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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2010.8.16
소탈하고 구수한 인품과 일을 많이 해 거칠어진 손, 그리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하루종일 집안청소 등 가사일에 전념하거나 남편이나 아이들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쏟는 여성이, 지금까지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성애가 깊은 여성의 이미지였다.
멋을 잔뜩 부리거나 화장을 많이 한 여자 (또는 그런 어머니)는 현모양처형이 아니라 살림도 잘 못하고 아이들도 잘 돌보지 않는 <나쁜 여자>로 간주되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어떤 학생의 어머니가 학부형으로서 학교에 올 때 화장을 야하게 하고 오면 아이들끼리 뒤에서 수군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저 어머니의 직업이 수상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달라진 것 같다. 모녀(母女)가 함께 걸어갈 때, 어머니가 세련되게 야하여 그 딸의 어머니 같이 보이지 아니하고 언니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오히려 그 어머니의 <젊음>, 아니 젊어지려는 노력을 칭찬하고 또 딸도 자기가 그런 어머니를 가진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가정주부가 멋을 안 부리고 일만 하면 좋은 엄마와 좋은 아내가 되고, 멋을 내는 데 신경을 많이 쓰면 살림과 육아에 게으르고 이기적인 엄마나 아내가 된다는 생각에서부터 한시바삐 탈피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엄마나 좋은 아내는 우선 엄마나 아내이기 이전에 스스로의 주체적(主體的) 자아(自我)에 대해 당당한 자부심을 갖는 여자여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하여 항상 불만을 느끼면서 그러한 자기 상실심리(自己喪失心理)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남편이나 자식에게 무조건적 이타주의와 희생주의로만 나가는 여자라면, 오히려 자식이나 남편에게 더욱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가정주부가 가사일에 쏟아야 하는 시간이 단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부의 지나치게 <희생적인 봉사>는 자칫하면 집안식구들에게 부담감만을 안겨주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지나친 청결벽(淸潔癖)을 가진 여성이나, 자식에 대한 희생적인 모성애를 방패삼아 자기가 못 이룬 꿈을 자기 자식이 어떻게 해서든지 이루게 하려고 자식을 달달 볶아대는 여성들은, 항상 억울해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기 쉽다. 또는 자기 몸을 전혀 돌보지 아니하고 남편에 대한 헌신적 내조(內助)에만 몰두하는 여성 역시 그 예후(豫後)가 좋지 못하다.
그러한 여성일수록 은근히 자기의 공을 과시하려 들기 쉽고 공치사가 심하며, 자기의 희생적 봉사를 식구들이 몰라 준다고 항상 투덜거리며 나날을 보내게 된다. 지나친 이타주의는 대개 <위장된 증오>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역시 원래 동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이어지는 대자연의 생태계에서 남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내>가 먼저 있고 <남>이 있는 법이다. 남편이나 자식이 나보다 먼저일 수는 도저히 없다. 그런데도 아직껏 진정한 모성애란 철저한 자기희생을 전제로 할 때에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딱한 일이다.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남성들의 이기심과 여성에 대한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좋은 아내는 남편에게 누이도 되고 신부도 될수 있는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기존의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여성들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기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여성, 진짜로 진정한 나르시시즘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라면,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누이도 되고 신부도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여성의 결혼생활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에, 그 실패의 표면적인 이유는 많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숨겨진 진짜 원인, 즉 이면적인 이유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대개 <사랑>이 <증오를 운반하는 가장된 도구>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떤 중년부인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그 여자는 남편이 몇년째 손을 물로 씻지 않은 채 식사하기를 고집해 왔기 때문에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이 부부간의 갈등의 표면적인 원인은 이처럼 간단하지만, 그 이면에는 좀 더 복잡하고 심층적인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이 중년부인이 남편에게 가진 불만은 사실 한갖 구실에 불과하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불평은 대개 심각한 <심리적 적개심>의 위장인 수가 많은 것이다. 즉, 이 여자는 지금의 남편에게만이 아니라 원래부터 모든 남성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항상 남성들을 바라볼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한 분노의 원인은 대개 어린시절에 아버지한테 사랑을 받지 못했다거나, 사춘기나 청춘시절에 남자들에게 구애(求愛)를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잠재의식 속에 쌓이고 쌓인 열등감이기 쉽다. 그러한 열등감에서부터 나오는 남성혐오증 (또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혐오증) 은 그 사람이 차츰 성장해 가면서 잠재의식 속으로 꼭꼭 숨어들어가, 자기 스스로도 그러한 자기 마음의 본태(本態)를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근본적 남성혐오감이 오히려 <남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자신의 정체를 위장, 방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여성들은 남편을 위해 더욱 더 희생적으로 봉사하여 자신의 근본적 적개심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녀의 잠재의식은 항상 자신의 적개심에 어떤 <당당한 이유>를 붙여 자연스럽게 폭발시킬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앞서 예로 든 부인의 경우, 그 여자는 남편이 자기의 <위생적 식사관리>에 따라와 주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삼아 드디어 남편에게 <이혼 선언>이라는 마지막 총뿌리를 겨눈 셈이다.
