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6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요한 6,1-15)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말씀의 초대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은 바오로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그가 사도들의 활동에 대하여 의회에서 인간적인 판단을 함부로 내리지 말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신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떠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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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엄청난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배고픔에 허덕일 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빵을 먹는 사람들이 아주 행복해합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빵이 남았습니다. 정말 가슴 뿌듯한 축제를 치른 것입니다.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립니다. 이렇게 배부르게 하시고 기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그 순간 광야에서 겪으셨던 악마의 유혹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하던, 발아래 보이는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해 주겠다던 악마의 속삭임을 다시 들으셨을 것입니다(마태 4,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해 산으로 홀로 기도하러 떠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무엇이 다른지요? 어떤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면,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지요. 칭찬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홀로 한적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당신의 원위치를 다시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큰일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하더라도, 기도하며 본래의 자리로 금방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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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기적의 음식은 어린이의 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아이의 저금통만 달랑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희망할 수 있는 여건에서는 아무라도 희망합니다. 하지만 어딜 봐도 ‘불가능한 상황’이면 쉽게 기대를 갖지 못합니다. 누가 봐도 끝난 처지에서는 신앙심이 아니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은총입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의 반전’입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역시 ‘부활 사건’입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오직 주님께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에 ‘축복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주님을 모시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매일의 기도’와 ‘매일의 선행’입니다. 자주 성체를 모시는 성사 생활입니다. 좌절은 언제라도 유혹입니다. 가능성이 사라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오늘 복음 말씀을 읽어 봐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숨어 있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 기사 안에서 우연히 모 방송국의 프로그램인데 초등학교 1,2,3학년 어린이들의 기발한 오답을 맞추는 시간에 있었던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을 직접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너무나도 재미있어 적어봅니다.
초등학교 3학년 시험문제입니다.
* 술에 취하여 거리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짓을 뜻하는 사자성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가”의 □에 맞는 글자를 적는 것이었습니다. 정답은 ‘고성방가’이지요. 출연진 아이들은 기발한 오답이라고 하니까 이러한 답을 말합니다.
‘고음불가, 이럴수가, 미친건가, 인간인가’
이 대답도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이러했습니다.
“아빠인가”
글로만 봐도 재미있는데, 실제로 직접 이 프로그램을 봤을 때는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문득 ‘아빠인가’라는 답변을 쓴 아이는 왜 이러한 답변을 썼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평소 아빠가 그렇게 고성방가를 자주 했기 때문에 그러한 답을 적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 좋은 모습을 기억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부정적인 모습과 비판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남에 대한 칭찬보다 비판이 더 많은 곳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웬만한 모범을 보이기 전에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긴 예수님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토록 바른 모범과 직접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셨음에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런 행적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놀라운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깜짝 놀랄만한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결심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지요. 즉, 그들은 자신이 변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 일하지 않고 평생 배불리 먹을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본뜻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예수님을 감히 비판하는 커다란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도 받은 비판입니다. 따라서 내 자신의 비판에 대해서 너무 아파할 필요 없으며, 그에 대해 서로 치고받고 싸울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누가 뭐라 할지라도 최대한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예수님을 닮아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실패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실패하는 사람에게 늘 부족한 것은 바로 성실이다.(디즈레일리)
기적의 재료
-김현 신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요한 복음서에서만 아주 살짝 드러납니다. 그것도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습니다만”(공동번역), 이 정도로 그칩니다. 오천 명 훨씬 넘는 군중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 만큼 남은 그 기적의 재료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웬 아이의 내어 놓음’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그러한 기적의 재료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마음만 굳히시면 그대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먼저 찾으셨습니다. 빵이 몇 개나 있는지,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우리가 사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 그분의 배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믿음을 고백하는 이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늘도 찾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언제 어디서나 성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예수님 앞에서 결코 부족함이 없는 기적의 재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걸 찾으실 때 수줍어할 이유도, 부끄러워 얼굴 붉힐 필요도 없습니다. 가난한 그대로, 부족한 그대로 우리의 믿음을 기적의 재료로 내어 드리면 됩니다. 이제 기적은 예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나누어 주고 있는지요
- 김복순 수녀-
오늘날 우리 삶에는 많은 기적이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지역사회에서, 국가의 사회경제 안에서, 세계 각지에서 기적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월급도 못 받고 몇 달째 일만 하는 맞벌이 부부는 하늘에서 돈다발이 뚝 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은 자녀들과 손자 손녀와 오순도순 사는 것을 희망합니다. 대물림 되는 가난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가정에서는 복권이라도 당첨되어 큰 부자가 되는 기적을 바랍니다. 우리네 서민들은 적은 돈으로도 장바구니를 가득 담을 수 있고 가족에게 풍성한 밥상을 준비해 줄 수 있기를 희망하며 사회경제가 하루빨리 좋아지기를 기다립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은 나눔의 삶이며 베풂의 삶, 곧 사랑의 삶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골고루 베풀고 나눌 때마다 2배, 4배 …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풍요로운 기적인 것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것을 나는 오늘 어떤 사람들과 나눌 것인지요. 어떤 나눔을 실천할 것인지요. 우리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요.
개입도 사랑, 불개입도 사랑
-김찬선신부-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어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겠지요. 하느님께서 꼭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더더군다나 사랑이신 하느님이 사랑의 계획을 이루심에 있어서는 불가능이 없으시고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오병이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회의적인 안드레아를 부끄럽게 하시려는 듯 5천명이 넘는 사람도 먹이실 계획을 세우시고 문제없이 먹이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데 이런 뜻도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것은 아무리 인간이 애를 써도 안 된다? 참으로 아리송합니다.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될 것도 같은데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니 말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과 인간이 범하는 그 수많은 죄악들이 그러면 하느님의 뜻에 맞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인간이 범하는 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계획과 실행에 하느님께서는 개입하시는가? 개입하신다면 언제부터 어디까지 개입하시는가?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과 상관없이 굴러간다는 말이니 무신론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계획과 실행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인간의 계획과 실행에 개입하신다면 사사건건, 처음서부터 끝까지 잔소리꾼처럼 일일이 다 개입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그에 따르는 실행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이 생깁니다. 전혀 개입치 않으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개입하시는 것도 아니라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계획과 실행에 어떻게 개입하시는 것일까요?
우선 우리 인간이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간의 죄악을 참으시는 것도 사랑이듯이 잘못된 계획과 실행에 개입하시는 것도 사랑이십니다.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도 사랑 때문이고 개입하시는 것도 사랑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것으로 돌아 가 옳게 끝이 난다는 뜻이지요. 잘못 되고 그릇된 계획과 실행, 심지어 나쁜 계획과 실행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정의로운 결론이 난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 하느님은 권선징악(勸善懲惡)하시는 분이십니다.
권선징악의 하느님이시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우리 부모도 자녀가 잘못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개입하듯 하느님도 사랑하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의 계획과 일에 개입하시고 잔소리 많은 부모도 자녀의 자유를 존중하여 다 개입치 않으시듯 과민하지 않으시는 더 큰 사랑의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실행을 존중하여 다 개입치 않으십니다.
다만 나의 악행에 대해서는 바로 징벌치 않으시는 하느님을 자비로운 분이시라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악행에 대해서는 어찌 가만히 두고 계시냐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타박하는 우리의 변덕이 있을 뿐입니다. 개입도 불개입도 하느님께는 사랑의 이유뿐이신데 개입도 불개입도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이유 때문에 원키도 하고 원치 않기도 한 것입니다.
