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綠雨堂)
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종가 연동 녹우당은 호남지방 사대부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고산 윤선도가 시작에 정진했던 곳이다. 해남의 상징적인 고건축물의 오랜 역사의 흔적은 5백년된 늙은 은행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녹우당도 이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비오는 것과 같다하여 녹우당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참고문헌
- 해남군 문화공보실, 해남군, 1996
- 해남(문화유적), 정윤섭, 향지사, 1997
고산양자예조입안문서
고산양자 예조 입안문서는 보물 제482호로 지정되었으며 고산이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대종을 잇기 위해 8세때 큰집으로 양자입계된 후 1602년 8월초 2일 16세때 예조에서 입안을 해준 문서로 지금의 공증과 같다.
이 문서에는 작성시 예조판서를 비롯 관련 보조자의 수결이 되어 있어 그 당시 모든 문서에 수결제도가 있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비자나무숲
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어초은 사당뒤에 있다. 약 500년전에 심은 것으로 짐작되며 높이 20m 내외, 가슴높이 지름이 1m 정도로서 수관의 지름은 1.5m 내외되는 것이 가장 크다.
비자나무 바로 밑에는 곰솔의 밀림 가운데 소나무가 군데 군데 섞여있고, 밑에는 사스레피, 참식나무, 마삭덩굴, 개비자나무, 남오미자, 송악, 모새나무, 볼레나무, 자금우, 및 동백나무 등의 상록 수종과 더불어 맥문동, 살맥문동과 춘란이 여기저기보인다. 그러나 비자나무 숲의 가장 위 가장자리에 커다란 참식나무가 보이며 또 곰솔 중에서 가장 큰 높이 25m, 가슴높이의 지름이 1m 정도 된다.
비자나무 숲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은 굴참, 상수리, 갈참, 졸참, 서어나무, 개서어나무, 말채나무, 노린재나무, 덤불작살나무, 진달래, 백동백 및 철쭉 등이며 그 밑에는 구절초, 새, 개솔새, 개억새, 신감채, 며느리밥풀, 반디지치, 싱어 및 네일갈퀴, 활량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뒷산의 비자나무 숲을 잘 보호하여 왔는데 이것은 시조의 유언을 잘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윤씨의 시조는 뒷산의 바위가 노출되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등지에서 자라고 있는데, 나무 나이가 300∼600년 정도 되는 비자나무 숲이 천연기념물(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둑판 중에서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최상품으로 취급된다.
추원당(追遠堂)
이곳 추원당은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고산선생의 고조부(4대조)윤효정(1476년 성종7년-1543년 중종38년/호은 어초은)의 제각으로 1935년에 새로 지었다.시향(時享)은 음력11월 15일 어초은 사당에서 지내고, 이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고산 윤선도 고택과 함께 녹우당에 남아있는 건물이다.
유물전시관
-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과 동국여지지도(보물 제481호) -
- 고산 수적(手蹟) 관계문서(보물 제482호) -
- 고려때의 개인의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
연자방아가 놓여 있는 유물관을 들어서면 국보 제 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 보물로 지정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이 담긴 고산의 수적관계 문서와 지정 14년 고려조 공민왕 3년(1354년) 노비문권 등 고산윤선도와 해남윤씨 들이 남긴 유물 4천6백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된 해남윤씨 가전고화첩은 지본수묵(紙本水墨)혹은 담채(淡彩)한 소품들을 체계 없이 조성한 것으로 크기나 소재, 기법이 다양하여 공재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보물 제 482호인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는 고산의 수적(手蹟)과 고산에 관계되는 문헌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금쇄동집고, 금쇄동기, 산중신곡이 있고 고산의 관계문서로는 은사첩, 윤고산양자예조입안문서가 있다.
보물 제483호로 지정된 노비문권은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 소지(所志) 6장, 입안(立案) 2장, 모두 8장으로 된 문서로 오랜 년대를 내려오는 동안 좀이 먹어 훼손된 것을 1755년(영조20)에 다시 6장을 한 제첩으로 다시 꾸며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고 표제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 때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윤광전이 그의 아들인 소윤(少尹)의 관직을 가진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주는 증서다. 문자의 내용은 이두문으로 되어있고 고대의 이문서는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서다.
이외에도 해남윤씨들이 남긴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영화를 느끼게 해준다.
