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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 있어야 열매가 튼실하다
신이 인간과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호두 과수원 주인이 신을 찾아와 간청을 했습니다.
“저한테 한 번만 1년 날씨를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유는 묻지 마시고 딱 1년만 천지 일기 조화가
저를 따르도록 해 주십시오.”
하도 간곡히 조르는지라, 신은 호두 과수원 주인에게 1년 날씨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의 날씨는 호두 과수원 주인
마음대로 되었습니다.
햇볕을 원하면 햇볕이 쨍쨍했고, 비를 원하면
비가 내렸습니다.
바람도 없었습니다.
천둥도 없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롭게 되어갔습니다.
이윽고 가을이 왔습니다.
호두는 대풍년이었습니다.
호두 과수원 주인은 산더미처럼 쌓인 호두 중에서
하나를 집어 깨뜨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알맹이가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다른 호두도 깨뜨려 보았습니다.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호두 과수원 주인은 신을 찾아가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봐, 시련이 없는 것에는 그렇게 알맹이가
들지 않는 법이라네.
알맹이란, 폭풍 같은 방해도 있고 가뭄 같은
갈등도 있어야 껍데기 속의 영혼이 깨어나
여문다네.”
우리네 인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즐겁고 좋은 일만 있다면야 우리
영혼 속에 알맹이가 여물겠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찌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겠습니까?
시련에 부닥칠 때
호두 알맹이의 교훈을 되새겨 보십시오.
– 박영하 <책읽고 밑줄긋기> 중에서
옮긴 글입니다.
항상 복운이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다^^이 몸이 그대로 금생(今生) 중(中)에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를 나타내서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일컬어지느니라. 비유컨대 춘하(春夏)에 논을 갈아서 심는다면 추동(秋冬)에는 곳간에 거둬 들여서 마음대로 사용(使用)함과 같으니라. 봄부터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은 오래인 것 같지만 일년내(一年內)에 기다려서 얻음과 같이 이 깨달음에 들어가서 부처를 나타내는 동안은 오래인 것 같지만 일생내(一生內)에 나타내서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부처로 되느니라.
이 길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도 상중하(上中下)의 삼근(三根)은 있지만 똑같이 일생내(一生內)에 나타내느니라. 상근(上根)의 사람은 듣는 곳에서 남김없이 깨달아서 나타냄이라. 중근(中根)의 사람은 혹은 一일(日)·혹은 一월(月)·혹은 一년(年)에 나타내느니라. 하근(下根)의 사람은 뻗어 갈 곳이 없어 막혀버리므로 일생내(一生內)에 한정(限定)된 일이기에 임종(臨終)의 때에 이르러서 모든 꾸던 꿈도 깨어 현실로 됨과 같이 지금까지 본 바의 생사(生死)·망상(妄想)의 사(邪)된 생각과 그릇된 사리(事理)는 형적(形迹)도 없어지고 본각(本覺)의 현실의 깨달음으로 돌아와서 법계(法界)를 보면 모두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으로서 평소(平素)에 천(賤)하다고 생각한 나의 이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로 되어 있느니라·가을의 벼에는 조(早)와 중(中)과 만(晩)의 세가지의 벼가 있지만 일년내(一年內)에 거둬들임과 같이, 이것도 상중하(上中下)의 차별(差別)이 있는 사람이지만 똑같이 일생내(一生內)에 제불여래(諸佛如來)와 일체불이(一體佛二)라고 아울러 생각해야 할 일이니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체(體)의 존귀(尊貴)하심은 어떠한 체(體)이신가 하고 추구(追求)해 보았더니 나의 심성(心性)의 팔엽(八葉)의 백연화(白蓮華)라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몸의 체성(體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말한 것이므로 경(經)의 이름이 아니고·이미 나 자신(自身)의 체(體)라고 알았기에 자신(自身)이 그대로 법화경(法華經)이며 법화경(法華經)은 나 자신(自身)의 체(體)를 불러 나타내시는 부처의 말씀이시므로 다름아닌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인 것이니라. 이렇게 깨닫는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이래(已來) 지금까지 항상 생각해 온 그릇된 망상(妄想)은 어제의 꿈을 생각하듯이 형적(形迹)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니라. 이를 믿고 한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면 법화경(法華經)을 깨닫고 여법(如法)으로 일부(一部)를 봉독(奉讀)함이니라. 열번은 十부(部)·백(百)번은 百부(部)·천(千)번은 천부(千部)를 여법(如法)으로 봉독(奉讀)한 것이로다. 이렇게 믿음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말하느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십여시사(十如是事) 사도에서 37세에 술작 410~1쪽곰곰이 생각하건대 말법유포(末法流布)의 때에 생(生)을 이 토(土)에 받고, 이 경(經)을 믿는 사람은 여래(如來)의 재세(在世)보다 유다원질(猶多怨嫉)의 난(難)이 심(甚)할 것이라고 쓰였느니라. 그 까닭은 재세(在世)는 능화(能化)의 주(主)는 부처이고, 제자(弟子) 또한 대보살(大菩薩)과 아라한(阿羅漢)이니라. 인천(人天)·사중(四衆)·팔부(八部)·인비인(人非人) 등(等)이라 할지라도 조기조양(調機調養)해서 법화경(法華經)을 듣게 하셨는데 역시 원질(怨嫉)이 많았었다. 하물며 말법(末法)인 지금의 때는 교기시각(敎機時刻)이 당래(當來)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스승을 찾아보면 범사(凡師)이고, 제자(弟子) 또한 투쟁견고(鬪諍堅固)·백법은몰(白法隱沒)·삼독강성(三毒强盛)한 악인(惡人)들이니라. 고(故)로 선사(善師)를 원리(遠離)하고 악사(惡師)에게는 친근(親近)하느니라. 게다가 진실(眞實)한 법화경(法華經)의 여설수행(如說修行)의 행자(行者)의 사제단나(師弟檀那)로 됨에 있어서는 삼류(三類)의 적인(敵人)은 결정적(決定的)이라. 그러므로 이 경(經)을 청문(聽聞)하기 시작한 날부터 생각을 정(定)할지어다, 황멸도후(況滅度後)의 대난(大難)의 삼류(三類)가 심(甚)할 것이라고. 그런데 나의 제자(弟子) 등(等) 중에도 이전(以前)부터 청문(聽聞)했으면서도 대소(大小)의 난(難)이 왔을 때는 새삼스레 놀라고 혼이 빠져서 신심(信心)을 저버렸느니라. 미리 전부터 말하지 않았느뇨. 경문(經文)을 우선(優先)으로 하여 유다원질황멸도후(猶多怨嫉況滅度後)·황멸도후(況滅度後)라고 조석(朝夕)으로 가르친 것은 이것이니라. 내가 혹은 추방(追放)을 당하고, 혹은 상처(傷處)를 입고·혹은 두 차례의 감죄(勘罪)를 받아 원지(遠地)로 유죄(流罪)됨을 보고 들을지라도 이제 새삼스레 놀랄 만한 일이 아니거늘.
물어 가로되, 여설수행(如說修行)의 행자(行者)는 현세안온(現世安穩)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삼류(三類)의 강적(强敵)이 맹렬(猛烈)하오. 답(答)하여 가로되, 석존(釋尊)은 법화경(法華經) 때문에 이번에 구횡(九橫)의 대난(大難)을 당하셨느니라, 과거(過去)의 불경보살(不輕菩薩)은 법화경(法華經) 때문에 장목와석(杖木瓦石)으로 맞고·축(竺)의 도생(道生)은 소산(蘇山)에 귀양가고, 법도삼장(法道三藏)은 얼굴에 화인(火印)을 찍히고, 사자존자(師子尊子)는 목이 베어지고, 천태대사(天台大師)는 남삼(南三)·북칠(北七)에 적시(敵視)당하였고, 전교대사(傳敎大師)는 육종(六宗)에게 미움을 받았었다. 이들 불보살(佛菩薩)·대성(大聖) 등(等)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로서 그토록 대난(大難)을 만나시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어느곳에서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을 찾으리요. 연(然)이나 지금의 세상(世上)은 투쟁견고(鬪諍堅固)·백법은몰(白法隱沒)인데다가 악국(惡國) 악왕(惡王) 악신(惡臣) 악민(惡民)만이 있어서 정법(正法)을 배반(背反)하고 사법(邪法)·사사(邪師)를 숭중(崇重)하므로 국토(國土)에 악귀(惡鬼)가 난입(亂入)하여, 삼재(三災)·칠난(七難)이 성(盛)하게 일어났느니라. 이와 같은 시각(時刻)에 니치렌(日蓮)이 불칙(佛勅)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야말로 시(時)의 불상(不祥)이로다. 법왕(法王)의 선지(宣旨)를 어길 수 없으므로 경문(經文)에 있는 대로 권실이교(權實二敎)의 싸움을 일으켜서 인욕(忍辱)의 갑옷을 입고, 묘교(妙敎)의 검(劍)을 차고, 일부팔권(一部八卷)의 간심(肝心)·묘법오자(妙法五字)의 기(旗)를 높이 들고 미현진실(未顯眞實)의 활을 당겨서 정직사권(正直捨權)의 화살을 활시위에 메우고, 대백우거(大白牛車)에 올라타고 권문(權門)을 마구 부셔서 저리로 밀어 붙이고, 이리로 몰아놓으며 염불(念佛)·진언(眞言)·선(禪)·율등(律等)의 팔종(八宗)·십종(十宗)의 적인(敵人)을 공격하니 혹은 도망치고, 혹은 뒤로 물러서며 혹은 사로잡힌 사람은 나의 제자(弟子)가 되었다, 혹은 반격하고 공격해서 항복시키곤 하였지만, 적(敵)은 다세(多勢)이고, 법왕(法王)의 한 사람은 무세(無勢)이므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느니라. 법화절복(法華折伏)·파권문리(破權門理)의 금언(金言)이므로 마침내 권교(權敎) 권문(權門)의 무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절복(折伏)하여 법왕(法王)의 부하(部下)로 삼고, 천하만민(天下萬民)·제승일불승(諸乘一佛乘)으로 되어 묘법(妙法)만이 유독(唯獨) 번창(繁昌)할 때, 만민일동(萬民一同)으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부는 바람이 가지를 흔들지 않고, 비는 흙덩이를 부수지 않으며, 대(代)는 희농(羲農)의 세상으로 되어 금생(今生)에는 불상(不祥)의 재난(災難)을 없애고 장생(長生)의 술(術)을 터득하여, 인법(人法) 공(共)히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이(理)가 나타날 때를 각자(各者)는 보시라. 현세안온(現世安穩)의 증문(證文)은 의심(疑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
물어 가로되, 여설수행(如說修行)의 행자(行者)라 함은 어떻게 믿는 것을 말하오. 답(答)하여 가로되, 당세(當世)·일본국중(日本國中)의 제인(諸人)·일동(一同)으로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 함은 제승일불승(諸乘一佛乘)이라고 개회(開會)하고 나면 어느 법(法)도 모두 법화경(法華經)으로서 승렬천심(勝劣淺深)이 있을 수 없느니라. 염불(念佛)을 부름도 진언(眞言)을 갖는 것도 선(禪)을 수행(修行)함도·통틀어 일체(一切)의 제경(諸經) 및,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수지(受持)하고 부름도 모두 법화경(法華經)이라고 믿는 것이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등(等) 운운(云云). 내가 말하노니 그렇지 않노라, 결국(結局) 불법(佛法)을 수행(修行)하려면 사람의 말을 채용(採用)하지 말지니라. 오로지 우러러 부처의 금언(金言)을 지켜야 하느니라.
