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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수 목사
여러 해 됐습니다만 한 청년에게 뜻밖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나름대로 불교와 우리 기독교를 나름대로 비교하면서 연구를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제게 한편으로는 순수한 알고 싶은 동기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기독교를 공격하겠다는 동기에서 물어왔습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에서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부처님이 맞아주시는데 교회에 와 보면 본당 중앙에 흉직한 십자가 위에서 신음하는 예수님이 맞아줍니다. 부처님은 인생이 쩔쩔매고 있는 고난의 문제를 다 해결하고 여유롭게 인간을 맞이하고 인도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아직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고난 때문에 저 십자가에서 쩔쩔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인생의 고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분이 주님이 될 수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불교가 내세우는 부처의 모습은 언제나 여유롭고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 비해서 예수님의 대표적인 모습은 십자가상에서 괴로워하시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십니다. 이 청년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대단히 중요한 점을 찾아냈습니다.
사실 불교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고통에서 출발하고 모든 노력을 이 고통을 해결하는 것에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 즉 苦集滅道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苦는 인생의 근본문제가 고통에 있다는 것입니다. 集은 인간의 고통이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苦의 원인 분석입니다. 그리고 滅은 따라서 이 고통은 반드시 피할 수 있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道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석가모니는 이 고집멸도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라오는 불자들에게 이 고집멸도의 길을 가르쳐서 저들도 고통의 문제를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부처가 됐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처는 모든 불자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요 모범을 말합니다.
마치 등산 도중에 선두에 선 사람이 자기가 정상이 이미 올라가서 나중에 따라 오는 사람들에게 힘내라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올라오면 쉽다고 가르쳐주는 꼴입니다. 그래서 여유 있게 웃으면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맞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고난을 당해야만 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수록되어있는 이사야서에는 구약신학에서 소위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 부르는 노래가 4편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이 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임재할 메시아를 노래 형식으로 예언한 말씀을 말합니다. 첫 번째 노래는 메시아의 소명과 영광을, 두 번째 노래는 종의 승리와 메시아 왕국의 설립을 노래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중에 세 번째 노래로 메시아의 고난 그 자체를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네 번째 노래는 그 고난의 목적과 결과를 노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임하실 여호와의 종으로서 메시아가 어떤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언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 이미 700년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그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고난 당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별히 6절을 보겠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예언대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마 26:67을 보면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27:26을 보면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님은 구체적으로 매 맞으시고 조롱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불교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여 인생의 문제의 핵심을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그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인식의 왜곡에서 찾습니다. 즉 고통은 욕구의 좌절에서 오며, 욕구는 어떤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데, 집착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 즉 무명(無明)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고통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데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서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 이 세계에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속세의 일을 떠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고통은 실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단지 깨달음만으로 이 고통을 이길 수는 없다고 가르칩니다. 인식과 관념을 바꾼다고 우리 인생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물론 고통에는 심리적인 요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실재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인생 길목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갖가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아이고 죽겠다' 한숨과 신음소리를 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인생의 고난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 범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홀로 인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자 불안하고 능력도 부족해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겪습니다.
또한 죄의 삯은 사망이라서 반드시 죽게 되는데 오늘도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가면서 늙고 병들게 됩니다. 거기서 또한 큰 고통을 겪습니다.
그뿐입니까? 타락하면서 그 마음속에 사랑이 식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살다보니 서로 갈등이 빚어지게 되고 그래서 또 고통을 겪습니다.
롬 8장을 보면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 피조물 전체가 신음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 자연이 파괴되고 이 사회에 구조 악에 자리잡고 그 안에서 갖가지 재난으로 고통을 겪고, 사회의 모순 때문에 갖가지 부당한 일들을 당하면서 고통을 겪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죄로 빚어진 이 고통은 우리가 저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계 21:1, 4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저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에 가기까지는 이 땅에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지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 두 가지 태도를 보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마크로두미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long suffering입니다. 종종 성경에서 인내라고 번역된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통이 내게 엄습해 올 때 오래 참아주라는 것입니다. 고전 13에 보면 이것이 바로 사랑의 첫 번째 덕목입니다.
