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탈을 조각하다가 장승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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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30년을 넘게 나무를 깎는 지헌 이영식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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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여정(旅情)을 보면, 길 떠나는 이를 배웅하러 아내나 어머니가 동네어귀 정자나무나 성황당 앞에서 이별을 고한다. 눈물을 훔치는 아내, 떠나는 자식에게 노자에 보태라고 속곳에서 쌈짓돈을 내주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것이 바로 장승이다.
우리나라에 장승문화가 들어 온 때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진 풍상 속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또 성문 앞에 세워졌던 장승은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던 마을의 얼굴이며, 나그네에게 곧 쉴 곳이 있다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마을 지킴이 장승처럼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바로 나무조각가 이영식이다. 선생과는 대장간마을 조성단지가 한창인 우미내 마을에서 만나 서로 인사를 하고 그의 공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작은 공방에서 그를 만나 30년 나무인생을 들어 본다. (글쓴이 주)
-반갑습니다. 굳이 우미내에서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있을 텐데. "그곳에 구리시의 상징이라고 하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곳이라 함께 느껴보았으면 해서 그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고 목수들의 도구다루는 소리를 들으니 좋았습니다."
-영남말투이신데, 고향과 성장배경은. "56년 경북 울진 온정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지 꽤 되었는데 아직 고향 말이 잘 버려지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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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 새긴 글씨와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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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을 둘러보니 수석도 많고, 크고 작은 작품부터 다양함을 느꼈습니다. 공예가로 나무 조각가로 입신하게 된 동기는. "누구에게나 계기는 있기 마련이지요. 제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했지요. 그러다 서울종합직업학교에서 목공예를 전공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나무를 깎고 다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0여년 나무 조각 일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작업은. "모두가 추억거리지요. 그래도 1년 넘게 단양 구인사 중수작업에 함께 한 일과 88올림픽기념전국공예대전에서 하회탈 8종 8점을 만들어 출품하여 입상한 것이 제 존재를 알리게 되었고, 그전에 84년에 서울미술제 입상한 것 등입니다."
-이곳에 수석이 많은데 수석과의 인연은. "수석과의 인연이라기보다 수석받침과의 인연이지요. 서울에 올라가기 전 대학에 입학하려고 부산으로 내려갔지요. 그러다 부산에서 알아주는 수석, 분재를 하시는 분을 만나 군에 가기 전까지 2~3년간 수석받침대 만드는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이 조각칼을 처음 댄 계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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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반(과일과 차 받침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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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시에는 언제 오셨고 동기는. "구리시에 자리를 잡은 때는... 84년이니까 어느덧 24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교문8리 지하실 방에 처음으로 제 작업실을 가졌지요. 이곳에 오기 전에는 많은 전문가에게 조각칼을 다루는 일과 마감하는 것을 배웠지요. 독립할 나이도 되고 해서 흔한 말로 머리를 얹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교문초등학교 부근입니다.
-그 공방에서 주로 만드신 작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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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선생이 최초로 개발한 하회탈 목걸이(왼쪽. 검정색) 오른 쪽은 요즘 우리가 흔히보는 하회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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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목각을 했습니다. 훌륭한 선생님들의 글을 빌려 조각도 하고 나름대로 관광 상품을 개발했습니다. (목걸이를 보여주며) 이 작품이 제가 처음 만든 목걸이입니다. 하회탈 중 양반탈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지요. 이곳에 정착하기전도 그랬고 정착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전통 탈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했지요.
-벽에 걸린 서예작품도 이 선생님의 글씨입니까. "제가 쓴 붓글씨지요. 목각 일을 하다 보니 남의 글을 빌려 쓰는 것도 어렵고해서 구리시에 오자마자 설파 문공수 선생이 운영하는 서예원에 등록하여 3년을 넘게 배웠습니다."
-서각에도 시서화(詩書畵)가 필요하군요. 설파선생과 특별한 인연은 없었나요. "왜요. 그분과 문하생들과 전시회도 가졌었지요. 그때는 겁 없이 뛰어 들었지만..."
-일전에 유채꽃단지에서 장승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하시던데... "아. 그거요. 너무 작지나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목각을 하면서 특히 우리나라의 정서와 맞는 탈을 조각하면서 언젠가는 장승 마을을 한번 세웠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가졌습니다."
-장승과 탈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텐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전통 탈에도 해학과 우리의 정서가 담겨있듯이... 크기의 차이는 나지만 둘 다 우리의 얼굴이 아닙니까."
-장승에 집착하시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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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용 장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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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 전공은 목각입니다. 하지만 장승에 매료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장승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냄새입니다. 마치 죽은 듯 자빠져 있는 나무에 눈을 만들고, 코를 세우고, 입을 그리면 새 생명으로 태어나지요. 그리고 작은 조각칼로 탈을 장승은 솟대와 더불어 우리의 마음이며 사랑이 아닙니까.
-장승을 처음 깎으신 때는. "10년 전 충북 단양에 온달마을(기념관)이 생기면서 마당에 200여개의 장승을 세웠지요. 그전에도 장난삼아, 연습삼아 몇 개를 만들어 보았지만 조각가로 초청되어 장승을 깎을 때는 정말 가슴이 설랬습니다. 그때 3쌍을 깎아 심었지요. 얼마 전에 가보니 장승마을은 사라지고 제 작품은 하나만 남았더군요. 그리고 작년 겨울에 옹진군 대의작도에서 신바람 나게 장승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바닷바람도 칼바람도 모르고 작업을 했습니다.
-요즈음 근황은. "누구나 한번쯤은 고통과 고행의 길로 간다지요. 저 또한 IMF의 희생양입니다. 대부분 공예인들이 그 고비를 잘 넘기지 못했지요. 저도 그 부류에 속합니다. 눈물을 머금고 공방을 정리하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을 합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RU READY라는 영화세트(서울영화촬영소)도 디자인을 했고요. 요즘에는 간간히 들어오는 가구 디자인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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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심이라고 쓴 글씨는 이영식 선생의 친필이다. |
|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 나이도 있고... 구리한강시민공원에 장승테마공원을 구축하는 꿈을 꾸어 봅니다. 해학적인 작품을 구상하고, 구리시민이 참여하는 다양한 장승과 솟대를 두어 과거 우리 민초들이 장승을 보고 위안을 받고, 솟대를 세워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듯이 희망을 주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영식선생의 주요경력> -아세아미술초대전 찬조작가 -한국미술대전 특선(2회) -국제미술대전 입선(1회) -동남아 6개국 순회전시 -중일 파차체 입상 -동아서화대상전 초대작가 -88올림픽기념전국공예품경진대회 입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