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 자연 속에서 역사가 되다
―김외숙 시의 힘과 아름다움
권온
김외숙이 시단(詩壇)에 등장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시인의 이름이나 그녀의 작품을 낯설게 느끼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김외숙의 시력(詩歷)이 일천하다고 하여 시인의 시를 쉽게 보아서는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시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예상보다 넉넉하다. 김외숙 시의 ‘죽음’은 ‘삶’과 연결된다. 또한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어둠’과 ‘빛’이 교감한다. 시인은 ‘기억’과 ‘역사’를 껴안는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빛나는 ‘문장’이 가득한 ‘책’을 따뜻하게 품는다.
여자는 끈목을 잡고 잠드는 오래된 습관이 있어요
아마 꿈속에서 만들고 싶은 것을 완성해 놓지 않을까요
손가락 위에 올라갈 매듭의 서열은
항상 정해져 있어요
기분이 좋은 날은 한 번에 매화꽃을 피우지만
허공에 걸리는 날도 있겠지요
엄지와 검지 사이 권총자세로 끈목을 걸어요
순식간에 발사된 총알처럼 지나가요
어지러운 회전과 직진 한 방에 끝나야 해요
햇살이 눈부시네요
사건이 있던 날
여자는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슬픈 일은 계속 되었어요
배추밭에 배추흰나비가 보여요
여자는 유년의 기억을 따라 끈목을 엮어갔어요
웃음소리가 뛰어다녀요
발아하는 꽃몽우리
꽃잎 같은 기억의 무늬는 잘 엮이지 않아요
슬픔은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무디게 하려는 손끝에 있어요
그때가 되면 홍매화가 활짝 피겠죠
―「끈목」 전문
천의무봉을 지향하는 시이다. 촘촘히 직조된 직물처럼,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퀼트를 닮은 시가 여기에 있다. 김외숙은 ‘~어요’, ‘~까요’, ‘~지요’, ‘~가요’, ‘~해요’, ‘~네요’, ‘~여요’, ‘~녀요’, ‘~아요’ 등 다채로운 ‘~요’를 15회 사용함으로써 여러 올의 실로 짠 끈을 뜻하는 ‘끈목’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의 중추를 담당하는 키워드로는 “여자”, “끈목”, “잠”, “꿈” 등이 있다. ‘여자’는 ‘사건’, ‘슬픈 일’, ‘슬픔’ 등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끈목’은 ‘손가락’, ‘손끝’, ‘엄지’, ‘검지’ 등과 연결되면서 그룹을 형성한다. 또한 ‘잠’과 ‘꿈’은 ‘유년’이나 ‘기억’과 이어진다.
이 시에서 인상적인 계열을 구성하는 어휘에는 “권총”, “총알”, “회전”, “직진”, “한 방” 등이 있다. 이들 단어는 ‘죽음’으로 수렴되는데 그것은 ‘삶’ 또는 ‘생(生)’의 이면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시인은 “햇살”, “매화꽃”, “홍매화”, “배추밭”, “배추흰나비” 등으로 연결되는 ‘자연’을 탐구하면서 ‘위안’을 추구한다.
