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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7) 칼 라너 신부 (상)
일상 속에서 영적 신비를 만나다
신학자 칼 라너
독일 출신의 예수회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신부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칼 라너 신부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나서 갓 스무 살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예수회원으로서의 양성과정과 함께 학문의 길에도 정진해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이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신학박사 및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는 1984년 인스부르크에서 선종할 때까지 신학교수로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자문역으로서, 또한 공의회 이후 교회상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한 대학의 영역을 넘어서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재 새롭게 출판 작업 중인 방대한 「전집」(독일 헤르더 출판사)에 담긴 그의 수많은 저서, 논문, 기고 등과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현대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여러 사전들과 학술지, 편람 등을 통해 오늘날에도 그는 교회의 신학과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한 칼 라너 신부 자신이 그의 저술들의 근본 동기가 ‘사변적 관심사가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복음선포라는 사목적 열망에 있다’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교회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쇄신되기를 원하는 많은 교회 내 구도자들과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칼 라너는 교의신학과 기초신학 분야에 있어서 탁월하고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목신학과 교회일치 신학, 타종교와의 대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종교신학 분야들에 있어서도 큰 획을 긋는 연구를 남겨놓았고 귀중한 통찰들을 전해주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그의 초기 저작들인 두 편의 종교철학에 관한 저서, 「세계 내 정신」과 「말씀의 청자」 역시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되는 의미 있는 유산입니다. 이 두 편의 작품을 통해서 그는 현대 신학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학을 인간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청자’인 인간의 주관적 측면과 경험을 깊이 고려함으로써 계시의 깊은 의미에 다가서는 시도이며, 역사와 현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살아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구도의 여정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인간의 초월자를 향한 본성적인 열망과 정향에 대한 자기 이해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장인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긍정을 통해 새롭게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종교철학적, 기초신학적 기초 수립을 위해 칼 라너는 ‘마레샬 학파’가 지향했던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초월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의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학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였고, 당시 가장 주목받던 현대 철학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개진하는 인간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상과 신비
이러한 그의 관점은 사변적이고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초월’을 향한 부름을 세상에서의 도피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유보된 관상적 삶의 양식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응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초월은 신비를 의미하며, 신비에 다가서고 응답하는 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신비가’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 라너 신부의 생각이었습니다.
20세기 중반기를 풍미한 프랑스 문화계의 거물, 작가이자 드골 시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에 온 인류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추구가 없다면 물질문명과 폭력, 국가주의 속에서 세상의 미래가 암울해질 것이라는 염려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라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신비와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하느님 체험의 본질이며, 이것 없이 외적인 제도와 형식 ‘소시민적인’ 자기만족의 방편으로서의 종교 생활만이 남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다”라는 라너 신부의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고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라너 신부는 신비체험이 그리스도인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며 또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자,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초월을 향한 본원적 갈망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우리가 쉽게 연상하게 되는 특이한 은사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체험들과 사건들 안에서 신비체험의 본질을 보려 합니다. 라너 신부는 영성에 관한 독립된 대작을 내어 놓지는 않았지만, 그의 수많은 피정 강의를 위한 글들과 묵상서들 속에서 라너 신부가 스스로 살아왔고, 신앙의 벗들에게 권해주는 영성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 많은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장익 주교의 아름다운 번역으로 출간된 「일상」(분도소책 1, 1980)입니다. 이 책에서 라너 신부는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어구를 머리말로 삼고 있습니다.그는 우리의 일상이 먹고 마시고, 살아가기 위한 하루하루의 노고와 잡다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럼에도 일상의 영적 의미에 대해 차분한 마음으로 시간을 가지고 묵상해보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일들에 대해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각자의 신앙에 있어 매우 긴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일상을 받아들이고 그 하찮음과 성가심까지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면하라고 권고하면서, 그러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신비와 접점을 가지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담박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여진 일상은, 바로 일상으로 머무는 이상, 우리가 하느님과 그의 숨은 은혜라고 부르는 저 영원한 불가사의와 무언의 신비를 담고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데, 이러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실현은 관념과 자아성찰에서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체험하는 구체적인 행위들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일상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하듯, ‘영원의 전조’를 담고 있는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1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8) 칼 라너 신부 (중)
일하고 걷고 먹고 웃는… 일상의 은총체험
일하는 것, 걷는 것, 보는 것….