여설수행초(如說修行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 501~2쪽염불(念佛)을 부름도 진언(眞言)을 갖는 것도 선(禪)을 수행(修行)함도·통틀어 일체(一切)의 제경(諸經) 및,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수지(受持)하고 부름도 모두 법화경(法華經)이라고 믿는 것이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등(等) 운운(云云). 내가 말하노니 그렇지 않노라, 결국(結局) 불법(佛法)을 수행(修行)하려면 사람의 말을 채용(採用)하지 말지니라. 오로지 우러러 부처의 금언(金言)을 지켜야 하느니라.
여설수행초(如說修行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 501~2쪽이렇게 깨닫는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이래(已來) 지금까지 항상 생각해 온 그릇된 망상(妄想)은 어제의 꿈을 생각하듯이 형적(形迹)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니라. 이를 믿고 한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면 법화경(法華經)을 깨닫고 여법(如法)으로 일부(一部)를 봉독(奉讀)함이니라. 열번은 十부(部)·백(百)번은 百부(部)·천(千)번은 천부(千部)를 여법(如法)으로 봉독(奉讀)한 것이로다. 이렇게 믿음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말하느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십여시사(十如是事) 사도에서 37세에 술작 410~1쪽우리의 삶에도 태풍이 불어 올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무섭기도 하고 불안 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면 하늘이 높고
맑듯이 우리의 삶을 온통 흔들리게 하는
큰 바람이 지나가면 우리의 마음도 깊어지고
생각이 맑아져서 한층 성숙해 집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고통이 없다면 무엇으로 만족을
얻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하나의 고통이 열 가지 감사를 알게하고
하나의 감사가 열가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이 없기를 물론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지금 고통속에 있거나 무슨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불평과 투덜거림
대신에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새로운 성숙과
감사를 떠올릴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그럴수 있다면 참으로 멋진 삶을
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삶은 아픔이 가져다 주는
고통보다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 옮긴 글입니다 -아무리 해도 이 몸은 헛되이 산야(山野)의 흙이 되리니, 아까워한들 무엇하리오, 아까워한들 끝내 아낄 수 없으며, 사람이 오래 산다 해도 백년(百年)은 넘지 못하니 그 간(間)의 일은 다만 한잠의 꿈과 같다. 받기 어려운 인신(人身)을 얻어 간혹 출가(出家)한 자(者)도 불법(佛法)을 배우고 방법(謗法)의 자(者)를 책(責)하지 않고 헛되이 유희잡담(遊戱雜談)만을 하며 지내는 자(者)는 법사(法師)의 가죽을 쓴 축생(畜生)이니라. 법사(法師)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世上)을 살고 몸을 보양(保養)한다 해도 법사(法師)로 되는 의(義)는 하나도 없고 법사(法師)라고 하는 이름을 훔친 도인(盜人)이니라, 부끄러워 할지어다, 두려워 할지어다. 적문(迹門)에는 「나는 신명(身命)을 사랑하지 않고 단(但) 무상도(無上道)를 아낌」이라고 설하고 본문(本門)에는 「스스로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음」이라고 설(說)했으며, 열반경(涅槃經)에는 「몸은 경(輕)하고 법(法)은 중(重)하니 몸을 죽여서 법(法)을 넓힌다」라고 쓰여 있느니라. 본적양문(本迹兩門)·열반경(涅槃經) 다 같이 신명(身命)을 버려서 법(法)을 넓힐지어다 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훈계(訓誡)를 배반(背反)하는 중죄(重罪)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쌓여서 지옥(地獄)에 떨어진다 함은 비유(譬喩)컨대 한열(寒熱)은 형체(形體)도 없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겨울이면 추위가 와서 초목(草木)이나 인축(人畜)을 괴롭히고 여름에는 더위가 와서 인축(人畜)을 열뇌(熱惱)케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재가(在家)의 몸은 다만 여념(餘念)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고 승(僧)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 간심(肝心)이외다. 그것도 경문(經文)대로라면 수력연설(隨力演說)도 있어야 할 것이로다. 세상(世上)살이가 힘겨울 때도 금생(今生)의 괴로움조차 슬프니 하물며 내세(來世)의 고(苦)에 있어서랴고 생각해서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기쁠 때도 금생(今生)의 기쁨은 꿈속의 꿈이며 영산정토(靈山淨土)의 기쁨이야말로 진실(眞實)한 기쁨이라고 생각하시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퇴전(退轉)없이 수행(修行)하여 최후(最後) 임종(臨終)의 때를 기다려 보시라, 묘각(妙覺)의 산(山)에 달려 올라가 사방(四方)을 쫙 바라보니 아아, 유쾌하도다, 법계(法界)는 적광토(寂光土)로서 유리(瑠璃)를 가지고 땅으로 하고 금의 밧줄로써 팔(八)의 길에 경계(境界)를 했으며, 천(天)으로 부터 사종(四種)의 꽃이 내리고 허공(虛空)에서 음악(音樂)이 들리며,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바람에 산들거리고 오락(娛樂) 쾌락(快樂)하시느니라. 우리들도 그 수(數)에 들어가서 유희(遊戱)하고 즐기게 될 것은 벌써 다가왔도다. 신심(信心)이 약(弱)해서는 이와 같이 가장 좋은 곳에는 갈 수 없다, 갈 수 없느니라. 궁금한 일은 더 더욱 물어보시라, 황송하고 황송하오.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 1386~7쪽만약 인천중(人天中)에 생(生)하면 승묘(勝妙)의 낙(樂)을 받으리라. 五에는 만약 불전(佛前)에 있으면 연화(蓮華)에서 화생(化生)하리라고 있느니라. 그런데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도읍(都邑)을 헤매어 나와서 망상전도(妄想顚倒)의 마을에 들어간 이래(已來)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으로 행하는 바 선근(善根)은 적고 악업(惡業)은 많더라. 그러므로 경문(經文)에는 일인일일중(一人一日中)에 팔억사천념(八億四千念)이 있으며 염념(念念) 중(中)의 소작(所作)은 모두 이는 삼도(三途)의 업(業)이니라 등(等)운운(云云). 우리들 중생(衆生)이 삼계이십오유(三界二十五有)의 거리에 윤회(輪回)함은 마치 새가 숲을 옮겨 가듯이 죽었다가는 태어나고, 태어났다가는 죽고, 수레가 마당을 돌듯이 시작도 끝도 없이 죽고 생(生)하는 악업심중(惡業深重)한 중생(衆生)이니라. 이로써 심지관경(心地觀經)에 가로되 「유정윤회(有情輪回)해서 육도(六道)에 생(生)함이 마치 차륜(車輪)이 시종(始終)이 없음과 같으며, 혹은 부모(父母)로 되고 남녀(男女)로 되며 생생세세(生生世世) 서로 은(恩)이 있느니라」 등(等) 운운(云云). 법화경(法華經)二의 권(卷)에 가로되 「삼계(三界)는 안온(安穩)함이 없으니 마치 화택(火宅)과 같아서 중고(衆苦)가 충만(充滿)했느니라」 운운(云云). 열반경(涅槃經)二十二에 가로되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여러 중생(衆生)을 관(觀)하건대 색향미촉(色香味觸)의 인연(因緣) 때문에 옛날 무량무수겁(無量無數劫)으로부터 이래(以來) 항시 고뇌(苦惱)를 받는다. 일일(一一)의 중생(衆生)이 일겁(一劫) 중(中)에 쌓는 신골(身骨)은 왕사성(王舍城)의 비부라산(毘富羅山)과 같으며, 마시는 바의 유즙(乳汁)은 사해(四海)의 물과 같고 몸에서 내는 바의 피는 사해(四海)의 물보다 많으며, 부모(父母)·형제(兄弟)·처자(妻子)·권속(眷屬)의 명종(命終)에 울며 흘린 바의 눈물은 사대해(四大海)의 물보다도 많다. 대지(大地)의 초목(草木)을 전부 네치의 주(籌)로 하여 그것으로써 부모(父母)를 세어도 또한 다 셀 수가 없느니라.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이래(已來) 혹은 지옥(地獄)·축생(畜生)·아귀(餓鬼)에 있어서 받는 바의 행고(行苦)는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해골(骸骨)에 있어서랴」 운운(云云). 이와 같이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바의 해골(骸骨)은 비부라산(毘富羅山)보다도 많고, 은애(恩愛)나 애민(哀愍)의 눈물은 사대해(四大海)의 물보다도 많지만 불법(佛法)을 위하여서는 일골(一骨)도 버리지 않았었다. 일구일게(一句一偈)를 청문(聽聞)하여 한방울의 눈물조차도 흘리지 않은 고(故)로 삼계(三界)의 농번(籠樊)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십오유(二十五有)의 거리에 유전(流轉)하는 중생(衆生)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삼계(三界)를 벗어나는가 하면 불법수행(佛法修行)의 공력(功力)에 의(依)하여 무명(無名)의 어둠이 개어 법성진여(法性眞如)의 깨달음을 열어야 하느니라. 