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와 은유의 세계_비유로 말씀하셨다/ 임의진
오늘 본문의 제2복음으로 마르코복음(마가) 4:33-34를 넣으려고 했습니다만, 사족같아 넣지는 않았으나, 시작하면서 일러 드려야 하겠구나 다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따로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막 4: 33-34)
아, 이 부분 주님 발끝에서 그 해석까지 듣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시원할까요.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 아직도 비밀스러운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비유의 세계.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말법, ‘이야기 가르침’에 빠져들고 맙니다.
본문 얘기인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는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혐의에 대한 고발,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비유입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당시 제국체제는 잃은 양 하나 데리고 갈 여유가 없이 파괴적이고 공세적인 전쟁과 우승, 1등의 시대였습니다. 관원들 세리들, 자본과 군대의 시대였습니다. 꼴찌는 포로나 노예에 다름아니었습니다. 빨갱이는 죽여도 돼! 하는 것처럼 꼴찌는, 실종자는 죽어도 돼!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4개의 씨뿌리는 밭이야기(마가복음 4장)도 그렇고 문제는 단순한 신앙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배체제에 대한 고발의 성격이 올곧합니다. 예를 들어 길가에 떨어진 씨는 지배체제의 공격성과 야수성을 비유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가 없는, 신학과 신앙 정신이 없는 사람들을 비유합니다. 지배체제를 이겨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가시떨기란 맘몬, 물신을 상징합니다. 염려, 재물욕심, 하느님이냐 돈이냐에서 돈을 따르는 것이 가시떨기밭의 일상사입니다. 좋은 밭이란 예수와 함께하는 터전이 된 삶입니다.
죄인을 영접하는 것도 지배체제에 대한 고발입니다. 예수님은 교인들을 영접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친구삼기 위해 오셨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죄인이 나타나면 우리는 화들짝 놀랄 것입니다. 죄의 형태는 가지가지 인데, 그중 가장 흔한 것이 혐의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부분, 내 취향에 맞지 않아도 죄라고 고발합니다. 죄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입니다. 그래서 흔한 말이 “법대로 해라~”인데, 법도 해석하기 나름이고, 유전무죄가 흔한 현상입니다.
잃은 양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들에게 오늘 잃은 양은 누구일까요. 양을 찾았다라는 말은 ‘휴리스코’라고 합니다.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인데요, ‘조사하다’라는 뜻도 있어요. 단 한 마리를 찾아나선 선한 목자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먼저 우선은 나 자신입니다.
두 번째 잃은 양은 차별과 혐오, 내버림, 소외당한 가난하고 애통한 자들입니다. 낮고 천한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마지막 피난처인 교회에서마저 버려진 존재들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 10) 그리스어로 ‘프로소폰’ 은 얼굴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얼굴이란, 곧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얼굴이라는 뜻, 잃어버린 어린 양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프로소폰이 ‘마스크’를 의미했어요. 무대에 선 배우들이 배역의 성격이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착용한 마스크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얼굴은 하느님이 기억하는 얼굴입니다.
그리스어로 ‘아르니온’은 아기양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우리들 인류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으러 나선 목동입니다. 푸른 초장에 계시는 예수님. 성인 양(프로바톤)은 꼴을 먹으러 골짜기 광야를 뒤지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늑대의 사냥감이 되기도 하지요.
노자 23장엔 희언자연, 곧 자연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사오도자 도를 좋아 사는 자가 있고 도자동어도 도를 좇아서 살면 도에 합일, 동화된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싹틉니다. 신부족언 유불신. 믿음은 동화될 수 있어야 생깁니다. 혼자서, 자기 혼자 동력도 없이 기획력하나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 대자연이 함께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늘나라의 이야기라도, 사람의 사는 이야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연못에서 개구리들이 헤엄치는데 망을 보는 개구리가 있어요. 그 개구리는 이상하게도 팬티를 입고 있었죠. 물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다가갔습니다. “너는 뭔데 팬티를 입고 있느냐.” ?”, “네 사실은 여기가 개구리 목욕탕인데 저는 때밀이입니다. 저그 둥둥 더러운 때들이 떠있는 거 안보인가요?” 물뱀은 에잇 더러워서 잡아먹지 않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지혜는 삶에서 터득합니다. 죽을 바를 찾아 살지 아니하고, 살 바를 찾아 나아갈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인 존재들인데, 주님께서 우릴 찾아주시고 우리에게 살길을 예비할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식이 많은 세상이나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은 많은데 진리가 부족합니다. 살길, 살 방도를 찾지 않고, 저만 잘 살겠다 합니다. 파수꾼이 없는 위험한 세계입니다.
자연에서 그러한 것처럼 우리는 진실한 작은 말에, 미물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뒤처진 사람들,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누구 하나 찾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나긋이 불러보고, 가끔 전화도 거는 등 찾아보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일등 좋아하는 차별과 소외의 세상은 예수님이 원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꼴찌를 챙기는 연민과 살핌의 세상이 바로 주님이 바라시는 하느님 나라, 하늘나라, 역설로 사람이 살만한 그런 나라입니다.
비유와 상징의 자연세계, 지혜의 세계에서 하늘말씀 복음의 진수를 냉큼 알아차려야 합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기를 하지 못하면 복된 내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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