좋은 이웃
- 전진 신부-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지라니 어린이합창단’?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합창단은 세계 10대 불평등 국가 중 하나인 케냐의 고르고초?(‘쓰레기장’?이라는 뜻) 단도라와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인 지휘자 김재창 씨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아이들 모습이 굳어 있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이 가슴 아팠다고 합니다. 그는 하루에 한 끼로 연명하는 아이들에게 단순히 밥 한 끼의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뜻있는 것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잃어버린 웃음과 희망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2006년 8월 처음 단원을 선발해 합창단을 만들었고 그해 12월에 첫 공연을 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희망의 전도사로서 좋은 몫을 하고 있습니다. 지라니?(jirani)는 스와힐리어로 ‘좋은 이웃’?이란 뜻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들은 웃음과 희망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웃음과 희망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은 단지 없던 빵이 생겨서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열린 사랑의 마음이 기적인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식량이 없어 굶주려 죽습니까?? 함께 나눌 수 없는 우리의 집착과 욕심이 서로를 죽이고 상처와 아픔을 줍니다.
언젠가 월요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한가한 날이었지요. 특별한 약속도 없었고 그래서 하루 종일 사제관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심지어 식사도 귀찮아서 건너뛰면서까지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저녁때가 되니까 배가 너무나 고픈 것입니다.
성당 근처 분식집에 갔습니다. 혼자서 그 분식집에 앉아 먹기에는 너무나 궁상맞은 것 같아서 쫄면, 만두, 김밥을 포장해서 사제관으로 가져왔습니다. 보통 3명이 먹을 분량입니다. 하지만 두 끼를 굶은 상태인지라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 음식은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기에 다 먹고 싶은 욕심도 생겼습니다.
이제 사온 것을 펼쳐들고는 무엇을 먼저 먹을까 고민했습니다. 이 중에서 제일 먹고 싶은 것은 만두였지만, 제일 나중에 먹기로 하고 다른 것부터 먹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맨 마지막에 먹어야 맛있게 식사를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만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는데, 배가 너무나 부른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가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두 하나를 입에 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가장 기대를 하고 먹은 만두였지만, 배가 불러서인지 너무 맛이 없었거든요.
하긴 예전에 어떤 책에서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있으면 맛있는 것을 먼저 먹으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야 최고로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다 먹으려는 욕심 때문에 가장 맛있는 것을 맛있게 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작은 것을 통해서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에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더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싶으셨지요. 그래서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합리적인 사고를 즉, 가격을 이야기하며 불가능하다고 답변합니다. 그런데 안드레아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이가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밀지요. 사람들의 수에 비해서 턱 없이 부족한 빵과 물고기를 보고서 저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또 없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적은 양을 받으시고는 어떻게 하십니까? 적다고 불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긴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많고 적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굳은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욕심입니까? 믿음입니까?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겠다고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뉴먼 추기경).
나의 욕심
-오민환-
어제까지 읽었던 요한 복음 3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진리를 전해주는 내용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요한 복음 6장은 갈릴래아에서 민중들과 함께했던 예수님의 행적 중에서 정점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공관 복음서에도 등장하지만 요한 복음서가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난처한 상황을 지배하고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빵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모으라고 지시하시면서, 기적 사건의 처음과 끝을 완전히 지배하고 계십니다. 또 사람들의 반응 역시 독특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신명 18,15 참조)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임금님으로 만들어 그들의 물질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뜻에 응할 리가 없으십니다. 산으로 몸을 피하십니다. 그분의 나라는 세상 권력을 쥔 자들의 나라가 아닙니다(요한 18,36 이하). 하느님 나라는 나의 물질적 욕구를 채우는 나라도 분명 아닙니다. 사람들은 늘 세상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기에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마저도 그렇게 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김찬선신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천 명을 먹이는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안드레아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큰 소용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소용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신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큰 소용이 됩니다.
그러므로 미소한 것을 보고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생각지 않고 인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빵을 주시고자만 하신다면 이보다 더 작은 것으로도 더 많이 배불리실 수 있으십니다. 사실, 이 빵의 기적에서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이 어린이뿐이었겠습니까? 아무렇게도 어린이보다는 어른들이 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어린이보다 어른이 양 면에서도 더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어린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를 두 마리를 소용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빵을 떼기 전에 먼저 감사 기도를 올리십니다. 불려주실 더 많은 빵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신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주신 이 작은 빵과 물고기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어제 밤, 근심을 하는 형제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4월 25일까지 6월에 할 자선 음악회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지금 사정으로 봐서는 음악회를 못하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유명한 가수와 사회자를 데려 와서 자선 음악회를 하는데 아무리 자선 음악회이어도 이들을 데려 오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협찬사가 있으면 이 음악회를 하기로 하였는데 요즘 협찬사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회사들마다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북한 돕기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회사들이 다 정부 눈치를 본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전화를 끊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원하시는 것이라면 될 것이고,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것이라면 다른 식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뭐 대충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현재 아무 것 없음에 대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 없고 그러니 미리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무엇이든 당신이 예비하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봉헌
-전삼용신부-
저는 요즘, 제가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봉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참으로 자신을 봉헌한 삶임을 느낍니다. 무슨 말이냐면,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참으로 봉헌한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내 자신을 봉헌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주님이라면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 행동을 내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며 살아갑니다.
참으로 내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다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살게 하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 개인의 능력으로는 누구도 만족시켜 줄 수 없음을 압니다. 어떤 사람도 한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사람일지라도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면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사람이 됩니다.
마더 데레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한 작은 수녀님이었습니다. 당신의 삶을 봉헌하니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만족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 분이 결혼했다면 한 가족을 만족시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혼해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 안에는 이 봉헌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께서 기적을 하시려고 작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필립보를 시험하기 위해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질문하십니다. 필립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아직까지 주님께 청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힘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는 인간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역시 세상적인 계산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뒤집습니다. 바로 ‘봉헌의 힘’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시지 않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인간의 참여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을 참여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영광도 함께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이 당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을 거부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는 곧 당신의 영광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영광을 시몬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의 빵과 물고기를 아버지께 봉헌하심으로써 기적을 얻어내십니다.
옛날 동화에 손만 대면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닿으면 보석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봉헌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남자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지만 인간의 참여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아이의 봉헌을 받으시고 또한 그것을 분배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심으로써 그들도 당신의 기적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지만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의 살과 피, 즉 성체, 성혈입니다. 그것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혈은 곧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하느님이 손을 대심으로써 보석보다 귀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는 바로 신자들이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작은 봉헌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도 우리에게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작은 봉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봉헌으로도 그렇게 큰 은총을 얻는다면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주실까요?
그러나 저의 고민은 자신을 봉헌했다고 하면서도 내 맘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 자신을 주님께 조금이라도 더 봉헌하고자 합니다.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시라고 저를 내어놓습니다. 그렇게 누구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이 주님의 도구로 많은 이들을 만족할 사람으로 쓰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써 달라고 하기 이전에 자신을 정말 주님께 온전히 봉헌해 드렸는지부터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짧은 묵상>>
예수님은 한 때 자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그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마태 13,58) 기적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이 은총의 선물은 그것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항상 치유의 기적을 하시기 전에 그들의 믿음을 점검하십니다.
