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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광복단과 15만원 탈취사건 스토리
국민회 외관단체의 성원으로 모금과 자위활동과 신문발행을 하면서 북간도 이주민이라는 한계를 비상한 방법으로 뛰어넘고자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체들의 군자금 난을 해결해주고 싶었고, 모든 간도의 청년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조선에 진공하여 하루아침에 일본군을 몰아내는 해방과 독립에의 꿈을 꾸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진공하여 경찰지소와 관청을 파괴하고 돌아오는 식의 전투가 아니라 탱크를 앞세우고 우르르 쾅쾅 들어가서 영토를 회복하는 꿈을 꾸었다. 마침내 그들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은행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임국정(1894년생), 한상호(1899년생), 최봉설(1899년생), 윤준희(1892년생), 박웅세, 김준으로 국민회 외곽단체인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이었다.
그러나 철혈광복단은 아직까지 건립 시기와 구체적인 조직기구가 자료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반병률은 그의 논문 ❰간도 (間島)15만원사건에 대한 재해석❱에서 철혈광복단은 1911년 초 이동휘가 간도에 왔을 때 조직한 광복단과 이후 노령지역에서 1917년 혁명이전에 조직된 전투적인 청년비밀결사인 철혈단이 1918년 가을에 통합. 조직된 것으로 폭력, 즉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청년단체로 간도지역과 노령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45) 그는 철혈광복단의 중심을 노령에 두고 15만원 탈취사건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그 사건이 6명의 애국청년들이 단독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상위조직의 지도에 따른 것이며 그 지도자는 철혈광복단의 핵심간부이자 국민의회의 군무부장 대리이기도 한 김하석이라고 하였다.46)
그러나 연변에서 기록된 글에 의하면 철혈광복단은 1914년에 라자구무관학교 관계자들인 남공선, 김립,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 등이 설립을 주도하였고 당시 창동학교 중학생인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와 임국정 등 수십 명이 가입한 비밀결사단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수년 동안 그 본체가 나타나지 않았다.47)
1919년 2월 18일 간민회 계통의 독립투사들이 박동원의 집에 모여서 조선독립의사회를 건립하고 3.13만세시위를 모의하면서 일제의 무력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시위운동에서 일본과 중국 군경에게 체포될 경우 희생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 때 결사대원들은 혈서로서 사인을 하였고 결사대의 명칭을 광복단이라 칭하였다.48) 이와 같은 광복단은 미국, 북경, 서울 평양, 천진, 러시아 등지에도 그 단원이 수천 명에 달하였으며 북간도 광복단의 경우 캐나다장로교 각 교회의 지도층 인물로 구성되었다. 그 가맹자는 “➀국자가에 이홍준, 이성근, 박동원, 김영학, ➁용정촌의 김정, ➂종성간동 자동 백유정, ➃팔도구 유예균, ➄평강 고동환 ➅그 외로도 박경철, 김순문, 구춘선, 이성호. 고평, 최봉렬, 박정훈, 이동식 등이었다.”49)
여기까지 살펴본 바로는 광복단과 철혈광복단을 직접 대입하여 연결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전자는 이동휘가 지휘하는 청년단체이고 후자는 용정 3•13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사를 각오한 사람들이 가입한 단체로 한인들이 있는 곳마다 세워진 비밀결사단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최봉설(최이붕, 최계립)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최봉설은 1920년 1월에 와룡동을 떠난 후 30여년이 지난 1956년에 고향에 와서 3개월간 체류하였다. 그 때 그는 맏아들 최동현에게 철혈광복단과 15만원 탈취사건의 전모를 들려주었다.