그러면 불법(佛法)은 무엇을 수행(修行)해서 생사(生死)를 출리(出離)할 것인가 하면 오직 일승묘법(一乘妙法)이어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에신승도(慧心僧都)가 칠일간(七日間) 가모(加茂)에 틀어박혀서 출리생사(出離生死)는 어떤 교법(敎法)이어야 하는가고 기청(祇請)을 드렸던 바 명신(明神)의 탁선(託宣)에 가로되 「석가(釋迦)의 설교(說敎)는 일승(一乘)에 머무르고 제불(諸佛)의 성도(成道)는 묘법(妙法)에 있고, 보살(菩薩)의 육도(六度)는 연화(蓮華)에 있으며, 이승(二乘)의 득도(得道)는 이 경(經)에 있느니라」 운운(云云). 보현경(普賢經)에 가로되 「이 대승경전(大乘經典)은 제불(諸佛)의 보장(寶藏)이며,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불(諸佛)의 안목(眼目)이고, 삼세(三世)의 모든 여래(如來)를 출생(出生)하는 종자(種子)이니라」 운운(云云). 이 경(經) 이외에는 모두 성불(成佛)의 때가 있을 수 없는데다가 특히 여인성불(女人成佛)의 일은 이 경(經) 이외에는 결코 허용치 않느니라. 오히려 이전(爾前)의 경(經)에서는 매우 심하게 퇴박을 당했느니라. 그러므로 화엄경(華嚴經)에 가로되 「여인(女人)은 지옥(地獄)의 사자(使者)이며 능(能)히 부처의 종자(種子)를 끊어버린다, 외면(外面)은 보살(菩薩)과 흡사하나 내심(內心)은 야차(夜叉)와 같다」 운운(云云). 은색녀경(銀色女經)에 가로되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눈은 대지(大地)에 타락(墮落)할지라도 법계(法界)의 모든 여인(女人)은 영구(永久)히 성불(成佛)의 때가 없느니라」 운운(云云). 혹은 또 여인(女人)에게는 오장삼종(五障三從)의 죄(罪)가 깊다고 하는데, 그것은 내전(內典)에는 오장(五障)을 밝히고 외전(外典)에는 삼종(三從)을 가르쳤느니라. 그 삼종(三從)이란 어려서는 부모(父母)를 따르고 성인(成人)이 되면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자식을 따르니 일생(一生)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영계기(榮啓期)가 삼락(三樂)을 노래한 중(中)에도 여인(女人)으로 태어나지 않음을 가지고 일락(一樂)으로 삼았었다. 천태대사(天台大師) 가로되 「타경(他經)에는 다만 보살(菩薩)에 기(記)하고 이승(二乘)에 기(記)하지 않으며 다만 남(男)에 기(記)하고 여(女)에 기(記)하지 않음」이라 하여 전(全)혀 여경(餘經)에는 여인(女人)의 수기(授記)는 없다고 석(釋)했느니라. 게다가 석가(釋迦)·다보(多寶)의 이불(二佛)·탑중(塔中)에 병좌(並坐)하셨을 때·문수(文殊)·묘법(妙法)을 홍통(弘通)하기 위해 해중(海中)에 들어갔다가·불전(佛前)에 돌아오시니 보정세계(寶淨世界)의 다보불(多寶佛)의 제자(弟子)인 지적보살(智積菩薩)은 용녀성불(龍女成佛)을 힐난(詰難)하여 가로되 「내가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배견(拜見)하건대 무량겁(無量劫)에 난행고행(難行苦行)하여 공(功)을 쌓고·덕(德)을 쌓고·보살도(菩薩道)를 구(求)함을 아직 그치지 않으셨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보건대, 내지(乃至) 개자(芥子)만큼도 보살(菩薩)이 신명(身命)을 버리신 곳이 아님이 있을 수 없느니라. 중생(衆生)을 위하기 때문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소위지적(所謂智積)·문수(文殊)가 재삼문답(再三問答)하시는 동안은 팔만(八萬)의 보살(菩薩)·만이천(萬二千)의 성문(聲聞) 등(等)은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청문(聽聞)하실 뿐으로 한 마디의 조언(助言)도 없었느니라. 그런데 지혜제일(智慧第一)의 사리불(舍利弗)은 문수(文殊)의 일은 힐난(詰難)치 않고 많은 이유(理由)로써 용녀(龍女)를 비난(非難)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여인(女人)은 구예(垢穢)이며, 이는 법기(法器)가 아니라고 소승(小乘) 권교(權敎)의 의(意)를 가지고 비난(非難)하셨던 바 문수(文殊)는 용녀성불(龍女成佛)의 유무(有無)의 현증(現證)은 지금 불전(佛前)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예상과 다름없이 팔세(八歲)의 용녀(龍女)가 사신(蛇身)을 바꾸지 않고 불전(佛前)에 참예(參詣)하여 그 가치(價直)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설(說)하여진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부처에게 바친바, 부처는 기꺼이 이를 받으셨으므로 이 때 지적보살(智積菩薩)도 사리불(舍利弗)도 의심을 풀고 여인성불(女人成佛)의 길을 열어놓았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성불(女人成佛)의 본보기는 이로부터 일어났느니라·소상한 것은 五의 권(卷)의 경문(經文)을 읽으시라.
여인성불초(女人成佛抄) 가마쿠라에서 44세에 술작 471~2쪽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이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적인(賊人)·강도(强盜)·야습(夜襲)·호랑(虎狼)·사자(師子) 등(等)보다도 당시(當時)의 몽고(蒙古)의 공격(攻擊)보다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괴롭히는 사람들이니라. 이 세계(世界)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의 소령(所領)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시(無始) 이래(已來) 그 마왕(魔王)의 권속(眷屬)이니라. 육도(六道) 중(中)에 이십오유(二十五有)라고 하는 감옥(監獄)을 짓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들여 보낼 뿐만 아니라, 처자(妻子)라고 하는 굴레를 씌우고 부모(父母) 주군(主君)이라고 하는 그물을 하늘에 치고 탐진치(貪瞋癡)라는 술을 마시게 하여 불성(佛性)의 본심(本心)을 어루꾀느니라. 오직 악(惡)의 안주(按酒)만을 권하여 삼악도(三惡道)의 대지(大地)에 엎드려 자게 하고, 간혹 선심(善心)이 있으면 장애(障碍)를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악(惡)에 떨어뜨리려고 생각하여 이루지 못하면 점차 속이기 위하여 비슷한 화엄경(華嚴經)에 떨어뜨렸는데 두순(杜順)·지엄(智儼)·법장(法藏)·징관(澄觀) 등(等)이 바로 이것이니라. 또 반야경(般若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가상(嘉祥)·승전(僧詮) 등(等)이니라. 또 심밀경(深密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현장(玄裝) 자은(慈恩)이니라. 또 대일경(大日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고보(弘法)·지카쿠(慈覺)·지쇼(智證)니라. 또 선종(禪宗)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달마(達磨)·혜가(慧可)·등(等)이니라, 또 관경(觀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선도(善導)·호넨(法然)이니라. 이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이 지자(智者)의 몸에 들어가서 선인(善人)을 속이는 것인데 법화경(法華經) 제오권(第五卷)에「악귀(惡鬼)가 그 몸에 들어감」이라고 설(說)해져 있음은 이것이니라.
설사(說使) 등각(等覺)의 보살(菩薩)이라 해도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대악귀(大惡鬼)가 몸에 들어가서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묘각(妙覺)의 공덕(功德)을 장해(障害)함이니 어찌 하물며 그 이하(已下)의 사람들에 있어서랴. 또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이 혹(或)은 처자(妻子)의 몸에 들어가서 부모(父母)나 남편(男便)을 속이고, 혹(或)은 국왕(國王)의 몸에 들어가서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위협하고, 혹(或)은 부모(父母)의 몸에 들어가서 효양(孝養)하는 자식(子息)을 책(責)하는 일이 있느니라. 실달태자(悉達太子)가 위(位)를 버리려고 하시자 나후라(羅睺羅)를 잉태(孕胎)하였으므로 정반왕(淨飯王)이 이 아이가 출생(出生)한 후(後) 출가(出家)하라고 충고(忠告)하시자 마(魔)가 아들을 억류(抑留)하기를 육년(六年)이니라. 사리불(舍利弗)은 옛날 선다라불(禪多羅佛)이라고 하는 부처의 말세(末世)에 보살행(菩薩行)을 세워서 육십겁(六十劫)을 경과(經過)하여 이미 사십겁(四十劫)이면 백겁(百劫)이 될 것이므로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이 보살행(菩薩行)을 성취(成就)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였는지 바라문(婆羅門)으로 되어 눈을 구걸(求乞)하자 어김없이 빼어 주었으나 그로부터 퇴(退)하는 마음이 생겨서 사리불(舍利弗)은 무량겁(無量劫) 동안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었느니라. 대장엄불(大莊嚴佛)의 말(末)의 육백팔십억(六百八十億)의 단나(檀那)들은 고안(苦岸) 등(等)의 사비구(四比丘)에게 속아서 보사비구(普事比丘)를 미워하였으므로 대지미진겁(大地微塵劫) 동안 무간지옥(無間地獄)을 경과(經過)하였느니라. 사자음왕불(師子音王佛)의 말(末)의 남녀(男女)들은 승의비구(勝意比丘)라고 하는 지계(持戒)의 승(僧)을 의지하여 희근비구(喜根比丘)를 비웃었으므로 무량겁(無量劫) 동안 지옥(地獄)에 떨어졌느니라.