봄볕으로 하트를 접었다 너에게 주고 싶은 봄볕 하트, 빈 페트병 속을 채워나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가 없어요 이상은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색하게 흥얼거렸다 어둠뿐인 세상 나는 기계처럼 접고 접혀왔다 너에게 주고 싶었다 봄볕 하트, 주택의 옥상에서 개가 짖었다 세상은 오늘도 소란스럽다 개소리는 허락 없이 집안으로 쳐들어왔다 남자는 그림자를 함부로 물어뜯었다는 이유로 개와 싸움판을 벌였다 이상한 주말 오후였다 개는 심장이 터지도록 짖었다 넘치는 에너지가 창문을 넘나들었다 너는 에너지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는데, 이웃들은 창문을 열어놓고 구경했다 나는 싸우는 소리를 뒤로한 채 꿋꿋하게 하트를 접었다 페트병에 가득 찬 봄볕 하트, 뚜껑을 닫았다 손에 봄볕이 번져 있었다
―「봄볕접기」 전문
시적 화자 “나”를 비롯하여 “너”, “개”, “남자”, “이웃들” 등이 시의 중심을 구성하는 대상들이다. “봄볕으로 하트를 접었다”라는 진술은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고 소통함을 의미한다. “너에게 주고 싶은 봄볕 하트”라는 어구에 집중해 보자. ‘나’는 ‘너’에게 봄볕 하트를 주고 싶지만 그것을 줄 수 없는 상황에 위치한다. “너는 에너지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 시의 포인트 중 하나는 “페트병”과 관련된다. ‘페트병’은 원래 비어 있었다. 봄볕 하트가 없는 “빈 페트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꿋꿋하게 하트를 접”어서 봄볕 하트가 “가득 찬” 페트병을 얻게 된다. ‘나’는 앞으로도 어둠과 소란으로서의 세상에서 마음, 심경, 감정, 정서 등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트 가득한 인간의 길을, 자연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따뜻한 빛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책을 펼친다
구르는 것만 봐도
웃음 터지던 열다섯 살
효선이 미순이
꽃잎 같은 소녀들
책장 속에 납작 짓눌려져 있다
풋내는 기억을 따라간다
여린 꽃잎은 힘이 없었다
납작해진 웃음소리들
까르르 새어 나온다
숨을 불어넣자
꽃잎이 바스라진다
천천히 책을 덮는다
―「압화」 전문
김외숙은 “책”에 주목한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로서의 책이다. 그것은 어떤 ‘상징’에 가깝다. 책에 담긴 핵심 내용은 “효선이”와 “미순이”이다. 시인이 이 시에 도입하고 있는 효선이, 미순이는 2002년 6월 13일 양주시 광적면 지방도로를 걷다가 미2사단 44공병대 궤도장갑차에 깔려서 그 자리에서 사망한 여중생 심미선, 신효순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에 등장하는 “효선이 미순이”는 “열다섯 살”이자 “꽃잎 같은 소녀들”이며 “여린 꽃잎”이다. 또한 그들은 “풋내”이자 “납작해진 웃음소리들”이며 “압화”이다. 효선이와 미순이는 왜 납작해졌을까? 그들은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서 납작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기억’에 관한 시이자 ‘역사’에 대한 시이며 ‘과거’를 다루는 시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전한 ‘현재’를 돌아보도록 돕는 시이자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향한 시이다. 독자들이여, 김외숙의 시를 읽으며 꺼지지 않는 희망을 노래하라!
내리막길이 빗길에 미끄러졌다
한참을 떠밀려 흙더미로 뭉쳐졌다
우산은 첫사랑처럼 멀리 날아가 버렸다
장대비를 잡고 일어서려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야유하듯 퍼붓는 비
냄새의 흔적까지 쓸어가버린다
비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
좌절 자세를 반듯하게 유지하고
비를 탐구한다
흙바닥을 짚은 손 위로
닥치는 대로 휩쓸어가는 비열함이 느껴진다
에코백을 끌어당긴다
입을 한껏 벌린 내부가 살려달라고 외친다
오늘은 안녕,
소소한 하루가 급류에 떠내려간다
내리막길이 일어선다
젖지 않은 생각을 짚고
―「내리막길이 내리는 길에게」 전문
“내리막길”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어지는 비탈진 길을 가리키거나 기운이나 기세가 한창 때를 지나 약해지는 시기나 단계를 의미한다. 내리막길과 “내리는 비”는 서로 대비되면서 이 시의 중심 구도를 형성한다. 곧 ‘지배 계급’일 수도 있고, ‘상위 계층’일 수도 있는, ‘경영자’, ‘관리자’로서의 내리는 비는 ‘야유’, ‘쓸어감’, ‘눈치’, ‘비열함’, ‘급류’ 등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면서 내리막길을 ‘좌절’로 내몬다. 내리는 비는 내리막길이 “살려달라고 외”치도록 유도한다.
