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의문의 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
그 후, 불을 사용하고 육식을 하면서 정상적인 직립보행(erect)을 한 호모 에렉투스(160-250만년전)가 나타나 1백만년 전부터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동하였으며, 30-40만년전 구인으로 대체되기까지 번성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이들은 큰 키(5.5피트)에 더 커진 뇌(750-1,000cc)와 작은 치아를 가졌다고 한다. 사람쪽으로 더욱 진화했다는 주장이다.
처음으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는 쟈바인(Trinil, Indonesia 100만년전)과 북경원인(Choukutien, China 50만년전) 및 프랑스의 선사학자인 앙리 드 류므레(1966)가 아라고 동굴(동부 피레네의 도타벨, 1971)에서 발굴했다는 인골(45만년전), 네브라스카인 등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이 시기가 빙하기 초기이므로 불을 사용하고 주먹도끼를 포함한 아츄리언 돌도구(Acheulean stones)도 사용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현생인류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쟈바의 솔로강변에서 발굴한 인골(25만년전)은 뇌용적이 1,100-1,200cc인 반면 같은 지역에서 발굴한 다른 유골(홍적세 중기의 호모 에렉투스)은 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의 많은 연구결과 이처럼 주장되어 왔던 호모 에렉투스의 유골들이 동물의 것이거나 심한 경우 새로운 뼈들을 가공한 사기극으로 판명이 되어 우리에게 놀라움을 더하게 하고 있다. 이제 그 중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① 쟈바인(The Java Man)
듀보아(Eugene Dubois 1858-1940)는 화란의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독일의 예나 의과대학(Jena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사진 10). 거기에서 7년간 독일인 스승 헤켈(Ernst Haekel)의 영향을 받아 진화론자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인류진화의 ‘빠진 고리’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헤켈은 “빠진 고리‘의 이름을 피테칸트로푸스 알라루스(Pithecanthropus alulus)라고 미리 이름까지 지어 놓은 상태였다(Wendt 1972). 그 뜻은 ’말없는 유인원‘(speechless ape-man)으로 호미노이드는 사람과 외관은 같으나 단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상상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헤켈은 막스(Gabriel Max)라는 화가로 하여금 이 유인원의 상상도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상상력으로 듀보아를 교육하였다.
마침내, 듀보아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좋은 취직자리들을 물리치고 화란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es)와 해군군의관 신분으로 8년간 근무하기로 계약하고 인도네시아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쟈바섬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수마트라에서 50명의 현지인을 고용하여 400상자분의 유골을 발굴하였다. 유골은 화란으로 보내어 조사토록 했으나, 대부분 동물의 뼈들로 확인되었다. 그는 친구(van Rietschoten 1889)가 쟈바섬의 와드잭에서 발견한 인골을 기증받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1889년부터는 쟈바의 솔로강변에 위치한 내륙지방(그림 12)을 중점적으로 탐사하였다.
그러던 중 제4기 지층에서 문제의 와드잭(Wadjac)에서 두개골(Wadjac skull 1,550-1,650cc) 두 개를 추가로 찾아 내었다. 그리고, 와드잭에서 6마일 거리에 있는 트리닐(Trinil) 지역으로 이동하여 7년간(1891-1898) 집중적으로 답사하였다. 1891년, 마침내 모래언덕 속에서 문제의 두개골(900cc 추정, 사진 11)과 어금니를 한 개씩 발굴하였다. 다음 해(1892년)에도 15m 인근에서 사람의 대퇴골과 어금니(10월)를, 1898년에는 앞어금니를 추가로 발굴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인부들이 3년간 일만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제방을 파 헤쳤다. 대부분의 뼈들은 동물의 것이었고, 연구의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치아 단 한개(1891.9), 다른 치아 한 개와 두개골(1891.10), 넓적다리뼈 한 개(1892.8), 이어서 발견한 치아 한 개(1892. 10)뿐이었다. 더구나, 두개골은 넓적다리뼈가 발견된 곳에서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치아들은 두개골 지점에서 3미터 밖에서 발굴한 것들이었다(Bowden 19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보아는 이 유골들이 한 사람의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조립하여 연구 검토한 결과 50-100만년전에 직립보행을 한 현생인류의 조상의 것이라 판단하고 안드로피테쿠스 에렉투스(Anthropithecus erectus)라 명명하였다. 이는 ‘직립 유인원’이라는 뜻이다. 그 후, 넓적다리등의 모습이 인간쪽을 닮았다 하여 ‘직립원인’을 의미하는 피테칸트로프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로 개칭하였다(그림 13).