칼 라너 신부의 묵상집 「일상」의 원제는 ‘일상의 것들(Alltagliche Dinge)’입니다. 말 그대로 이미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살아가면서 행하고 체험하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목이 뜻하듯, 이 책에서 라너 신부는 독자들에게 영성적 묵상에 어울린다 싶은 별스러운 영적 체험과 장소를 찾아다니기에 앞서서 우리가 거의 습관적으로 수행하며 반복하는 일들과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신비와 만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목차를 대하면서 우리가 갈망하는 신비 체험의 계기들이 놀랍게도 우리의 일상사에 함께 묻어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일하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신비의 현현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영성입니다.
라너 신부는 먼저 이러한 일상적인 일들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묘사합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우리가 이러한 익숙한 행위들이 품고 있는 소중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음을 던집니다. 그 물음은 조금씩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사가 반영하는 ‘신비’에 대한 깊은 차원의 성찰로 이어지고, 이렇게 ‘의식된’ 일상은 영적 체험의 자리가 됩니다. 라너 신부가 이 소책자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일상적 행함에 대한 새로운 성찰들 중에서 몇 가지를 옮겨 봅니다.
“일은 우리가 평일 또는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적 내용이다… 일의 신학이 해야 할 첫마디는, 바로 일은 그대로 일이라는, 또 언제나 그러리라는 말이다. 즉, 고달프게 단조로운 것,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것, 일상적인 것이다.(‘일하는 것’)”
“우리는 걷는다. 그리고 이미 이 신체적인 걸음만으로도 여기가 우리 정처가 아님을, 우리는 길을 가고 있음을, 어디엔가 정말로 이르러야 할 몸임을, 아직도 목적을 찾고 있는 나그네임을, 두 세상 사이의 방랑자임을, 길손임을 말한다.(‘걷는 것’)”
“앉는다는 몸짓은 부정도 표명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평정과 고요와 항구의 복된 향유에서, 잃을 두려움 없이, 한마디로 평정한 앉음에서이다.(‘앉는 것’)”
“일상의 보는 행위로 되돌아가자. 이 행위 자체도 이미 인간이 하나의 전체로서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곧 인간은 열려 있고, 두루 살피고, 멀리 있어 좌우할 수 없는 것에도 마음을 둘 줄 알며,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내심을 드러내고, 남이 나를 있는 그대로 알기를 용납할 용기와 순진을 갖춘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보는 것’)”
“일상에는 일의 심각성뿐 아니라 바라건대 웃음도 어우러져 있다.… 이런 웃음은 모든 것과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줄 아는, 탁 트인 호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웃는 것’)”
“인간 실존의 위대하고 숭고한 그 무엇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드러내려면 회식이 그 우선적 상징이 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회식은 먹는 이들 상호 간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의 상징, 아니, 실행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존의 기반인 신체적 식사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자신을 서로 베풀어 주기 때문이다.(‘먹는 것’)”
“잠은 인간 세계가 근본적으로는 올바르고 안전하고 선함을 신뢰하는 행위, 천진의 행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현실을 수락하는 행위이다.(‘자는 것’)”
세계 긍정에서 시작되는 일상의 영성
라너 신부는 여기서 우리에게 일상의 경험 자체에 대해 환상을 갖거나, 그것을 미화하고 신비화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일상에 배인 수고와 고뇌와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깊이 이해하면서도 그것까지도 포함하여 나에게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이처럼 일상의 세계를 긍정하는 결단을 감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세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내면 깊은 데서부터 ‘세계긍정’이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를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신비와의 만남입니다. 라너 신부는 우리가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으면서 굳건하게,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이고 영성적 차원에서 나의 일상의 세계를 만나는 삶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가 속한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가르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경구가 담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편 라너 신부의 영성이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를 높이 평가하는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승이자 저명한 영성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는 라너 신부의 ‘일상의 영성’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제시한 신학의 정식인 “경험을 통한 하느님 인식(Cogito dei experimentalis)” 경구와 깊이 상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너 신부의 신학과 영성은 교회 전통에서 열매 맺은 신학과 영성의 정수를 오늘의 언어와 상황에 맞게 되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라너 신부의 이 묵상은 상당히 오래전에 쓰여진 글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삶의 기예’의 철학과 비교해 볼 때도 적지 않은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예’라는 말은 고대 헬레니즘 철학에서 유래한 용어이지만, 특별히 최근에 들어 삶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보여지는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에서 