지금 또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등(等)은 이에 해당(該當)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에는 「여래(如來)의 현재(現在)조차도 역시 원질(怨嫉)이 많은데 하물며 멸도(滅度)의 후(後)에 있어서랴」 또 가로되 「일체세간(一切世間)에 원(怨)이 많아 믿기 어려우니라」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횡사(橫死)의 재앙(災殃)을 당(當)하고 가책(呵責)·매욕(罵辱)·편장(鞭杖)·폐계(閉繫)·기아(飢餓)·곤고(困苦)·이와 같은 등(等)의 현세(現世)의 경보(輕報)를 받아 지옥(地獄)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등(等) 운운(云云). 반니원경(般泥洹經)에 가로되 「의복(衣服)이 부족(不足)하고 음식(飮食)이 추소(麤疏)하며 재(財)를 구(求)함에도 이(利)가 없고, 빈천(貧賤)한 집과 사견(邪見)의 집에 태어나며, 혹(或)은 왕난(王難) 및 여타(餘他)의 종종(種種)의 인간(人間)의 고보(苦報)를 만나는데 현세(現世)에 가볍게 받음은 이는 호법(護法)의 공덕력(功德力)에 의(依)하는 까닭이니라」등(等) 운운(云云). 문(文)의 본뜻은 우리들이 과거(過去)에 정법(正法)을 행(行)하는 자(者)에게 원질(怨嫉)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도리어 신수(信受)하므로 과거(過去)에 타인(他人)을 장해(障害)한 죄(罪)로 미래(未來)에 대지옥(大地獄)에 떨어져야 할 것을 금생(今生)에 정법(正法)을 행(行)하는 공덕(功德)이 강성(强盛)하므로 미래(未來)의 대고(大苦)를 초래(招來)하여 소고(少苦)를 만남으로써 넘기느니라. 이 경문(經文)에 과거(過去)의 비방(誹謗)에 의(依)하여 여러가지 과보(果報)를 받는 가운데 혹(或)은 빈가(貧家)에 태어나고 혹(或)은 사견(邪見)의 집에 태어나며, 혹(或)은 왕난(王難)을 만난다 등(等) 운운(云云). 이 중(中)에 사견(邪見)의 집이라 함은 비방정법(誹謗正法)의 집이며, 왕난(王難) 등(等)이라 함은 출생(出生)하여 악왕(惡王)을 만나느니라. 이 두 가지의 대난(大難)은 각자(各者)가 자신(自身)의 몸으로써 느꼈으리라. 과거(過去)의 방법(謗法)의 죄(罪)를 멸(滅)하려고 사견(邪見)의 부모(父母)에게 가책(呵責)을 당(當)하는 것이며, 또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미워하는 국주(國主)를 만났으니 경문(經文)에 명명(明明)하며 경문(經文)에 혁혁(赫赫)하니라. 자신(自身)이 과거(過去)에 방법자(謗法者)였다는 것을 의심(疑心)하지 말지어다. 이것을 의심(疑心)하여 현세(現世)의 경고(輕苦)를 견디기 어려워서 자부(慈父)의 책망(責望)에 따라 의외(意外)에도 법화경(法華經)을 버리는 일이 있다면 자신(自身)이 지옥(地獄)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비모(悲母)도 자부(慈父)도 대아비지옥(大阿鼻地獄)에 떨어져 함께 슬퍼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疑心)할 바 없느니라. 대도심(大道心)이라 함은 이것이니라.
각자(各者)는 힘껏 법화경(法華經)을 믿어 왔으므로 과거(過去)의 중죄(重罪)를 책(責)하여 끄집어 냈느니라. 비유컨대 철(鐵)을 공들여 달구어 치면 흠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돌은 태우면 재가 되고, 금(金)은 태우면 진금(眞金)이 된다. 이번에야 말로 진실(眞實)한 신심(信心)이 나타나서 법화경(法華經)의 십나찰(十羅刹)도 수호(守護)하시게 되리라. 설산동자(雪山童子) 앞에 나타난 나찰(羅刹)은 제석(帝釋)이며 시비왕(尸毘王)의 비둘기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이었느니라. 십나찰(十羅刹)이 시험(試驗)해 보기 위하여 부모(父母)의 몸에 들어가서 책망(責望)하는 일도 있을 것이니라. 이것으로 보더라도 신심(信心)이 약(弱)하면 후회(後悔)가 있으리라. 또 전차(前車)가 뒤집힘은 후차(後車)에 대한 훈계(訓誡)이다, 지금의 세상(世上)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어도 도심(道心)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정(世情)을 싫어하더라도 결코 싫어할 수 없으리라. 일본(日本) 사람들은 반드시 대고(大苦)를 당(當)하리라고 보이며 안전(眼前)의 일이로다. 문영(文永)구년(九年) 이월(二月) 십일일(十一日)에, 활짝 피었던 꽃이 대풍(大風)에 꺾이듯이 명주가 대화(大火)에 타버리듯이 되었으니 세상(世上)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찌 없겠느뇨.
형제초(兄弟抄)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 1081~3쪽지금 법화경(法華經)은 자행(自行)·화타(化他)의 이행(二行)을 개회(開會)하여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새가 이익(二翼)을 가지고 날면 장애(障碍)가 없듯이 성불(成佛)에 막힘이 없다. 약왕품(藥王品)에는 십유(十喩)를 가지고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역용(力用)의 승렬(勝劣)을 판정(判定)하였는데, 제일(第一)의 비유(譬喩)에 가로되, 제경(諸經)은 제수(諸水)와 같고 법화(法華)는 대해(大海)와 같음 운운(云云) 취의(取意), 실(實)로 자행(自行)인 법화경(法華經)의 대해(大海)에는 화타(化他)인 제경(諸經)의 중수(衆水)를 받아들임이 주야(晝夜)로 끊임없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증가(增加)하지 않고 감(減)하지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덕용(德用)을 나타낸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70~1쪽기쁘도다 말법유포(末法流布)의 때에 태어난 우리들·슬프도다 이번에 이 경(經)을 믿지 않는 사람들. 대저 인계(人界)에 생(生)을 받는 자 누가 무상(無常)을 면(免)하리오. 그러한 사람들이 어찌 후세(後世)를 위해 수행(修行)을 하지 않겠는가. 곰곰이 세간(世間)의 모양을 보아하니 사람이 모두 입으로는 이 경(經)을 믿고 손에는 경권(經卷)을 잡는다고 하지만 경(經)의 심(心)에 배반(背反)하므로 악도(惡道)를 면(免)하기 어렵도다. 비유(譬喩)컨대 사람에게 모두 오장(五臟)이 있는데 일장(一臟)이라도 상(傷)한다면 그 장(臟)에서 병(病)이 생겨 나머지 장(臟)을 손상(損傷)하여 마침내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 이로써 전교대사(傳敎大師)는 「법화경(法華經)을 찬탄(讚歎)할지라도 도리어 법화(法華)의 심(心)을 죽인다」 등(等) 운운(云云). 문(文)의 뜻은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 독송(讀誦)하고 찬탄(讚歎)할지라도 법화(法華)의 심(心)을 배반하면 도리어 석존(釋尊)·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을 죽이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의(意)이니라. 종내(終乃) 세간(世間)의 악업중죄(惡業衆罪)는 수미(須彌)와 같이 많지만 이 경(經)을 만나면 제죄(諸罪)는 상로(霜露)와 같이 법화경(法華經)이라는 일륜(日輪)을 만나서 소멸(消滅)되느니라. 그렇지만 이 경(經)의 십사방법(十四謗法) 중(中)의 일(一)이나 이(二)라도 범(犯)하게 된다면 그 죄(罪)는 소멸(消滅)하기 어렵도다. 왜 그러냐하면 일대삼천계(一大三千界)의 모든 유정(有情)을 죽였다고 해도 어찌 일불(一佛)을 죽이는 죄(罪)만 하겠는가. 법화(法華)의 심(心)을 배반(背反)한다면 시방(十方)의 부처의 명(命)을 끊는 죄(罪)로다. 이 법도(法道)에 배반(背反)함을 방법(謗法)의 자(者)라고 하느니라. 지옥(地獄)은 무서우니 불길을 가지고 집으로 삼는다. 아귀(餓鬼)는 슬프니라 기갈(飢渴)로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고, 수라(修羅)는 투쟁(鬪諍)이며, 축생(畜生)은 잔해(殘害)라 해서 서로 살육(殺戮)한다. 홍련지옥(紅蓮地獄)이라 함은 붉은 연(蓮)이라고 읽는데, 그 까닭은 너무나 추워 몸을 움추려 굽히니 등이 갈라져서 살이 나온 것이 홍련(紅蓮)과 흡사하니라. 하물며 대홍련(大紅蓮)에 있어서랴. 이러한 악소(惡所)에 가면 왕위(王位)·장군(將軍)도 소용 없으며 옥졸(獄卒)의 가책(呵責)을 당하는 모습은 원숭이를 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이 때는 어찌 명문명리(名聞名利)·아만편집(我慢偏執)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실지어다, 법화경(法華經)을 아는 승(僧)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뜻으로 한번이라도 공양(供養)한다면 악도(惡道)에 가지 않느니라. 어찌 하물며 열번·이십(二十)번 내지(乃至) 오년(五年)·십년(十年)·일기생(一期生)동안 공양(供養)하는 공덕(功德)은 부처의 지혜(智慧)로써도 알기 어렵도다. 이 경(經)의 행자(行者)를 한번 공양(供養)하는 공덕(功德)은 석가불(釋迦佛)을 직접 팔십억겁(八十億劫)동안·무량(無量)한 보(寶)를 다하여 공양(供養)한 공덕(功德)보다 백천만억(百千萬億) 뛰어났다고 부처는 설(說)하셨느니라. 이 경(經)을 만났으므로 기쁨은 몸에 넘치고 좌우(左右)의 눈에 눈물이 고여 석존(釋尊)의 은혜는 다 보답(報答)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이 산(山)까지 여러번의 공양(供養)은 법화경(法華經)과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은혜를 보답(報答)하게 되나이다. 더욱더 면려(勉勵)하시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느니라. 모든 사람이 이 경(經)을 믿기 시작할 때는 신심(信心)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중간쯤에는 신심(信心)도 약(弱)하고 승(僧)도 공경(恭敬)하지 않고 공양(供養)도 하지 않으며, 자만(自慢)하여 악견(惡見)을 하니 이는 두려워할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더 신심(信心)을 해 나가시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後悔)하게 되리라. 비유(譬喩)컨대 가마쿠라(鎌倉)에서 교토(京都)까지는 십이일(十二日)의 도정(道程)이니라, 그런데 십일일(十一日)남짓 걸어가서 이제 일일(一日)을 남겨두고 걸음을 멈춘다면 어떻게 수도(首都)의 달을 바라볼 수 있겠느뇨. 