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몬왕 하눈
삼하 10장 1-19절
주요내용 = 완악함 처리
본문은 다윗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두 차례나 크게 승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아처리의 자세한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 중요한 교훈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처리를 뜻합니다. 그 동안 몇 번 강조한 적이 있지만 오늘은 좀 더 자세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1.자아처리의 본격적인 시기는 언제인가?
1절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여기 암몬 왕 나하스의 죽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불신앙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암몬이 누구입니까? 암몬은 롯이 둘째 딸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짐승 만도 못한 내력을 가진 벤암미의 자손입니다. 이것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영적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나하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이름 '나하스'는 '뱀'이라는 뜻입니다. 뱀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불신앙으로 꾄 간교한 짐승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울 때에 가나안 동편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했습니다.
가나안 동편은 천국에 이르기 전인 현세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상을 종합해 볼 때 암몬왕 나하스는 자연인의 불신앙과 타락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나하스의 죽음은 홍해 사건과 같이 구속사적으로 굉장한 사건입니다. 즉 그의 죽음은 예수를 구주로 믿어 거듭나는 중생을 뜻합니다.
2.그럼 자아란 무엇일까요?
1절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여기 하눈 왕이 담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의 정체입니다. 하눈은 누구일까요? 그는 나하스를 이은 왕으로 그의 이름이 '호의를 받다'는 뜻입니다. 대개는 사람들이 호의를 베푸는데 반해 이 사람은 호의를 받습니다. 즉 온갖 것이 나를 위해 되어져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인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눈은 자아의 정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처럼 자이란 자기 중심적인 마음입니다. 불신앙의 나하스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불신앙을 버리고 예수를 영접했어도 아직 해결해야 할 자아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3.그럼 불신앙 때의 마음이란 전혀 쓸모 없는 것일까요?
2절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이 말씀을 볼 때 암몬왕 나하스는 이스라엘의 원수였으나 다윗에게는 선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하스가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었다니 뜻밖이지요? 그러나 이는 마치 블레셋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선대했던 그런 유형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도 마음도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마음이 자기 중심으로 변형되는 자아일 때가 문제이지 인간은 도리어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이 내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아직 중생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애굽단계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끊임없이 감화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음은 진리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음을 원이로되" 하셨습니다. 롬7:25에 바울이 죄의 갈등 가운데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 섬기노라"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또 마음으로 섬기라고 교훈합니다.
솔로몬도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했고, 롬12:2에 "마음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마음만 새로워지면 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종교의 죄소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처리를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그 처리를 원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4.그럼, 자아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요?
2-4절의 내용입니다. 4절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나하스를 조문하는 다윗의 조문단을 하눈은 정탐으로 의심하여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을 자르고 옷은 중동 볼기가 나오도록 잘라서 쫓아냅니다. 당시에 수염은 명예와 권위의 상징이요, 수염이 깍인 사람은 노예였기에 수염은 자유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옷을 중동 볼기까지 잘랐다는 것은 보일 것이 다 보이도록 수치스럽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욱 곤욕스러운 것은 그것을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즉 수염을 얼굴 면적의 절반을 깍았으니 나머지는 내가 깍을 수밖에 없고, 또 옷의 대부분을 잘랐으니 나머지는 내가 벗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자아의 횡포를 잘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시133:2을 보면 수염과 옷은 영적권세와 성령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눈에 의해 이와 같은 것들이 크게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처럼 자아를 버리지 않으면 큰 손해와 수치를 당합니다. 자아는 선악과의 독입니다. 자아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자아는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자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자아처리란 우리에게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5.자아처리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 회복입니다.
5절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다윗은 수치를 당한 신하들에게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즉 에돔의 랍바성에서 당한 수치를 여리고에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여리고성에 자아처리의 비밀이 있습니다. 여리고의 무너짐은 자아처리를 가리킵니다.
랍바성도 자아의 상징입니다. 랍바 성은 여리고처럼 이중 성벽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이중성을 잘 묘사합니다. 또 여리고는 랍바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이듯 자아처리란 영적인 성장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얼마나 나를 죽이지 못하고 자기 십자가 안질려고 합니까? 이것을 죽여야 합니다.
