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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지각생 도마의 신앙고백 요20:24-31
미국의 제48대 부통령을 역임한 마이크 펜스 전 미국 부통령 부부가 극동방송과 아일랜드리조트(회장 권모세 장로)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25일 조선호텔에서‘국제정세 속 굳건한 한미동맹’이란 주제로 특별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해 달라진 삶을 고백했다.펜스는“전 세계적으로 불확실성과 위험이 더 커져가고 있다”며 “유럽 아시아 태평양 모든 지역이 긴장 가운데 있는 상황 가운데 한국은 더욱 특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발사)을 발사하는 것을 보며 더욱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느낀다”면서 북한의 이런 행동을 더욱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이어“지난 70년간 한미 양국이 안보를 위해 지금까지 잘 지켜왔듯이 우리의 다음세대들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한미 양국의 동맹 관계를 잘 유지하고 강화해 나아가아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러시아에 대해서도 펜스는“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리더십을 지지하며 러시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전 세계 동맹국들은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더욱 힘을 합해야 하고 자유를 위해 함께 하나 돼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야 말로 지금까지 본 가장 최악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펜스는 또“전쟁을 겪은 한국의 성공을 보면 나는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들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 자유가 있기에 우리는 꿈과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번영과 안녕 속에 살 수 있다”며 지금의 대한민국 모습이 바로 그 증명이다. 이제 아시아 태평양의 번영과 자유를 한국이 이끌게 될 것”이라며“윤석렬 당선인이 앞으로 한국과 미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다리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부인 카렌 펜스는 짧은 간증으로 복음을 전했다.“어린 소녀였을 때부터 깊은 신앙을 가졌다며 우리가 만나기 전날 밤 마이크는 무릎 꿇고 기도했던 마이크 펜스를 모시겠다”며 남편 마이크 펜스를 소개했다. 무대에 오른 펜스는“이 세상에서 멋진 여성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나오니 너무 좋다”며“아내와 36년을 함께 했다. 아내는 기독교 학교 교사였다. 이어진 간증에서 펜스는“저는 훌륭한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10대 때는 내가 믿고 있던 신앙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며 대학생이 된 뒤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갈 때“개신교 신앙을 가진 친구 존 게이블이‘베스퍼스’라는 기독교 친교 모임에 참석하면서 학생들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성경을 읽어주면서 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는 친구들의 간증을 통해 믿음의 진실성을 갖게 됐다”고 고백했다.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게이블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친구에게‘어디서 그런 멋진 십자가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친구가‘너는 그것을 목에 걸기 전에 먼저 마음속에 걸어야 해’라고 말했다”며“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먼저 마음을 영접해야 한다는 조언에 큰 충격을 받아 10분간 멍하니 서있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날부터 펜스는 매일 성경을 깊이 탐독하며 친구들과 하나님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1978년 ‘익투스 크리스천 찬양 축제’에서 하나님을 영접했다. 저는 그날 언덕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 하나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 얻게 하심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저는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삶이 변했다고 고백한 펜스는“주님을 기쁘게 하고 신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의 기도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줄 믿는다”며 여러분들도 지금 처한 상황이 답답하더라도 성경을 읽으며 믿음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의 제48대 부통령을 역임한 마이크 펜스의 간증처럼 인생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지만 이처럼 광범위한 책에서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수 있을까? 요한복음 1장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 예수님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구원의 하나님이시오, 이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들인다면 내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행복이라고 강조하는 세상에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참된 신앙을 위해 절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의 권력 앞에서 패배하고 넘어져도 좌절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발견했기 때문에 도마처럼 예수님을 나의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서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처럼 믿음이란 내 생각 내 추측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잘못된 나의 생각으로 인해 어떤 사람의 경우는 오랜 시간 동안 믿음이 무엇이지도 몰랐기에 지난 긴 세월동안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이고 영생이고 천국 간다고 믿었기에 눈에 보이는 삶의 축복으로 믿음을 판단했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잘 풀리고 사업 잘 되고 돈 많이 벌고 좋은 대학 들어가고 별 문제 없이 평안해 보여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것이라 믿었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솔직히 우리들 다 그렇게 믿었던 게 아닌가요? 병 들거나 사고 나거나 삶이 망하거나 가난하면 믿음이 부족해서 복을 못받아 망했다고 믿었던 지난 시간의 생각들이 얼마나 믿음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눈에 보여지는 그런 모습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이란 내 생각과 내 추측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어디든지 따라가며 전진하는 것! 어린 양되신 주 예수님께서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며 가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 인생이 얼마나 성공했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주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가! 내 마음과 생애가 하늘 본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내가 오늘 주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에 따라 우리 인생에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쌓았는가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은 해 뜨면 사라지는 안개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가고 있는가! 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과 삶을 보면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라도 자만하면 망할 수 있고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자녀들이 안 풀릴 수 있고 병들어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믿음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히10:36-38) 36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한 것이라. 37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께서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이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신앙은 마지막까지 말씀과 약속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끝까지 남은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본 성전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착착 진행되고 있었는데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니 그는 스스로 성전에 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저녁 식사 후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찢긴 빵은 머지않아 찢기실 주님의 몸을 상징했고, 나누어 마신 포도주는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며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눈을 가렸던 비늘이 제자들의 눈도 가리고 있었습니다. 