어떻게 하든 이 경(經)의 뜻을 아는 승(僧)에게 가까이 하여 더욱더 법(法)의 도리(道理)를 청문(聽聞)해서 신심(信心)의 걸음을 옮길지어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439~1440쪽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알고 나면 교훈(敎訓)해야 할 선지식(善知識)도 필요없고 생각하는 마음, 말하는 말, 행(行)하는 행위(行爲), 거동(擧動)이란 거동(擧動),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사위의(四威儀) 소작(所作)은 모두 부처의 마음과 화합(和合)해서 일체(一體)이므로, 죄과(罪過)도 없고, 장애(障碍)도 없는 자재(自在)의 몸이 되는데, 이를 자행(自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재(自在)인 자행(自行)의 행(行)을 버리고 흔적도 없는 무명망상(無明妄想)인 벽사(僻思)의 마음에 주(住)하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교훈(敎訓)을 배반(背反)하므로 어두움에서 어두움으로 들어가, 영구(永久)히 불법(佛法)을 배반(背反)하는 것을 슬퍼하고 슬퍼할지니라. 지금 되돌려서 생각을 바르게 하여 깨달음에 돌아가면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자신(自身) 이외에는 없다고 알았노라. 나의 마음의 거울과 부처의 마음의 거울과는, 오직 일경(一鏡)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면(裏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지 못하므로 무명(無明)이라 하고, 여래(如來)는 표면(表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셨느니라. 고(故)로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체(體)가 오직 一이니라. 거울은 하나의 거울이라 해도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따라 명매(明昧)의 차별(差別)이 있다. 거울은 이면(裏面)이 있다 해도 표면(表面)의 장애(障碍)로 되지 않으며, 다만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의(依)해서 득실(得失)의 둘이 있으니, 상즉융통(相卽融通)하여 일법(一法)의 이의(二義)니라. 화타(化他)의 법문(法門)은 거울의 이면(裏面)을 향(向)함과 같고, 자행(自行)의 관심(觀心)은 거울의 표면(表面)을 향(向)함과 같으니, 화타(化他)의 때의 거울도 자행(自行)의 때의 거울도 나의 심성(心性)의 거울은 오직 하나로서 다름이 없다. 거울을 즉신(卽身)에 비유(譬喩)하고, 표면(表面)을 향(向)함을 성불(成佛)에 비유(譬喩)하며, 이면(裏面)을 향(向)함을 중생(衆生)에 비유(譬喩)함이라. 거울에 이면(裏面)이 있음을 성악(性惡)을 단절(斷絶)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고, 이면(裏面)을 향(向)할 때·표면(表面)의 덕(德)이 없음을 화타(化他)의 공덕(功德)에 비유(譬喩)하며, 중생(衆生)의 불성(佛性)이 나타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느니라. 자행(自行)과 화타(化他)는 득실(得失)의 역용(力用)이니, 현의(玄義)의 一에 가로되 「살바실달(薩婆悉達)·조왕(祖王)의 활을 당겨 팽팽함을 이름하여 역(力)이라 하고 칠개(七個)의 철고(鐵鼓)를 부수고 하나의 철위산(鐵圍山)을 관통(貫通)하여 땅을 뚫고, 수륜(水輪)을 통과(通過)함과 같음을 이름하여 용(用)이라 함 자행(自行)의 역용(力用)이니라 모든 방편교(方便敎)는 역용(力用)의 미약(微弱)함이 범부(凡夫)의 궁전(弓箭)과 같다. 왜냐하면 옛날의 연(緣)은 화타(化他)의 이지(二智)를 받아 이(理)를 비춤이 고루 미치지 않으며, 신(信)을 생(生)함이 깊지 않고 의심(疑心)을 제(除)함이 다하지 못함이라 이상(已上) 화타(化他). 지금의 연(緣)은 자행(自行)의 이지(二智)를 받아서 부처의 경계(境界)를 극(極)하고, 법계(法界)의 신(信)을 일으켜 원묘(圓妙)의 도(道)를 더하며 근본(根本)의 혹(惑)을 끊고 변역(變易)의 생(生)을 손실(損失)함이라, 다만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을 함께 이익(利益)케 할 뿐만 아니라, 법신(法身)과 법신(法身)의 후심(後心)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도 또한 함께 이익(利益)하니, 화(化)의 공(功)은 광대(廣大)하고 이윤홍심(利潤弘深)함은 확실(確實)히 이 경(經)의 역용(力用)이니라 이상(已上) 자행(自行)」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역용승렬(力用勝劣)이 분명(分明)함은 물론(勿論)이니 상세하게 이것을 보아라,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거울에 비춘 교상(敎相)이로다. 극불경계(極佛境界)란 십여시(十如是)의 법문(法門)이며, 십계(十界)에 서로 구족(具足)하여 십계(十界)·십여(十如)의 인과(因果)·권실(權實)의 이지(二智)·이경(二境)은 나의 몸 안에 있어서 일인(一人)도 누락(漏落)됨이 없다고 통달(通達)하고 해료(解了)하여 불어(佛語)를 남김없이 깨닫느니라. 기법계신(起法界信)이란 십법계(十法界)를 체(體)로 하고, 십법계(十法界)를 마음으로 하며, 십법계(十法界)를 형상(形相)으로 하셨다고,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몸 속에 있었다고 믿음이라. 증원묘도(增圓妙道)란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의 둘은 상즉원융(相卽圓融)의 법(法)이므로 주(珠)와 광(光)과 보(寶)의 삼덕(三德)은 오직 하나의 주(珠)의 덕(德)임과 같아서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불법(佛法)에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일생중(一生中)에 부처가 된다고 경희(慶喜)의 마음을 더하느니라. 단근본혹(斷根本惑)이란 일념무명(一念無明)의 잠에서 깨어나, 본각(本覺)의 생시(生時)에 돌아오면 생사(生死)도 열반(涅槃)도 함께 어제의 꿈과 같이 흔적도 없음이라. 손변역생(損變易生)이란 동거토(同居土)의 극락(極樂)과 방편토(方便土)의 극락(極樂)과 실보토(實報土)의 극락(極樂)의 삼토(三土)에 왕생(往生)한 사람·그 토(土)에서 보살(菩薩)의 도(道)를 수행(修行)하여 부처가 되려고 바라는데·인(因)은 변하고 과(果)는 바뀌어 차례로 전진(前進)해 올라가서 겁수(劫數)를 거쳐 머나먼 성불(成佛)을 기다림을 변역(變易)의 생사(生死)라고 하느니라. 하위(下位)를 버림을 사(死)라 하고 상위(上位)로 나아감을 생(生)이라 하며, 이와 같이 변역(變易)하는 생사(生死)는 정토(淨土)의 고뇌(苦惱)인 것이로다. 그래서 범부(凡夫)인 우리들이 이 예토(穢土)에서 법화(法華)를 수행(修行)하면, 십계호구(十界互具)·법계일여(法界一如)이므로 정토(淨土)의 보살(菩薩)의 변역(變易)의 생(生)은 줄고 불도(佛道)의 행(行)은 증가(增加)하여 변역(變易)의 생사(生死)를 일생중(一生中)에 짧게 해서 불도(佛道)를 성취(成就)하므로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양종(兩種)의 보살(菩薩)·증도손생(增道損生)하느니라. 법신(法身)의 보살(菩薩)이란 생신(生身)을 버리고 실보토(實報土)에 거(居)하느니라. 후심(後心)의 보살(菩薩)이란 등각(等覺)의 보살(菩薩)이니라. 단(但) 적문(迹門)에서는 생신(生身) 및 생신득인(生身得忍)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며, 본문(本門)에서는 법신(法身)과 후신(後身)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느니라, 단(但) 지금은 적문(迹門)을 열어서 본문(本門)에 섭(攝)하여 하나의 묘법(妙法)으로 하는 고(故)로 범부(凡夫)인 우리들이 예토(穢土)의 수행(修行)의 행(行)의 힘을 가지고 정토(淨土)의 십지등각(十地等覺)의 보살(菩薩)을 이익(利益)케 하는 행(行)인 고(故)로 화(化)의 공(功)이 광대(廣大)하니라 화타(化他)의 덕용(德用). 이윤홍심(利潤弘深)이란 자행(自行)의 덕용(德用) 원돈(圓頓)의 행자(行者)는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 일법(一法)도 누락(漏落)됨이 없이 일념(一念)에 구족(具足)하여 횡(橫)으로 시방법계(十方法界)에 편만(遍滿)하는 고(故)로 넓은 것이며, 종(縱)으로는 삼세(三世)에 걸쳐 법성(法性)의 연저(淵底)를 극(極)하는 고(故)로 깊으니라. 이 경(經)의 자행(自行)의 역용(力用)은 이와 같으며, 화타(化他)의 제경(諸經)은 자행(自行)을 갖추지 않으므로 새가 편익(片翼)을 가지고서는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고(故)로 성불(成佛)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 법화경(法華經)은 자행(自行)·화타(化他)의 이행(二行)을 개회(開會)하여 부족(不足)이 없으므로 새가 이익(二翼)을 가지고 날면 장애(障碍)가 없듯이 성불(成佛)에 막힘이 없다. 약왕품(藥王品)에는 십유(十喩)를 가지고 자행(自行)과 화타(化他)와의 역용(力用)의 승렬(勝劣)을 판정(判定)하였는데, 제일(第一)의 비유(譬喩)에 가로되, 제경(諸經)은 제수(諸水)와 같고 법화(法華)는 대해(大海)와 같음 운운(云云) 취의(取意), 실(實)로 자행(自行)인 법화경(法華經)의 대해(大海)에는 화타(化他)인 제경(諸經)의 중수(衆水)를 받아들임이 주야(晝夜)로 끊임없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증가(增加)하지 않고 감(減)하지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덕용(德用)을 나타낸다.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70~1쪽우리들이 세계광선유포 실현을 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대어본존님과 인법일개이신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 경지명합하여 명의조람 하에서의 진심어린 실천입니다.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의 마음을 마음으로하여 한 사제불이의 실천 속에 진정한 의미의 이체동심도 민중구제도 말법만년진미래제에 걸친 세계광선유포의 실현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만이 중요하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으로하여 정진했을 때 광선유포는 자연스럽게 일시에 이뤄지게 되어있는 것이 말법의 법화경의 행자들인 우리들이 나아가야 올바른 길인 것입니다.