벗어나 일상에 깊이 뿌리박고 우리가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성공적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 윤리학과 인간학을 추구하는 철학들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너 신부의 일상에 대한 묵상들을 이러한 경향의 철학들과 비교해보면 사실 서로 적지 않은 접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그의 묵상이 오늘날에도 시의성을 지니고 있고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깊이 살펴보면 그가 보여주는 일상의 영성과 신학은 ‘삶의 기예’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라너 신부는 우리가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삶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삶의 기예’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하고 선용하면서도, 그것을 궁극적인 영성의 대안으로 삼을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적 식별의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은총체험’을 일상의 영성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너 신부의 묵상 마지막 장에서 감동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기예’를 넘어 ‘은총체험’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의 신학의 근본적 주제인 ‘초월’에 대해 접근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8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9) 칼 라너 신부 (하)
“일상의 신비란 요란스럽지 않은 성령의 체험”
정신, 초월, 은총 - 신비 체험의 삼중적 구조
칼 라너 신부의 묵상서 「일상」의 마지막 장인, ‘일상에서의 은혜(은총) 체험(Von der Erfahrung der Gnade im Alltag)’은 ‘일상의 신비’를 일깨우는 라너 신부의 영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감동적인 글입니다. 여러 번 읽고 숙고하며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는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의도가 아니라 평범한 독자들의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영적 강화와 같은 성격의 글이지만, 읽을수록 기초신학, 성령론, 은총론과 관련된 라너 신부의 심오한 신학과 철학 사상이 깊이 배어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라너 신부는 이 글에서 ‘일상의 신비’를 추구하는 신학과 영성이란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되 일상의 삶이 필연적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피상성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매일매일의 구별되지 않는 ‘모든 날’(독일어로 ‘일상’의 문자 그대로의 뜻 All-tag)에서 ‘하느님의 날’로 상징되는 ‘영원’의 의미를 발견하는 노력임을 삼중의 구조 속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일상의 영성’은 우리가 즉자적이고 자기애적 차원에서만 일상의 경험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정신적 존재로서 체험하고 살아가는 결단을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를 라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일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 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기막힌 바보짓을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몰아적’이라든가 떳떳하다든가 하는 느낌의 갚음마저도 없이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칼 라너, 「일상」,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 41-42쪽)이어서 라너 신부는 이러한 정신적인 것의 체험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영원’과 관계 맺고 그리로 자신을 투신하는 모험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 체험 가운데서, 바로 내게 일어난 경험들에서 정신을 찾아보도록 하자.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정신을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정신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인 것이다.
…실로 정신으로서의 인간이란, 단지 사변적으로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신과 세계, 시간과 영원의 접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가를, 정신이 혹 인간적 생활양식의 수단에 그치지나 않고 있는가를 재삼 확인하려는 것이다.”(같은 책, 43쪽)
우리가 라너 신부의 전체적인 신학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말하는 영원에 대한 내적 의식은 다름 아니라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초월의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신적이고 초월적 차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선을 추구하고 일상의 깊은 의미를 길어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기에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라는 라너 신부의 기본 사상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근본 체험을 은총의 사건으로 체험하는 특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상의 신비란 궁극적으로 영 안에서의 자유를 체험하는, 결코 요란스럽거나 특정한 은사에 매이지 않은 성령의 체험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이처럼 정신을 체험한다면, 적어도 믿음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사실상 이미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다… 정신의 이런 체험에 있어 우리가 자신을 아주 내맡긴다면, 손에 잡히는 것, 내보일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죽음 같은 암묵에 잠겨 죽음과 멸망의 맛을 띠게 될 때면, 아니면 모든 것이 마치 희고 무색이고 잡히지 않는, 무어라 형언 못할 열락 안에 녹아 버릴 때면,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은 정신뿐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가 아는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섭도록 깊은 심연이, 그의 무한성이 우리에게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다 내주어 더는 자기에 속하지 않을 때, 자신을 거부하여 더는 임의로 처신하지 않을 때, 만사와 자아가 우리로부터 한없이 멀리 물러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자신의 세계, 은혜와 영생의 하느님 세계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같은 책, 44-45쪽)
