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길? 장사꾼의 길?
베트남 파병에서 걸린 고엽제 피부병 때문에 보훈병원을 자주 가는 편인데 거리가 너무 멀어 간단한 피부병은 K대 피부과에 자주 다니는 편이다.
어제도 K대 피부과를 갔었는데, 옆에 늘 앉아 있던 전공의(여자 레지던트)가 자리에 없었다. 해서 전문의에게 물어보았더니 단체 행동 나갔다고 했다.
전문의에게 슬쩍 말을 건네 보았다.
의사들이 자기 밥그릇 작아질까 봐 파업하는 나라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꿀 먹은 벙어리다.
요즘 전공의들의 파업을 보면서 정말 배부른 대한민국이 되었구나 하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람들을 위해서 살신성인한 유명의사들에 관한 얘기하나를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골똘히 생각해 보니, 슈바이처 박사의 일화 하나가 생각났다.
그 일화의 줄거리를 대강 적어 본다.
슈바이처 박사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에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으로 가는 도중에 생긴 일화 한 토막이다.
그는 아프리카를 떠나 파리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덴마크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신문기자들이 취재를 하려고 그가 탄 기차로 몰려들었다.
슈바이처는 영국 황실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은 귀족이다. 그래서 취재경쟁에 열중한 기자들이 한꺼번에 특등실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다시 일등칸으로 몰려가서 찾아보았으나, 거기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보이지 않았다.
기자들은 또다시 이등칸으로 가 봤으나, 거기서도 슈바이처 박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모두 허탈한 나머지 그대로 돌아가 버렸는데, 영국 기자 한 사람만이 혹시나 하고 3등 칸을 기웃거리다가 뜻밖에 거기서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내게 된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꽉 끼어 앉아 있는 퀴퀴한 악취로 가득한 3등 칸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슈바이처 박사는
그들을 진찰하고 있었다. 놀란 기자가 그에게 특등실로 자리를 옮기기를 권했으나 슈바이처 박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선생님, 어떻게 3등 칸에 타셨습니까?" "예, 이 기차는 4등 칸이 없어서요." "아니 그게 아니고 선생님께서 어쩌자고 불편한 곳에서 고생하며 가십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잠시 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특등실의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 일화 한 토막에는 의료인의 진실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모두 모두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 의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류급에 속하는 편이다. 연봉이 최소 2억 이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19년째 의대정원을 늘이려고 했으나. 장사꾼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밀려 국가가 손을 대지 못했다. 직전 문재인 정권도 겨우 480명 늘이려다 실패했다.
국민들의 미래 건강이야 어찌되건 말건, 좋은 게 좋고, 편안한 게 좋은 걸로 그냥 19년을 보냈다.
여러 가지 이유와 내용은 언론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딱 한 가지 의사들이 공부를 하지 아니한 중요한 내용이 있는 듯하다.
바로, 1766년 멜서스의 인구론이다, 그의 저서에서 “인구가 대략 25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므로 2세기 뒤에는 인구와 생활물자(주로 식량) 간의 비율이 256대 9가 되며, 3세기 뒤에는 4096대 13이 되고, 2천 년 뒤의 차이는 거의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질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인구도 그러한 비율로 늘어나지도 않았으며, 식량과 물자도 산업혁명의 발달과 더불어 어마어마한 성장을 보인다. 그래서 인구론은 죽었다고 평가한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인구가 늘지 않는데 왜? 의대정원을 늘리려 하느냐고 반문한다. 참 답답하고 갑갑하다. 진료를 받는 환자들은 좀 더 긴 시간으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 병원엘 가면 고작 2-3분 좀 길면 5분 정도다.
그것도 한 참을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고 시골에서 올라온 환자는 더욱 실망스럽다. 여기서 독한 말 한마디 붙인다면 우리의 의사 70%는 처방사 역할이다.
의사라면 질병의 근원을 해결해야 할 자세가 필요한데, 제약사에서 만든 약 처방만 내리는 처방사인 것이다. 그리고 인구가 잠시 정체될지는 모르나, 질병은 절대로 정체되지 않는다.
바로 코로나 같은 게 그러한 질병이다. 온 세계가 난리 법석을 떨었던 게 바로 엊그제 같다. 의사가 아니라 장의사까지 모자랐고, 무덤을 만들 수 없어 시체를 무더기로 불도저로 묻는 국가도 있었다.
질병학자들은 앞으로 또 코로나 정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서운 전염병이 엄습할 것이란 예고를 하고 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이에 따라 계속 독하디 독한 질병이 온 다는 것은 예고가 아니라 반드시 또 온 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명은 점점 늘어난다. 지금의 초등학생들은 120세까지 무난히 살 수 있다고 내어놓은 통계도 있다. 수명이 늘어나면, 이에 비례해서 몸 이곳저곳에서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의사가 질병에 대해서 환자와 좀 더 긴 시간을 가지고 대화하고 진단하는 등의 진정한 진료가 필요한데, 간호사도 할 수 있는 처방사가 되어 하루에 거친 환자 數 곱하기 의료숫가로 이익을 계산하는 현재의 의료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맬서스의 인구론이 죽었듯이 의사들의 인구정체니 뭐니 하는 내용 가지고는 위에서 언급한 거대한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이겨나갈 수 없는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님처럼 풍요로운 모든 걸 포기하고 오지의 아프리카로 들어가
병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지는 못할지언정, 수술을 앞둔 환자들을 외면하는 처사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
또한, 의대정원을 늘린다고 당신들의 밥그릇이 절대 작아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배우고, 마음 깊이 새겨보기를 바란다.
‘치료는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고 마음을 숙이는 거랍니다’. 환자를 존중하고 역지사지 마음으로 진솔하게 그 아픔을 이해하면서 인술을 베풀어야 의사라고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슈바이처 박사에 대한 책 두 여권쯤, 아니면 우리나라 장기려 박사님에 대한 책이라도 한번 읽어보고 참된 인술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신의 어리석었던 행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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