1893년, 복무기간이 지나자 그는 일단 귀국하여 유럽각지를 돌면서 자신의 탐사내용에 대하여 강연하며 다녔다. 그 결과 명성은 얻었지만, 그 유골들이 과연 한 사람의 것이냐는 의문때문에 학계와 교회들로부터 배척되었다. 1895년에 열린 화란의 국제동물학회(The 3rd International Congress of Zoology, Leyden, Holland)에서 그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참석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영국학자들은 유골의 주인공을 사람의 것으로 본 반면, 독일 학자들은 원숭이로 해석하였다. 프랑스 학자들만이 그 중간형태의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발표가 있은 후 유럽의 인류학자 24인이 다시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 결과, 10명은 유인원(동물)으로 판정하였고, 7명은 원인(猿人)이라 하였다. 독일의 영장류 해부학자인 버효(Rudolph Verchow)는 두개골과 대퇴골이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으므로 한 동물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견에는 진화론자인 웰스(H.G. Wells)도 동의하였다.
그 후, 그는 감정을 숨기고 곧잘 화를 내는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발굴한 유골들을 외부에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화석들은 지금도 화란 라이덴의 자연사박물관(Leiden Natural Museum)에 비밀스럽게 보관된 채 어떠한 연대측정도 한 적이 없이 보관되고 있다. 비록 부정확한 연대측정법이라 할지라도 이를 이용하여 하루 빨리 듀보아의 유골에 대한 연대를 측정하여 의구심을 풀어야 마땅할 것이다. [Taylor; ibid, p 24] 그는 1898년에는 생계를 위해 비전공 분야에 박봉인 암스텔담 대학의 결정학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1907년, 독일 과학아카데미의 세렌카 교수(Selenka)가 이끄는 조사팀이 듀보아의 발굴내용을 확인하려고 쟈바를 방문하였다. 듀보아는 그들에게 아무런 협조도 안 했을 뿐더러 유골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연구팀은 트리닐에서 만여톤에 달하는 흙을 파 헤치면서, 43박스에 달하는 화석을 발굴했으나, 듀보아가 발견했다는 내용물들은 전혀 확인할 수 없었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고 보고하였다(Keith 1911). 그들이 확인한 흥미로운 일 중 한가지는 듀보아가 파 내려갔던 화석들이 나오는 지층은 인근지역의 화산에서 흘러 내리는 용암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이는 쟈바인을 50만년전으로 추정한 방식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14년, 듀보아의 쟈바인은 호주에서 몇 년전에 발굴한 탈가이 두개골(Talgai Skull)의 발굴소식에 가리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엔 이미 진화인류학자들의 활동으로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가 인류의 연결고리로 인정되어 가고 있었던 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듀보아는 다시 와드잭 두개골을 공개함으로써 학계에 복귀를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도 듀보아는 자신이 와드잭 인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감추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듀보아는 자신이 발굴한 유골들이 인류의 직계조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당시 와드잭(Wadjac)에서 발굴한 인골(Wadjac skull 1550-1650cc)을 30년간이나 숨겨왔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많은 학자들도 같은 지역(Trinil, Sangiran)에서 듀보아가 발굴한 것과 비슷한 수많은 동물뼈와 더불어 현대인의 인골을 발굴하였다.
듀보아가 70세가 되던 해, 독일의 저명한 진화인류학자인 케닉스발트(G.H.R. von Koenigswald 1902-1982)는 4년간에 걸쳐(1935-39) 듀보아와 같은 지역(Sangiran)에서 듀보아가 발견한 것과 유사한 유골들을 발굴하였다(사진 12). 그러나, 손발뼈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치아가 붙은 턱뼈와 두개골의 윗조각을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ropus Ⅱ, Ⅲ, Ⅳ)라 명명하면서 “듀보아가 발견한 두 어금니는 오랑우탕의 것이며, 앞의 어금니와 대퇴골은 사람의 것이고, 치아는 원숭이의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리고, “쟈바인은 원숭이와 비슷한 동물”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Franzen J.L.; In Memoriam Gustav H. R. von Koenigswald, Seckenbergiana lethaea, 64(5/6), pp 381-402, 1984], [P.V. Tobias; The Life and Work of G.H.R. von Koenigswald in auf den Spuren des Pithecanthropus, Ges., 34, pp 25-96, Frankfurt, 1984]
듀보아는 돌연히 자기가 발굴한 두개골은 원숭이의 것이며, 쟈바인은 커다란 기본원숭이(Gibbon ape)의 일종이라고 문서로 발표하였다. [W. Homells; Mankind in Marking, pp155-156, 1935]. 이는 그의 주장을 원숭이와 현대인의 중간지점으로 옮겨 놓으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고백내용은 벤트(Herbert Went 1955), 브레이스와 몬태규(C. Loring Brace & Ashley Montagu 1955), 버드셀(Joseph B. Birdsell 1975) 등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두개골 화석연구의 권위자인 부울과 발로아(Marcellin Boule & H. M. Vallois)는 듀보아가 발굴한 두개골의 윗부분을 철저히 분석한 후 “이들은 침팬지나 긴팔원숭이를 닮은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독일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버효(Verchow of Berlin)는 두개골의 안와(眼窩)의 후면이 협착된 것으로 보아 원숭이의 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뼈들이 모두 한 생명체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즉, 여러 동물의 뼈들을 조립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W.A. Criswell; Did Man Just Happen?, Zondervan Publishing Co., Grand Rapids, p 86, Michigan, 1973].