4명의 손에 들려온 중풍 병자도 그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해 주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마르 2,5) 물론 베짜타 연못에서는 38년간 움직이지 못했던 병자를 그저 일어서 가라고만 하십니다. 그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 걸어갑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5,8)
그러나 오늘 5천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는 누구도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지 못합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까지도 세상적인 계산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의 믿음도 요구하지 않고 이 엄청난 기적을 행하십니다. 여기엔 신비로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곧바로 ‘성체와 성혈’에 관한 예수님의 계시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 기적이,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내려오게 한 것처럼, ‘성체성사’와 관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두주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그리스도 자신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믿음도 이것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믿음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완전한 기적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세상에 생명의 양식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었던 기적은 마리아의 믿음을 통해서였습니다. 마리아는 흠 없는 믿음으로 흠 없는 기적, 즉 생명의 양식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는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마리아의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생명의 양식으로 내려오게 하심을 넘어서서 바로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성체성사에도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십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께서 교회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없이는 어떤 누구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고, 따라서 성체성사도 거행되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교회의 일원으로써 당신의 완전한 믿음으로 성자를 잉태하여 사람이 되게 하신 그 신비를 영원히 유지되게 해 주시는 교회의 보이지 않는 믿음이 되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모님이 없이는 성자께서 순결한 육체를 취하시어 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듯이, 그 분의 믿음 없이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변화의 기적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완전한 단 한 분이신 그 분의 신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믿음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성체를 통하여 한 몸이 되는 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로 미루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이 때에는 ‘내가 좀 더 크면…….’이라는 말을 하지요. 청소년이 되면 ‘내가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하며, 성인이 되어서는 ‘결혼만 한다면…….’이라 말합니다. 이제 결혼한 후에는 ‘집을 산 후에는…….’이라고, 또 집을 사고서는 ‘안정이 된 후에는…….’이라 말합니다. 은퇴하고 찬바람이 불고 인생의 마지막에 와서는 이렇게 말하면서 후회하지요.
‘그때 말할 걸, 그때 먹을 걸, 그때 즐거울 걸…….’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인데, 우리들은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지 못하지요. 그래서 ‘지금’ 이라는 시간을 즐기는 대신 알 수 없는 미래로 미루기만 하다가 결국은 과거의 시간을 후회하고 연연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의 이런 시가 생각납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개어 있지만 내일은 먹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말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까지 당신 곁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거든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 늦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행해졌던 그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만약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봉헌한 아이가 없었다면? 또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그러한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기적은 계속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는 나의 봉헌과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서 함께 한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큰 기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하지 못하고 뒤로 미루는 우리들의 이상한 습관입니다. 그 이상한 습관들이 하느님의 큰 기적이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를 후회하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할 것들을 뒤로 미루지 마세요.
마음속 계산기
- 김우정 신부-
기도를 드리다 보면 이따금 좋은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도 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거나 은총의 놀라움에 눈을 뜰 때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확신과 보람을 느낍니다. 반대로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분을 드러내는 기도의 목적에서 벗어나, 이런 체험을 하는 것에만 매달려 무언가 자극이 될 만한 것을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의 깊이였지만,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빵을 먹이신 예수님의 모습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총을 보기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짐으로 인해 생기는 이익에 더 관심을 두거나 무언가 감성적인 것에만 더 집중해서 본질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이런 신앙은 본질이 아니라 선택 사항이 됩니다. 신앙이 선택 사항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을 못 박았던 사람들처럼 미련 없이 주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이신 하느님께 당신을 일치시켰던 주님께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계산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은 아직 미숙하고 서투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계산기를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찾아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때에 따라 선택하는 사항이나 옵션이 아니라 진실한 가치를 지닌 본질로 탈바꿈해 나갈 것입니다.
줌으로써 행복한 사람!
-오상선신부-
언젠가 손님이 와서 여의도에 있는 한 식당을 간 적이 있었다. 주인은 사극에 자주 나오는 탈랜트인데 참으로 겸손해 보였다.
종업원들도 하나같이 성실하고 열심해 보였다. 이 식당의 특색은 <달라는 대로 무조건 퍼준다는 것>이었다. 어떤 식당에 들어가면 <뭐 좀 더 달라>고 하면 싫은 듯하여 더 청하기 어려운데 여긴 청하면 즉시 갖다 줄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도 퍼주고 또 퍼주었다.
주인인 그 탈랜트도 한번씩 돌면서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식은 어떠신지요?> 하며 겸손하게 인사를 하며 감사를 표하였다.
손님들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가 언제 날지 모를 정도였다. 가격이 그렇게 만만한 집은 아니었는데도 비싸게 먹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집인 것같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주인은 열심한 개신교 신자라고 한다. 신자로서 주일날은 장사를 안하고 싶은데 고객들 때문에 어쩔수 없이 문을 연단다. 그러나 그날 자신은 나오지 않고 종업원들만 나와서 일하는데 그날의 전 수익은 종업원들의 몫이라고 한다. 자신은 주일날 돈을 벌 수가 없다는 것이고 고객들을 위해서 종업원들이 수고하고 그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주인의 이러한 자세는 종업원들이 그 바쁘고 힘든 일 가운데서도 기쁘고 성실하게 일하도록 만들어주고 고객들에게도 참으로 풍성하게 대접해 준다는 느낌이 들게 해줌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베푸시는데 주님의 자세가 진정한 봉사자의 자세, 섬기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된다.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아무리 수가 많다 하더라도 먹여서 보내야겠다는 생각, 바로 이러한 자세가 달라는 대로 주어도 남게 되는 기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겠는가?
어떤 자매가 <사제는 아낌없이 줌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데 신부님은 어떠신지요?>라 물었다. 달라는 사람에게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 주고 또 내어 주는 자세는 주님의 자세요 그 식당 주인의 자세요 사제의 자세요 모든 크리스천의 자세가 되어야 하리라.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참 기적이 무엇인지를 우리도 체험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해 본다.
나는 진정 줌으로써 행복한 사람인가?
빵의 나눔은 주님을 알아보는 표
-김찬선신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에 모두 나오는 얘기입니다. 수난과 부활 사화를 빼놓고 네 복음에 모두 나오는 얘기는 요한의 증언, 성전 정화, 그리고 이 기적 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얘기는 공관 복음과 조금 다릅니다. 먼저 공관복음은 이 기적의 시작(Initiative)이 제자들의 군중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됩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적이 예수님의 염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공관 복음은 제자를 특별히 지칭치 않는데 요한복음은 필립보를 지칭하여 당신의 염려를 표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필립보는 토마와 함께 다른 제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주님의 영적이고 신비적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실증을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는 제자입니다. 토마는 “주님,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함으로써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유명한 답을 끌어냈고 필립보는 너희는 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봤다는 주님의 말씀에 “주님,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함으로써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는 답을 들은 제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을 놔두고 왜 이런 필립보에게 군중을 먹여야 한다는 부담스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 필립보가 토마와 마찬가지로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믿는 것이 어렵고 가능성보다는 불가능을 더 먼저 생각하는 제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회의적인 시각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을 즉시 그리고 굳게 믿었지만 토마와 필립보는 늘 인간적인 기준에서 불신하고 초월적인 가능성을 보지 못하기에 신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앎과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地上性을 초월하시는 부활하신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고자만 하시면 안 될 일이 없고 인간이 아무리 막아도 하느님 뜻대로 될 것임을 믿으면 현세적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거기에서도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보고 하느님 뜻에 맡기고 따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인간이 아무리 어떻게 하려 해도 안 됨을 알고 역시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따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회의적인 시각으로 자주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필립보를 특별히 깨우치시고 보게 하시고자 일부러 필리보에게 질문을 하신 것이고,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가능성과 하느님을 보지 못할 때마다 이 엄청난 빵의 기적을 떠올리라고 빵의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뒤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빵을 떼시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당신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이 바로 주님을 알아보는 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해결 불가능한 상황을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하느님을 만나고 알아 뵙는 때입니다.