대자대비의 마음..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 경지명합 함개상응으로 직결해서 니치뇨예하님의 지도말씀대로 실천해나가는 것이 세계광선유포 실현을 위한 가장 올바르고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확신하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용맹하게 정진해나아갈 때 본존님께 제대로 칭찬받는 직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불제자들의 기본 중의 기본은 본존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여 대자대비의 베품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때 드디어 세계광선유포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일체(一切)의 법(法)·일체(一切)의 보살(菩薩)·일체(一切)의 성문(聲聞)·일체(一切)의 범왕(梵王)·제석(帝釋)·염마(閻魔)·법왕(法王)·일월(日月)·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면 멸(滅)하지 않는 죄(罪)가 있겠는가, 오지 않는 복(福)이 있겠는가. 진실(眞實)이고 심심(甚深)하니 이를 신수(信受)할지어다.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497쪽어찌 기원(祈願)의 성취(成就)가 늦으리요. 대지(大地)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虛空)을 동여매는 자(者)는 있을지라도·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없는 일은 있을지라도, 해는 서(西)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모든 보살(菩薩)·인천(人天)·팔부(八部) 등(等)·이성(二聖)·이천(二天)·십나찰(十羅刹) 등(等)이 천(千)에 하나라도 와서 수호(守護)하시지 않는 일이 있다면 위로는 석가제불(釋迦諸佛)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구계(九界)를 속이는 죄가 되리라. 행자(行者)는 확실히 부실(不實)할지라도 지혜(智慧)는 어리석을지라도 몸은 부정(不淨)할지라도, 계덕(戒德)은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수호(守護)하시리라.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여여래공숙(與如來共宿)의 자(者)이니라, 부대사(傅大士)의 석(釋)에 가로되 「조조(朝朝)·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 부처와 함께 눕고 시시(時時)로 성도(成道)하며 시시(時時)로 현본(顯本)함이라」라고 운운(云云)."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737쪽의 말씀은 어찌할 것이며..
동서남북(東西南北)·팔방(八方)·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외(外)·사백만억나유타(四百萬億那由佗)의 국토(國土)에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잇따라와서 충만(充滿)하시었다, 하늘에는 별과 같이·땅에는 도마(稻麻)와 같이 열(列)지어 계시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시는 것을 비유하면 대왕(大王)의 태자(太子)를 모든 신하(臣下)가 수호(守護)하는것과 같다. 단(但) 사천왕(四天王)의 동류(同類)가 수호(守護)하여 주시는 것도 황송한 일인데, 일체(一切)의 사천왕(四天王)·일체(一切)의 성수(星宿)·일체(一切)의 일월(日月)·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이 수호(守護)하시니 만족(滿足)해야 할 일이니라. 게다가 일체(一切)의 이승(二乘)·일체(一切)의 보살(菩薩)·도솔내원(兜卒內院)의 미륵보살(彌勒菩薩)·가라타산(伽羅陀山)의 지장(地藏)·보타락산(補陀落山)의 관세음(觀世音)·청량산(淸凉山)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등(等)·각각(各各) 권속(眷屬)을 구족(具足)하여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해 주심으로써 만족(滿足)해야 할 것인데·또한 황송하게도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친(親)히 자진(自進)해서 내림(來臨)하시어·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동안 수호(守護)해 주심에 대한 황송함은 말로 다하지 못하노라.
우에노전모친답서(上野殿母親答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570쪽의 말씀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특히 황송하게도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친(親)히 자진(自進)해서 내림(來臨)하시어·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동안(24시간 내내) 수호(守護)해 주심에 대한 황송함은 말로 다하지 못하노라' 라고 말씀해주신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의 말씀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만일 혈맥상승을 언급한다면 생사일대사혈맥초를 보시면 될 것이고..
법체의 혈맥상승을 언급한다면 우리들 모두는 대석사의 대어본존님 앞에서 매일 조석으로 근행창제해야 하는 것만이 신심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호도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침, 오후, 저녁으로 시간이 나고 거리상의 문제가 없다면 서울포교소에서 노법태존사님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신심수행을 나가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일전(日前)에 강적(强敵)과 대결(對決)한 일에 대하여 서신(書信)을 받아 위세(委細)히 보았소이다. 그러니 정말로 적인(敵人)들이 죽이려 노리고 있었구려, 사전(事前)의 조심이랄지 또 용기(勇氣)라 할지, 또한 법화경(法華經)에 대(對)한 신심(信心)이 강(强)하기 때문에 무난(無難)히 존명(存命)하셨으니 반갑고 반갑도다. 대저 운(運)이 끝나면 병법(兵法)도 소용(所用)이 없고, 과보(果報)가 다하면 종자(從者)도 따르지 않는 법인데, 결국(結局) 운(運)도 남고 과보(果報)도 남았기 때문이니라. 특히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제천(諸天)·선신(善神)·수호(守護)하리라는 뜻을 촉루품(屬累品)에서 서장(誓狀)을 세우셨으며, 일체(一切)의 수호신(守護神)·제천(諸天) 중(中)에서도 우리들의 눈에 보이게 수호(守護)하심은 일월천(日月天)이니라, 어찌하여 믿지 않을소냐. 그중에서도 특히 일천(日天)의 앞에 마리지천(摩利支天)이 계신다, 일천(日天)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시는데 종자(從者)인 마리지천존(摩利支天尊)이 버리시겠느뇨. 서품(序品)의 때·명월천자(名月天子)·보광천자(普光天子)·보광천자(寶光天子)·사대천왕(四大天王)·여기권속(與其眷屬)·만천자구(萬天子俱)라 하여 열좌(列座)하셨으니, 마리지천(摩利支天)은 삼만천자(三萬天子) 안에 있으리라. 만약 그 안에 없다면 지옥(地獄)에나 떨어져 있으리라. 이번의 대사(大事)는 이 천(天)의 수호(守護)가 아니겠느뇨. 그 천(天)은 검형(劍形)을 귀하(貴下)에게 주시고 여기에 내려왔으며, 이 니치렌(日蓮)은 수제(首題)의 오자(五字)를 그대에게 수여(授與)하니, 법화경(法華經) 수지(受持)의 자(者)를 수호(守護)하는 것은 의심(疑心)할 바 없느니라. 마리지천(摩利支天)도 법화경(法華經)을 가지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구제(救濟)하시니, 「임병투자개진열재전(臨兵鬪者皆陣列在前)」의 문(文)도 법화경(法華經)으로부터 나왔느니라. 「약설속간경서(若說俗間經書) 치세어언(治世語言) 자생업등(資生業等) 개순정법(皆順正法)」이라고 함은 이것이니라. 이것을 보더라도 더욱더 강성(强盛)하게 대신력(大信力)을 내시라. 자기 운명(運命)이 다하고 나서, 제천(諸天)의 수호(守護)가 없다고 하여 원망(怨望)하는 일이 없을지어다.