듀보아가 죽은 후(1940), 진화론자들은 쟈바인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른다(Mayr 1950). 지금도 학자들간에는 쟈바인이 신종(중간종)인지 인간의 변종(현대인)인지 대립하며 논쟁중이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러한 유골들이 과연 한 사람의 것이었느냐는 하는 것이다. 원숭이의 두개골과 사람의 대퇴골이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간직한 채 쟈바인을 진화학자인 톰슨(Thompson 1958)은 <다윈의 기원론>의 복사판에서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왔던 원숭이와 현생인류의 연결고리라고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② 북경원인 (北京原人 The Peking Man)
북경원인은 또 하나의 “빠진 고리”로 주장되어 온 대표적인 호모 에렉투스 중 하나이다(사진 13). 스웨덴학자 즈단스키(Otto Zdansky 1921)는 북경근교(45Km)의 쵸우코우티엔(Choukoutien 周久店)의 한 언덕(龍骨山)에서 사람의 것과 유사한 치아 두개와 많은 동물뼈들을 발굴했으나, 그는 아무런 설명없이 고국으로 돌아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카나다의 내과의사였던 블랙(Davidson Black)은 마튜(William Mathew)가 쓴 <기후와 진화>(Clime & Evolution)를 읽고서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한다. [Dora Hood; Davidson Black: A biograph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64)]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1914) 필트다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학자중 하나인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로부터 필트다운인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아직 필트다운인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그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설립한 북경 유니온의과대학(Peking Union Medical Colledge)에 인류탐색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교수에 취임키로 하고, 1919년 부인과 함께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쟈바인을 발굴하려 했던 유진 듀보아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
이들은 다음해부터 석회석 채굴장이 많이 있는 북경서남쪽 45Km지점의 주구점일대(龍骨山)를 탐사했다. 그러나, 찾던 유골은 나타나지 않았다. 1926년부터는 중국학자인 비중문(裵文中)과 양종건(揚鐘健)을 비롯하여 프랑스 신부로서 중국지질학부 고문인 샤르뎅 신부와 미국인 지질학자인 바바 등이 참여하였다(사진 14).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영국의 필트다운사건 때 거짓유물을 묻은 것으로 판명된 샤르뎅이 1923년부터 북경인의 발굴에도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당시에 교황청으로부터 일체의 저술활동을 하지 않도록 금지령을 받고 있던 때였다. 사진중앙의 세 번째 사람이 비중문이고, 중앙에 키가 가장 큰 사람이 샤르뎅이며, 그 옆에 담배대를 물고 있는 사람이 블랙이다. [南條郁子譯; 人類ノ起源, p 97, 創元社, 大阪, 1995, 원문은 Thomas Herbert; L'Homme avant l'Homme].
이들은 재정이 고갈되어가던 1927년에 마침내 그는 잇빨 한 개를 발견하였다. 불랙(1927)은 이러한 치아의 주인공이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의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50-100만년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라 단정하고, 시난트로푸스(Sinanthropus pekingsis)라 명명하였다. 치아 하나로 이렇게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명명한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저 놀랍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 후, 이곳에서는 인골(10)도 발견되었으나 이러한 사실은 일체 발표되지 않았다.
이러한 발표에 고무된 북경유니온대학의 설립자인 록펠러 재단은 인류화석의 연구기금으로 8만불을 추가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에 거금이었던 이 돈으로 그는 100명의 인부를 발굴현장에 투입하였다. 한 암석에서 떼어낸 두개골의 용량은 1,000cc 보다 작았으나, 블랙은 이 두개골이 자기가 명명한 시난트로프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블랙처럼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헤메고 있었던 샤르뎅을 위시하여 진화인류학들인 스미스, 부울, 케닉스발트 등은 이 두개골을 보고서 원숭이의 것과 유사하며, 듀보아가 쟈바에서 발견한 것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쟈바인과 북경인을 한 데 묶어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 명명하였다.(Koenigswald & Weidenreich 1939, Teilhard de Chardin 1965).