<독서> :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행하자. - 경규봉 신부-
그들이 사도들을 죽여 버리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율법교사 가믈리엘이란 바리사이파 사람이 사도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에 의원들 앞에서 말한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을 사람이 없앨 수 없으며,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은 그냥 두어도 언젠가 망하여 없어질 것이므로 따라서 사도들을 버려두자고 말한다. 만일 사도들의 행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면 망할 것이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하느님과 대적하는 잘못을 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사도들을 버려두자고 권고한다.
이 말씀을 들은 의원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또한 백성을 두려워하기도 했기에 사도들을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하며 사도들을 풀어주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모욕을 당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며 의회를 물러나와, 날마다 복음을 전하였다.
가믈리엘은 기원전후 무렵 가장 유명한 율법학자 힐렐의 손자이며, 사도 바울로의 율법교사였다(사도 22,28). 그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당시 백성으로부터 존경받던 율법학자였다.
‘분리된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속된 것과 어울리지 않고 분리되어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로서 율법의 정확한 해석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 23,2-3)라고 말씀하셨다.
이들은 역사가 하느님에 의하여 통제되며 하느님의 목적에 의하여 다스려진다고 믿었다. 또한 부활과 내세를 믿었으며, 사람은 이승에서의 삶에 따라 내세에서 그 대가를 치른다고 믿었다.
가믈리엘이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학자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잘 실천하는 충실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음을 뜻한다. 때문에 그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고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불의하게 처형당하셨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사도들이 행한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표징을 읽을 수도 있었다. 그 또한 부활과 내세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의회의 의원들 앞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는 의원들의 손에서 사도들을 구해내었다.
비록 그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도들에 대한 박해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어긋난다는 점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구해내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는 여러 종교와 종파가 있다. 그리고 종교간,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이 대단히 심하여 살인과 살상, 모함 등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여러 종교와 종파로 갈린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악을 허락하시듯이 이를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를 단죄함으로써 사랑을 거스르는 우를 범하지 말자.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을 거스르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생각하자. 그리하여,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든지, 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며, 판단하고 행하는 신앙인이 되자........................◆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 도구로 삼으심
- 권동성 신부-
요한복음 사가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를 전하면서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군중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대한 저마다의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아 왔고, 예수님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군중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군중을 피해 혼자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활동에 대한 군중의 오해를 원하지 않으셨기에 군중을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리스도교 신앙도 그러한 현세적인 이익이나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내어 주고, 보다 낮은 자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다시금 우리는 예수님을 왜 찾고, 그분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빵을 많게 한 기적은 예수님 편에서 베풀어진 선물입니다.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잘 아셨다고 전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마태오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그들 중의 병자를 고쳐주셨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셨고, 이제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청하기도 전에 미리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측은히 여기고 보살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은 이처럼 풍성합니다. 모두가 함께 나누고도 남음이 있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더 가지고자 하는 우리의 욕심’ 으로 인해 부족함이 발생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할수록 우리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지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지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신의 삶에 불만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더 가지고자 하면 누군가는 덜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폭력과 착취가 발생합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이웃은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제 나만의 불행이 아니라 이웃의 불행까지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는 빵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실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년의 ‘내어놓음’이었습니다. 소년의 헌신,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이 베품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할 때,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을 때, 그것이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해도 하느님께서는 큰 도구로 삼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김훈일 신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할 때 얼마나 커다란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적당히 오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도록 온다는 것입니다. 가진 게 적었지만 예수님이 함께하시니 적게 가진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목표와 스스로 설정해 놓은 나 자신에 대한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을 이루기에 많이 부족하고 많이 모자랍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나의 삶 가운데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거둔 그런 풍성함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문제는 오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두렵고 어려움이 보이지만 예수님을 찾지 않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고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내 삶의 한 사건이 되려면 지금 주어진 처지를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오천 명을 위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드리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풍성한 결실을 맺는 신앙을 살아갑시다.
-이찬홍 신부-
며칠 전 좀 터프한 형제님께 ‘부부싸움 하다가 밥상을 엎어 본적이 있습니까?’ 라고 여쭤보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화끈한(?) 성격으로는 적어도 한 두 번은 엎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은 저의 편견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저는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밥상은 엎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매일 먹는 음식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고귀한 마음이 있습니다. 매일 섭취하는 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함부로 다르지 않고, 또한 버리지 않습니다.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고, 무시하면 언젠가는 밥을 굶는 날이 올 것이다. 때문에 늘 음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는 생각이 우리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니는 것!’ ‘비록, 내 손으로 수확한 음식이요, 내 노동력의 대가로 얻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할 기본적인 자세요, 매 삶을 통해 기적을 체험하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풉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빵아 많아지거라!” “물고기야! 숫자가 늘어나거라” 라는 말로써 기적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먼저,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하십니다.
하찮은 빵과 물고기이지만, 이런 음식을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하느님께 내어 드림으로써, 바로 기적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매일 받아 모시는 성체를 통해서도 체험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봉헌합니다. 이 빵과 포도주가 미사의 거룩한 성변화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고, 우리는 거룩하게 변화된 그것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할 때, 단순하게 빵과 포도주만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가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당신께 드리니 구원에 양식이... 음료가 되게 하소서.” 라는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노력, 결실, 정성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는 미사 때마다 우리의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봉헌과 함께, “당신과 함께 함으로 저희가 이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이렇게 성당에 오게 되었습니다.” 라는 감사 기도가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고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곧,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거룩한 축성으로 당신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배고픔을 없애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미사를 통해 받아 모시는 성체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단순한 빵과 포도주의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받아 모시는 예수님에 몸과 피에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삶을 통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이루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놀라운 기적이요, 우리가 체험해야할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문득, 방위병 훈련소에서 식사 전에 외쳤던 구호가 생각납니다. “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멘
-홍성만 신부-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치면서 큰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멀리 푸루른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풀이 무성한 산등성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신 기적을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구름처럼 밀려옵니다. 때는 뉘엿뉘엿 해가 지는 저녁이며 외딴곳이라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은 일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원한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으셨겠지만 그래도 무슨 말이 나올까 궁금하셨나 봅니다.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빵을 사다가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입니다. 더군다나 이 외딴곳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봐도 '불가능하다'고 밖에 나올 수 없는 대답을 이미 알고 계실 예수님께서 왜 물어보셨을까? 성경은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 곧이어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말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작정하시고 계셨던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며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바로 그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예수님 손에서 축성된 빵과 물고기는 오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하찮게 여겨지던 아주 작은 봉헌이 예수님의 손을 거쳐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 그렇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나의 하찮아 보이는 기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자그마한 희생과 봉사.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거치면서 나와 이웃에 대한 커다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 빵의 기적은 성체성사의 예표(豫表)입니다.
주님께 할애하는 나의 기도 시간, 자그마한 희생ㆍ봉사는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듯, 이웃을 위한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주님을 기억하면서 봉헌하는 나의 작은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와 순종은 그 어느 때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어 나와 이웃의 평화와 위로의 양식이 됩니다. 이 평화와 위로의 양식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원천이 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될 작고 큰 봉헌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말씀지기 부활특집 2006 4/5월호-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요한 6,7-10)
우리는 신중하게 계산하는데 익숙합니다. '헌 차를 고쳐 써야 하나, 아니면 새 차를 사야 하나? 또다른 책임을 맡아 할 시간이 될까? 남편이 비정규직 직장을 가지게 되면 아이들 교육이 힘들어지겠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넓게 생각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저 사람들(오천명이나 되는)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을 만족시킬 만한 답은 없습니다.
필립보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못박습니다. 안드레아 역시 회의적이었지만, 그가 구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받아들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자, 별안간 모든 이가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남기까지 하다니요!
