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어서(御書)의 유래는?
어서의 문체에 대해서는 한문체와 한자와 가나(假名)의 혼용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시, 공문서는 한문으로 쓰고 있었으며, 히라카나문은 사적인 일기나 쉬운 이야기 등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히라카나 혼용 문장으로 당시의 속어(俗語)나 이해하기 쉬운 비유 등으로 현실에 일어나는 사건, 그리고 쉬운 불법 설화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서에 대하여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집과 정리에 착수하신 분은 제2조 닛코상인입니다. 이 수집과 정리에 있어서 중요 어서 열편 즉 ‘십대부(十大部)를 정한 것은 『후지일적문도존지지사(富士一跡門徒存知之事)』(신편어서 p.1870)에 명백합니다.
또한 어서의 서사(書寫)도 하시고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여래멸후오오백세시관심본존초(如來滅後五五百歲始觀心本尊抄)』 등의 중요한 어서 외에 답서의 대부분이 사본으로서 오늘날에 전해져 오고 있어 그 진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성인 멸후, 닛코상인 이외의 오노승은 천태사문(天台沙門)이라 칭하며 스승에게 적대하였으며 대성인의 어서에 관해서는 히라카나 혼용의 답서를 후세에 남기는 것은 대성인의 수치라 하여 녹여서 다시 종이로 만들거나 소각했습니다.(신편어서 p.1870)고 하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요?
오직 닛코상인께서 혼자서 대성인을 본불님이라 받들고 그 가르침을 후세에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 어서를 결집하신 노력의 존귀함을 새삼 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어서를 그릇됨 없이 배독할 수가 있는 것은 「이 경(經)은 상전(相傳)이 아니고서는 알기 어렵도다.」(신편어서 p.92)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역대의 법주상인의 상전에 의한 지남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