그 후에도 블랙은 1929년부터 2년간 비문중 및 스웨덴의 인류학자인 앤더슨과 같이 화석화된 두개골 파편(30개, 800-1,100CC)과 아래턱뼈(11), 대퇴골(7), 팔뼈(2), 치아(147)를 발굴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뼈들을 연결하고자 수백톤의 암석들을 폭파하였다(Day 1977, T. Chardin 1965). 그러나, 코끼리, 사슴 등의 동물뼈들만 나올 뿐 시난트로프스의 뼈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150피트까지 지층을 파 내려 갔지만,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한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934년, 블랙은 41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북경인의 유골조각들을 조립하던 바이덴라이히(Frantz Weidenreich)였다. 그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립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북경인(Peking Man)으로 알려진 모조품인 것이다. 뇌용량 1,000cc에 50만년전에 살았다는 원인(猿人 hominoid)으로 발표하였다. 그들은 북경인의 치아가 현대인과 약간 다르며, 불과 연장을 사용하였고 식인습관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유골의 발굴작업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계속되어 45개의 인골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그러던 중, 북경인 유골에 관하여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전까지 수집한 유골들을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송하려고 북경에서 해안지방인 진황도(秦皇島)로 이송하던 중(1941.12.7) 치아 두개를 남기고는 유골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한 설에 의하면 이 유골을 실은 배가 황해에서 전복되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더구나, 1932년부터 발굴작업에 참여한 바이덴라이히가 만든 리스트에 기재된 14개의 두개골과 나머지의 모든 유골들도 2차세계대전 중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다. 이차 분실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진화학자들이 관리하여 오던 많은 유골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고 지금은 출처불명한 주형물들(casts)과 치아 두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고리’가 된 것이다. 따라서, 북경원인의 연구를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와 같은 진화학자들이 남긴 연구논문과 그림 및 플라스틱 모조품에 의존해야하므로 학술적 검증이 현재로서는 어려운 실정이다(Patrick O'Conell 1969, Shapiro 1971, Janus & Brashler 1975).
그 후, 1966년까지 추가로 발굴된 22구의 인류화석들(남19, 여3)도 모두 파손되거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삼차 분실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 번에 걸친 이러한 의문스러운 증발사건은 진화론자들이 역사적으로 자행했던 다른 조작사례들과 관련하여 상기할 때, 그들이 프라스틱모조품을 만들 때 사용했다는 뼈조각들이 과연 진품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은 프랑스 인류학연구소의 구석기연구교수인 헨리 부루일(Henry Breuil 1931)이 샤르뎅이 발굴했다는 동일한 장소에서 현대인이 일한 작업장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마일 밖에 있었던 돌과 뿔사슴들의 뼈들이 이 작업에 이용되었으며, 불을 지피는 용광로의 흔적도 발견했다고 한다. 이러한 흔적을 부루일은 잿더미가 7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H. Breuil; Le Feu l'industrie de pierre et d'os dans le gisement de “Sinanthropus' a Chou K'ou Tien(The Fire and the Industry of Stone and Bone in the Layer of Sinanthropus at Chou K'ou Tien), L'Anthropologie(Paris), 42(March), p 1-7, 1932]. 이처럼 현대인이 사용한 잿더미를 진화론자들은 북경원인이 흡사 불을 사용했던 것으로 각색시켰던 것이다. [David Pilbeam; The evolution of man, Thames and Hudson, London, 1970].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하려고 대영박물관에 근무하던 마우리스(Maurice 1950)의 지휘하에 북경인이 굴속에서 불을 집히고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그림 14). 그리고, 대영제국박물관 입구의 층계길에 걸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전혀 사실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 아니다. 불의 이용에 관하여 그들의 일원인 샤르뎅(1934)은 후일 “불의 흔적은...수미터의 깊이까지 쌓여 있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Teilhard de Chardin(1956); The appearance of man translated by Cohen, 1965]
그리고, 진화학자인 루캉(Rukang & Shenlong 1983) 등도 불의 흔적은 6미터나 되는 대규모의 것이라고 확인하였다. [Taylor; ibid, p 239] 그러나, 블랙과 샤르뎅(1933)은 그러한 보고내용(1932)은 무시한 채, 자기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 보낸 것이다. 그들은 이 글 속에서 용광로작업을 ”인공적 불의 흔적“이라는 간단한 한 마디의 표현으로 무시해 버렸다. [Taylor; ibid. pp 238-239]. 부로일은 그 밖의 다른 작업장의 유물도 추가로 발굴하여 그 지방에 조그마한 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하였으나, 그 진열품들 역시 어느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Bouden 1977).