오늘의 제1독서에는,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최근에 일어났던 일들을 교훈삼아 현명한 판단을 이끌어내면서 또한 전능하신 분의 개입을 용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사도들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시다면 아무것도 그분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교회가 추모하는 성인들 역시 인간적 계산에 머물기보다 거룩한 보화에 이끌린 분들입니다.
성 베드로 샤넬은 오세아니아의 한 외단 섬에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생활은 고되고, 그의 설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추장의 아들이 세례성사를 받겠다고 하자 베드로는 몽둥이로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는 분명 인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였겠지요.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이 채 못 되어 섬 주민 전체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성 루도비코 몽포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에 주력하였는데, 유행가를 성가로 고쳐 부르거나 연극을 사용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간 정통적이지 않은 방법 때문에 교회 당국의 반대를 야기했습니다.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의 루도비코 성인은 다른 지방으로 이동되었습니다. 루도비코가 유행가를 부르는 배의 승객들에게 유행가 대신 묵주의 기도를 바치자고 초대하며 무릎을 꿇자, 모두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모두 기도에 참여하고 성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 성인들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보잘것없는 재능을 하느님께 가지고 가서 그분께서 써 줍시사 청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은총을 포함해서 계산합니까?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 거란 생각으로 실망한 적은 언제입니까? 어떤 소박한 빵과 물고기를 하느님의 손에 놓아드릴 수 있습니까? 영감에 넘치는 상상력이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길을 보여 주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주님, 저는 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익숙합니다. 저의 한계를 인정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의 풍요로운 은총과 저를 인도하시는 특별한 길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저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의 특권 -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사도 5,34-42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 았다고 기뻐하였다.)
복 음 :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돈이 많은 사람이거나 잘 생긴 사람, 혹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건강한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여겨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내 목숨까지도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가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또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지요. 타인에 의한 행복은 언제든지 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도들이지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도, 또 감옥에 갇히는 것도 특권으로 여기면서 행복해 했던 사도들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유다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대책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을 걷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위협을 하고 감옥에 가두어도 사도들의 증언은 그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이 증언하고 다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것을 보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당황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의 제자라는 자들은 감옥에 가두어도 나오고 나와서는 또 떠들어대니 어떻게 막을 길이 없겠는가??
이 때 원로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제안을 합니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5,36-39)
인생의 경험자답게 좀 시간을 두고 보자는 가말리엘의 제안대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도들을 매질하고 위협해서 풀어주었습니다. 경험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서서히 없어지니 한 번 기다려 보자는 처방을 내린 것이지요. 그런데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증언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세상으로 불길처럼 뜨겁게 퍼져나갔지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온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는 주님?이심을 증언하고 있고, 또 그 증언에 힘입어서 예수님을 모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증언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었음을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여실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도 어쩌지 못한 이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고 매질을 당하는 등 끊임없는 협박과 위협 속에서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5,41)
사도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온갖 위협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 그대로 미친놈이 아니고서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위협받는 것을 어떻게 특권으로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피하고 싶은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특권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박해이고 위협이고 어려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매 맞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구세주로 확신했기 때문에 그 모든 박해가 특권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특권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에 더욱 힘이 나서 ?예수는 주님?이라고 외칠 수가 있었지요. 이렇게 사도들은 예수님께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매를 맞아도, 재산을 빼앗겨도, 감옥에 갇혀서 죽을 위험에 처했어도 예수님 생각으로 행복했지요.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역사요, 그리스도교 역사의 시발점이자 흐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인간의 모든 욕구를 뛰어넘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가장 큰 한계인 생로병사의 한계마저도 완전히 뛰어넘은 자유인의 경지가 되었지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진리임을 참으로 확신했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는 성경 말씀대로 자유인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지요. 힘쓰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확신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꺾을 수가 없지요. 주님 때문에 받는 어려움을 오히려 특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신앙의 경지에 오른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박해시대 때 목을 치던 휘광이들이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확신에 찼던 우리의 순교 선조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뺏겨도 그들은 자유로웠지요. 감옥에서조차 자유로웠다는 것은 이 세상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그랬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랬던 바로 그 신앙을 우리는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들과 선조들이 지녔던 그 신앙을 지금 우리는 나의 신앙으로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을 알아서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십니까? 그리고 주님 때문에 겪는 시련을 특권으로 기쁘게 생각하는지요? 우리 시대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지만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할 뿐입니다. 선조들은 재산도 지식도 자유도 없었고 신앙 때문에 불행이란 불행은 다 맛보았지만 자유로웠지요. 천주님께 감사하며 기쁨에 넘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의 요소를 다 갖추고도 가장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지요.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없는 것에 집착하고 몰두하며 평화와 자유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큰 불행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른 채 이 세상만을 바라보며 행복을 찾는 거기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을 하는 만큼 투신을 해야 합니다. 투신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절대 깊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소중한 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그 관계는 깨지고 말지요. 그러나 나의 귀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면 그 사랑은 점점 깊어 갑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느님을 깊이 알고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은 내놓지 않고 바라기만 한다면 어불성설이지요.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끊임없는 결단입니다. 투신하고 결단하는 가운데 자유로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은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두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집니다. 배신과 순교, 즉 배교자와 순교자로 갈라지지요. 일찍이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배교자가 행복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자유와 평화를 누렸던 순교자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깊이 원하고 사도들이 만났던 그 하느님을 원한다면 투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 하느님을 깊이 알았던 제자들이지요. 목숨도, 미래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도들의 하느님을 우리의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길이요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이러한 참된 행복은 역시 하느님께 투신하는 삶 속에서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병이어
-김유철 신부-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어디를 갈 때 일정량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마을은 주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도중에는 인가도 없고 사람의 발길도 뜸한 곳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먼 길을 갈 때에는 특히나 먹을 것을 잘 챙겨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많은 군중들이 움직입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충분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나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 것도 부족한데 어떻게 나누어주겠는가?’, ‘혼자만 먹다니 인색한 사람’ 등등 ‘나’를 먼저 생각하다보니 함께 있어도 불편한 사이가 됩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식량)을 예수님께 내놓은 것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봉헌을 기초로 삼아 기적을 행하십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나 하나만을 우선시 하던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것을 조금씩이라도 내놓았고, 이를 감사히 받습니다. 나누어주고 나누어 받는 가운데 모두가 배불리 먹게 됩니다. 나만을 챙길 때는 부족했던 음식이 나누어 먹자 남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벽이 허물어질 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에서부터 따듯한 미소, 고운 마음 등등… 나눌 수 있는 우리는 부자입니다.
