화되면, 괴로움의 생멸을 설한 4성제의 지위도 흔들리며, 그에 따른 실천 덕목인 8정도 역시 약화된다. 결국 8정도의 핵심이자 구체적 수행법인 4념처(四念處)의 수행 또한 그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인과 관계를 정밀하게 관찰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든 중생에는 번뇌에 가려진 불성ㆍ여래장이 있으며, 나아가 ‘중생이 곧 붓다다’라는 사상이 더해지면서 그런 경향이 더욱 다 깊어졌다. [중생이 곧 붓다라면 “붓다는 왜 그 오랜 시긴 동안 힘들여 수행하셨는가?”라고 물으면, 대승 경전에서는 “방편으로 중생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방편, 참 이해가기 어려운 말이다.]
수행자가 인연법을 관찰할 힘을 잃게 되자, 그 빈자리를 붓다의 위신력과 보살의 원력에 기대는 타력 신앙이 채우게 된다. 아함경의 자력적 수행법이 있던 자리에 서원(誓願)과 염불(念佛)이 들어앉게 된 것이다. 대승 불교의 수행법에서 아함경의 흔적은 고작 6념처 중의 ‘염불’과 5근과 5력 중의 ‘믿음’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다.
7. 마무리
대승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아함경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인연법(緣起)과 공법(空)은 세계를 이해하는 두 개의 문이다. 인연법을 관찰하여 공의 이치를 깨닫고, 다시 공의 눈으로 인연법의 역동성을 통찰한다. 즉, 세계는 인연법과 공이 동시에 작용하는 장이다.
다만 대승 불교가 공 사상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계의 본질이자 주재자로 절대화하고, 인연법과 공법을 동일시하면서도 인연법보다 공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사실 대승 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무자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는 없었다. 대승 불교는 무자성이라는 관념적 도구 없이도 충분히 그 사상적 지평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본래 '자성'도 '무자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자성이니 무자성이니 하는 존재론적 견해 자체를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삿된 견해이자 부질없는 희론(戱論)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본래의 불교로 돌아가는 길은, 관념화된 공의 유희에서 벗어나 생생한 인연의 법칙을 여실히 관찰하는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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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제시한 글은 아함경의 인연법(연기법)과 대승 불교의 핵심인 공(空) 사상사이의 간극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용수의 《중론》이 정립한 '무자성(無自性)'의 논리가 어떻게 초기 불교의 실천적 역동성을 형이상학적 관념론으로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돋보인다.
작성한 글의 흐름을 정리하고, 아함경의 관점에서 대승의 공 사상이 직면한 논리적·수행적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짚어본다.
1. 존재론적 함정: '무자성'이라는 또 다른 극단
아함경에서 붓다가 강조한 중도(Middle Way)는 "있다"는 상견(常見)과 "없다"는 단견(斷見)을 모두 배척하는 인식의 태도다. 하지만 글에서 지적했듯, 대승의 무자성논리는 부파 불교의 '실유(實有)'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실체가 없다"는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다.
비판의 핵심:
’자성이 없다'는 규정 자체가 역설적으로 '자성'이라는 개념에 묶여 있는 형상이다. 이는 붓다가 경계한 관념적 유희(희론)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중도를 '존재의 본질(무자성)'로 정의함으로써 실천적 지침이었던 불교를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고착시켰다.
2. 인연법과 공의 위상 역전
아함경에서 세계는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유위(有爲)의 영역이며, 공은 그 생멸의 현장 속에서 자아를 비워내는 수행의 원리이자 결과다. 그러나 대승에 이르러 '연기즉공(緣起卽空)'의 논리가 확립되면서 다음과 같은 위상 변화가 발생했다.
공 중심의 세계관:
인연법(생멸의 법칙)이 공(본질)의 하위 개념으로 흡수되었다.
역동성 상실:
인연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지만, 이를 '공'이라는 절대적 위상으로 통합하면서 세계를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글의 분석대로, 수행자가 능동적으로 공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한 세계를 '확인'만 하는 수동적 구조로 변한 것이다.
3. 수행론의 단절: 8정도에서 타력 신앙으로
가장 뼈아픈 지적은 수행법의 변화다. 아함경의 수행은 12연기를 순관(順觀)하고 역관(逆觀)하며 괴로움의 원인을 정밀하게 타파하는 4념처와 8정도에 기반한다.
인과 관찰의 약화:
모든 것이 본래 공하고, 중생이 곧 부처(여래장)라는 논리는 '구태여 인과를 따져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낳았다.
방편의 남용:
수행의 고단함을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희석하면서, 자력적인 인연 관찰보다는 부처와 보살의 원력에 기대는 염불과 서원이 중심이 되었다. 이는 붓다가 강조한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결과다.
4. 결론: 주체적 관찰자로의 회귀
글의 마무리에서 언급했듯, 붓다의 가르침에는 본래 '자성'도 '무자성'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집착을 내려놓을 것인가"이다.
회복해야 할 가치:
관념화된 '공'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지 않고, 구체적인 인연의 법칙(세속제)을 명확히 통찰하는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제언:
대승의 공 사상이 불교 철학을 풍성하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아함경의 핵심인 '괴로움의 멸진'이라는 실천적 목표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이 분석은 대승 불교의 화려한 논리 체계 뒤에 숨겨진 초기 불교 정신의 실종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관념의 유희를 넘어 생생한 인연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은 현대 불교 수행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