1934년에는 현대인의 두개골(세 개는 완전한 형태)도 발굴되었으나, 샤르뎅(1965)은 ”윗 동굴“(upper-cave)에서 발견된 것처럼 고쳐 기술하였다. 사실적 기록을 조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류의 두개골 발견사실을 감추려고 바이덴라이히(1939)는 5년간 활동하였다. [F. Weideneich; On the earliest representation of modern mankin recovered on the soil of East Asia, Peking Natural History Bulletin, 13, p 161, 1939]. 그러한 두 사람의 활동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부로일이 발견했던 방대한 잿더미나 현대인의 두개골에 대해서는 일체 소개하지 않고 있다. 진실이 이처럼 조작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은 학문적인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우든(Bouden 1977)은 브루일의 보고서가 모든 교과서와 책자에 인용되는 것을 억압하기 위하여 진화론자들이 갖은 노력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Macolm Bouden; Ape-men: Fact or fallacy? Sovereign Publications, Bromley, UK, 1977]
지금까지 전해지는 에피소우드 중 하나는 샤르뎅이 스승인 부울을 주구점에 초청했을 때 부울은 부스러진 원숭이의 두개골을 보고서 매우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는 지적하기를 현대인들이 (과거에) 주구점에서 모종의 산업에 종사했으며, 두개골들은 단순히 원숭이의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원숭이의 두개골이 부스러진 것과 다른 두개골 부위가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작업자들이 원숭이의 뇌를 먹고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울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과욕을 부려서 시난트로프스를 주구점의 지배자라고 추리한 것은 아닌지 (그것이) 동물이라는 기준에서 다시 자문해 보아야 한다.” [Marcellin Boule and H.V.Balloise; Fossil man Translated by M. Bullock, Rerint, Thames and Hudson, London, 1957]
더욱, 흥미있는 일은 이 발견에 관여했던 샤르뎅 자신도 북경원인이 큰 원숭이라고 고백했으며, 듀보아도 자신이 발견했던 쟈바인이 원숭이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F. Weidenreich; Pithecanthropus and Sinanthropus, Nature, 141(Feb. 26), p378, 1938]. 그 후, 바이덴라이히(1948)와 샤르뎅(1955)이 모두 죽자 그들의 추종자들이 북경인의 공식명칭을 호모 에렉투스 페킹시스(Homo erectus pekingsis)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우든(1984)은 말하기를 이러한 유골들의 주인공이 당시의 석회석을 채굴했던 사람들과 이들이 채굴작업을 하면서 원숭이를 비롯한 동물들을 사냥하여 잡아 먹은 후 불속에 버린 동물들의 뼈들이 혼합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구점 일대는 지금은 거의 채석장으로 변하였고 동굴들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다만, 작은 전시관에 몇 점의 화석인골과 그 곳에서 출토하였다는 유물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을 뿐인데, 이러한 화석뼈들은 주로 동물들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영문으로 기록된 수많은 북경인에 관한 서적들을 살펴 보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두개골의 숫자는 14-40개, 손발의 뼈들은 3-11개, 발굴지점은 ‘윗 동굴’에서 ‘아랫 동굴’로 다양하나, 현대인의 거주흔적에 대해서는 일체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샤르뎅은 두개골이 큰 원숭이의 것이라고 하여 유인원일 가능성을 부각시킨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한다면 북경인은 진화론자들이 선입관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유골들을 자기들이 상상한 방향으로 조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Taylor; ibid, p 241]
주구점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동굴에서는 사암의 물고기 화석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석회석 채굴업자들이 그 곳에 거주하면서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아 먹고 버렸거나, 홍수와 같은 대격변에 의해 사람과 동물들이 갑자기 같이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③ 멧돼지 잇빨과 네브라스카인(The Nebraska Man)
북경인의 발견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지질학자인 쿡(Herold J. Cook 1922)은 네브라스카주의 필리오세(Piliocene)지층에서 어금니 하나를 발굴하였다. [Henry F. Osbourn; The origin and evolution of life,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18]. 이것을 당시의 저명한 고생물학자이며 미국의 국립자연사박물관장이었던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 1922)과 그의 동료들은 침팬지와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40만년 전에 살았던 현생인류의 조상이라 하여 헤스페로피테쿠스 헤롤드쿠키(Hesperopithecus harold cooki)라 명명하였다. 일명 네브라스카인(The nebraska Man)은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다. 그의 발표가 전해지자 고생물학자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1922, 1924)와 윌더(Harris Fairfield Wilder 1926)와 같은 수많은 진화론자들이 이를 지지하였다.