다른 하나는 견디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후포모네'입니다. 이 말은 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사회의 구조 악 때문에, 뜻밖의 사고나 자연 재해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음을 전하며 의롭게 살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고난이 엄습해 올 때 끝까지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그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오래 참고, 또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이 말씀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서 곤핍한 자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곤핍한 자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의 인생의 문제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모든 고통을 다 저주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고통을 다 같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다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 종류의 고통, 고난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가 의로운 고난입니다.
벧전 2:20을 보면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선행을 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
는 고난이 있는데 이는 참고 견딤으로써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벧전 4:15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악을 저지르다가 그 결과로 겪게 되는 고난인데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셋째가 애매한 고난입니다.
그 이유를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고난을 말합니다. 선행이나 악행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행의 피해로 또는 우주적인 구조의 문제로 인한 우발적 사고로 고난을 겪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연대성 속에 살기 때문에 생깁니다. 내 악행 때문에 내 실수 때문에 남들이 더불어 고난을 당할 때가 있고, 다른 사람의 악행이나 실수 때문에 더불어 내가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의 문제, 각종 재난의 문제에 끌려 들어가게 되어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입니다. 이런 애매한 고난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는 결코 부끄러운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또한 애매한 고난을 당하신 것도 아니고 의로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생의 고난을 짊어지시고 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을 대신해서 짊어지셨기에 그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부끄러운 고난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위로가 되는 고난이요, 의롭고 자랑스러운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저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십자가를 기독교의 심볼로 자랑스럽게 교회 정면에 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을 맞고 있습니다. 이 고난 주간의 절정은 바로 주님의 고난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가 의로운 고난을 당하셨다고 해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으면 정말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는 결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2000년 전에 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은 비밀입니다. 우리 머리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집니다.
저는 설교 준비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연히 제 방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게 됐습니다. 십자가에 고개를 떨구시고 달려 계신 주님을 그린 그림입니다. 한 동안 그 그림을 기도하면서 보는 가운데 제 마음속에 너무도 소중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주님의 음성으로 받았습니다.
우선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순간 저를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문득 요 10장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요 10장을 보면 선한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데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기 양들을 기억하며 그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저 십자가에서 저를 위해 죽으시면서 저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떤 젊은 임산부가 있었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하는 도중에 의사로부터 그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듣게 됐습니다. 남편하고 의논했습니다. 함께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자기들의 아이의 이름을 미리 지었습니다. 평소에 자기 뱃속에 있는 그 아이를 향해 이름을 불러가며 대화를 했습니다. 여러 달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하다보니 더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해산하는 날이었습니다. 진통이 옵니다. 초산이라 두렵기도 하고 몹시 아팠습니다. 그런데 무섭고 두려울 때마다 사랑하는 자기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을 참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용기 같은 것이 샘솟는 것을 느낍니다. 이 임산부는 해산하는 그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 자기의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자기 아이를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십가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마음속으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새생명을 주시기 위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저 십자가 위에서 장차 제가 죄의 값으로 치루어야 할 죽음의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문득 행 9장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가고 있는 바울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분명히 바울이 핍박한 것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양무리들을 핍박했지 주님을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당신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함께 아파하실 줄 아는 분이십니다. 물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겪으실 줄 아는 분이십니다.
기독교 명상가 리차드 범브란트가 쓴 승리하는 신앙이라는 책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는 아마도 문법시험을 보면 낙제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나와 너 그리고 그라는 대명사를 뒤죽박죽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과 제자들을 혼동하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과 당신의 자녀들을 혼동하십니다. 마치 엄마가 자식이 아파서 괴로워할 때 그 사랑 때문에 함께 그 아픔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자식이 자기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때 그 자식과 함께 한 번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 당할 모든 고난을 다 당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해야 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같을 줄 알아 이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이 고난 주간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결단하고 새롭게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