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虛한 날엔 국수가 먹고 싶다
/ 오태진
한 그릇 3000원 하는 국숫상에 여섯 반찬이 올랐다.
얼갈이배추김치와 파김치엔 진한 젓갈향, 짭짤한 손맛이 배 있다.
깍두기는 사근사근하고 고들빼기김치는 쌉쌀하다. 요즘엔 사람들이 쓴 것을 싫어해서 고들빼기를 연한
소금물에 담가 쓴맛을 빼버린다.
그래서 이 맛도 저 맛도 아닌데 모처럼 쌉싸래한 고들빼기김치가 입맛을 깨운다.
얼핏 봐선 뭔지 모를 고기도 한 접시 삶아 나왔다. 누르지 않은 돼지 머리 고기다.
차진 맛은 덜해도 포근포근 씹히는 게 꽤 고소하다. 마늘 썰어 넣고 깔끔하게 무친 새우젓도 곁들였다.
11월 첫 주말 전북 임실 행운집에서 받은 상이다. 읍에서도 18㎞ 떨어진 강진면 강진시장까지 간 것은 이 집
국수를 먹기 위해서지만 반찬을 보고는 막걸리 한잔 안 할 수 없다.
멸치 국수는 호박채를 곱게 얹어 크고 깊은 양푼에 가득 담았다.
면이 얼마나 푸진지 국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국숫발은 흔히 ‘중면’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굵어 보인다.
굵은 면발은 오래 삶느라 불기 쉬운데 부드러우면서도 뜻밖에 탄력 있다.
전분을 넣은 것 같진 않고. 이 집에서 쓰는 국수 포장을 살펴봤다.
‘고급 밀가루에 강력분을 조금 섞어 쫄깃하다’고 쓰여 있다. 면발에 소금 간도 한 듯 짭조름하다.
행운집은 28년 동안 백양국수라는 읍내 가내공장에서 면을 받아다 쓴다.
노부부가 45년 내내 살림집 이층에 널어 말리는 자연 건조 국수다. 덜거덕거리는 기계에서 뽑아낸 면을 하얀
천 말리듯 대나무에 죽 걸어놓는 풍경은 이제 두어 곳밖에 안 남았다. 그래서인지 행운집 국수에선 햇살 내음,
바람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비빔국수도 맛보려고 시켰다.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돼 조금만 달라고 해야 하는 걸 깜빡 잊었더니 역시
양푼에 넘치도록 나왔다. 달지도 맵지도 않아 수더분한 맛이다.
배가 불러 젓가락을 놓고 주인 아주머니에게 “남겨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자리에 와 앉는다.
“멀리서 일부러 온 분 같아서 조미료도 안 넣고 들깨 듬뿍 넣어 비볐는데….”
아깝다는 듯 비빔국수 그릇을 당겨 가 호로록 호로록 먹는다.
“국수만 파는 집에서 웬 머리 고기까지 내느냐”고 물었다.
예순다섯 살 아주머니는 술 찾는 장꾼이 많아 원래 공짜 안주로 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국수 손님들이 우리는 왜 안 주느냐고 해 국수 찬이 돼버렸다고 한다.
채소 반찬들도 아주머니가 밭 일궈 키운 것이라 한다. 밥때 지나서도 간간이 오는 손님 맞다가도 가게 앞에
주저앉아 채소 다듬느라 쉴 틈이 없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아주머니가 “맛있는 토종 상추”라며 한 무더기를 신문지에 싸 건넨다.
국수는 잘난 음식이 아니다. 입맛을 요란하게 들쑤시지도 않는다. 가난하고 소박하다.
그래서 오히려 국수 그릇에 담긴 인정은 얕지 않다. 반찬 한 가지라도 더 올리고, 다듬던 푸성귀라도 들려
보내고 싶어하는 행운집 아주머니 마음처럼.
임실에서 멀지 않은 완주 봉동읍 봉동시장에도 푸짐한 국숫집이 있다. 50년 넘은 3대 할머니국수다.
1960년 권부녀 할머니가 8남매를 먹여 살리려고 장터에서 국수를 말아 팔기 시작했다.
지금은 며느리와 손자며느리가 꾸린다. 차림은 멸치 국수 딱 하나다.
소짜 3000원, 중짜 3500원, 대짜 4000원이다. 소짜가 중국집 짬뽕 그릇만 하고, 중짜는 그보다 한 배 반,
대짜는 두 배쯤 된다.
이 집 30년 단골은 “그나마 예전보다 작아진 것”이라며 “대짜가 세숫대야만 했다”고 말한다.
맛도 양 못지않다. 말갛게 비치면서도 진하고 구수한 멸치 국물에 알맞게 삶은 면발이 잘 어우러졌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아 속이 편하고 살짝 떨군 들기름 향이 독특하다.
다녀본 국숫집 중에 멸치 국물이 잡냄새 없이 가장 깔끔하고 맛 깊었던 곳은 전주 이연국수다.
좋은 멸치를 우려내고 주인이 담근 국간장을 쓰는 덕분일 것이다.
국숫발도 반년을 숙성시키는 주문 제품을 받아 온다고 한다.
전남 담양엔 천변 숲길 관방제림 따라 국수거리가 늘어서 있다. 50년 전 죽세공품 시장에서 국수를 팔던
진우네집을 시작으로 국숫집이 열 곳 넘게 이어진다.
가게 앞 평상들에 모르는 사람끼리 둘러앉아 국수를 먹자면 금세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된다.
국수는 위안의 음식이자 소통의 음식, 교감의 음식이다. 저마다 지닌 무의식 속 자아(自我)와 연결돼 있다.
국수 국물 멸치 냄새는 어린 시절 고향 냄새다. 국수를 먹는 것은 고향에 가는 것, 옛 고향집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누리는 것이다.
하루하루 메마른 일상을 살다 사람들은 불현듯 끈끈한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마음이 허할 때, 삶이 허기질 때면 문득문득 국수를 생각한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 국수가 먹고 싶다”(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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