그럼 여리고에서 어떻게 죽입니까? 마치 하나님의 군대가 자기들의 말도 의견도 생각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법궤를 중심에 모시고 성을 돌고 돌며 그들의 하나님 중심을 노출시키고 노출시키면서 돌고 돌았듯 나의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마지막 날 마지막 회에서 크게 외쳐부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행위는 여리고 작전의 최고의 절정이요 외쳐 불렀다는 점에서 이는 우리의 하나님 중심의 삶이 불만이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나의 기쁨과 찬송이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내 뜻이 묵살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됨을 진정한 나의 감사와 찬송이 될 만큼은 되어야 바로소 자아가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입니다. 이 여리고와 종려나무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구약의 종려나무와 신약의 종려나무 사건은 곧 여리고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흡사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부르던 아이들의 심령상태를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왕으로 영접하고 기쁨으로 찬양하는 그 마음이 바로 자아처리의 핵심이요 목표입니다. 즉 내 자리에 하나님을 앉힐 뿐 아니라 그것이 나의 기쁨이요 영광이요 나의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6.하나님께서 자아처리를 위해 자아를 드러내십니다.
6절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
암몬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로 다윗의 보복이 두려워 4개국의 아람 용병까지 돈 주고 기용하여 함께 그들의 수도 랍바 성의 안팎을 철저히 방비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랍바성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처럼 자아처리 시기가 절정에 달하면 자아는 더욱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자아들을 다 처리하시기 위해서 온갖 악한 환경을 붙여서 내 본질을 그러내고 드러내시는 작업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실망을 하는데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때 특히 자존심 때문에 갈등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가족이 내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혹은 나의 가장 약점을 찔러 그것 때문에 고통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왜 싸웠는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여쭈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7.자아처리는 분리작업이 그 비결입니다.
7-13절 내용입니다. 9절 "요압이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뺀 자 중에서 또 빼서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여기 요압과 아비새가 이끄는 다윗의 군대가 암몬과 아람의 군대의 사이를 끊어놓는 작전입니다. 암몬 군대는 랍바성을 지키고 돈으로 산 아람 군대는 성밖 약 6키로미터 지점에서 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몬군대는 난공불락의 랍바성을 가졌고 아람군대는 뛰어난 군대이기 때문에 이 둘이 힘을 합하면 어느 군대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그 중간에 들어가 두 사이의 협력을 끊어 놓아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와 같은 전법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스스로 포위되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분리작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으면 생명내건 도박같은 일을 계획했을까요? 그래서 요압은 군사를 두 대로 나누어 빼고 뺀 특공대로 먼저 아람을 공격합니다. 그 결과 아람군대는 자기 나라로 도망쳤고 그들만 믿던 암몬 군대는 풀이 죽어 성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자아처리의 성패는 분리작업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내 위치를 떠나 휘말려 들면 안됩니다. 문제가 생겨도 염려는 내 몫이 아니다 하고 말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속상할 일이 있어도 나는 죽었으니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혹은 내 뜻이 좋아도 아버지가 허락치 않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포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나는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순간에 휘말리기 일수입니다. 그래서 특공대가 되어야 합니다. 특공대란 목숨 내 놓은 군대입니다. 목숨 내어 놓고 어떤 일에도 말려들지 않고 이 하나님의 위치를 범치 않는 훈련이 바로 자아처리의 훈련입니다.
8.자아처리는 생각의 변화에 그 중점이 있습니다.
16절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편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여기 소바 왕 하닷에셀은 아람의 동맹국들을 다시 결집하여 헬람에서 다윗에게 재도전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대패하고 군대장관 소박까지 죽고 그 때부터 아람국들은 그 동안 자기들이 다윗을 아래로 보았던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다시는 암몬을 돕지 않게 됩니다.
여기 군대장관 소박이 무엇일까요? 소박의 뜻은 '영'입니다. 그러나 여기의 영은 생각으로도 해석 가능한 용어입니다. 주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공식과도 같이 영과 생각은 한 굴레에 속합니다. 즉 그 막강한 소박이 죽듯 자아처리의 절정은 생각의 변화에 있습니다(골3:10). 조련사가 동물들을 훈련시킬 때 동물들이 자기의 본능과 습관이 아닌 훈련지침대로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그 지글러가 벼룩을 훈련시킨 이야기로 유명합니다만 벼룩을 좁고 투명한 공간에 넣어 두면 처음에는 뛰다가 뛰어도 그 곳이 그 곳임을 알고는 뛰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밖에 내어놓아도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치 생각을 고친 아람국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위에 계시고 우리는 그 분의 지배 아래에 있음을 깨닫고 매사에 그렇게 적용해야 합니다. 이 일이 완성될 때 자아처리는 이루어집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아를 처리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자아는 수치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환경 속에 나타나시는 주님의 손길을 깨닫고, 주님의 위치를 월권하지 말고, 주님께 함부로 했던 그 동안 생각을 고치십시다. 그래서 자아처리를 잘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