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창船艙』(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은 1941년 「고운봉」선생이
불러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스타로서의 입지(立地)를 굳힌 곡
입니다. 「고운봉」선생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1937년 17세가 되던
해, 서랍장에서 아버지의 돈을 훔쳐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게 됩니다.
당시 본인이 존경하는 많은 가수들을 보유하고 있던 '태평 레코드'
에 찾아가게 되고, 문예부장이었던 박영호와 작곡가 이재호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음악성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기에 곧바로
청년 '고명득'을 '태평 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채용하고 그에게
'운봉'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습니다.
곧바로 그들은 3개월간의 순회 공연에 돌입하게 됩니다.
신인(新人)이었던 「고운봉」(2010~2001)의 입장으로서는 큰 행운
이었고, 꿈 같은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1939년 '국경의 부두'
라는 곡으로 정식 데뷔를 하게 되었고, 1940년 '남강의 추억'이라는
곡으로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고운봉」을 눈여겨보던 '오케 레코드'의 '이 철 사장'은 1940년
가을에 '스카우트' 를 감행하게 됩니다.
'이 철 사장'의 예감이 적중한 것인지, 1941년 여름 무더위 속에서
탄생한 『선창船艙』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비오는 날 선창(船艙)가를 걸으며 헤어진 사랑을 회상(回想)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행복했던 과거에 반해 그것을 그리워하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그려내며, 나라를 잃은 슬픔에 탄식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달래주었습니다."
『선창船艙』은 일제치하(日帝治下) ,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창(愛唱) 되고 있는 노래입니다.
작사가 조명암 선생과 작곡가 김해송 선생은 이후에 모두 월북하여
활동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이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알려졌습니다.
2000년「고운봉」선생 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 온천에
『선창船艙』 노래비가 세워 졌고, 이듬해인 2001년 「고운봉」선생은
노환(老患)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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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은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데로 갔나 찬 비만 내린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울어본다고 다시 오랴 사나이의 첫 순정
그대와 둘이서 희망에 울던 항구를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