공재윤두서
공재 윤두서 (1668~1715)
고산 윤선도와 함께 녹우당 해남윤씨가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공재 윤두서(1668~1715)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불렸던 문인화가로 그가 그린 자화상은 해남의 유일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공재는 숙종 19년(1693)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한다거나 정치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윤두서가 살던 시기는 대략 숙종 재위기간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동을 거치면서 기존의 권위들이 무너지고 변화와 개혁에 대한 각성과 모색이 싹트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활동했던 윤두서 였기에 그의 그림에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난다.
윤두서는 조선 중기까지 우리 그림에 등장하는 신선이나 도사의 옷차림, 시중드는 동자의 머리모양 등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나 ‘나물 캐는 여인’ , ‘밭가는 풍경’ 등 기존의 산수화 풍을 벗어나 사실주의 적인 화풍을 전개한다.
그의 그림에서 ‘짚신삼기’는 휘늘어진 나무 밑에 도사가 아닌 맨상투 바람의 조선남자가 다리를 뻗고 앉아 열심히 짚을 엮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풍속화는 18세기 중 · 후반에 김홍도 등에 의해 유행하게 되는 풍속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산수화의 관념적 화풍 속에서 민중들의 생활상을 현실에서 끌어넣을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윤두서는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실학적 선구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윤두서는 지도나 기하학을 비롯 다양한 분야에 박학했던 학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박학의 학문경향은 고산 윤선도를 비롯한 녹우당 해남윤씨가 인물들의 경향이기도 하다. 윤두서는 옥동 이서 등 출세에서 소외된 남인학자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틀에 박힌 관념을 벗어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고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윤두서는 실학자로서의 면모도 유감 없이 보여준다. 이는 해남윤씨가의 『당악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모두 널리 꿰뚫고 그 극치를 추구하였고 백가의 뭇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원리와 응용을 연구하였으며, 천문은 각 지방을 두루 답사하고 밤마다 돌아다니며 관찰하여 천체의 이동현상을 살피었고, 천문을 측량하고 땅을 재는 법을 경험적으로 증명하였다. 세상에 전해오는 병서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패관소설도 모두 읽어 지식을 넓히는데 도움을 얻었고 또 중국의 지도와 우리나라 지리서의 내용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윤두서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와 절친하였는데 실학자 성호이익은 윤두서의 제문을 쓰면서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이익과 같은 학자가 나오는데는 윤두서와 같은 선구자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윤두서의 실학적 성향은 실학을 추구했던 당시 남인들과의 교유와 함께 윤두서의 외증손 다산 정약용에도 미치게 된다. 정약용은 외가인 이곳 녹우당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있으며 정약용의 제자 중 절반이 해남 윤씨로 그의 학문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윤두서는 사람이나 동물을 그릴 때는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때까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림을 그린 후에 대상의 본 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버렸다고 한다. 윤두서의 사실주의 적 기법은 자화상에 잘 나타난다. 자화상은 그림의 양식에서도 전무후무한 묘사의 기법을 쓰고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은 그의 내면을 잘 담고 있다.
윤두서는 또한 말을 즐겨 그리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중에 ‘백마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많은 말 그림이 현존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자화상과 함께 한국 회화사상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되는 ‘노승도’ 그리고 ‘심득경 초상화’가 있다. 심득경은 윤선도의 외증손이며 윤두서와 절친한 지기로 지냈으나 먼저 죽었다.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려서 보내니 그 집안 사람이 살아온 것 같아 모두 울었다 한다.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 때 (1713년) 서울 생활을 버리고 해남으로 돌아왔고 2년 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양 미술관에 보관중인 공재 윤두서 초상화
해남군청 윤주연 군의회 전문위원이 행정계장으로 재임(2003년)시 전남도의 남북교류 협의회의 이름으로 군수,군의회의장과 함께 평양일대를 방문하였을 때 평양의 미술관에서 공재 윤두서의 산수화 두점을 관람하고,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다는 말에 따라, 조상의 초상화를 보아야 한다며 우겨, 창고에 보관된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를 사진 찍어온 모습이다.
평양의 사진은 연동에 소재한 윤선도 유물관의 공재 초상화 보다 다소 얼굴에 살이 쪄 보이며, 젊은 모습으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다르다.