3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 했지만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장밋빛 미래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정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의 종착역이 저만치 보이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 속에 머물고 있으니 정말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히 외로우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로우셨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티끌에 불과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히브리 시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시103:13-14) 13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도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혼돈과 아픔과 절망까지도 자기 안으로 끌어안으십니다. 하지만 쓸쓸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이게 현실입니다. 고난의 태풍 앞에서 시몬의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릴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말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베드로가 한 그말에 조금의 거짓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정말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이성적인 판단이나 결심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그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다는 것은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몇 시간 후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외침은 공허한 외침이 되었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미 그의 약함과 배신까지 품어 안으셨습니다. 비가 내린 후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아파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사람이라야 지금 자기에게 절망한 이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으깨진 포도처럼 생의 밑바닥을 맛본 사람이라야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히2:18). 부모는 자녀들에게 열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열 손가락은 한 손에 붙어 있으나 그 길이와 굵기가 각기 다르듯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역시 사명과 사역으로 볼 때는 다 같으나 개성으로 볼 때는 각각이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앞에서도 자신만만하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고 하였지만 세 번이나 부인했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때로는 열정이 앞서서 실수도 하였지만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는 제자도 있었으며 도마처럼 모를 때는 모른다고 하면서 솔직하여 주님의 위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게 한 제자도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3년간 사역하실 때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부활신앙의 지각생 도마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열두 제자중 하나인 도마
3년이라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그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는데 다소 엉뚱한 데가 있었는가 하면, 부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제자라고 생각될 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베다니 나사로 집으로 가시기 전 사역의 의미를 말씀하실 때에 다른 제자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는데, 도마는 나서서, 그때에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자기 동료 제자들에게 이르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한 것이(요11:16) 과연 도마의 엉뚱하고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도마가 앞장 서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과 함께 가자고 제자들을 설득하는 장면으로 봐야 합니다. 그는 의심만하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면 천국을 예비하기 위해 승천하셔서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한 후에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도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주여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요14:5)라고 반문하던 제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다른 제자들도 주님이 가시는 길을 몰랐을지라도 잠자코 있었지만 도마만은 확실히 알고자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냐고 되물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가장 위대한 말씀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답변해 주셨던 것을 보면 도마야 말로 조금이라도 이해가 안가면 잠자코 있는 그런 제자가 아니라 확실히 알고자 하는 그런 제자가 바로 열 두 제자 중에 디두모라 하는 도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디두모라는 이름은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도마가 실제로 쌍둥이 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제자들이 ‘디두모라고도 도마’를 불렀던 것을 볼 때 쌍둥이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도마 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인물로 알고 있습니까? 의심 많은 제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135장에는 ‘허물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도마에 대한 이런 평가는 도마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도마만이 아니었습니다.
(1) 처음으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 로마병정들이나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체포하러 올 것에 대해 불안해서 한 데 모여 있을 때인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느니라(요20:24). 그런데 안식 후 첫날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소문도 들리지만 아직도 불안에 떨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을 저녁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시며 주님께서는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불안 근심 염려가 떠나갔고 이제는 기쁨이 충만케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낸 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습니다(요20: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부활신앙을 힘입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했었습니다.(요20:20)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던 도마가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도마를 반갑게 맞이하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사실과 부활하신 육체를 보여주신 빅뉴스를 증거하였는데 도마의 성격대로 그의 반응은 전혀 의외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다른 제자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을까요?