신비 안에 존재하는 인간, 일상 안에 살아가는 인간
라너 신부에 의하면 이처럼 일상 안에서 은총 세계를 지각하고, 영에 따른 결단을 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실존의 중심을 이루는 ‘일상의 신비’를 사는 삶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초월에 개방하는 정신적 태도 표명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라너 신부는 이미 자신의 초기작 「말씀의 청자」에서 인간을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자유로우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정신’으로 규정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세계의 의미를 인간의 관점에서, 편에서 예단하거나 조작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자유로우신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이’로서 존재하며, 초월과의 만남으로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조건 없이 긍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결코 이러한 근원적인 초월 경험 없이 획득될 수 없습니다. 이는 드물지 않게 삶 가운데 의미의 부재 속에서도 인내로이 그 시간을 견디는 자세를 요구합니다. 라너 신부가 「말씀의 청자」에서 전하는 통찰을 음미하며 일상 안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로 다짐해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니라 성령에 따른 삶이자 성령 안에서 자유로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만일 자유로운 분이신 하느님께서 계시하지 않고 침묵하길 원하신다면 하느님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서 자신의 정신적 및 종교적 실존의 궁극적인 최고 자기실행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칼 라너, 「말씀의 청자」, 김진태 옮김,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2004)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0)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그린 이콘, 사랑의 신비로 초대
삼위일체 이콘을 묵상하며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으며 이 주제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수도사이자 성상 화가였던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을 바라봅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1410년 완성해 성 세르게이 삼위일체 수도원에 안치했던 이 그림은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나온 세 명의 손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온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정작 아브라함과 사라의 등장을 볼 수는 없지만 그 배경에 있는 마므레의 나무를 통해 그 소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성화를 조용히 바라보며 묵상하다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하는 세 인물이 또렷이 구별되는 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얼굴은 매우 닮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해석가들은 이것이 ‘본체로서는 한 분’이시나, ‘위격으로는 세 분’이신 하느님이라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교의를 표현하기 위해 화가가 의도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분은 나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잔이 있습니다.
이는 성체성사를 상징하며 세 분 가운데 중심에서 두 번째 위격을 상징하는 자세를 취한 손으로 그 잔을 향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신앙인이 삼위일체를 묵상한다는 것은 사랑의 성사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 인도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이 성화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관조하는 것은 곧 사랑의 신비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이지요.
그림을 계속해서 가만히 묵상해 보면 세 분은 고요히 앉아 계시되,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사랑의 움직임이 감돌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그림을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상호내주’의 신비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는 루블료프가 깊이 묵상한, 인간을 위로하시는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입니다. 이 성화에 흐르는 고요하면서도 따뜻한 색과 정조는 우리를 매혹하고 ‘상호내주’의 신비에 시간을 잊고 잠기게 합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성화들은 유난히 온화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유명합니다. 그 특징이 이 그림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 위격,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를 더없이 사랑하시며, 서로를 초대하십니다. 삼위일체를 묵상하는 소재로서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을 환대하고 마음에서부터 극진히 대접한 장면을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온화한 사랑의 신비는 그림을 부드럽게 채우고 그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의 영혼까지 어루만져 줍니다.