한편, 옷을 입은 공재의 초상화가 일본으로 간적이 있어 원본 유무에 대한 새로운 초상화 여부도 관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수정동과 금쇄동
고산문학의 배경지 수정동과 금쇄동
고산은 자신의 은둔생활을 철저히 자연 속에 몰입시킨다. 그가 이러한 자연속에서 자신의 세계로 조영한 곳이 수정동과 금쇄동이다.
고산문학의 주된 배경은 자연이다. 이중 어촌을 배경으로 한 것이 보길도에서 지었던 어부사시사이고 산중인 임천(林泉)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에서 지었던「산중신곡」과「금쇄동기」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은 크게 천연의 순수자연과 순수자연에 인공을 가한 조형자연을 선호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고산이 보길도에서 부용동원림을 조영하고 현산면에 금쇄동원림, 수정동원림 등을 경영한 것은 이러한 조형자연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의 대표작인 산중신곡은 이곳 금쇄동과 수정동 그리고 문소동 등에서 원림을 경영하며 산거생활의 흥취를 노래한 것이어서 고산의 중요한 문학처이다.
고산이 처음 은둔처로 정한 수정동은 현산면 만안리 만안저수지 윗쪽 골짜기에 위치한 계곡이다. 현재 채석장이 있는 곳을 지나 조그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비가 올 때나 흐르는 실개천이 나오고 이 실개천을 이용하여 고산이 조영한 수정동 유적이 나온다.
이곳은 고산이 기유년 53세 되던 2월 경상도 영덕의 귀양살이에서 풀리어 해남연동의 종가에 돌아온 후 산거생활(山居生活)을 위해 처음 찾은 곳이다. 이곳의 좁은 계곡을 따라 오르면 양쪽에 허물어진 축대가 있어 정자나 집을 짓기 위해 쌓아올린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병풍바위 바로 아래에는 축대 중 가장 큰 규모인 높이 약 3m, 길이 10m 가량의 정자 터가 있으며 여기저기 기와 파편들이 흩어져 있어 기와를 얹은 정자 터가 아니었나 추측케 한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자연의 일부는 높이 약 10m, 길이 50m 가량의 병풍바위다.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비폭이 되어 흐르고 있다.
비가오지 않을 때는 그 수량이 적어 그 맛을 느끼기 어렵지만 비가 오면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비폭을 바라보며 시상에 잠겼을 고산을 생각하면 그의 낭만적인 조영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비폭에서 부근 마을사람들이 유두날 물을 맞았다고 하며 물을 맞을 때 마음씨가 나쁜 사람은 구렁이가 물을 막아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병풍바위 왼편으로 따라 올라가면 조그마한 동굴이 나온다. 천연굴로 보이며 아주 옛날에는 호랑이도 살았다고 한다. 이 동굴은 산중신곡의 ‘일모요(日暮謠)’에 나오는 ‘아희야 범 무서운데 밖에 나다니지 말아라’고 한 고산의 심정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위쪽에는 무성한 덤불 숲 속에 축대를 쌓아 만든 연못이 있다. 이곳에서는 금쇄동이나 보길도에 비해 그 조영된 규모나 모습이 작지만 아기자기한 정원 같은 느낌이 든다.
고산은 수정동에서 다시 문소동을 찾아 정사(精舍)를 짓고 왕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꿈으로 인해 발견한 곳이 금쇄동이다. 고산은 경진년(54세)에 천연의 금쇄동을 발견하며 금쇄석궤(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고 며칠이 안되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금쇄동이라 하였다 한다.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감춰온 이곳, 그 누가 알랴 선경인 줄을 깎아 지르나니 신설굴이요 에워 두르나니 산과 바다로다. 뛰는 토끼 나는 가마귀 산봉우리 넘나들고 올라와 보니 전날밤의 꿈과 같음을 알겠구나. 옥황상제께서는 무슨공으로 내게 석궤(錫櫃)를 주시는고」
이 한시는 고산이 금쇄동을 발견하고 지은 「초득금쇄동(初得金鎖洞)」이란 작품으로 이곳을 얻은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고산이 찾아낸 금쇄동은 현산면 구시리 산 181번지에 있는 270~290m의 산 정상부에 있다. 서북쪽을 제외하고는 가파르고 험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보통 ‘산성안’ 이라고 부른다. 금쇄동 안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병풍산이 동·북쪽으로 길게 가로 놓여 있어서 약 4km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계곡에서 금쇄동이 있는 산을 올려다보면 그리 높지는 않으나 바위가 많고 경사가 심해서 오르기 어려운 산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약 3만여 평의 분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 분지를 감싸고 약 1.5km 가량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1656년 유형원이 만든 「동국여지지」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올 뿐이다.