시인은 “오늘은 안녕,”을 이야기하지만 여기에는 ‘내일의 불안’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 내리막길의 “소소한 하루”는 늘 ‘젖은 생각’에 찌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대로 일어서기는 어렵다. ‘서민’일 수도 있고, ‘하급 계층’일 수도 있으며, ‘비정규’의 삶일 수도 있는 ‘근로자’, ‘노동자’로서의 내리막길에게는 “젖지 않은 생각”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고의 전환이자 짱짱한 생각일 수 있다. 김외숙이 ‘내리막길’과 ‘내리는 비’라는 자연물로서 형상화한 인간 탐구로서의 시가 여기에 있으니 독자들로서는 찬찬히 살필 일이다.
밝은 안과에 갔다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며 의사는
긴 한숨을 쉰다
좁아진 시야를 취조한다
언제부터인지 묻는다
싱크대 문짝에 머리를 부딪치면
눈을 탓할까요
문짝을 탓할까요
의사는 혼자 결론을 내린다
혹이 난 부분을 만지며
의사가 뽑아준 확인서를 펄럭이며
거리로 나선다
빛을 모은 눈동자는 보고 싶은 만큼 본다
쇼그렌으로 분류되지 않은 굴절의 기타장애
알 수 없는 문장들
땅바닥 디딘 발자국이 꺾인다
내가 다닌 길은 허공으로 만든 길
기억이 출렁이자 발걸음이 흔들린다
―「의심확인서」 전문
이 시는 시적 화자 ‘나’와 인물로서의 ‘의사’가 소통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나’는 “눈”의 이상 또는 “장애”로 인해 “혹”이 발생하였는데 ‘의사’의 반응은 객관적이고 냉정하며 차갑다. “긴 한숨을 쉰다”, “좁아진 시야를 취조한다”, “혼자 결론을 내린다” 등의 진술은 이를 입증한다.
‘나’는 의사의 반응 앞에서 ‘꺾임’이나 ‘출렁임’ 또는 ‘흔들림’ 등을 겪는다. 그것은 진정한 소통의 부재 또는 실패를 의미한다. “의사가 뽑아준 확인서”는 “의심확인서”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직 ‘나’의 위태로운 상태는 끝나지 않았다. ‘나’의 위기는 현재진행중이다. ‘나’의 의심을, 당신의 의심을, 우리들의 의심을 해소할 수 있는 그날까지 김외숙의 단어는, 문장은, 시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솜사탕 같은 아름다운 기대감 속에서 김외숙의 시 5편을 함께 읽었다. 다채로운 요소들의 조화로운 공존은 그녀의 시 세계를 요약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표현 중 하나이다. 특히 시인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상관성이 강조된다. 독일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다.(Man is not above nature, but in nature.)” 김외숙은 「끈목」에서 자연의 조력으로 인간을 완성하였다. 곧 죽음의 공포는 삶의 기쁨으로 전환된다. 시와 철학의 조언을 수용하여 우리는 자연 위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또한 시인의 시에 제시되는 역사와 기억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미국의 흑인 해방운동가 맬컴 엑스(Malcolm X)에 따르면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이고, 기억이 없다면, 인간은 하등 동물로 강등된다.(History is a people's memory, and without a memory, man is demoted to the lower animals.)” 김외숙은 「압화」에서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환기한다. 그것은 과거를 다루는 일인 동시에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과업이다. 우리는 개인의 기억과 사회의 역사를 조화롭게 일치시켜서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완성해야 한다. 시인의 시 세계가 품고 나아갈 기억, 역사, 자연, 인간의 풍경이 끝내 아름답기를 바란다.
권 온(문학평론가, 문학박사)
2008년 계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비평(평론) 부문을 수상하며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