이 그림을 감상한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세 거룩한 천사가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그리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성자에게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께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이 드높여지고 든든해진다(「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 분도출판사).” 나웬 신부는 이 삼위일체 이콘을 묵상한 장의 제목을 ‘사랑의 집으로의 초대’라고 지었는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 그림을 묵상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향함으로써 두려움과 폭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사랑의 집’ 안에 살게 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와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이 놀라운 작품을 남긴 러시아의 이콘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수도사로서 성덕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1988년에 공식적으로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대체로 1360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타타르족의 지배하에 있던 러시아가 조금씩 독립의 가능성을 보였던 시기였는데, 백성들에게는 수많은 전란과 약탈로 가득했던 가혹한 폭력과 죽임의 시기였습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평화로운 이콘들은 그러한 시기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06년, 그가 1410년 경 그린 것으로 보이는 ‘삼위일체 이콘’이 완전히 복원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재발견되었을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라도네츠의 삼위일체 수도원 수도사였던 그는 이곳에서 수도원 창립자이자 위대한 성인이었던 성 세르게이와, 그의 사후에는 그 제자인 니콘에게 영성을 배운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것이 기쁨과 평화, 온유와 사랑이 중심이 된 그의 성화의 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그는 각지를 다니며 수도사이자 성상화가로서 활동하는데, 비잔틴에서 건너온 위대한 성상화가 테오판의 제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405년 테오판이 주도했던 모스크바의 주님 승천 대성당의 벽화와 성화 제작자들의 명단 마지막에 그의 이름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당시로써는 비교적 연로한 나이에 아마도 흑사병으로 1430년 1월 29일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 한 장면.안드레이 루블료프와 함께 떠오르는 현대의 예술가는 러시아의 위대한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첫 장편 작품인 ‘이반의 어린 시절’ 이후 두 번째 작품으로,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생애를 다룬 205분의 대작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고군분투 끝에 내어놓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탁월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에 서구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열광했지만, 일종의 선전영화를 기대했던 당시 공산정부로부터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이는 그가 망명할 때까지 지속된 고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감독 말에 의하면, 일반적인 전기영화가 아니라 루블료프가 ‘삼위일체’를 그리게 한 ‘시적논리’를 따라간 이 영화는 8개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타르코프스키가 이 영화의 의미를 스스로 밝힌 말을 음미하면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시대에 삼위일체 영성을 통해 피어난 아름다움이 주는 구원을 묵상해봅니다.
“이 영화는 형제 살육이 벌어지고 타타르족이 러시아를 침략했던 시대에 안드레이 루블료프로 하여금 ‘삼위일체’라는, 즉 형제애, 사랑, 화해하는 믿음의 이상을 담은 천재적 작품을 낳게 한, 형제애를 갈구하는 민족적 동경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던가를 다루는 작품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43쪽)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1)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상)
예술과 윤리 · 구원에 대해 쉼 없이 고민한 영화감독
아마 꽤 많은 분들이 한 어린아이가 바닷가 고목 옆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영화 ‘희생’의 포스터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1994년 이 영화가 서울의 한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었을 때,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많은 관객들이 전혀 상업적이지 않은 이 영화를 보러와서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었죠. 이 영화의 성공은 당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진 영화공부와 예술영화 보기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운’ 예술영화를 애쓰며 이해하려는 분위기는 몇 년이 지난 후 소리 없이 사라져갔던 것을 기억합니다.영화가 나오고 10년쯤 지나 지각 개봉했던 ‘희생’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입니다. 지금도 이 감독의 이름을 가끔씩 만나게 되지만, 그의 영화를 애써 보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그의 비타협적인 예술성과 윤리성은 이제는 경외심과 존경심의 대상만이 아니라, 이해 못할 지루함과 난해함, 시대착오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지닌 가치는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질문들의 진지함과 깊이, 그 자신이 한편의 영화를 창작하고 제작하는 동안 들인 헌신들과 함께 바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술과 윤리와 구원에 대해 평생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선·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점점 초월을 향한 갈망과 예감이 두드러졌던 그의 영화 세계를 우리는 과장 없이 ‘인간존재의 영적 탐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의 모색은 비록 그의 영화를 잘 모른다 하더라도 참된 영성을 찾고 살아보자고 하는 이라면 한 번쯤 귀 기울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세 번에 걸쳐 그의 영화와 글에서 길어낼 수 있는 영성적 메시지를 음미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봉인된 시간」 속에서 만나는 윤리, 예술 그리고 삶
1932년 4월 4일 러시아 북동부의 자브라체에서 유명한 시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86년 12월 29일 망명 중 아까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반의 어린시절(1962)’,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솔라리스(1972)’, ‘거울(1975)’, ‘안내인(스토커)(1979)’, ‘향수(1983)’, ‘희생(1986)’이라는 단 일곱 편의 작품만을 남겼지만 그 모두가 그의 예술가로서의 탁월함, 사상가로서의 투철함,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성을 잘 반영하며 각고의 노력과 절실함으로 인간의 영적인 차원을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영화만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도 자신의 예술적이고 영적인 투쟁과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하기 얼마 전 출간되었던 일종의 영화론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봉인된 시간」에서 그의 예술과 윤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김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1)
그는 영화가 시학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이는 영화예술이 진실된 삶의 윤리를 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시란 문학의 한 장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란 내겐 하나의 세계관이며 현실과 맺는 관계의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다. 이렇게 볼 때 시란 인간을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동반하는 하나의 철학이 될 것이다.