「금쇄동은 해남현의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산세는 면곡(面曲)하고 험령(險嶺)을 넘으면 그 위에 고성지(古城址)가 있다. 인조 때 현사람 윤선도가 산의 높은 곳을 금쇄라고 이름지었다.」
이 산의 정상에서는 두륜산과 달마산은 물론이고 멀리 월출산과 서남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모습과 기암절벽이 기묘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고산이 이곳을 얻고 쓴 시에 ‘선경(仙境)’이라 표현한 마음이 이해가 간다. 고산은 그의 수필집인「금쇄동기」에서 금쇄동에 관한 산수경관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금쇄동은 문소동 동쪽의 제일봉 위에 있다. 심히 높아서 해와 달을 가까이 하고 바람과 비를 내려다 볼만한 곳이다. 금쇄동의 하늘은 환하게 밝으면서 붉은 기운이 그윽하고 산수의 경치는 진귀하면서 아름답다. 산의 후면은 점차 험해지다 위에는 심하게 험하지 않고 멀고 깊어서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다. 금쇄동의 계곡입구에 도달하면 점로(店路)는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산세가 험하고 급해서 그 아래로 왕래하면 단지 단애(丹崖)와 취벽(翠壁)만 보이고 높이 솟은 뾰족뾰족한 산봉우리 같고, 저녁놀이 서린 첩첩한 산봉우리 같아서 골짜기가 거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
고산은 이곳 금쇄동에 회심당, 불원요, 휘수정, 교의제 등을 짓고 연못을 파서 연꽃과 고기를 길렀다는 기록이「고산연보」고산의 54세 때 기록에 나온다. 이러한 조형자연 속에서 고산은 산중신곡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지을 수 있었다.
고산 연보를 비롯한 산중신곡이나 금쇄동기를 통해 금쇄동의 여러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금쇄동을 오르며 그가 차례대로 명명한 불차, 하휴대, 기구대, 중휴대등 20여개에 이르는 지명과 그중 금쇄동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월출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본가 연동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송순이 담양의 지곡리에 있는 성산동의 식영정과 소쇄원, 광주 충효리의 환벽당(環碧堂)을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하여 명구로 기렸듯이 이곳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을 삼승(三勝)이라 할 수 있다.
이곳 금쇄동에는 고산 신도비와 고산 제각이 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하는 고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고산은 금쇄동기에서 수정산의 거처를 가려면 5리가 못되고 문소산(聞簫山)의 거처를 가자면 1리도 못되니 이는 1환(丸)의 자연이요 천년의 비경이라며 이 세 곳을 스스로 가까운 거리의 명구승지로 생각한다고 자술(自述)하고 있는데, 고산이 시가생활의 주된 무대로 삼은 수정동, 금쇄동, 문소동 중에서 고산의 묘가 있는 곳이 문소동(聞簫洞 퉁소소리 듣는 골짝)이다.
문소동은 민가 한 채가 있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현재 고산 제각과 묘소가 있다. 이곳에는 커다란 백일홍 나무 한 그루가 묘와 제각으로 가는 이정표가 되어 있다.
고산은 그가 죽기 전에 묻힐 묘 자리를 금쇄동에 정한다. 그가 잡은 묘 터는 당시 유명한 지관이었던 이의신이 잡아놓은 터였다고 전해 온다.
이의신은 윤선도와 인척관계였다고 하는데 풍수지리에 밝은 이의신은 묘 자리로 쓰기위해 나귀를 타고 매일이면 이곳을 열심히 왕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안 고산이 하루는 이의신이 타고 다닌 나귀를 자신이 타고 가니 나귀는 습관적으로 자신이 늘 상 다니던 곳에 이르러 멈추어 서고 고산은 노새가 멈춘 자리에서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니 과연 명당자리였다.