부활 제2주간 금요일
- 차공명 신부 -
불교의 경전중에 하나인 유마경에는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나온다. 불교에서 세상 한 가운데 높이 솟아 있다는 수미산이라는 큰 산도 겨자씨 하나 속에 들어갈 수도 있고 지구상의 모든 바닷물이 한개의 털구멍 속에 다 들어갈 수 있다는 설법이 그것이다. 거시와 미시가 서로 만나는 불교 특유의 과장된 설법이다. 근데 이 설법에 대해서 과거에 의문을 품고 당시 선종의 큰 스님에게 질문을 한 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당 나라 사람 이발이라는 자다. 이 이발은 매우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별명이 이만권 이었다고 한다. 이 이발이 여산의 업종사에 있는 지상 스님이라는 큰 스님에게 가서 앞에 나온 설법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다. 스님! 수미가 겨자 씨앗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설법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옵니까? 그러자 스님이 반문하였다. 사람들이 그대를 이 만권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대는 어찌 그 많은 책을 그 작은 머리속에 넣었는고? 이 말을 듣고 이발은 마음이 확 트이며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종종 예비신자들 중에 예수님의 여러가지 기적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평생 동정녀이신 성모마리아의 성령으로 인한 예수님 잉태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들에 대해서 도져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질문을 하는 토마스 사도의 후예들의 천진한 질문에 간혹 당황스럽기도 하다. 태어나자 마자 신앙속에 자라서 그런지 성경의 기적이야기는 그냥 자연스럽게 믿어왔던 나에게 도져히 받아들일수 없는 비상식의 이야기라고 항변하는 그들에게 조금은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그들에게 뭔가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하면 왠지 설득력이 없을것 같아 예전에 선불교에 관한 책을 읽다 메모해 놓은게 앞선 이야기한 내용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적이야기를 단순히 상식을 깨는 놀라운 이야기나 예수님의 능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싶지만 실상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놀라운 힘에 주목해야지 그 이야기 자체에 매몰되어서는 진정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기 싶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상황은 많은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하시는 상황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돈이야기를 하고 자신들의 한계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넓은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아주 작은재료를 가지고 일단 나눔을 시작하신다. 비롯 너무나 빈약한 출발이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도전이었지만 뜨거운 사랑의 열정이 있었기에 그 사랑은 모든 현실을 관통하여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이야기이다. 우리들은 너무나 싶게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도전보다는 체념이나 지금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우리 보통사람들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놀라운 일들이 많이 생겨난다. 특히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이 세상 어떤 일이 두려우리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
-황순찬-
◆K는 소아정신과 환자로 장기간 입원한 경험이 있고, 현재도 인근 소아정신과병원에서 외래치료를 받고 있다. 처음 K를 보았을 때 솔직한 내 심정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였다.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 어린아이임에도 내재된 불안과 공포로 극도의 폭력적 연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단어들은 잔혹한 폭력·살인·시체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연히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해 수업시간에도 교실이 아닌 곳에서 보냈고, 또래 아이들을 보면 작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 일쑤였다. 간신히 부모를 설득하여 약물치료를 재개하고, 복지관의 도움으로 미술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하면서 K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K가 가진 미술적 재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애착장애를 가지고 있던 K는 주위의 관심과 사랑으로 마음도 많이 편안해졌다. 내가 가면 두 손으로 나의 볼을 감싸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럴 때 K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K가 사는 동네 근방으로 가정방문을 가게 되면 나는 가급적 K네 집에 들르려고 한다. 이제는 내가 K를 상담하는 것보다 K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 복음은 웬 아이가 가진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와 같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K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
-강영구신부-
당신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산술적(算術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산술(算術)과 합리(合理)의 그릇에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는 계산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요 무모함입니다.
얼마 전 어느 도시에서 어린 아이가 영양실조로 굶어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 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양과잉과 비대증으로 살을 빼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이 그 아이를 굶주리게 했습니다.
우리는 양(量)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이 가져야 나눌 수 있고 적게 가지면 나눌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탐욕(貪慾)에 사로잡힌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어도 나눌 줄 모릅니다. 쌓아놓고 움켜쥐고 있는 것은 끝내 썩어서 버리게 됩니다. 탐욕(貪慾)에 빠진 사람이 가진 많은 것들은 쓰레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웃과 형제들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고 작은 것일지라도 함께 나누려고 하는 너그러움은 기적(奇跡)의 바탕이 됩니다. 양(量)으로 치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보잘것없지만 자비로운 사람의 눈에는 산더미보다 더 많게 보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富)는 분뇨(糞尿)와 같아서 쌓아놓으면 악취를 풍기지만 뿌리면 땅을 비옥(肥沃)하게 만든다.”
당신도 무엇이든지 나누고 베푸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하느님의 손길인 기적을 보게 됩니다.(一明)
칼을 하나 가슴에 품고
-양승국신부-
오늘도 주님께서는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당신 사랑의 기적, 빵의 기적을 계속하십니다. 미사가 우리에게 의미나 교훈은 그 수효를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희생, 사랑, 나눔, 영원한 생명, 희망, 축제...등등.
그런데 미사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한 형제의 삶을 통해 신앙 생활 안에서 용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늘 신앙 안에서, 미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50년 이상 사용해왔던 제 이름 석자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높은 담장 안에서의 하루하루 생활은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더욱 저를 괴롭혔던 것은 친구중의 친구, 목숨마저 바꿔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명예퇴직, 방황, 창업모색, 오랜 친구와의 의기투합, 동업 시작, 자금부족으로 인한 은행대출, 보증, 친구의 잠적, 신용불량자, 구속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 가정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고 제 몸은 완전히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배신감, 치욕,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소화불량, 고혈압을 동반한 화병으로 숱한 나날을 극도의 고통 속에 보냈습니다. 아무리 <용서하자! 잊어버리자!>고 숱하게 다짐해도 가슴깊이 맺힌 응어리는 풀리지가 않았습니다.
그곳을 나온 후에도 뼛속까지 맺힌 한이 풀리지 않아 미친놈처럼 마구 전국산천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한때 너무도 원통해서 칼을 하나 가슴에 품고 그 친구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떠돌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저를 다시 서게 한 것은 미사였습니다. 비틀거리며 거리를 헤매 다니던 어느 날, 제 앞을 가로막아선 소박한 건물은 한 아담한 성당이었습니다. 마침 성찬의 전례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늘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낯설게 느껴지던 제 본명이며, 느티나무와 잘 어울리던 옛 시골성당의 전경이 떠올랐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 신부님이 외우시던 미사 경문은 제 뼛속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십자가 위에서도, 제자들의 그 숱한 배신에도 불구하고 용서에 용서를 거듭하신 예수님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제야 저는 예수님은 용서의 주님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미사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해 바쳐진 은총의 제사였습니다."
용서의 비결은 성체성사에 있습니다.
화해의 비결은 성체성사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비결은 성체성사입니다.
매일의 미사야말로 기적입니다.
용서야말로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성체성사의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외치고 계십니다. "이제 그만 용서하거라! 이제 그만 모든 것 내려놓거라! 이제 그만 떨쳐버려라! 이제 내 안에서 편히 쉬거라!" 하고 말입니다."
한 어린아이의 전 재산 -박상대 신부-
성서는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요한 20,30)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지상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마련한 새로운 차원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우리는 지난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어제 목요일까지 요한복음 3장에 보도된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위한 조건으로 물과 영으로 새로 나야함을 배웠다. 오늘 금요일부터 부활 제3주간 토요일까지는 미사전례의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이 봉독된다.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을 통하여 지상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썩어 없어질 빵이 필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다른 빵이 필요하다는 것(성체성사)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은 앞서간 5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짜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치유하자, 유다인들의 예수의 권한에 시비를 걸어 논쟁을 벌이는 5장 전체의 내용이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보도되고 있는 반면, 6장의 내용은 갈릴래아 호수와 바로 근처인 가파르나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5장과 6장 사이에 병자들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행적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상당히 긴 대목의 요한복음 6장은 구조상 대략 6단락으로 구분된다. ①단락: 예수께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다.(1-15절) ②단락: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16-21절), ③단락: 군중들이 호수 동편에서 가파르나움으로 이동한다.(22-24절) ④단락: 예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대화형식으로 내리신다.(25-59절) ⑤단락: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제자들의 불신을 토로하자 예수께서는 배신자를 예고하신다.(60-66절) ⑥단락: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께서는 12사도 중에 배반자가 있음을 예고하신다.(67-71절) 오늘의 복음은 6장의 ①단락에 속하는 대목으로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빵의 기적(표징)을 보여주고 있다.(1-15절)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 많은 군중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 다닌 것 같다. 조그만 산등성이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리를 잡자, 그 주위로 무려 5,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앉았다. 유다인들의 가장 큰 축제인 과월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언급(4절)은 조상들이 광야생활 중에 먹었던 만나를 암시한다. 다들 지치고 굶주린 모습이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들이다. 예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5절) 물론 불가능함을 알고 하신 말씀이다. 돈도 없고, 그만한 양의 빵을 살 곳도, 파는 곳도 없다. 예수께서 다시 한번 제자들과 군중들을 두루 살펴보신다.