… 이런 예술가야말로 존재의 정서적 구조의 특별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직선적인 논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으며, 섬세한 모습의 특수한 본질과 삶의 비밀스런 현상, 삶의 복합성과 진실을 작품 속에 담아낼 수 있다.(26, 27쪽)”
한편, 그의 예술관을 보면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을 통해 완성된 이상주의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관점을 그저 하나의 사상으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하고 살아온 진실된 경험과 부합하기에 각고의 숙고와 결단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세계관과 윤리적 그리고 이념적 목표인 것이다. 훌륭한 걸작 예술품은 윤리적 이상을 표현하려는 노력 속에서 탄생한다. 윤리적 이상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느낌을 좌우한다. 예술가가 삶에 애정을 가진다면 그는 이 삶을 인식하고,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시키는 일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 또한 감지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만일 한 예술가가 삶을 더욱 보람차게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면 현실이 묘사되는 과정에서 그 예술가의 주관적인 표상과 그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현실이 여과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인간 완성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정신적 노고의 결과인 것이며, 사물에 대한 느낌과 생각의 조화로, 그 품위로 그리고 그 단순간결성으로 우리들을 사로잡는 세계관의 표현인 것이다.(33쪽)”
그의 영화론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인식과 문제의식에서 자라난 ‘책임의 윤리’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소비사회의 상품처럼 자기 자신을 대해서는 안되며 삶과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 노력, 삶의 근본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는 예술은 ‘절대진리’의 인식을 위한 추구이자 실천이어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합니다.
“예술과 학문이란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형식인 것이며, 소위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인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인간적인 것, 잔인한 것, 무한한 것, 제한된 것, 이 모든 것들을 예술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절대적인 것을 포착하는 한 형상의 창조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46쪽)”
그는 근대 이후 예술의 상업화와 자기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며 다음과 같이 우리 시대에 잊혀진 진정한 예술가의 전형을 떠올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현대 예술가의 오만불손함을 한 번쯤 샤르트르(Chartres) 대성당을 지은 이름 없는 건축가의 겸손함과 비교해야만 할 것이다! 예술가는 사심없는 임무 수행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을 우리 모두는 오래전에 이미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240쪽)”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29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2)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중)
모순된 현실 속에서 영적 가치 찾는 ‘좋은 영화’
영화와 영성
우리나라에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타르코프스키가 망명시절에 타계하기 전 감독한 마지막 두 작품 ‘희생’과 ‘향수’가 1990년대 중반에 뒤늦게 개봉되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좋은 영화를 목말라하던 이들이 탁월하게 미적이면서도 영적이며 윤리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는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발견하고 많은 감동과 배움을 얻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설립한 ‘성 베네딕도 미디어’의 기여가 컸습니다. 성 베네딕도 미디어는 상업적 고려 대신에 사명감을 가지고, 당시 주된 영상물의 수용매체였던 비디오로 타르코프스키의 러시아 시절 대표작 ‘안드레이 루블료프’와 ‘잠입자(스토커)’를 출시하였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도출판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문화 사목에 귀중한 기여를 한 임인덕 신부(독일명 : 세바스티안 로틀러, 2013년 선종)의 열정과 노력이었습니다. 임인덕 신부가 판권과 번역, 기술적, 경제적 문제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난해하다 할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한국에 소개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그의 영화가 지닌 영적, 도덕적, 예술적 가치를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임인덕 신부는 2005년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의 감사패 수상 소감에서 좋은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이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에 딱 들어맞는다 하겠습니다.