제자들은 불신하는 도마로 하여금 주님의 부활 사실을 인식시키고 믿게 하기 위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신앙고백은 성령님이 돕지 아니고는 안되는 모양입니다.(고전12:3) 그리하여 도마는 의심많은 도마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회의론자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평강은 당시 제자들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부활의 평강이 있어야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다시 집안에 모여 문을 굳게 닫고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이 두 번째로 방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다짜고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때 도마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신앙 고백합니다.(요 20:25-29) 그래서 도마는 늦게나마 불명예를 벗어버립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으로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여드레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건에서는 도마의 신앙 고백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의심하였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놀라왔을까? 더울 놀라왔던 것은 주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내 옆구리의 창자국에도 손을 넣어 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는 어떻게 여드레 전에 도마가 제자들에게 하였던 말을 마치 예수님이 알고라도 있듯이 어떻게 그 말을 하실 수 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께서 도마로 하여금 못박힌 흔적과 허리에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였을 때 도마가 할 수 있는 말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마의 신앙 고백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도마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 도마의 불신앙과 부활한 주님을 만났을 때의 도마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도마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는 것은 성경에서 도마에 관해서는 많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열두 제자들을 언급할 때 나올 뿐 그에 대해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비중 있게 다루어집니다.
(3)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도마어록
1)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어서 무덤에 묻힌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 주셨던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 보면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 달려가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가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 유대인들이 방금도 돌을 들어 치려고 했는데 왜 다시 베다니로 가고자 합니까?’ 하며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가 불쑥 나서며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며 엉뚱한 소리를 한 것처럼 들립니다. 언제 어디서든 상황인식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용감하게 들이대었던 모습이 도마의 모습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은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았던 주님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최고의 진리의 말씀을 얻게 한 도마의 위대한 질문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예비됨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하고 싶으셨지만 현실에만 마음을 두고 있던 제자들은 그 예비된 나라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14:1-4)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제자들이 지금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다른 제자들이 묵묵히 있을 때 도마는 그 길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과감히 그 길을 물으면서 대답을 들었습니다. 도마는 납득이 안되는 것은 질문했는데 위대한 질문은 위대한 대답을 얻습니다!
(요14:5-6) 5 도마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어찌 그 길을 알겠나이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였을 때 다른 제자들은 모르면서도 가만히 있었지만 도마는 솔직히 말하기를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하고 말 한 도마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려고 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아서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피조물인 인생이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티끌같은 인생이 메시야를 온전히 알기는 불가능하다.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때 믿음으로라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
2. 도마의 신앙고백의 의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불신과 의심의 원인이 되었다. 내가 있어야할 자리, 내가 지켜야할 자리를 지키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의무요 은혜의 조건이 됨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도마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손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말하였다가 결국 부활한 예수님을 뵙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요20:26-29) 26 여드레가 지나서 그분의 제자들이 다시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더라. 그때에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그 뒤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28 도마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매 2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도마의 경우는 정직한 질문이었고 그것은 곧 놀라운 확신으로 바뀐 의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확신에 따라 놀라운 선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고 솔직하고 담대하고 상당히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부활 후 첫날 저녁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후에 다른 제자들이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였을 때 도마는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 분의 두 손의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분 옆구리에 넣지 않고는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아니하겠다는 그런 도마를 주님은 찾아오셔서 도마로 하여금 부활한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고 그 입을 통해 도마의 신앙고백이 나오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일시적으로 살아났다가 다시 죽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산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정말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일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모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주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으로는 세상의 법에 따라 정죄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마귀로서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으신 분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마귀도 참소할 명분이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마귀의 승리로 끝날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부활의 첫 열매로 살리심으로 인해 마귀는 법적으로 하나님에게 패배당한 것입니다.