그 중에서도, 필트다운인의 발굴에 관여했던 영국의 그라프톤 스미스는 전세계에 배포되는 런던화보사(Illustrated London News)를 설득하여 네브라스카인 부부의 상상도를 그리도록 설득하였다(그림 15). 어금니 한 개로 전체적인 인물화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화가에게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모양으로 그리도록 주문하였다. 이렇게 하여 두 페이지를 장식한 기상천외한 상상도가 런던화보집에 실리게 되었다. [G. Elliot Smith; Hesperopithecus: The ape-man in the western world, Illustrated London News, 160(Jun. 24), p 944, 1922]. 스미스는 후일(1935) 과학발전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영국정부로부터 기사작위를 받게 된다. 그러나, 1953년에는 필트다운인의 사기극 공모자로 지목되었으니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들은 그 후에 사실을 왜곡케 한 재판정의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1925년 7월에 미국 테네시주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 하여 법정에 기소됐던 한 주립고등학교의 진화론교사 스코프스(John Thomas Scorpus)에 대한 원숭이재판(Monkey Trial, Dayton, Tennessee)에서 진화의 증거로 제출된 것이다. 이 재판은 진화론을 지지하는 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에 의해 더욱 선동되었다. 당시의 주법은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코푸스는 주법을 위반한 셈이었던 것이다. [J.T. Scoupes & James Presley; Centre of the storm: Memories of John T. Scoupes, Holt, Rinehart & Winston, New York, 1967]
테네시 법정에서 진화론측 변호자인 대로우(Clarence Darrow)는 창조론자인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ian)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고 한다. “See Brian, even in your own state of Nebraska has a fossil that shows there are missing links and that evolution is variable' (브라이언씨, 당신의 고향 네브라스카에서도 진화론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잃어버린 중간고리인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소?)
진화과학자들은 네브라스카인의 자료로 브라이언을 맹렬히 조소하며 비난하였고 브라이언은 아직 자료가 빈약하므로 연구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경윈인과 또 다른 사기극으로 판명된 필트다운인의 증거까지 제시된 이 재판에서 결국 진화론을 가르쳤던 스코프스는 불과 100달러의 벌금형만을 선고받음으로써, 이 재판은 실질적으로는 진화론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후, 테네시주에서의 진화론교육의 금지규정은 1965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화론과 다른 견해는 가르쳐지지 못하고 추방되는 현실을 맞고 있는 것이다(Davidheiser 1971).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 일인지 혼란스러운 생각뿐이다.
그러다가 재판이 끝난지 3년 후(1928), 매우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되었다. 네브라스카인의 어금니와 완전히 동일한 이(齒)를 가진 멧돼지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더구나, 그 잇빨의 주인공은 그 곳에선 멸종되었으나 지금도 파라과이의 샤코지방(Chaco)과 에쿠아돌에서 서식하는 멧돼지(Prosthennops serus->Catagonus ameghino)의 것으로 여러 학자들(William K. Gregory 1927, Ralph M. Wetzel 1975, Tim White 1983]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R.M. Wetzel et al; Catagonus, an 'extinct' peccary, alive in Paraguay, Science, 189(Aug.1), p 379, 1975]. 이처럼, 네브라스카인은 멧돼지의 어금니 한 개와 출처불명의 유물 몇 점을 근거로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네브라스카인은 교과서는 물론 브리타니카 사전(14판, p 767, 1929)에서도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자료를 사용하고 있어 시급한 시정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필트다운인, 쟈바인, 북경인, 그리고 라마피테쿠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네브라스카인과 유사한 사건이 그 후에도 서남콜로라도인(Southwest Colorado Man) 사건에서 재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콜로라도에서 발굴했다는 잇빨 한 개로 진화론자들이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한 이 잇빨의 주인공은 후일 말(馬)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W.A. Criswell; Did Man Just Happen?, p 85, Zondervan Publishing Co., Grand Rapids, Michigan, 1973].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제 아무리 권위있는 진화학자들이 학문을 빙자하여 새롭게 발표하는 주장들이라 할지라도, 앞으로는 일단 의심하고 철저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러한 엄청난 과오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나 반성없이 학문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쉼없이 새로운 이론과 변명의 자료를 개발하는데 급급해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학문이며, 무엇을 연구하려는 것인지 반문 하고 싶다.
