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의정부 문학공모전 / 박철민
[대상] 아버지의 밭 / 박철민
새싹이 돋을 때가 되면 아버지의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갈대가 지천으로 흔들리는 공간에서 나는
유년의 그림자를 찾아 더듬거리는 발길을 디딘다
가다가 들판 질경이를 밟으면 하늘이 열리고 땅이 춤춘다
밟히면 밟힐수록 가속도로 힘을 내는 풀잎
바람은 달려가기 위해 제 그림자를 스스로 버린다
들판에도 생명의 무게가 있다
들판은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소유라 주인이 없다
아버지가 쥐어 주신 삽을 끌며 들판을 가로지르던 때는
담장 밑 그늘의 까마중처럼 나를 증명할 시간이 없어
나의 그림자는 항상 위태로웠다
하여 아버지의 굽은 등뼈처럼 곡선으로 얼룩진 밭에서
내가 뿌린 퇴비는 잡풀만 무성하게 키웠다
그 시절엔 걸음을 디딜수록 들판의 길은 자꾸만 늘어나
아버지 주름진 이마에 싹이 돋을 즈음엔
나는 내가 가야 할 들판의 길을 찾아
아버지 그림자를 밟고 짐승처럼 웃어야 했다
어느 날 얼굴에 묻은 가난의 흙을 털며 문득 갈을이 왔다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야위고 시린 바람의 냄새
그 마른 바람이 아버지의 절은 땀을 훔쳐 달아나자
비로소 붉은 입술보다 더 매혹적인 얼굴로 살아나던 들판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이 빠진 삽을 한강 구석에서 씻으며
그 들판의 마지막 풀잎으로 살아 반짝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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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세상을 비추는 작은 불빛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더불어 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그 마음에 상처라든가, 아픔이라든가 하는 불편한 단어가 들어 있더라도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이니까요. 시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옛 고전에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가는 길은 마음 안에 이미 들어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 가는 길에는 마음이 밖으로 나와 있어서 바른 길을 갈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시를 쓰는 현자의 지혜는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한 통찰과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싹트는 것이고 건강한 시의 마음 뒤에는 언제나 환한 웃음의 함박꽃이 피어 있습니다.
웃음의 함박꽃 뒤에 있는 사랑은 상처와 아픔을 감싸 안고 키워내어 다시 한번 성숙하고 건강한 시의 아름다운 묘약으로 재탄생시켜 냅니다. 정녕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길 수 있는 문화적인 서사는 없습니다. 지식은 무한하고 광대하여 거대한 탑과 같은 것이지만, 시가 전해주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미소를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여, 시를 쓰고 사랑하는 우리가 곧 ‘지혜’의 한 부분이고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인류애의 출발점입니다. 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고대 중국의 시경을 위시한 창조의 작업은, 이제 현대시에서의 자연과 사람에 대한 예의와 헌사에서 정점을 맞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의 동면에서 깨어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초보 시인에게 주어진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아직 측량이 되지 않습니다만, 아름다운 우리 작단의 미물이 되지는 말라는 의미로 알고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발길을 옮기겠습니다. 더불어 미약하지만 문학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작은 불빛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지평의 들머리를 제공해 주신 의정부 문인협회 지부장님 이하 회원 문우 여러분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고마움을 전하며 시를 통한 세상의 카타르시스를 위하여 더욱 부단히 정진할 것을 믿음으로 약속드립니다. 의정부가 우리 문학의 산실입니다.
[최우수상] 엄마의 꿈 / 김상수
[우수상] 지게 / 윤경암
[장려상] 외로운 노송의 외침 / 전표건
[장려상] 모래의 노래 / 이영미
[장려상] 겨울산 / 홍윤기
[장려상] 계절의 은유 / 이초선
[심사평]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 가는 길이 되길
2024년 제 26회 <의정부전국문학공모전>에 접수된 시 작품은 중등부 157편, 고등부 200편, 일반부(대학생 포함) 193편이었습니다. 예년보다 다소 낮은 응모율이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와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문학 창작 활동은 인간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고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정신의 몸짓이며 숨결입니다.
응모 작품의 수준 차이가 컸으며 과거 응모 작품보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졌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우리 삶과 글쓰기에도 반영된 것인지 다소 기계적이고 작위적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머뭇거림, 잠시 쉼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수상하신 분들과 응모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와 감사와 응원의 말씀을 드립니다.
많은 고심 끝에 대상으로 선정한 박철민(경기도 고양시) 님의 ‘아버지의 밭’은 위태함 속에서 필 듯 피지 않는, 피지 않을 듯하지만 기어코 피우는 꽃처럼 시종일관 시적 긴장감이 충만합니다. 대상의 구체적 형상화는 어떠한 절박함과 맞물려 시 본연의 미적 요소를 더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잠언적 요소를 첨가하여 시의 기능을 한 층 더 끌어올려 줍니다.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 가는 길이 길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한 김상수(광주광역시 북구) 님의 ‘엄마의 꿈’은 단아한 시조 형식에 사연, 이야기를 담는 능력이 돋보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픔의 형상화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우수상으로 선정한 윤경임(광주광역시 북구) 님의 ‘지게’는 우선 총6연, 각 연은 3행씩 처리한 점이 깔끔했습니다. 정제미를 주는 전통적 형식과 제목으로 쓴 소재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원초적 아픔, 연민을 느끼게 해 줍니다. 단지 제목과 내용의 응집력이 약해 보입니다.
장려상으로 선정한 전표건(경기도 가평군) 님의 ‘외로운 노송의 외침’은 다소 작위적이지만 재미있고 신선합니다. 이영미(대전광역시 유성구) 님의 ‘모래의 노래’는 시에 음악을 접목했다는 점에서 독창적입니다. 홍윤기(서울 동대문구) 님의 ‘겨울산’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과 같은 담백함이 매력입니다. 시어의 연마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이초선(단동조선족문학회) 님의 ‘계절의 은유’는 연륜과 사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각운의 묘미는 시 전체의 우아미로 승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