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50) - 캘리포니아 좋은 날씨

[이뭐꼬]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K교수는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조교를 불러서 책방에 가서 <캘리포니아 좋은 날씨>라는 책을 사 오라고 제목을 적어주었다. 다음 날 조교에게서 1,2권으로 된 책을 받아서 책장을 넘겼다. 안 표지에는 책의 저자인 남자가 손에 담배를 쥐고 있는 포즈로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남자는 남자가 잘 안다. 뭔가 강인한 인상을 주는 호남형 남자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그런 남자이었다. 인물 소개를 읽어 보니 그 남자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 남자는 스무 살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문단에 데뷰했단다. 그 후 연극인으로 성장하였는데, 동랑 극단의 기획실장을 오랫동안 맡았단다. 그 남자는 연극, 영화, 출판, 광고, 방송 등 대중 문화 전반에 일대 돌풍을 일으킨 인물로 소개되었다. 또한 그는 뒤늦게 기업계에 뛰어들어 나산 그룹 기조실장, 논노 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단다. 그 남자는 상도 많이 탔다. 연극 <오늘 같은 날>로 희곡문화상을 수상한 외에도 일간스포츠 광고상, 중앙일보 광고대상, 기독교 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고 한다. 그 남자의 경력은 K교수에 비하면 무척이나 화려했다.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 글의 사건과 인물, 상황과 구성은 모두 허구이며 설령 실제와 닮은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따름이다. 어쩔 수 없이 소설이란 또 하나의 거울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연재소설에 대해서도 필자는 똑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 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모든 남자에게는 적어도 자신들만 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사람의 여자가 있다고. 그 그림자가 있다고. 나는 내 인생의 복판에서 겪은 그 사계절의 이름을 민들레,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찔레라고 이름했다.... 언제나 풋나기인 나를, 언제나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변함없이 믿어주며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나의 아내요 삶의 진정한 동지인 진달래에게 이 글을 바친다...”

그 남자 소설 속의 진달래는 미스K가 틀림없다는 것을 K교수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남자의 소설을 밤새워서 흥미롭게 읽었다. 자전적인 소설임이 분명하였다. 전남 벌교에서 태어나 문학 소년으로 성장한 저자는 연극계에 종사하다가 미스K를 만나 1981년에 결혼을 한다. 결혼 후에 기업인으로 자리를 옮겨 돈도 잘 벌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 남자는 나산 그룹의 기획실장을 거쳐서 패션 회사인 논노 그룹의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논노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는 갑자기 미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한국에 들어오면 그는 빚 때문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 한다.

소설 속에서 그 남자는 그리운 아내가 있는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빌딩의 외벽을 줄 타고서 청소하는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귀국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아내와의 갈등이 엿보이지만 이혼했다는 표현은 없었다. 그 남자가 회사가 부도가 나서 갑자기 미국으로 도망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들어오더니 아내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옷가지 몇 개만 챙긴 채 성급히 문밖을 나섰는데, 그게 기약없는 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소설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 K교수는 오전 10시 20분쯤에 가정대학의 마)여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점심 한번 같이 하자고. 이미 두어 번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 마)교수는 좋다고 승낙했고, K교수가 12시 45분에 가정대학 앞으로 차를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그 시간이면 다른 교수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간이다. K교수는 같은 학과의 바)교수와 함께 갔다. K교수는 못 생긴 외모와는 달리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S대학에서 여교수들과 점심 식사를 가장 많이 한 교수일 것이다.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교수가 된 이후, K교수가 다른 사람과 식사할 때에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학교에서 여자 교수와 식사할 때에는 단 둘이 만나지 않고 반드시 2:1로 만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을 K교수는 예외 없이 철저히 지킨다. 대개는 같은 학과의 후배 남교수와 동행하여 여교수를 만난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K교수는 학교에서 많은 여교수들과 만나 식사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데도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별다른 소문 없이 잘 지내왔다.

이러한 원칙은 K교수가 이전 직장인 연구소에서 터득하였는데 어찌 보면 삶의 지혜이다. 이전 직장에서 한번은 여직원과 둘이서 직장 근처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다른 부서 여직원이 멀리서 살짝 보였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아무리 해명을 해도 소용이 없고 소문은 점점 변질되고 아주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K교수는 직장에서 여자와 함께 식사할 때에는 절대로 1:1로 만나면 안 된다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궁금하다]

모르는 당신의 이름은 '그리움'이에요 맞죠?
당신의 이름은 김그리움 박그리움 이그리움 최그리움이에요
다가갈 수 없다는 볼 수 없다는 그 '그리움'이에요
나의 그림자예요 나의 독백이고 눈물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정말 어쩌자는 건가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늘 날 울려요
때때로 조용필도 마찬가지지지만 알아요?
그 두사람의 이름 때문에 때때로 내가 이따금 징징 우는 거
나는 정말 이빨이 아픈 사람처럼 질질 울기 일쑤였어요
노래를 듣고서는 흥건히 젖은 눈물을 훔치고 있는 꼬락서니의
내가, 항상 부끄러워요 시시해요 미워요
누가? 내가 알아요?

출처-<캘리포니아 좋은 날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