“묵상, 그리스도교 교육, 사목에 대한 비디오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들고 연대감, 자유, 인권, 평화의 가치관을 정립시켜 줄 극영화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제작하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종교적 체험을 목적으로 제가 선정하는 비디오 영화에는 대중성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작가주의 영화’이고 탁월한 예술성과 의미심장한 내용을 지닌 작품들입니다. 종교영화가 아니더라도 좋은 영화는 인간의 품위, 삶과 죽음, 구원, 올바른 가치관, 양심, 평화, 인권 등의 메시지와 영성을 충분히 발견하게 해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좋은 영화는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매력적입니다. 최상의 영화는 그저 암시만 줄 뿐 정곡을 찌르되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가주의 영화와 예술영화는 굳이 신앙이라든지 신을 주제로 삼지 않고도 종교적 체험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권은정,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 - 임인덕 신부이야기」, 분도출판사, 2012)
뛰어난 문화적 감식안과 복음적 열정으로 평생을 문화 복음화에 헌신했던 한 수도자가 가장 높이 평가한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성서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매우 인내롭게 해석해야 하는 상징이나 집요한 윤리적 고뇌, 숨김없는 종교적 회의와 신앙적 위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 진지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현대인의 정신적 위기를 직시하고 대결하며 형상화하는 노력은 사실 우리의 영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부터 단련시키고 정화시키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영성의 문으로서의 정신적 위기
사실 100년이 넘은 영화 역사에서 불과 몇 안되는 ‘영화 작가’들만이 진정한 영적이며 초월적인 영화미학의 모범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상적이고 수사학적인 방식으로 종교적인 이야기나 상징을 자신의 영화에 사용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대신, 매우 실존적이며 예술적인 방식으로 정신적 위기에 직면한 인간이 겪는 내면의 풍경을 그려내고 그러한 고뇌하는 인간상이 초월의 세계를 표징과 침묵을 통해 만나는 접점의 순간을 형상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적으로 포착된 순간은 보는 이에게 흘러가는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때’, 곧 성서적 의미의 ‘카이로스’를 지각하는 드문 경험을 하게 합니다. ‘때’를 아는 것은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실현된 종말론’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윤리적 결단을 매개로 하여 계시와 초월의 세계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대면하고 답하도록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목표에 매우 가깝게 다가갔다고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덴마크의 영화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1889~1968),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1901~1999), 스웨덴의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1918~2007)입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름 역시 이 특별한 계보에 놓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여러 차례 얼마나 베리만과 브레송의 영화들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히면서도, 자신이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신적 위기가 지닌 종교적, 영적차원의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통찰했던 러시아의 대작가 도스토옙스키가 확립한 ‘전통’에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는 ‘정신적 위기’를 외면하는 대신 오히려 이와 대결하고, 거기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용기를 지닌 예술만이 인간의 깊은 영적 차원을 드러내고, 정신적 위기에서 회복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내게 특별히 아주 의미깊었던 것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이 전통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그렇게 찬란하게 꽃피워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이 전통은 오히려 경시당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전통이 원칙적으로 유물론과 통합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높은 평가가 주춤하고 있는 또 다른 원인은 이 작가가 쓴 작품의 주인공들, 아니 이 작가의 모든 작품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계자에게도 해당되는 특징인, ‘정신적 위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러시아에서 왜 사람들은 이 ‘정신적 위기’라는 상태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인가?