“나의 부친은 최봉설은 1899년 11월 27일, 와룡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사숙에 다니다가 창동학원의 소학과 중학을 졸업했다. 창동학원을 다니던 1914년 8월 14일,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칠 뜻으로 ”철혈광복단“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의 본부는 명동에 있었고 단장은 김국보였다. 아버지의 입단의식은 우리 집에서 간단히 거행되었는데 아버지는 왼손무명지를 베어 혈서를 쓰고 맹세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최이붕, 최일륜, 최계랍 등 가명을 두루 썼다.”50)
최봉설(1899-1973)의 회고대로 그가 가입했던 단체 이름이 ⌜철혈광복단⌟이고 본부가 명동에 있었으며 단장이 연해주의 인사들처럼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가 아닌 김국보라는 점 그리고 최봉설과 한상호의 입단 시 나이가 15살인 점을 감안할 때 철혈광복단이 캐나다장로교 산하 지교회 청소년들의 비밀결사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최봉설은 1916년 창동학원을 졸업한 이후로 라자구군관학교에서 8개월 학습한 외에는 출생지인 와룡동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적안평 기독소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그의 나이 20세에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들을 위한 북간도 모금위원인사들
선정 시 정기영과 함께 와룡동 지역의 대표로 뽑혔다. 그리고 그 후로 3.13 만세 시위에 결사
대로 참여를 하였다. 3.13 시위 후 그를 비롯한 철혈광복단의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일제
와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중 연해주에 다녀 온 경험이 있는 임
국정은 체코 군인들이 헐값으로 무기를 판매하고 있는 사실을 알리며 그들에게 군자금 마련을
제안하였고 그들은 거사를 위해 자주 모이게 되었다.51)
3.13시위 후, 윤준희(1892-1921)는 용정에서 국민회 회장인 구춘선의 지도로 이익찬, 방원성
과 함께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대한독립신문을 발간에 참여하였다.52)
임국정은 캐나다장로교 북간도 기독청년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기독동지청년회에 가입하여 청
년회 대표로 노령독립회의에 참여하였다.53) 뿐만 아니라 서성권과 강백규가 만든 간도청년회
발기인 중의한 명으로 활약하였다.
한상호(1899-1921)는 와룡동 창동학교 출신이었으며 최봉설과 연배의 친구였다. 54) 그는 거
사를 위한 권총과 수류탄을 구입하기 위해 윤준희,임국정, 최봉설과 함께 연해주에 다녀왔다.
55)
임국정(1895-1921), 최봉설, 한상호는 와룡동 창동학교 출신이며 최봉설과 한상호의 아버
지는 창동학교 설립발기인이었고 학교 후원 회원이었다. 그들은 모두 창동교회 청년들이었으
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이었다.
박웅세와 김준이 명동출신이고 윤준희는 명동학교 출신으로 언급되는 면면을 살펴 볼 때56)
철혈광복단은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청소년 단체임이 분명하고 1919년 2월 18일 박동원의 집
에서 있었던 광복단의 입단식도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
15만원 탈취사건을 일으킨 철혈광복단은 1914년에 캐나다장로교 산하의 청소년비밀결사체로
조직되었으나 1919년 2월 18일 조선독립의사회를 건립하고 만세시위를 모의하면서 일제의 무
력 간섭에 대처하기 위하여 시위운동에서 일본과 중국 군경에게 체포될 경우 희생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로 결사대로 가입하면서 확대되었다. 결사대원들은 혈서로서 사인을 하였고 결사
대의 명칭을 광복단이라 칭하였다. 이와 같은 광복단은 미국, 북경, 서울 평양, 천진, 러시아
등지에도 그 단원이 수천 명에 달하였으며 북간도 광복단의 경우 캐나다장로교 각 교회의 지
도층 인물과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광복단은 간도국민회가 결성되자 자연스럽게
국민회의 외곽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철혈광복단은 1920년 1월 4일, 열혈청년들에 의한 15
만원 탈취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반병률은 그의 논문❰간도 (間島)15만원사건에 대한 재해석❱에서 임국정의 상고문과 조선총
독부 고등법원의 상고기각 판결문과 당시 상해파고려공산당의 핵심간부였던 장도정이 15만원
탈취사건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국민의회 당국자와 김하석에게 한 것으로 보아 사건의 기획자
가 로령 국민의회 김하석 이며 간도의 철혈광복단의 소수의 정예들이 그의 지시를 받아 이행
한 것으로 본다.57)그러나 기록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많은 정황들이 국민회 산하의 철혈광단
멤버 소수가 은밀히 기획하고 주도한 사건임을 드러낸다. 그들이 김하석의 편지를 받고 김하
석을 만난 것은 1919년 12월 초와 12월 23일의 일이고58) 그들은 3•13 시위 후부터 무장 투
쟁을 결의하며 거사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상부 지도자 김하석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15만원탈취사건은 1920년 1월 4일에 철혈광복단 단원인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박
웅세, 김준 등 6명이 승지촌과 동량리 어구에서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보내는
길회선 철도부설기금 15만원을 탈취한 대사건으로 무려 10개월에 걸쳐서 준비되었다. 3•13
이후, 무장투쟁에 의기투합한 그들은 국민회의 무장화를 위한 군자금 모금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다. 59)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자는 것과 의연금 모금을 하자는 의견을 있었지만 전자는