④ 필트다운인(The Piltdown Man)
필트다운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희대의 학문적 사기사건으로 유명하다. 저명한 고생물학자이며 진화론자였으며 대영제국의 런던박물관장이던 우드워드(Arther Smith Woodward)와 그의 친구이며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도오손(Charles Dowson)은 (Reader 1981)은 1908년부터 1912까지 다윈의 생가에서 수마일 떨어진, 영국 동부의 필트다운마을(Piltdown, East Sussex)의 자갈 구덩이에서 40-5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의 파편들과 치아 및 턱뼈들을 발견하고(사진 15) 이안트로푸스 도소니(Eoanthropus dowsoni)라 명명하였다. 이 이름의 뜻은 ‘도오손이 발견한 첫 사람’ 이라는 말이다. 두개골은 사람에 가깝고 아래 턱뼈는 원숭이와 비슷하여 현대 인류의 ‘첫 사람’(Dawn Man) 이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그림 16). 이들은 런던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 1912.12.18)에 초기인류의 화석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그들의 발표내용은 세계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사이언스지의 표지기사로 실리게 되었고(Science 1938. 12),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부울(Marcellin Boule 1886-1942)과 미국 고생물학자인 오스본(Harris F. Osborn 1857-1935)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리타니카 사전에도 인류의 중간종으로 기재되기에 이르렀다. 왕립아카데미소속의 연구원인 쿡(John Cook)이 그린 필트다운인의 대형 유화가 런던의 지질학회에 걸리게 되었다.이러한 사실이 보도되자 필트다운인을 주제로 한 학술논문도 500건 이상이 쏟아져 나왔다. [Gary E. Parker; Origin of Mankind, Impact No. 101,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California, p 4, Nov., 1981]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의 교과서에 인류의 조상으로 기재되었으며, 세계 각국의 주요 박물관들에서도 전시가 되었다. 이러한 발견의 공로로 영국정부는 1916년에 이미 죽은 도오손을 제외한 케이스(1921), 우드워드(1924), 스미스(1926?) 등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그러나, 이 유골들에 대한 진위성이 계속 문제가 되어 마침내 8인으로 구성된 제1차 진상조사위원회(1916)가 결성되었다(사진 16). 이 회의에는 도오손과 우드워드를 비롯하여 영국의 왕립협회회원으로서 저명한 해부학자이며 의사인 케이스(Arthur Keith) 등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이 유골들을 진품으로 판정하였다. 여기에 소개한 사진은 일차 조사위원회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중앙에 흰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케이스이며, 그의 오른편에서 화석골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유골발견자의 한 사람인 도오손이다.[南條郁子; ibid, p 39]
그러던 중, 1953년에 다시 2차 조사위원회가 재소집되었다. 소집이유는 새로운 유골분석방법인 불소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회의에는 대영자연사박물관의 오클리(Kenneth Okley), 인류학자인 와이너(Joeph Weiner), 옥스퍼드대학의 치과해부학자인 클라크(LeGros Clark), 뇌연구자인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등 10인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와이너와 오클리(사진 17)가 회의를 주도하였다. 이 방법으로 검토한 결과 필트다운인의 유골은 5년이 경과한 원숭이 턱뼈와 사람의 두개골을 조립하여 만든 것임이 드러났다. [The Great Piltdown Hoax, Popular Science, Oct, 1956].
불소측정법이란 영국 킹스칼리지의 해부학자인 워터스톤(David Waterston 1871-1942)이 화석뼈에 대한 연대측정법으로 개발한 것인데, 이는 오래 된 뼈일수록 흙 속의 불소(F)가 뼈속으로 스며들게 되므로, 오래된 뼈속에 불소함량이 점점 더 많아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트다운인의 두개골 속에는 불소 함량이 매우 적어 전문학자들이 재조사한 바 그 뼈들은 불과 수천년전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턱뼈에는 인이 거의 없었으며, 더욱 놀라운 일은 해골이 중크롬산카리로 변색처리되었고, 치아에서는 줄톱으로 연마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Criswell; ibid. p 89]
뒤늦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턱뼈가 정상인의 해골에 걸맞지 않게 컸으며, 아래턱뼈, 턱뼈관절, 아래턱의 송곳니 및 얼굴 부위가 없었다. 더구나, 두개골의 중간 부위가 없었기 때문에 두뇌의 용적을 측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드워드는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치인 1,070cc라고 임의로 추정한 반면, 케이스(사진 18)는 자신이 설명한 대로 커다란 턱뼈에 부합하도록 1,500cc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측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자 중재에 나선 사람이 샤르뎅 신부였다. 그는 같은 필트다운 지역에서 발굴한 송곳니 하나를 그 유골의 주인공의 것으로 삽입하도록 제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측이 만족할만한 뇌용적인 1,200cc 라는 숫치가 타협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사람과 유인원의 중간크기에 상당하기 때문에 모두가 수용하였다. [Taylor; ibid. pp 227-228] 뇌용적을 실험치가 아닌 상상과 추리로 만들어 낸 것이다.