마사카도(將門)는 무장(武將)으로서의 이름을 떨치고 병법(兵法)의 대사(大事)를 궁구(窮究)하였으나, 왕명(王命)에는 패(敗)하였으며, 번쾌(樊噲)·장량(張良)도 소용(所用)이 없었으니, 다만 마음만이 중요(重要)하니라, 아무리 니치렌(日蓮)이 기원(祈願)을 한다 해도 불신(不信)한다면, 젖은 부싯깃을 대고 부시를 치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니, 더욱 면려(勉勵)하여 강성(强盛)하게 신력(信力)을 다 내도록 하시라. 지난 번의 존명(存命)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생각하시라, 어떠한 병법(兵法)보다도 법화경(法華經)의 병법(兵法)을 쓰실지어다. 「제여원적(諸餘怨敵)·개실최멸(皆悉摧滅)」의 금언(金言)은 헛되지 않으리라. 병법(兵法) 검형(劍形)의 대사(大事)도 이 묘법(妙法)으로부터 나왔느니라, 깊이 신심(信心)을 취(取)하시라, 결코 겁이 많아서는 불가능(不可能)하니라. 공공근언(恐恐謹言).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五殿答書)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1192~3쪽니치렌(日蓮)이 말법(末法)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부처는 대망어(大妄語)의 사람이요·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은 대허망(大虛妄)의 증명(證明)이로다. 불멸후이천이백삼십여년간(佛滅後二千二百三十餘年間)·일염부제내(一閻浮提內)에서 부처의 말씀을 도운 사람은·단(但) 니치렌(日蓮) 한 사람이니라. 과거(過去) 현재(現在) 말법(末法)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경천(輕賤)하는 왕신만민(王臣萬民)이 처음에는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으나 마침내는 망(亡)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니치렌(日蓮)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처음에는 증험(證驗)이 없는 것 같았으나 이제까지 이십칠년(二十七年)동안 법화경(法華經) 수호(守護)의 범석(梵釋)·일월(日月)·사천(四天) 등(等)이 그토록 수호(守護)하지 않는다면 불전(佛前)의 서언(誓言)은 헛되어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지리라고 두렵게 생각하였기에 지금은 각자(各者)가 힘써 지키리라. 오타(大田)의 지카마사(親昌)·나가사키지로효에노조도키쓰나(長崎次郞兵衛尉時綱)·다이신보(大進房)의 낙마(落馬) 등(等)은 법화경(法華經)의 벌(罰)이 나타남이로다. 벌(罰)에는 총벌(總罰)·별벌(別罰)·현벌(顯罰)·명벌(冥罰)의 네가지가 있느니라. 일본국(日本國)의 대역병(大疫病)과 대기갈(大飢渴)과 자중지난(自中之亂)과 타국(他國)으로부터의 침공(侵攻)은 총벌(總罰)이고, 역병(疫病)은 명벌(冥罰)이며, 오타(大田) 등(等)은 현벌(顯罰)이고 별벌(別罰)이니라. 각자(各者)는 사자왕(師子王)의 마음을 발휘해서 남들이 아무리 위협(威脅)할지라도 겁내지 말지니라. 사자왕(師子王)은 백수(百獸)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사자(師子)의 새끼도 또한 이와 같다. 그들은 야간(野干)이 짖는 것이고 니치렌(日蓮)의 일문(一門)은 사자(師子)가 짖는 것이로다. 고사이묘사전(故最明寺殿)이 니치렌(日蓮)을 사면(赦免)한 것과 이 어른이 용사(容赦)한 것은 잘못이 없었는데 사람들의 참언(讒言)이라는 것을 알고서 용사(容赦)한 것이니라. 지금은 아무리 남이 말할지라도 듣고 알아보지 않고서는 남의 참언(讒言)은 믿지 않으시리라. 설사 대귀신(大鬼神)이 붙은 사람일지라도 니치렌(日蓮)을 범석(梵釋)·일월(日月)·사천(四天) 등(等)·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八幡)이 수호(守護)하시는 고(故)로 벌(罰)하기 어려우리라고 아실지니라. 월월(月月)·일일(日日)·강성(强盛)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解弛)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
우리들 범부(凡夫)는 어리석어서 경론(經論)에 있는 것과 먼 장래의 일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필정(必定)코 헤이(平)들도 조(城)들도 노(怒)해서 이 일문(一門)을 맹렬히 박해(迫害)할 때가 올 것이니 그 때는 눈을 감고 각오(覺悟)하여라. 당시(當時)의 사람들이 쓰쿠시(筑紫)로보내지려하고 또 가는 사람 또 그곳에서 적(敵)을 맞이 하는 사람을 내 자신(自身)에게 견주어 생각해 보아라. 당시(當時)까지는 이 일문(一門)에 이런 슬픔은 없었다. 그들은 현재(現在)는 그와 같으며 살해(殺害)되면 또 지옥(地獄)에 가리라. 우리들은 현재(現在)는 이 대난(大難)을 당(當)할지라도 후생(後生)은 성불(成佛)하리라. 비유(譬喩)컨대 뜸과 같으니 당시(當時)는 아플지라도 후(後)에는 약(藥)이 될 것이니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느니라.
저 아쓰하라(熱原)의 우치(愚痴)한 자(者)들은 말로 격려(激勵)할 것이요, 위협(威脅)하지 말라. 그들에게는 오직 한결같이 결단(決斷)하게 하여라, 좋아지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요 나쁘게 되는 것은 필정(必定)이라고 생각하라. 배가 고프다고 하거든 아귀도(餓鬼道)를 가르치고, 춥다고 말하거든 팔한지옥(八寒地獄)을 가르치며, 두렵다고 생각하거든 매를 만난 꿩, 고양이를 만난 쥐를 타인(他人)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성인어난사(聖人御難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1190~1쪽지금은 아무리 남이 말할지라도 듣고 알아보지 않고서는 남의 참언(讒言)은 믿지 않으시리라. 설사 대귀신(大鬼神)이 붙은 사람일지라도 니치렌(日蓮)을 범석(梵釋)·일월(日月)·사천(四天) 등(等)·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八幡)이 수호(守護)하시는 고(故)로 벌(罰)하기 어려우리라고 아실지니라. 월월(月月)·일일(日日)·강성(强盛)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解弛)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
우리들 범부(凡夫)는 어리석어서 경론(經論)에 있는 것과 먼 장래의 일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필정(必定)코 헤이(平)들도 조(城)들도 노(怒)해서 이 일문(一門)을 맹렬히 박해(迫害)할 때가 올 것이니 그 때는 눈을 감고 각오(覺悟)하여라. 당시(當時)의 사람들이 쓰쿠시(筑紫)로보내지려하고 또 가는 사람 또 그곳에서 적(敵)을 맞이 하는 사람을 내 자신(自身)에게 견주어 생각해 보아라. 당시(當時)까지는 이 일문(一門)에 이런 슬픔은 없었다. 그들은 현재(現在)는 그와 같으며 살해(殺害)되면 또 지옥(地獄)에 가리라. 우리들은 현재(現在)는 이 대난(大難)을 당(當)할지라도 후생(後生)은 성불(成佛)하리라. 비유(譬喩)컨대 뜸과 같으니 당시(當時)는 아플지라도 후(後)에는 약(藥)이 될 것이니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느니라.물어 가로되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은 멸후(滅後)에 있어서 어느 때에 유포(流布)시켜야 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상법(像法)에 있어서 홍통(弘通)해야 하느니라. 물어 가로되 말법(末法)에 있어서 유포(流布)될 법(法)의 명목(名目)은 어떠한가, 답(答)하여 가로되, 니치렌(日蓮)의 기심(己心)에 상승(相承)한 비법(秘法)은 이 답(答)에 나타낼 것이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로다. 물어 가로되 증문(證文)은 어떠한가. 답(答)하여 가로되, 신력품(神力品)에 가로되 「이시(爾時)에 불(佛)이 상행등(上行等)의 보살(菩薩)께 고(告)하시되 요(要)를 가지고 이를 말하면 내지(乃至) 선시현설(宣示顯說)함이라」 운운(云云). 천태대사(天台大師) 가로되 「이시불고(爾時佛告) 상행(上行) 이하(以下)는 제삼(第三) 결요부촉(結要付屬)이니라」 또 가로되 「경중(經中)의 요설(要說)의 요(要)는 사사(四事)에 있다. 통틀어 일경(一經)을 결(結)함에 오직 사(四)일 뿐이며 그 추병(樞柄)을 취(取)하여 이것을 수여(授與)하노라」 물어 가로되, 지금의 문(文)은 상행보살등(上行菩薩等)에 수여(授與)한다는 문(文)이니라.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기심(己心)에 상승(相承)한 비법(秘法)이라 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상행보살(上行菩薩)이 홍통(弘通)해야 할 비법(秘法)을 니치렌(日蓮)이 앞서서 이것을 홍통(弘通)하는 당자(當者)라고 하는 뜻이 아닐손가, 상행보살(上行菩薩)의 대관(大官)의 일분(一分)이니라.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문(法門)은 무익(無益)하니라. 조행(助行)으로는 사용(使用)할 것이로되, 정행(正行)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전교대사(傳敎大師) 가로되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석가(釋迦)에 신순(信順)하여 법화종(法華宗)을 도와서 진단(震旦)에 부양하고 에이산(叡山)의 일가(一家)는 천태(天台)에게 상승(相承)하여 법화종(法華宗)을 도와서 일본(日本)에 홍통(弘通)함이라」 지금 니치렌(日蓮)은 탑중상승(塔中相承)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를 말법(末法)의 시(時)에 일본국(日本國)에 홍통(弘通)하니 이 어찌 시국상응(時國相應)의 불법(佛法)이 아니겠느뇨.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을 홍통(弘通)하여 정행(正行)으로 하려는 자(者)는 반드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질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귀하(貴下)는 연래(年來)의 권종(權宗)을 버리고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가 되셨으니 진실(眞實)로 시국상응(時國相應)의 지인(智人)이니라, 통틀어 나의 제자(弟子)들은 나와 같이 정리(正理)를 수행(修行)하시라, 지자(智者)·학장(學匠)의 몸이 되었어도 지옥(地獄)에 떨어지면 무슨 보람이 있을손가, 결국(結局) 시시염념(時時念念)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지어다.