너무 위험하고 후자는 가난한 동포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어 무리라고 판단을 하였다. 그들은
고심 끝에은행을 털이를 합의를 하고 조선은행 회령지점에 근무하는 전홍섭을 끌어들였다. 그
리고 한상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은 은행털이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최봉설과 한
상호 아버지에게 송아지 판돈을 받아서 비밀리에 연해주에 다녀왔다. 그들은 권총 6자루와 수
류탄 6개를 구입하였고 9월에 박웅세와 김준을 끌어 들여 부족한 인원을 채웠다.60)
그들은 1월 1일에 전홍섭을 통해 1월 휴가 중(1월 4일과 5일 경)에 회령으로부터 조선은행
용정출장소에 현금수송이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그들은 거사지점과 행동노선 등에 대하여 치
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거사지점을 물색한 끝에 비교적 안전하고 퇴로도 용이한 용정에
서남쪽으로 20 리 정도 되는 재바위골, 승지촌에서 가까운 동량리 입구로 결정하였다.
1월 4일 운명의 날에 그들은 권총과 기타 장비를 휴대하고 습격지점으로 갔다. 그들은 성공적
인 전투를 위해 만전을 기하였다. 우선 역할 분담을 위하여 팀을 매복조와 습격조로 나누었
다. 매복조는 윤준희, 박웅세, 김준이었고 습격조는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이었다.61)그들은
아침부터 나와서 매복하였고 5시경 중국인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다시 길옆 버드나
무 방천에 매복하였다. 한 시간 동안 기다리던 윤준희 조가 장재방향으로 정찰을 떠났다. 반
시간 후에 그들은 동량어구에서 수송대를 발견하였다. 윤준희와 박웅세는 수송대를 감시하기
위해 매복하였고 김준은 다른 조에게 전당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최봉설은 전투태세를 갖추
고 수송대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현금을 실은 말이 앞서고 우편물을 실은 말이 뒤 따르고 있었다. 수송대원은 용정출장소 직원
인 하루구찌, 회령은행출장소 서기 김용억, 일본인 순사 나가도모, 조선순사 박연흡 그리고 도
중에 합류한 조선상인 진길풍, 일본인 우편수송인 가시하라 이었다.62) 최봉설은 두 사람을
총으로 쓰러뜨리고 말 두 필을 낚아채어 앞으로 달렸다. 윤준희도 두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
다. 최봉설은 퇴로 시 1차 모임장소로 정했던 곳으로 가서 일행을 기다렸다. 임국정과 윤준희가 걸어서 왔다. 마지막으로 한상호가 왔다. 박웅세는 며칠 후 결혼식을 올리므로 친구인 김준과 함께 명동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소팔포강 동쪽 골짜기에서 15만원을 확인하고 해란강을 건너 백석구를 지나 다음 날 새벽(5일)에 와룡동 최봉설의 집으로 갔다. 최봉설과 한상호의 부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5일 밤에 와룡동을 떠나 왕청현 이판구유채 거점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 63) 최봉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5일에 의란구 유채구에서 김하석을 만났으며 블라디보스토크 까지 함께 동행하였다. 64) 12일에 다시 길을 떠나 4일 만에 러시아 국경 너머에 있는 모커우에 이르러 일주일을 보낸 후 23일에 배를 타서 24일에 최종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김하석의 안내로 신한촌의 독립운동가 채성하 집에 머물다가 신한촌 하바롭스까야거리 5호에 있는 박참봉의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그들은 성공한 거사를 자축하며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는 조선청년 독립군의 꿈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용정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5일 사건이 보고된 첫날에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회령의 조선은행 직원 전홍섭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윤준희 일행의 이동한 흔적을 추적하여 오도구, 세린하, 조양천 등지를 샅샅이 수색하는 한편 수백 명의 중국과 일본의 경찰을 풀어 평강일대의 조선간민들을 체포하였다. 1월 6일에는 100여 명의 경찰들을 명동에 파견하여 조선 간민들을 사납게 검거하며 체포하였다. 그들은 첩자를 통하여 윤준희와 최봉설이 제창병원에서 몇 차례 접촉했던 사실을 알아냈고 10일에는 중일공동수색대 90명을 와룡동에 파견하여 최봉설의 부친 최병국과 동생 최봉준을 체포하였다. 일제는 심문 끝에 철혈광복단의 거사를 파악하고 하얼빈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에 15만원탈취사건을 통보하였다. 그리고 연길도윤에게 혐의자 색출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연길도윤공서에서는 ❰포고 제2호❱를 반포하여 15만원탈취사건의 혐의자를 신고한 자에게 포상을 한다는 현상문을 내걸었으며 상인들에게는 5원과 10원 지폐 사용자를 즉시 관서에 보고할 것을 훈시하였다.65)
그들은 마지막 관문 통과를 앞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무기를 사자는 의견과 홍범도에게 넘겨주어 무기를 사자는 의견 대립으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임국정의 의형제인 엄인섭에게 상의하기로 하였다. 엄인섭이 선뜻 무기구매 알선을 해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교섭 선불금으로 1만원을 그에게 주었다. 66) 그리고 그들은 엄인섭의 밀고로67) 1월 31일 새벽에 불시의 습격을 당하여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체포를 당하였고 최봉설 만 뒷문으로 가까스로 도망치는 중에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추격을 피하여 러시아인의 집에 숨어서 치료를 받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고향을 영원히 등지고 연해주 그리고 서 만주와 중앙아시아를 떠돌며 사는 인생이 되었다.