대영박물관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며 치과해부학자였던 클라크(LeGros Clark)는 필트다운인이 사기극으로 판명되었을 당시에 메모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치아들을) 마모시킨 흔적들이 바로 눈에 띄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왜 일차조사시 그것을 발견치 못했는지 질문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Ronald Millar; The Piiltdown man, Paladin, St. Albans, UK, 1974]. 그는 1916년도의 조사시 그러한 사실이 발견되어 상부에 보고된 적이 있었으나, 지도층인 케이스와 우드워드가 무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C.W. Lyne; The significance of the radiograps of the Piltdown teeth, Proceedings of Royal Society of Medicine, 9(Ondontological section), p 33, London, 1916]
이와는 별도로 방사선동위원소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이 뼈들은 오래된 것이 아니며, 사람의 두개골과 오랑우탕 암컷의 턱뼈를 조립한 것으로, 턱뼈들은 중크롬산카리 용액으로 처리하여 색소가 입혀져 있다는 사실도 판명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엄청난 과학적 사기극을 주도한 사람이 부울(Marcellin Boule)에게 사사받은 27세의 샤르뎅(Gould 1979)과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라고 추정하였다(Winslow & Bouden 1983). [Stephene J. Gould; Piltdowm revisited, Natural History, 88(March), p 86, New York, 1979], [J.H.A. Winslow, Meyer; The Perpetrator at Piltdown, Science 83(Washinton), 4(September), p 33, 1983]. 보우든(Malcolm Bowden 1977)은 필트다운이 발견된 구덩이에 가짜 화석들을 집어 넣은 사람이 유신진화론자인 샤르뎅(S. J.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M. Bouden; Ape-Man: Fact or Fallacy, pp 35, 46-47, Sovereign Publications, Bromley, Kent, Canada 1977] 이렇게 하여 40여년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군림하여 왔던 필트다운인은 희대의 학술적 사기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표 5).
최근에, 스펜서(Frank Spencer 1990)가 추가로 밝힌 바에 의하면, 호주 시드니 대학의 한 역사학자의 조사결과 이러한 사기극을 도운 또 다른 공범이 필트다운진상조사위원이었던 케이스(Arthur Keith 1866-1955)였다고 밝히고 있어 충격을 더 하고 있다. 결국, 허위진상조사위원들의 과반수가 사기극을 주도했던 공범자라는 이야기이므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케이스는 철저한 진화론자로서 일찌기 서젼로얄대학 해부학탐색교수(Hunterian Professor of Anatomy at Royal University of Surgions 1908)로 취임시 “나의 포부는 영국의 인류학역사를 새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었다. [Arthur Keith; An Autobiography, Philosophical Library, New York, 1950]. 이러한 사기극의 진상은 이차진상조사위원회를 주도하였던 와이너(Joseph S. Weiner 1955), 오클리와 와이너(Kenneth P. Oakley & J.S. Weiner 1953, 1955)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며, 런던지질협회(1954. 7. 10)와 밀러(Ronald Miller) 등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자 진화학자인 쥬커만은 “앞으로 인류화석에 대한 발견이 보고될 때에는 일단 그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필트다운인 사건은 인류진화를 믿고자 한 진화인류학자들이 진화론의 약점인 ‘빠진 고리’를 발굴하고자 만들어 낸 잘못된 열심과 학문적인 명예욕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허황된 자작극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상상이나 선입관에 의한 유골발굴작업은 지금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키, 요한슨 등의 학자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Taylor; ibid. p 229]. 최근에 타임지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난주, 영국의 고생물학자인 가디너(Brian gardiner)는 자신과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커런트(Andrew Currant)는 (필트다운인 사기극의) 범인이 당시에 박물관에서 동물학부 책임자로 일했던 힌턴(Martin A.C. Hinton)이었음을 확인하였다” [Time, June 3, 1996]
⑤ 하이델베르그인(The Heidelberg Man)
하이델베르그인은 진화론자들이 1907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인근 마우어지방의 라인강변 모래구덩이에서 턱뼈의 화석을 발굴하였다(사진 19). 화석을 분석한 결과 25-60만년 전에 그 곳에 살았던 초기인류라고 주장하고 일명 마우어인(The Mauer Man)이라 불렀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큰 턱뼈가 유인원과 유사하나 치아의 배열은 사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뼈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치아는 현대인과 같으며 턱뼈는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사람들과 같고, 두개골은 흑인들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진화 인류학자인 허들리카(A. Herdlika)는 하이델베르그인의 치아는 사람의 것으로 이 유골의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람’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