그러자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허리춤을 움켜쥔다. 무엇이 잡히는 모양이다. 사실 사람들은 길게 내려 입은 겉옷 속에 전대(纏帶: 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차기 위해 무명이나 베 따위의 헝겊으로 만든, 중간을 막고 양끝을 튼 긴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 속에 며칠 먹을 빵이 들은 게다. 그들은 통상 집을 나설 때 누룩 없이 납작하게 만든 빵(무교병)을 몇 개씩 전대에 넣어 다녔다. 그냥 먹어도 되고, 쨈을 발라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다니다 보니 빵을 다 먹어버린 사람도 있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하나 선뜻 자기 것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안드레아가 용케도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지목한다. 아이가 자기 생명과도 같은 양식을 잘못 간수한 것인가? 아이의 작은 체구 때문에 허리춤이 불룩해서 안드레아에게 들킨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아이 마음이 자기의 것을 몽땅 식사의 음식으로 내어놓은 것인가?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여하튼 어린아이의 전 재산과도 같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건네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복음서는 그저 '감사의 기도'라고 하지만 분명 이 기도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기도였을 게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렀던 눈으로 사람들을 살펴보신다.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은 군중들 가운데 빵도 마른 물고기도 수북히 쌓여있다. 모두가 배불리 먹는다. 여기 저기서 이야기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따금 한바탕 웃음소리도 들린다. 그야말로 즐거운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전체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오늘의 사건이 분명히 기적임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빵의 기적을 현장에서 분명히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14절)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달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빛에서 이런 기적을 보인 당신을 정치적인 '메시아 왕'으로 삼으려하는 낌새를 알아보셨다.(15절)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한 표징의 참 뜻을 깨닫기에는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욕심이 앞서고 신(神)의 표징이 곡해되는 곳에 더 이상의 가르침은 없다. 예수께서는 일단 그들을 피해 혼자서 산으로 가셨다. 사람들이 시간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길 바라시는 것이다. 문제는 일용할 양식보다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 (요한 6, 1-15)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이런 질문에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고 대답하였고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절망적이고, 비관적이고, 무책임하고, 부정적이다. 필립보는 아예 처음부터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안드레아는 작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 소용도 없다는 절망적인 대답이다. 어떤 일 앞에서 아예 처음부터 절망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조건 안 된다, 할 수 없다, 그것으로는 턱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한다. 길을 물어도 모르겠는데요, 무엇을 부탁해도 안 되는데요, 할 수 없는데요, 어떤 일을 맡겨도 시키는 것만 하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요즈음 사람들의 모습에서 너무나 많이 보게 된다. 무책임, 부정적인 사고, 절망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는가?
예수님은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시는 것을 보시고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었고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서 예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그 해답을 갖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한다면 굳이 기도를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기도한다는 것은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미 해답을 알고 계신 하느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 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하느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봉헌한 회원들에게 물으신다. " 저기 지나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네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너와 함께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너에게 오는 수 많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그동안 우리들의 삶이 제자들처럼 무책임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지 못하는 실망스런 대답만 하고 있지 않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제자들의 실망스런 대답과는 정 반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고 우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신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다음 그냥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음 다음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얼마나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인가? 이러한 배려를 통해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가 활기가 넘치고 금방 풍요로워졌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재료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냥 버려져서는 안 된다. 짜투리 시간들, 남은 음식물들, 안 입는 옷들, 등은 모두 다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내가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은 배고픈 이들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헐벗은 이들에게, 길에 내몰려진 이들에게, 상처받은 이들에게, 목마른 이들에게, 외로운 이들에게 큰 선물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 건강, 재능, 재물, 맡겨진 일, 은총 등을 낭비한 일은 없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다, 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시지 않았는가? 이 작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작은 것이 어디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불평하고 실망하기 보다는 그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작은 것을 나누고자 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오늘 우리에게 물으신다. 예수님은 "너희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라고 하셨다. "너희가"라고 하셨다면 제자들이 알아서 사 오라고 하시는 것이겠지만 "우리가"라는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너희들만이 사 오려고 하려면 어렵겠지만 예수님과 함께 즉 우리가 함께 사 오려고 한다면 못할 것이 없다. 무엇이든지 가능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 오려고 하는데 안 될 것이 무엇이며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우리의 힘으로만 하려고 한다면 안 될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사 올 수 있다.
"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디에서 그 많은 빵을 사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 올 수 있는 곳을 알아야 사 올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러 갈 곳은 시장도 아니요, 빵 가게도 아닌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면 우리는 얼마든지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충분한 빵을 사 올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 오려고 하니까 빈곤함을 느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 보라. 얼마나 많은 빵이 있는 가를 보게 될 것이다. 오천 명이 아니라 오십 만명을 먹고도 남을 충분한 빵이 창고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을 묵상한다는 것은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빵을 예수님한테 사러 가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 묵상을 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 묵상을 깊이 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 해 보라.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빵을 주어야 하는지를 알 것이다. 우리는 먼저 복음을 충분히 묵상함으로서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빵을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한다. 제자들이 자기들과는 다르게 살아가시는 예수님의 삶의 방법을 새롭게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묵상하기 전이나 묵상을 한 후에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삶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눈을 떠야 한다. 그것이 오늘 내가 무엇 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하느님의 사람은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부정이 있는 곳에 정의를,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다. 작은 것을 요긴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어느 곳에 가든지 또 어떤 상황이든지 우선 남을 위한 배려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하느님의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금방 금방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그냥 넋 놓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것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오병이어의 기적과 군중들의 착각 †
어제복음(요한 3장)에 이어 오늘복음은 4-5장을 뛰어넘고, 6장(티베리아에서 오병이어)으로 막바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선 4-5장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주님은 세례 요한이 죽은 이후 공적인 활동을 잠시 멈추고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주님은 이 시기에 당신이 누구이며,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추수할 영혼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을 직접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시켰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선교 현장에 나가서 해야 할 여러 가지 지침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장차 복음 전교자로서 겪게 될 여러 가지 환난과 박해에 대해서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현장으로 나가서 하느님 나라를 전파했으며, 마귀를 쫓고, 각종 질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교활동에서 큰 열매를 거두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그들의 선교활동을 주님께 보고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각 지방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교활동을 마친 후에 다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르코와 루가는 첫 번째 전교활동에 참여했던 12제자를 "사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아포스톨로스)는 "보내심을 받은 자"란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선교사", 또는 "전도자"와 비슷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견된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하게 주님께 보고했습니다. 제자들이 활동을 보고한 곳은 아마도 가파르나움이었을 것입니다.(마르 6,30. 루가 9,10 참조)
1. 한적한 곳,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심