그들이 탈취한 15만원 중 군사학교 부지 구입을 위해 지출한 외 나머지 12만 8천여원은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그대로 일경에 압수를 당하였다. 인터넷 사전이나 개인의 글들에 회자되고 있는 ‘탈취한 거금이 북로군정서의 군자금으로 귀속되었다거나 그들이 무기를 사서 북로군정서에 기증했다’는 말은 낭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살인약탈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기개를 굽히지 않고 “조선인으로 정의인도에 근거한 의사발동이므로 범죄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를 규탄하였다.68) 30세 윤준희, 27세 임국정, 22세 한상호는 독립전쟁에의 소명을 받고 조국독립을 화산처럼 뜨겁게 사모한 죄 값으로 1921년 8월 25일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69)
최봉설, 박웅세, 김준은 궐석재판으로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보를 전달한 전홍섭은 15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6부로 계속됨
2022년 1월 16일
우담초라하니 올림
미 주
45)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08,109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46)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109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47)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년문집⌟, 241쪽, 연변인민출판사, 1999
48)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08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49)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08, 209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242쪽에서 김춘선은 광복단을
철혈광복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63, 164쪽은 광복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50)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5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51)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5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52)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29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53)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209쪽,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54) 김호림 저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174쪽, 글누림, 2013
한상호는 1899년생, 교수형을 당한 1922년에 23살이었다.
55)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55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56) 김준과 박웅세는 명동 출신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윤준희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표현되 었는데 인터넷 사전인 나무위키에는 용정 영신학교 교원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으며 검토가 필요하다. 명동학교 출신일 가능성은 있다. 임국정을 명동학교 출신이라고 하는 책들이 있는데 김철수와 김호림은 임국정이 창동 출신임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 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57)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10~112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58)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11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59) 김삼룡은 ⌜승리의 기록⌟54, 55쪽에서 최봉설의 회고대로 그들의 거사 행위를 청년들의 무장투쟁의 필요성에 의한 자각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굉일은 ⌜일제하 북간도 기독 교 민족운동사⌟, 233쪽에서 국민회군의 무장화를 위해서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춘선 은 러시아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의 사주로 말하고 있다. 김하석이 연변 독립운동단체 들의 부탁으로 무기를 구입해서 배편으로 보냈는데 배가 좌초하여 무기가 수장되어 자신 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자 철혈광복단 후배동료들에게 단기간에 군자금을 만들어 보내라고 하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탈취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 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최봉설의 회고에 의하면 독립을 열망하는 그들의 자발적인 결정으 로 보인다.
