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흐름을 느낍니다. 마치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아침에 해가 떠서 눈 깜짝하는 사이에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아래 넘어가는 그 시간인 듯, 우리 인생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만큼 바쁘게 살아온 탓일까요?
누구나 그렇듯이 학창 시절에는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다가 제대로 된 꿈 한번 꾸지 못하고 훌쩍 보내버리고 맙니다. 철이 들 무렵, 말로는 자아실현을 위해 직장을 다닌다고들 하지만, 일단 조직이란 틀 속에 갇혀버리면 나라는 개인의 존재를 잊고 지낼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려가면서, 어쩔 수 없이 삶의 본질을 찾기보다는 생활 속에 묻혀 소시민으로서 살아왔습니다. 물질 만능의 시대를 탓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사용되는 돈의 가치가 수많은 별의 크기보다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교직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40년이 지나 정년을 앞둔 지금,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아서인지 가끔은 교장실 창 너머로 바라보는 화단의 나무들과 꽃들을 마주하다 보면, 유년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또는 햇병아리 초임 교사 시절로 회귀하는 잔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파노라마처럼 밀려드는 일 중에는, 코흘리개 아들 손을 잡고 학부모로서 애태우던 우리 사직초에 학교 관리자로서 발령을 받았으며,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 어느새 그 아들이 결혼하여 한 가정을 꾸리고 곧 손자를 볼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교의 윤회란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살아보니 삶이란 돌고 도는 것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철없는 것이 시집을 가서 밥이나 제대로 하고 살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내 아들이 훌륭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혼자 슬그머니 웃음 지을 때가 많습니다.
찰나와 같은 내 생에 많고 많은 사람과 만남이 있었지만, 유달리 시어머님과 만남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었습니다. 흔히들 고부간을 피할 수 없는 ‘갈등의 감기’라고들 말하지만 그런 표현은 적어도 시모와 나, 우리 사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친정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도 있지만, 워낙 어질고 품위가 있으며 삶의 지혜가 풍부하셔서 자연스럽게 시어머님께 의지하게 되고 정서적인 교감의 횟수가 잦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나도 며느리에게 똑같은 좋은 시어머니가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할 정도였으니깐요.
내가 결혼할 때 시어머니 연세가 49세, 꽃중년 한창때였는데 쏜살같은 세월은 우리 어머님을 86세란 시간 앞에 모시고 왔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인지 병원에 자주 들르시며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말아야 할 텐데”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십니다.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면 생로병사의 어김없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와병 중이시면서도 자식 사랑의 끈을 놓지 못하시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자식을 향한 사랑의 끈을 더 조이고 계시는 우리 어머니! 아들이 쪽파김치를 좋아한다고 파를 다듬어놓고, 김장에 사용할 깐 마늘을 듬뿍 챙겨주시는 그 마음은 한없이 베풀어주려는 부모님의 끝없는 사랑 말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어머님의 얼굴에 깊게 자리 잡은 주름들은 자식 사랑의 흔적이자 훈장이며, 나빠진 심장은 한시도 놓지 못한 자식 사랑의 가슴앓이 탓이겠지요. 망가진 고관절과 허리는 자식들을 위한 아낌없는 희생 탓이었고, 들리지 않는 귀는 자식들의 세세한 이야기를 들으려 애써 귀 기울인 까닭이겠지요.
이제 와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어머님께서 제게 주신 많고 많은 선물 중에 가장 값진 것은 결혼 후 불심을 키워주신 것입니다. 사찰을 함께 다닌 것은 고부간의 끈끈한 정의 깊이를 더했으며 나아가 불심을 더 크게 키워 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머님께서 어느 시점에 생을 마감하실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님의 깊은 불심이 있으셨기에 우리 자식들 모두가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자식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으시고, 만수무강하시기를 부처님께 합장합니다. 저 또한 사랑스러운 며느리에게 좋은 시어머니가 되겠다고 부처님께 합장합니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시간 속에 섬광처럼 빛나는 어머님과 나의 인연은 부처님의 가호였으며 억겁의 인연으로 다시 만난, 그리고 또다시 만날 소중한 인연입니다.
부산 사직초등학교 교장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