고산은 이 묘를 차지하기 위해 묘 자리에 말뚝을 박고 물을 부어 묘 자리를 표시 한 후 이의신에게 자신이 보아둔 자리가 있는데 한번 살펴보아 달라고 권한 후 이의신을 데려가니 이의신이 웃으면서 자리에는 임자가 모두 따로 있는데 자신이 괜스레 헛고생을 했다며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의신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풍수가로 그가 유명한 지관이 된 이야기가 마산면 송석리 일대에서 생긴 전설로 전해 내려온다.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 (1587~1671)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는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송강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대부분 한문문학과 경직된 사회구조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들을 지어냈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으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과 시름과 흥, 원(願)을 시문(詩文)으로 풀어낸다. 고산은 본관이 해남으로 1587년(선조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현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다. 고산은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자 8세 때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고산의 일생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내게 된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을 지녀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탄한 일생을 살지 못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지만 당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로 당시는 이이첨 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남인이었던 고산은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힘을 펴지 못 하였으며 광해군에 아첨하는 권세가 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때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비난한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의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 돼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지만 유배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는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 때 출사의 꿈이 펴진다. 별시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지금 경북 성주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1636년(인조14) 고산의 나이 50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애국의 정이 깊었던 고산은 향리자제와 가졸 등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선편으로 강화도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왕자들은 붙잡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이때 배를 타고 남하하다 도착한 곳이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다. 그는 이곳에서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샘과 돌이 참으로 아름다와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고 감탄하며 머물게된다.
이곳에서 고산은 격자봉 아래에 은거지를 정하고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지었으며 낙서재를 세우고 자연에 묻혀 어부사시사를 짓는 등 작품생활을 하는 생활의 터가 되며 임종시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땅이 된다.
고산의 시련은 말년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74세 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논쟁에 있어 3년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하여 송시열 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된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말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니 경솔히 죽일 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고산은 79세(1665년 현종6)에 광양으로 이배 되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향년 85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다.
고산은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의 생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으로 교차된 삶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산은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문학적으로 매우 뜻깊은 시대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래서 그를 평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문학이다. 이러한 그가 평생을 통해 쏟아낸 엄청난 시구로 인해 한국의 국문학사는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윤선도는 그의 창작산실이 거의 유배, 은둔지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인 배경을 비롯 그 공간에서 처하게 된 동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산이 택한 은거지는 크게 현산면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였다. 현산은 첩첩산중 육로를 거쳐 찾아야 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할 해중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 된다.
해남에서 문학생활의 주무대는 현산면 만안리에 있는 금쇄동과 수정동, 문소동으로 이곳에서 약 10년을 번갈아 머물며 ‘산중신곡’ ‘금쇄동기’등의 작품을 쏟아냈고 보길도의 부용동에서는 일곱차례에 걸쳐 약 12년간을 풍류하며 살았다.
고산 윤선도(1587~1671)의 묘
고산은 금쇄동기에서 수정산의 거처를 가려면 5리가 못되고 문소산(聞簫山)의 거처를 가자면 1리도 못되니 이는 1환(丸)의 자연이요 천년의 비경이라며 이 세 곳을 스스로 가까운 거리의 명구승지로 생각한다고 자술(自述)하고 있는데, 고산이 시가생활의 주된 무대로 삼은 수정동, 금쇄동, 문소동 중에서 고산의 묘가 있는 곳이 문소동이다.
문소동은 민가 한 채가 있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현재 고산 제각과 묘소가 있다. 이곳에는 커다란 백일홍 나무 한 그루가 묘와 제각으로 가는 이정표가 되어 있다.
고산은 그가 죽기 전에 묻힐 묘 자리를 금쇄동에 정한다. 그가 잡은 묘 터는 당시 유명한 지관이었던 이의신이 잡아놓은 터였다고 전해 온다.
이의신은 윤선도와 인척관계였다고 하는데 풍수지리에 밝은 이의신은 묘 자리로 쓰기위해 나귀를 타고 매일이면 이곳을 열심히 왕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안 고산이 하루는 이의신이 타고 다닌 나귀를 자신이 타고 가니 나귀는 습관적으로 자신이 늘 상 다니던 곳에 이르러 멈추어 서고 고산은 노새가 멈춘 자리에서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니 과연 명당자리였다.
고산은 이 묘를 차지하기 위해 묘 자리에 말뚝을 박고 물을 부어 묘 자리를 표시 한 후 이의신에게 자신이 보아둔 자리가 있는데 한번 살펴보아 달라고 권한 후 이의신을 데려가니 이의신이 웃으면서 자리에는 임자가 모두 따로 있는데 자신이 괜스레 헛고생을 했다며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