60)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55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61)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311쪽, 연변인민출판사, 2002
62)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 ⌜개벽⌟, 김춘선 저❰15만원 탈취기❱, 486, 487쪽, 민족 출판사, 1999
63)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56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64)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11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65)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247, 248쪽, 연변인민출판 사, 1999
66)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57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 탈취한 자금 관리에 대한 다른 주장들이 있다.
반병률은 그의 논문❰간도 15만원사건에 대한 재해석❱112쪽에서 일제의 판결문에 따라 김하석이 관리와 사용을 결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도착한 후에 김하석의 주도로 자금 배분을 결정하였다. 김하석이 탈취한 자금을 러시아 돈으로 교환하였고, 윤준희에게 최의수를 소개하여 그에 게 매일 1,2만원을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 후 교환한 금액의 가운데 5만 루블은 임국정이 가져갔고 25만 루블은 김하석이 가져갔으며, 일화 5천 엔 또한 김하석이 가옥비로 가져 갔다. 나머지 강탈금은 윤준희에게 맡기고 떠났다.
최봉설은 그의 회상록에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이 신한촌에 도착한 후에 철혈광복단의 단장인 전일을 비롯하여 단원들 30 명 정도 가 모였고 이동휘가 자금 사용을 결정하였다고 했는데 당시 이동휘는 신한촌에 있지 않고 중국에 있었다.
67) 밀고자에 대하여 강덕상의 ⌜현대사자료⌟에는 일본영사관측에 정보를 제공한 인물이 누 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고 한다. 1920년 4월 10일자 상해의 독립신문은 밀고자를 블라 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영사관의 사환 김모라고 밝힌바 있다. 최봉설은 그의 책 ⌜독립군의 수기⌟ 엄인섭과 김하석을 밀고자로 지목하고 있다. 엄인섭의 경우 당시 독립운동자 사이 에서 밀정으로 지목되고 있어서 밀고자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하석의 경 우에는 그리 쉽게 단정할 수가 없다.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13,114쪽, 연 변대학민족연구원, 2000년
68)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250쪽, 연변인민출판사, 1999
69)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58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참 고 서 적
1. 반병률 저⌜홍범도 장군⌟, 한울 아카데미, 2019
2. 김택, 김해진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5집 교육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1988
3. 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4. 김호림 저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글누림, 2013
5.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6. 서굉일 저,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7.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민족교육사료집 1⌟, 연변교육출판사, 2000
8.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연변인민출판사, 2015
9.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년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10. 양소전, 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9
11. 조영진 외 편저 ⌜항일무장독립투쟁사 1⌟, 도서출판 일원, 2000
12. 김택, 김인철 주필 외 ⌜홍범도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13. 김춘선 주필,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2015
14. 김춘선, 안화춘, 허열길 저 ⌜최진동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15. 리광인, 김송죽 저 ⌜백포 서일장군⌟, 민족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2015
16.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 ⌜개벽⌟, 김춘선 저❰15만원 탈취기❱, 민족출판사, 1999
17. 박규찬, 꿘영하 주필, ⌜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
18. 호이전, 문홍복 주필, ⌜연변문사자료 제 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정협무사자료위원회, 1997
19. 현룡순, 리정문, 허룡구 편저, ⌜조선족백년사화⌟, 료녕인민출판사, 1982
20, 장세윤 저, ⌜봉오동 ‧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21. 서굉일, 김재홍 저, ⌜규암 김약연 선생⌟, 고려글방, 1997
22. 심영숙 저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
23.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24. 박창욱, 반병률 외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연변대학민족연 구원, 2000년
첫댓글 철혈 광복단!!!
한 번도 배우지 목했던 독립운동단체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하오!
철혈광복단은 북간도 독립운동에서
아주 비중이 있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아요.
우리의 역사 교육의 한계이고
교과서 편집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우리의 피와 살이 되는 역사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시험 위주의 암기 교육이 중심이 되고 있어요.
문제를 극복할 날이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