(1) 도마의 신앙 고백이 주는 교훈
오늘 본문에는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교훈을 통해서 주님이 입으신 부활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육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인간의 혈육과 동일한 몸으로 부활했다면 문들이 닫힌 곳을 들어올 수도 나갈 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계시던 때, 곧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 그 분은 이 우주의 시공간의 법칙에 매인 분은 아니셨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물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특별한 몸을 입으신 것 같이 우리도 장차 주님처럼 부활한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내가 부활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입고 영생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부활한신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서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이 이 평강입니다. 지금 단언하여 드릴 수 있는 말은 만약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이 평강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아직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무엇인가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뻐하였을까? 주께서 주신 평강이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점령하였을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처음 여드레 동안은 주님이 주셨던 평강을 누릴 수 없었지만 부활한 주님을 본 후에는 그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최고의 평강을 누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도마는 자신의 의심을 내려놓고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의 이 신앙고백은 자신의 눈앞에 계시는 부활의 주님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며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도마는 실패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의 삶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이 평강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분명히 어딘가 고장이 나 있는 것입니다. 얼른 납득이 안 되실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도 영적으로 보면 교만의 일종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이 처리하기엔 너무 커서 내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도마의 신앙고백의 비교
주님께서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제자들에게 한 말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분명히 도마가 손가락을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으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한 말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도마가 말한대로 손을 내밀어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도마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계시는 주님 앞에서 늘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마가 직접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져 보았을까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제 생각에는 감히 만져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못자국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만져보라고 하신 후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의 고백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은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의 참된 의미와 더불어 또한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도마의 이 고백은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싶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의 신성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의 이 신앙고백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막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신앙고백하면 베드로의 신앙고백만 알고 있었지 지금까지 그 누구로부터 ‘도마의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도마의 신앙고백이 또 다른 의미로서 어쩌면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이 바로 이 한 마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16:13-18) 13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들어오사 자기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 곧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14 그들이 이르되, 어떤 이들은 주께서 침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대언자들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하시니 15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1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베드로와 똑 같이 주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고 교회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죠! 베드로가 분명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최초의 사람이지만 그의 고백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령님의 은혜로 신앙고백을 한 것이지 그의 삶을 통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 나온 그런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가 정말로 깊은 체험을 통해 주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다면, 나중에 사람들이 무서워서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오늘 요한복음에서 만나는 도마의 신앙고백은 깊은 인간적 회의와 의심을 거친 다음에 마음을 통해 나오게 된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면 도마는 매우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기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믿습니다! 하고 믿는 그런 신앙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도마가 신앙고백을 하는 것에도 성령님의 역사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주님과 함께 생활하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인간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했을 때 그는 이 분이 하나님이심을 그 순간 그의 전 존재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살아생전에 그를 '그리스도'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으나 나중에는 부인했고, 도마는 주님 살아생전엔 그를 하나님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을지라도 부활한 주님을 만난 그 순간엔 그의 전 존재를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이 비록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를 보고 난 후에 한 고백이긴 하지만 그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하나님으로서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그의 남은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바치고 순교의 길을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사역과 계시와 또 많은 표적들과 말씀을 통해 체험하고 또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였으므로 제자들을 대표해서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신앙 고백한 것을 요한이 기록한 것은 우리도 도마와 같이 이 고백에 들어있는 진리를 터득하고 이 신앙 곧 예수님이 우리의 주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3)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은혜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요20:2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그 분을 믿는 믿음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분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는 이것이 기적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참으로 복된 자인 것입니다.
(4) 성경을 기록한 목적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30-31절에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표적들을 행하였으나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는 예수께서 죽으신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벌써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나오는 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미혹을 받을 위험이 있는 때였습니다. 요한이 이 도마의 신앙고백을 기록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예언된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임은 물론이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믿고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한 인간,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사적 한 분을 가리키는 “예수”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수”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사단의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함을 오늘 우리는 도마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확실히 다시한번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들이 입게 될 영광스런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충분한 정보는 없지만 성경에 있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결론은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살과 뼈가 있으며 음식을 먹기도 하는 육체임은 틀림없으며 동시에 시공간의 제한은 받지 않는 신비한 육체라는 정도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을 밝혀주지는 않지만 우리의 구원과 삶에 꼭 필요한 것만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정점으로 하여 퍼져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사건과 부활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밝히 드러난 것을 부정하면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3. 도마가 외친 신앙고백의 의미
오늘 도마의 신앙고백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으로 한 역사를 살았던 한 인물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해주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인식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신비한 사건이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장차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여러분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약속의 그 날까지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은 단지 부활을 약속으로만 말씀하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또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부활의 확실성을 믿게 하시기 위해 직접 부활하신 몸으로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 나타나셔서 부활이 사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부활의 진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처한 현재의 환경을 초월하여 우리는 위로를 받을 것이고 새로운 힘으로 담대하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요3:16)고 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부활한 자들의 삶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 위대한 부활의 생명을 위해 주님께서 독생자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며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1장에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시오, 구원의 하나님이시오, 이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들이고 그의 이름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핵심내용을 실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구약은 신약에 오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이 예수이시다' 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사야9장6절에서도 밝혀져 있듯이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요한복음 5장43절에 아들된 몸으로써의 예수께서 직접 밝히신 말씀인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인간의 육신을 입은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시며 친히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이심을 알려주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아들된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성자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되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 되신 성자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으로 계시는 분이시지만 그 한분은 복수로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구약에서는 오직 여호와로 알려주셨던 그분을 신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자세하게 소개를 하십니다. 아버지는 결코 예수님이 될 수가 없고 성령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아버지로 불리워졌지만 신약에서 구분할 땐 아들이셨습니다. 결코 신약의 아버지가 되실 수가 없으며 성령도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인 삼위분들은 영원 전부터 함께 하셨던 오직 한 분 여호와 그러나 세 분의 개체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복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구약시대 여호와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은혜가 있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