‘정신적 위기’란 내게는 항상 건강하다는 표시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견해로는 ‘정신적 위기’란 자아를 발견하고 하나의 새로운 믿음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 위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삶이란 부조화에 가득 차 있는 반면 인간의 영혼은 궁극적으로 조화를 갈망한다. 이러한 모순 속에 인간이 꿈틀거리게 되는 자극을 받게 되고, 또한 동시에 인간의 고통과 희망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적 심오함과 영적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244~245쪽)”
이제 ‘정신적 위기’를 영성의 문으로 삼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인 ‘잠입자(스토커)’와 ‘희생’을 살펴보려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5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하)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삶의 피폐함 극복’ 확신
양심의 시험과 단련을 통한 영성의 길
1978년에 제작된 영화 ‘잠입자’(‘안내자’로도 번역되며 원제는 ‘스토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었던 마지막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타르코프스키의 메시지와 영화 미학이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 요구한 공식적 지침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이 영화 이후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공격은 그로 하여금 결국 서방으로의 고뇌 어린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그가 망명 후 실감하게 되는 서구 자본주의 세계에 만연한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미리 예감하게 합니다.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솔라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SF 소설을 이야기의 기본 구조로 삼으면서도 장르의 문법을 따라가는 대신, 인간 정신의 위기와 양심의 시험에 대한 지극히 진지한 성찰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탁월한 연출과 시적 영상을 통해 제시되는 묵시록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 ‘잠입자’는 그를 찾아온 작가, 과학자와 함께 숨은 소망이 실현된다는 ‘금지 구역’ 또는 ‘비밀 구역’을 목숨 걸고 찾아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금지 구역’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와 일체의 보호막 없이 대면하게 되고 가장 깊은 양심의 부름에 직면합니다. 이는 전율할 정신적 위기이지만, 감독은 이야말로 유일하게 현대인들이 정신적 재생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저서 「봉인된 시간」에서 “자신이 이 작품에서 다름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란 무엇인가를 시적언어로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며 영화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도중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에 대해 많이 숙고한 연후에 그들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감행한 여행의 목적지인 그 방의 문턱을 실제로 넘을 것인가를 더 이상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내적, 도덕적 상태가 결국 비극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정신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정신력은 다만 시선을 자기 자신의 내부로 던지는 데까지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본 자신들의 모습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탁월한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여전히 절망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고, 신념의 회의를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 대한 봉사라는 자신의 소명을 거듭 발견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로써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서 현대인들이 빠져 있는 윤리적 무력함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무력함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길을 간절하게 모색합니다. 그는 그 길이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역은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하는 삶이며, 인간은 그 과정에서 파멸하든지 아니면 견뎌내든지 할 뿐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이 과정을 견뎌내는가 마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인간이 스스로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으며, 부차적인 것들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그 인간의 능력에 좌우된다.”
그러기에 타르코프스키에게 참된 예술이란 이러한 정신적 위기를 정직하게 그려내고 그로부터 각 개인이 양심의 부름에 대해 고뇌하고 응답하여 이기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책임 있는 결단의 삶을 선택하도록 자극과 영감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로서는 인간의 유일하게 진실로 중요한 과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다시 찾아야만 하고, 그 영혼의 고통을 느껴야만 하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양심과 조화시키는 시도를 해야만 한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고통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스스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자극시킨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책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세상은 어차피 남들의 타락한 의지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은 세상 돌아가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조화를 재생시키는 일은 개인적인 책임감을 복구시키는 것에 달려 있다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인간의 윤리적 무력함 형상화 시도
우리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저술에서 만나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사실 여러 면에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잠입자’에서 인간의 선의지와 도덕률의 초월성이라는 칸트적 윤리학의 차원과는 다르게 영성적 관점에서 인간의 윤리적 무력함의 근원을 형상화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를 우리는 「봉인된 시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진술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히 인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관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을 언제나 무시하여 왔다. 인간은 영원하고 본질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기만적인 우상을 쫓아간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인간 삶의 밑바닥을 이루는 예의 매우 평범한 기본적 부분, 즉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같은 사랑과 몰아적 헌신이야말로 현대의 불신과 냉소주의 그리고 공허함에 대치될 수 있는 마지막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작품 ‘잠입자’에서 인간의 사랑이야말로 절망적인 인간 세계에 관한 모든 삭막한 이론화에 대하여 성공적인 반기를 들 수 있는 예의 기적이라는 것을 나는 명백하고도 수미일관되게 말한 바 있다. 다만 우리들은 사랑 역시 잊은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망명한 후,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 스웨덴에서 그의 유작이 된 그 유명한 작품 ‘희생’을 기어이 완성합니다. 그의 죽음이 확실시되자 비로소 당시 소비에트 정권 허락 하에 출국허가를 얻어 타르코프스키 부부의 품으로 올 수 있었던 어린 아들에게 바쳐진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가 인류에게 남긴 믿음과 희망에 대한 감동적인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위기, 삶의 피폐함이 극복될 수 있다고 확신한 그의 예술은 참된 영성의 길을 찾는 신앙인에게도 많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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