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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2일 주현절 일곱째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4장입니다.
광고, 현금, 기도입니다. 성경 롬9:30-10:13절(신253쪽)입니다. 찬송 570장입니다.
제목: 율법과 그리스도
성도 여러분, ‘끼리끼리 논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같거나 비슷한 부류끼리 서로 어울리게 됨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비슷해서는 부족합니다. 완전히 똑같아야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생이시므로 우리도 영생이어야 합니다. 그가 빛이시므로 우리도 빛이어야 합니다. 그가 사랑이시므로 우리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가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거룩하여야 합니다. 그가 의로우시므로 우리도 의로워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의 ‘끼리끼리(특별한)’ 관계를 성경은 ‘언약’으로 표현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본문에 자주 반복되는 ‘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먼저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온 ‘의’라는 단어는 올바름이나 정의롭다는 의미인데, 실제로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의’ 또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의’라는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신분 또는 지위’를 의미합니다. 즉 언약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연합)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의의 법’(9:31)은 율법입니다. 이는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즉 언약의 신분’(5)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의’에 대한 이런 지식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를 얻어서 언약 백성이 되었고, ‘의의 법(율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또는 율법이 마지막의 목표인 그리스도)’에 이르지 못하여 버림을 받은 현실의 진술(9:30-31)로 오늘 본문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대부분은 버림을 받고 소수만 구원을 받은 이유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유기 때문이라고 9장에서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9:14, 30)라는 반어적 질문으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제, 바울은 ‘의’를 얻지 못한 이스라엘의 실패(30b-31)에 대하여 “어찌 그러하냐”(32a)라고 질문하고, 그들의 책임 관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32b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부딪칠 돌에 부딪혔습니다”(32b). 이것은 사8: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침략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을 ‘부딪칠 돌’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반석이 되시지만, 다른 것들을 의지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부딪칠 돌’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오히려 걸려 넘어졌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인용하여 다시 설명합니다. 33절입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앞에서 인용된 사8:14절에 나오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의 개념을 사28:16절에 나오는 ‘시온에 놓인 한 돌’의 개념과 결합하여 사28:1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28:16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바울은 ‘부딪칠 돌’과 ‘시온에 놓인 귀하고 견고한 한 기촛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이 예언대로 그를 믿기를 거절하고 율법 행위를 의지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걸림돌’(갈5:11)에 부딪쳐 넘어졌지만, 그러나 그를 믿은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즉 의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9:1-3절에 증언한 바와 같이 바울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 가운데 하나님께 그들의 구원을 구하면서(1), 그들이 ‘의’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다시 설명합니다. 2-4절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한 이유로 첫째는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
둘째는 올바른 지식인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율법 행위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였기에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힘써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 셋째는 올바른 지식, 즉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사실에 무지하였기 때문입니다(4).
4절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여기서 ‘마침’으로 번역된 헬라어 ‘텔로스’는 종결(폐지)의 의미도 있지만, ‘완성, 또는 마지막 목표(목적)’라는 의미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모든 것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셨다, 즉 우리의 대표자로서 율법 언약을 완성하여 의롭게 되셨다. 그 결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의(칭의, 새 언약의 신분)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둘째로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 목표라’는 것은 율법이 율법으로 죄인임을 깨달은 자(롬3:19-20)를 그리스도(율법의 목적지)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라는 것입니다. 갈3: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오해하였습니다. 율법이 진정으로 무엇을 목적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완성이자 마지막 목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4)에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3).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그리스도)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2).
성도 여러분, 율법과 복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특히 율법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완성이요, 목표라는 4절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을 설명합니다(5-13).
첫째는 율법으로(율법 행위) 말미암는 의입니다(5).
5절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이것은 레18: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에 실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저주’를 받습니다. 갈3:10절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신27:26),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이스라엘처럼 율법 행위로 말미암는 의(언약적인 구원이나 축복)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의 이단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광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갈3:2-5).
둘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6-8).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6)를 의인화하여 신30:12-14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6)고 소개합니다. 신30:12-14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30:12-14절은 ‘만일 ... 하면 ... 하리라’라는 율법 언약이 신28-29장에서 제시되고, 이스라엘은 저주를 받아 이방의 포로가 되리라는 예고(신30:1)와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 구원의 약속(신30:2-10)과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라는 신30:11절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신30:12-13절과 같은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7절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여기서 바울은 신명기의 명령(율법)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인용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그를 모셔 올리기 위해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와 같은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 즉 그런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이미 오셨고, 죽으사 무저갱에서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죽음으로 율법 언약을 이미 다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 우리를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우리가 그러한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을 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신30:11절을 보충 설명하는 신30:14절을 다시 인용하여 말합니다. 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그것은 율법 언약의 완성이신 말씀(그리스도)이 우리에게 가까워 우리 입에 있으며, 우리 마음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신30:14절의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를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c)고 변경하였습니다. 이는 ‘그 말씀(율법)’(신30:14)은 쉽고, 가까이 있고(신30:11), 그리고 행할 수 있다(신30:14)는 예언(약속)은 이제 성취되어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기에,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가 필요 없고 오직 믿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율법 언약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4).
이제 바울은 ‘우리(사도)가 전한 믿음의 말씀(복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설명합니다(9-13).
먼저 ‘믿음의 말씀(복음)’이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것은 ‘예수가 주’(9a)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칭호는 하나님(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9b)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사 주가 되게(임명) 하셨다, 즉 ‘예수가 주’라는 것을 반복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가 주’라는 믿음의 말씀은 9-13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복음)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를 주로 칭하였는데, 그 황제가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여 율법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과 만물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알고 살지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주(책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구원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9-10절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믿어지고, 수동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시인되어, 수동태)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언약을 완성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주가 되셨다는 주 예수의 복음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칭의), 성화 구원과 영화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기서 9절은 능동태를 사용하여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시인하지만, 10절은 수동태로 주 예수의 복음이 우리에게 믿어지고 시인되어 진다는 것, 즉 그것을 믿고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엡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도 여러분, 아무나 복음을 믿고 시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부름을 받은 사람만이 주 예수의 복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누구든지 주 예수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율법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인용하면서 계속 반복합니다(11-13).
먼저 11절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르되(이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여기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의롭다 함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바울은 9:33절에서 이미 인용된 사28:16c절을 다시 인용하여 오직 주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는 것(칭의)을 강조합니다.
이제 12a절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이것은 ‘누구든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12b절입니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의 죽음으로 율법 언약을 다 이루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사람과 만물의 주가 되셨기 때문에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여기서 ‘그를 주로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소유가 되었다, 즉 그와 연합하였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결혼한 아내가 그 남편의 부를 소유하는 것과 같이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우리도 만물을 소유하는 부유한 자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당시에 잘 알려진 욜2:32절의 인용인 13절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욜2:32절의 요엘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율법 언약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주가 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의 복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를 대표해서 율법의 언약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우리의 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율법을 다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주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됩니다. 그러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능력(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 성품을 계시하는 거룩한 율법도 주 예수 복음을 믿는 우리가 순종할 수 있게(성화 구원)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제3의 용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천지가 흔들려도 새 언약대로 될 것을 믿으시고 그것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찬송 544장을 부르시고 다 같이 기도하신 후에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