이 부분 부터가 오늘복음의 묵상 성구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보고하는 것을 모두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이 성공적으로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마르 6,31)"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식사할 틈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쉬게 하시려고 잠시 한적한 곳(광야)으로 가셨습니다. 마르코는 이 곳을 "한적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마태오는 "빈 들", 루가는 "베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곳이 제자들이 활동을 보고한 곳을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베싸이다 광야, 즉 "한적한 곳"을 찾으신 것은 일차적으로 과로한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행이 건너편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과 제자들이 탄 배보다 훨씬 더 빨리 그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곳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고 마치 목자 없는 양같이 보여서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휴식을 미루고 주님은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말씀을 전했으며,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흩어진 양 떼"였으며, 주님은 그들을 인도하실 "선한 목자"였습니다. 주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배만 채우고 있을 때에, 식사할 틈도 없이 그들을 돌보시는 등 봉사활동에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몰려오는 군중들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산등성이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잡고 앉으셨습니다. 절기상으로는 유다인들의 명절인 과월절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II. 오병이어 기적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의 가르침은 베싸이다(벳새다) 광야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날이 저물어 가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는 큰 군중들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주님에게 가서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서 먹을 것을 구하게 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요청은 매우 합리적인 제안이었습니다. 그 곳은 인적이 없는 빈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가르침을 중단하고 그들을 마을로 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금식(굶음)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요청은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합리적인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4,16).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필립보에게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고 물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때에 주님은 군중을 어떻게 먹일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필립보의 속을 떠보시려고(시험하기 위해서) 그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필립보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5천명이나 되는 군중에게 조금씩만 먹여도 200 데나리온 이상의 돈이 필요할 것이라고 즉각 대답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00데나리온은 노동자가 약 8개월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만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200일 임금은 약 10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모인 사람이 남자만 5천명이었다면,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최소한 1만 명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000만원 어치 빵을 산다고 해도 한 사람 당 1,000원 정도의 빵밖에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빵을 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사람들을 각 마을로 보내서 스스로 음식을 구하게 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도록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2.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가 가서 알아보아라(마르 6,38)
오늘 묵상하는 요한복음에는 내용이 없으나, 마르코복음에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가 가서 알아보아라!"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큰 군중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은 일을 하실 때에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아도 그것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우리들은 누구에게 물건을 내 놓을 때 크고 화려한 것을 내 놓고 자랑하여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아주 보잘 것없고 하찮은 것에서도 주님은 우리 욕구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가 많은데, 그렇게 불평만 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해결해야 될 문제는 없습니까?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불평을 그치고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립시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주님께서 그것을 가지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듣고 나가서 그들이 가진 음식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 온 음식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소금에 절여 굽거나 말린 것)" 밖에 없었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이 사실을 보고한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때에 모였던 군중들은 급히 도보로 왔기 때문에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조금 준비해 온 사람들도 오랫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가지고 온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한 아이가 먹으려고 가지고 왔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어린아이로 부터 말입니다. 아마 어른들은 약삭 빠르기 때문에 숨겼을 것입니다. 그렇게보는 이유는 주님은 만나를 내려주실 때 딱 맞게 내려주셧듯이, 빵도 딱 맞게 나누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하는 내용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어린이와 어른에 대한 상징적인 차이입니다.
여하튼 안드레아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를 가지고 주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 절망적인 목소리로 "여기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보고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외치던 소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어디에서 이 백성이 다 먹을 만큼 고기를 얻어주란 말씀입니까?....양을 얼마나 잡고 소를 얼마나 잡으면 되겠습니까? 바다의 고기를 다 모아오면 되겠습니까?"(민수 11,13.22) 그러나 그때에 하느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어 수많은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여 주셨습니다. 주님 역시 베싸이다 광야에서 이러한 놀라운 일을 행하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서 당신이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나타내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임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생명의 떡이며, 당신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3. 축성하시고 음식을 나누어 주시다.
안드레아가 어린아이에게로 부터 가져온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은 가져오라고 하시고 떠 "사람들을 모두 앉혀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풀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식사할 만한 장소가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사람들을 풀 위에 "50명씩", 또는 "100명씩" 떼를 지어 앉혔습니다. 이러한 대형은 식사 분배와 야영하기에는 적합한 대형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에 이집트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진을 치고 야영하던 일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하느님은 구약에서 하늘로 부터 만나를 비처럼 내리게 하여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메추라기를 진 주변에 몰려오게 하여 고기를 마음껏 먹게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 역시 베싸이다 광야에서 무리들에게 이러한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먼저 빵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먹일 음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신 것은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빵을 가지고 축성하신 후에 그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광야에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저녁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되 풍족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풍족하게 채워주십니다.
4. 5000명(성인남자 기준)이 풍족히 먹고 12광주리가 남다.
주님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후에 남은 음식을 버리지 못하도록 거두게 하셨으므로 제자들은 그 지시를 따라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거두었는데, 남은 음식을 거두어 보니 모두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광주리"는 "가는 가지로 엮어서 만든 것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휴대용 광주리"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 날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남자만 5,000명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인 무리들은 50명, 또는 100명 단위로 떼를 지어 앉았기 때문에 몇 명이었는지를 세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주변에 있던 마을인 가파르나움이나 베싸이다의 인구가 모두 2-3,000명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남자만 5,000명이라는 숫자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린아이의 도시락으로 싸온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이고 12광주리나 남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께서 창조주시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음식을 받아 사람들에게 공급했던 제자들은 그 많은 빵과 물고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손에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5,000명을 먹이고도 남는 음식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신적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영적인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의 육체는 음식을 나누어주면서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만은 주님의 신성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도 여전히 주님의 신성을 온전하게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고 말했습니다(요한 6,14). 아마도 사람들은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신 주님의 능력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아 베싸이다 광야로 왔던 사람들은 하느님 아들이 가르치는 말씀, 즉 생명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주님께서 직접 주시는 육신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주님을 "하느님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예언자!"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장차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나와 같은 한 에언자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예언자가 오면 그의 말을 들으라! 고 명했습니다. 마침내 모세가 예언했던 그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무리를 먹였듯이 베싸이다 광야에서 백성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본 사람들은 마침내 모세가 예언했던 예언자가 왔다고 열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강제로라도 주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주님은 점점 분위기가 과열되고 사태가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홀로 남아서 급히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급히 집으로 돌려보내신 것은 기적을 본 무리들이 흥분하여 주님을 강제로 왕으로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일을 그대로 방임하게 되면, 주님은 로마에 항거하는 정치적인 지도자로 오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십자가와는 상관없이 로마에 항거하는 반역자로 몰려서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무력으로 로마와 맞서 싸우기 위해 오신 정치적인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홀로 남아서 급히 사람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신 후에 기도하기 위해서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홀로 하느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고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한 경우를 3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3번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때였습니다. 1) 안식일에 행한 기적으로 인해 사람들이 흥분하여 주님을 찾을 때(마르 1,35-39). 2) 5병 2어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흥분하였을 때(마르 6,45-). 3) 최후의 만찬 후 게쎄마네의 동산에서(마르 14,26-42).
이 세 가지 사건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밤에 일어났으며, 군중이 열광을 하여 위기를 초래했고, 때로는 심각한 영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때였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그의 복음서 첫 부분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의 복음서 처음에 주님께서 시험받으신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대신 주님께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세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마태오와 루가복음에 나오는 세 가지 시험과 비슷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주님에게 1)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나, 2) 빵을 위한(경제적) 메시아, 또는 3) 십자가를 피하고(사탄에게 절하고) 불법과 타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님의 활동에 있어서 매우 위급한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때에 영적인 위기감을 느끼시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광야)을 찾아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한적한 곳을 찾으셔서 하느님과 깊은 교제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악마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셨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위기를 느낄 때 어떻게 하십니까? 조용히 한적한 곳을 찾아 피정을 가십니까? 아니면 술판을 벌려서 잊어버리려 하십니까?...........◆
-두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