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3,9-15.20; 에페 1,3-6.11-12; 루카 1,26-38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교의는 1854년에 선포되었지만, 그에 대한 믿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기원후 2세기에 성 유스티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녀였던 하와가 뱀의 말을 잉태하여 불순종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처녀이신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을 잉태하여 순종과 생명을 가져오셨다.”
엊그제 대림 특강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은 자신이 되뇌는 말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와는 뱀이 하는 유혹의 말을 되뇌면서 결국 뱀의 말을 잉태하여 불순종과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이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 불순종과 죄로부터 제외되어야 하기에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 유스티노 성인의 이론입니다.
이외에도 여러 교부와 신학자들이 성모님께서 모든 죄로부터 보호받으셨다는 주장을 해 왔는데, 근대에 이르러 종교개혁자들이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배제하기 시작하자,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거슬러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더욱 지켜 나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교의가 반포되기 16년 전인 1838년, 제2대 조선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주보로 인가해 줄 것을 교황청에 청하였고, 3년 뒤인 184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인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대축일 앞에 “한국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붙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님은 지난 순교자 성월에 제가 편지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조선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이를 끝장내 줄 박해의 칼날이 별로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청원이 인가되었다는 소식을 지상에서 듣지는 못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오늘 사제서품 미사가 봉헌되는 해가 많았는데요, 성 앵베르 주교님 덕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 신부님도 오늘 금경축을 맞이하셨는데, 서품 기념일을 지내시는 많은 어르신 신부님들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오늘 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교부들은 이 구절을 원복음이라 부르는데, ‘여자의 후손’이 바로 성모님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주회 때에 모시고 있는 성모님은 이 말씀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뤼드박의 성모상’이라 불립니다. 1830년 프랑스 뤼드박에서 성녀 카트린느 라부르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는데, 성모님 주변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발현은 오늘 축일 제정에도 영향을 주었는데요, ‘뤼드박의 성모상이 레지오를 통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는 것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신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2 독서에서 에페소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미리 선택하셔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렇게 되고, 성모님은 태중에서 그렇게 되셨습니다.
복음 말씀에서 성모님은 하와와 매우 다른 대답을 하시는데요, 하와는 뱀의 말을 되뇌지만, 성모님은 천사의 인사말을 곰곰이 되뇝니다. 사실 이것이 특강 때 말씀드린 ‘루미나시오’, 즉 되새김인데요, 성모님께서는 어떤 말과 일을 곰곰이 되새기시는데 항상 주님의 말씀이거나 예수님과 관련된 일에 대해 그렇게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마침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인류의 역사는 U 턴하여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스스로 ‘주님의 종’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이라 하면 ‘자유가 없이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노예고요. ‘종’은 일차적으로 주인에게 ‘저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당신의 것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셔도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종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원하시는 대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는 제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라고 말했다면, 성모님께서는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저를 당신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이 고백을 드리셨고, 이 고백을 드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