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이란 나라는 묘한 측면이 있다. 바티칸은 로마라는 도시 속의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지난날 유럽 사회에서 외교의 관례를 만들었고, 오늘날 국제정치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자국에서 태어난 사람을 국가수반으로 삼지만, 바티칸은 반드시 그렇지도 아니하다. 지금의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그 앞선 교황은 독일 출신이었고, 또 그의 선임자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어찌 보면 교황 프란치스코는 바티칸의 이방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바티칸 국의 엄연한 국가수반이다.
바티칸은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다. 그러나 그 도덕적 권위에 있어서는 일반 국가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교황 프란치스코는 강력히 교회개혁의 드라이브를 걸었고, 그의 파격에 가까운 행동들은 세계의 환희를 이끌어 냈다. 그가 전개한 일련의 노력들은 단지 교회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희망까지도 북돋아 주고 있다. 며칠 후면 그가 한국에 온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1801년에 순교한 이들을 비롯한 124명의 조선시대 순교자들을 특별히 기리게 된다.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福者) 칭호를 받는 사람들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현재의 심장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역사의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서린 곳이기도 하다. 오늘의 광화문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이며 한국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적인 장소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광화문에서 특정 종교인 천주교의 행사가 열린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가 과연 그곳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자격을 가졌는가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사실, 한국 교회사 가운데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검토해보면 신사참배 문제를 비롯하여 결코 정도를 걸었다고 볼 수 없는 장면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자신의 최선을 다해 민족의 보편적 구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지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교회는 이러한 비판과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한국 교회는 이 땅의 겨레를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갖췄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준으로 하여 살펴보면, 광화문에 설 수 있는 한국 교회의 자격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광화문에 서기에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곳 광화문에서 과거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일은 우리 역사와 현재 및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측면이 있다. 이 행사를 천주교식의 용어로는 시복식(諡福式)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은 특정인에게 복자(福者)라는 칭호를 내려주는 행사라는 뜻이다. 복자라는 단어는 덕행이 뛰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우선, 과거의 한국 교회가 광화문에 설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은 이번에 시복되는 사람들의 면모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복되는 사람 가운데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과 같은 지식인이 있다. 이조 정랑을 역임했던 홍낙민과 같은 고위 관료도 있다. 그러나 시복되는 이들 대부분은 농투성이, 옹기장이, 무지렁이이거나 힘없는 아낙들이었다. 즉, 이번에 시복되는 사람들의 주류는 새로운 세상을 그리던 민초들이었다. 이 민초들과 지식청년들이 함께 어우러졌던 곳이 당시의 그 공동체였다. 사상통제에 저항하고 신분평등을 실천하다 희생 이들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원론이요 공론의 기준으로 여겨지고 있던 주자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들이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주자학은 “더 이상 증명이 필요 없는 지배사상”이며 지도이념이었다. 당시 조선정부 당국에서는 새로운 신앙운동을 주자학과 그에 기반을 둔 사회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들의 순교는 주자학 중심의 사상통제 정책에 대한 저항의 결과이기도 했다.
일반 역사학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그들은 이 새로운 사상을 통해서 인간 존엄성을 깨달았고, 사람은 서로 평등한 존재임을 알았다. 그래서 홍낙민과 같은 관리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해방시켜 주었다 하여 동료 양반들의 비난을 받았다. 1790년대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입교했던 유군명은 부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은 직후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황일광과 같은 백정은 1801년 당시 정약종과 같이 살다가 순교했다. 그는 “나에게 천국이 둘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잘 알면서도 신도들이 인간으로 대우해 주니 현세에 있고, 두 번째의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갈 곳이다”라고 외쳤다.
이러한 파격적 행위는 사회의 관습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노비가 공식적으로 해방된 1894년 갑오경장보다 100년을 앞서 자신의 재산인 노비에게 해방을 줄 수 있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는 형평운동(衡平運動)이라 불리던 백정 해방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120여 년을 앞서 백정 출신 황일광은 새로운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그를 인간으로 이해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처럼 그들의 믿음은 순수한 종교적 복음이었음과 동시에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의 초기 교회는 사회와 문화의 변혁을 바라면서 몸소 실천했던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국가 폭력이 가해졌다. 그 국가 폭력의 희생물이 바로 이들이었다. 조선왕조는 이들 대부분을 단 한 번도 신원(伸寃)한 적이 없다. 이제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그들의 선구적 행동을 뒤늦게나마 인정해 주는 곳이 광화문 광장이라면, 그들은 그 광장에 설 자격이 충분하다. 그들 죽음의 의미를 오늘 여기에 일깨우려 그들이 순교에 이를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말엽 이래 조선왕조에서도 민초들은 이제 소중한 가치를 위해 죽을 수 있었던 지사(志士)요 깨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 소중한 가치는 그들에게 감옥의 고통과 고문의 괴로움과 죽음의 공포까지도 극복할 환희를 주었다. 이 환희로 인하여 죽어갔던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로 탄생한다. 그들의 시복은 부당한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의식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자유와 인권의 중요성을 행동으로 증거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죽음은 오늘의 우리가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서양에서 살던 사람만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겠는가? 자유는 피를 먹고 크는 나무이다. 우리에게 자유라는 나무를 키워준 사람들이 그날 광화문 광장의 주역들이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는 현재보다는 과거 때문에, 그리고 그 과거의 의기를 살려야 한다는, 미래를 향한 현재의 각오 때문에 광화문 광장에 설 자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친애하는 크리스천 형제 프란치스코 1세는 광화문에서 시복식을 주관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로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순교자를 기리며 위로하고, 오늘의 우리를 격려한다. 아니, 그는 과거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오늘날 순교의 개념은 신앙을 위한 증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독일의 석학 발터 카스퍼가 말했듯이, 오늘의 순교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나 사회정의 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광화문 광장에서 이 점을 현대 한국 교회에 일깨우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우리 겨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광화문에 모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