이러한 여자는 자식에게도 원만한 가정교육과 모성애를 베풀어 줄 수가 없다. 자식이 자기의 극진한 정성과 희생을 몰라 준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불평하면서, 겉으로는 <남보라는 듯이> 뼈를 깎는 듯한 모성애를 베풀어 준다. 예컨대 대학입시 준비를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라면, 자식이 공부를 끝내고 잠들 때까지는 나도 자지 않고 버티고, 자식이 밤을 새우면 나도 밤을 새운다는 식으로 <미칠 듯한> 애정을 아들에게 쏟아 붓는다. 그러면서도 그 어머니의 잠재의식 가운데는, 자기의 아들 역시 아들이기 이전에 한 <남자>라는 생각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잠재의식은 오히려 아들이 대학입시에 실패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기 쉽다.
그녀의 아들이 굳건한 자기주장과 당당한 고집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있는 소위 <마마 보이(mama boy)>인 경우라면, 그 아들은 대학입시에 실패하기로 작정돼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잠재적 소망이 이심전심으로 아들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에, 그 아들의 <의식>이 아무리 대학입시에 합격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잠재의식>은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 대학입시에 실패해야만 한다는 것을 숙명적인 체념으로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아들이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나면 그의 어머니는 내심 기뻐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남자는 역시 믿을 게 못 돼. 내 뱃속에서 나온 아들이라고 해도 별수 없지. 내가 그토록 희생적으로 그 녀석에게 쏟아 부은 정성을 몰라주고 입시에 떨어져 버리다니.....역시 무자식이 상팔자야, 상팔자 !>
위에서 예로 든 경우는 어찌보면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처럼 심하지는 않더라도 이와 유사한 심리를 갖고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많다고 나는 본다. 자기가 겪은 불행한 어린시절이나 청춘시절에 대한 막연한 보상심리로써, 어떤 특정한 남자에게 잠재적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자들조차 모든 남자들을 마치 원수처럼 대한다. 남성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투쟁>해 나가는 것이 현대여성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이요 당연한 <노선>이라고 선전해 대는 기(氣)가 센 여성운동가들의 호소에, 요즘 여성들 특히 배운게 많은 여성들이 차츰 귀를 기울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은, 아무리 명분이 그럴 듯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외쳐대는 주장의 이면에는 <개인적 적개심>이 항상 개재(介在)되어 있기 쉽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적개심이 공적(公的) 적개심으로 전이(轉移)될 때, 그 파괴력은 엄청난 영향을 일반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다.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나치즘>이라는 허울좋은 공적(公的) 명분으로 사로잡아 독일을 파멸로 이끌어 간 것은, 그의 불우한 어린시절과 여인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던 청춘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가 주(主)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스러운 여성, 진정으로 사랑스러운 아내가 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스타(star)>로 만들 필요가 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다시 되돌이켜 새롭게 출발할 수도 없는 일이고, 남자들에게 구애를 받아보지 못한 채 그늘에 숨어 한(恨)을 씹어 삼켜야만 했던 소녀시절을 다시금 재구(再構)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나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으로 마음을 굳게 무장시키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내가 <제잘난 맛>에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당당한 자신감과 나르시시즘을 창조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여성의 경우 <외모 컴플렉스>는 평생을 지배하게 되는 <무서운 악마>이기 때문에, 보다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멋의 창조를 통하여 항상 신부화장을 하는 기분으로 자기 자신을 가꿔 나가야만 할 것이다. 내가 <야한 여자>를 얘기할 때마다 주로 <겉이 야한 여자>에 중점을 두어 얘기하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이다.
누나가 동생 다루듯이 남성을 다루고, 지극한 모성애로 사랑해 줄수 있는 여자는 그래서 행복한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여성들은 공연한 열등감에 시달리지 말고 남성들이 갖고 있는 <자궁회귀본능>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질고 예쁜 <누이>가 되도록 노력하자.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여성은 행복하다. 남성들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 남성들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언제나 <아름다운 누나>의 치마폭에 매달려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외로운 고아>요 <외로운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