십팔원만초(十八圓滿抄)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367쪽무상(無相)의 극리(極理)란 달과 바람과 같은 생시(生時)인 이 몸의 심성(心性)의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이니라. 이 극락(極樂)이란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정보(正報)인 유정(有情)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의보(依報)인 국토(國土)가 화합(和合)하여 일체삼신즉일(一體三身卽一)이니라. 사토불이(四土不二)로서 법신(法身)의 일불(一佛)이며, 십계(十界)를 신(身)으로 함은 법신(法身)이니라. 십계(十界)를 심(心)으로 함은 보신(報身)이니라. 십계(十界)를 형(形)으로 함은 응신(應身)이니라. 십계외(十界外)에 부처는 없고 부처 외(外)에 십계(十界)가 없어서 의정불이(依正不二)이고 신토불이(身土不二)니라. 일불(一佛)의 신체(身體)임을 가지고 적광토(寂光土)라 하며, 이런 고(故)로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라 하느니라.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법성(法性)의 연저(淵底)·현종(玄宗)의 극지(極地)인 고(故)로 극리(極理)라고 하느니라, 이 무상(無相)의 극리(極理)인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심성(心性)속에 있어서 청정무루(淸淨無漏)이니라. 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생(生)과 사(死)의 둘의 이(理)는 생사(生死)의 꿈의 이(理)이고, 망상(妄想)이며 전도(顚倒)이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가지고 나의 심성(心性)을 밝히면 생(生)할 시초(始初)도 없는 고(故)로 죽게 될 끝도 없으니, 이미 생사(生死)를 떠난 심법(心法)이 아니겠느뇨.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수재(水災)에도 썩지 않으며, 검도(劍刀)에도 잘리지 않고, 궁전(弓箭)에도 맞지 않고, 개자(芥子)속에 들어가도 개자(芥子)도 넓어지지 않고, 심법(心法)도 줄어들지 않고, 허공(虛空)속에 꽉 차도 허공(虛空)도 넓지 않고, 심법(心法)도 좁지 않으며, 선(善)에 배반(背反)함을 악(惡)이라 하고, 악(惡)에 배반(背反)함을 선(善)이라고 한다. 고(故)로 심외(心外)에 선(善)이 없고 악(惡)이 없으며, 이 선(善)과 악(惡)에서 떨어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느니라. 선악무기(善惡無記)·이 외(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외(外)에는 법(法)이 없는 고(故)로 선악(善惡)도 정예(淨穢)도 범부(凡夫)·성인(聖人)도 천지(天地)도 대소(大小)도 동서(東西)도 남북(南北)도 사유(四維)도 상하(上下)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소멸(心行所滅)함이라. 마음에 분별(分別)하여 생각해서 말하여 나타내는 언어(言語)이므로 마음의 외(外)에는 분별(分別)도 무분별(無分別)도 없느니라.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 그러므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 가로되「마음은 솜씨 좋은 화사(畵師)가 종종(種種)의 오음(五陰)을 만들 듯이 일체세간중(一切世間中)에 법(法)으로서 만들지 않음이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衆生)도 그러하니 삼계(三界)는 오직 일심(一心)이니라. 마음 외(外)에 다른 법(法)이 없고, 심불(心佛) 및 중생(衆生)·이 삼차별(三差別)이 없느니라」이상(已上). 무량의경(無量義經)에 가로되「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에서 무량의(無量義)를 출생(出生)함」이상(已上), 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이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일념(一念)의 마음 이것이니라. 문구(文句)에 석(釋)하여 가로되「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이 없는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이승(二乘)의 유여(有餘)·무여(無餘)의 두 가지의 열반(涅槃)의 상(相)을 떠나는 고(故)로 불상(不相)이라 하느니라」운운(云云), 마음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가지고 경론(經論)의 전요(詮要)로 하느니라. 이 마음을 깨달아 앎을 이름하여 여래(如來)라 하며, 이를 깨달아 알고나면 십계(十界)는 나의 몸이고, 나의 마음이고 나의 모습이니라.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나의 신심(身心)이기 때문이니라. 이를 알지 못하는 때를 이름하여 무명(無明)이라 하며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고 읽느니라. 나의 마음의 모습을 분명(分明)하게 깨닫지 못함이라. 이것을 깨달아 아는 때를 이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니, 고(故)로 무명(無明)과 법성(法性)은 일심(一心)의 이명(異名)이니라. 이름과 말은 둘일지라도 마음은 오직 하나의 마음이며, 이런 까닭에 무명(無明)을 단절(斷切)해서는 안 되느니라. 꿈의 마음인 무명(無明)함을 단절(斷切)하면 생시(生時)의 마음을 잃게 되는 고(故)로 통틀어 원교(圓敎)의 뜻은 일호(一毫)의 혹(惑)마저도 단절(斷切)하지 않으니 고(故)로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에 가로되「여시상(如是相)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상호본각(相好本覺)의 응신여래(應身如來) 여시성(如是性)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성(心性) 본각(本覺)의 보신여래(報身如來) 여시체(如是體)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신체본각(身體本覺)의 법신여래(法身如來)」이 삼여시(三如是)로부터 후(後)의 칠여시(七如是)가 출생(出生)하여 합(合)해서 십여시(十如是)로 되었느니라. 이 십여시(十如是)는 십법계(十法界)이며, 이 십법계(十法界)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法門)으로 되느니라. 한 사람을 본보기로 하여 일체중생평등(一切衆生平等)함이 이와 같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총감문(總勘文)으로서, 어판(御判)이 확실(確實)하게 찍힌 정본(正本)의 문서(文書)로다. 부처의 어판(御判)이란 실상(實相)의 일인(一印)이며, 인(印)이란 판(判)의 이명(異名)이니라. 나머지의 일체경(一切經)에는 실상(實相)의 인(印)이 없으므로 정본(正本)의 문서(文書)가 아니라, 결코 실(實)의 부처가 없으며, 실(實)의 부처가 없는 고로 몽중(夢中)의 문서(文書)로다, 정토(淨土)에 없기 때문이니라. 십법계(十法界)는 十이지만 십여시(十如是)는 一이니라, 비유(譬喩)컨대 수중(水中)의 달은 무량(無量)일지라도 허공(虛空)의 달은 하나임과 같다. 구법계(九法界)의 십여시(十如是)는 몽중(夢中)의 십여시(十如是)이므로 수중(水中)의 달과 같고, 불법계(佛法界)의 십여시(十如是)는 본각(本覺)의 생시(生時)의 십여시(十如是)이므로 허공(虛空)의 달과 같으니라. 이런 고로 불계(佛界)의 하나의 십여시(十如是)가 나타나면, 구법계(九法界)의 십여시(十如是)의 수중(水中)의 달과 같은 것도 하나도 궐감(闕減)없이 동시(同時)에 모두 나타나서 체(體)와 용(用)이 일구(一具)로서 일체(一體)의 부처로 되느니라. 십법계(十法界)를 서로 구족(具足)하여 평등(平等)한 십계(十界)의 중생(衆生)이므로 허공(虛空)의 본월(本月)도 수중(水中)의 말월(末月)도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에 구족(具足)하여 궐(闕)함이 없는 고로 십여시(十如是)는 본말구경(本末究竟)하여 동등(同等)하며 차별(差別)이 없느니라. 본(本)이란 중생(衆生)의 십여시(十如是)이고, 말(末)이란 제불(諸佛)의 십여시(十如是)이니라. 제불(諸佛)은 중생(衆生)의 일념(一念)의 마음에서 나타나시므로 중생(衆生)은 이는 본(本)이고, 제불(諸佛)은 이는 말(末)이니라, 그러함을 경(經)에 가로되「이제 이 삼계(三界)는 개시아유(皆是我有)이며, 기중(其中)의 중생(衆生)은 모두 이는 나의 자(子)이니라」고 이상(已上), 부처가 성도후(成道後)에 화타(化他)를 위(爲)하는 고(故)로 적(寂)의 성도(成道)를 부르고 생사(生死)의 몽중(夢中)에서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설(說)하시느니라. 지혜(智慧)를 부(父)에다 비유(譬喩)하고, 우치(愚癡)를 자(子)에다 비유(譬喩)하여 이와 같이 설(說)하셨느니라. 중생(衆生)은 본각(本覺)의 십여시(十如是)일지라도 일념(一念)의 무명(無明)이 수면(睡眠)과 같이 마음을 덮어 생사(生死)의 꿈에 들어가서 본각(本覺)의 이(理)를 잊고 아주 약간 과거(過去)·현재(現在)·미래(未來)의 삼세(三世)의 허몽(虛夢)을 꾸느니라. 부처는 생시(生時)의 사람과 같으므로 생사(生死)의 꿈에 들어 가서 중생(衆生)을 놀라게 하시는 지혜(智慧)는 꿈속의 부모(父母)와 같고 꿈속에 있는 우리들은 자식(子息)과 같으니라. 이 도리(道理)로써 실시오자(悉是吾子)라고 말씀하셨느니라. 이 이(理)를 생각하여 이해(理解)하면 제불(諸佛)과 우리들과는 본(本)에 있어서도 부자(父子)이고, 말(末)에 있어서도 부자(父子)이며, 부자(父子)의 천성(天性)은 본말(本末)이 같으니라. 이런 사유(事由)로 기심(己心)과 불심(佛心)과는 다르지 않다고 관(觀)하는 고(故)로 생사(生死)의 꿈을 깨고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로 돌아옴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지금 나의 신상(身上)의 천성(天性)·지체(地體)이며, 괴로움도 없고, 장애(障碍)도 없는 중생(衆生)의 운명(運命)이고 과보(果報)이며 명가(冥加)이니라. 대저 생각해 보건대 꿈의 때의 마음을 미혹(迷惑)에 비유(譬喩)하고, 생시(生時)의 때의 마음을 깨달음에 비유(譬喩)하였다, 이로써 일대성교(一代聖敎)를 각오(覺悟)함에 흔적도 없는 허몽(虛夢)을 꾸고서, 마음이 괴로워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 보면, 자신(自身)도 집도 잠자리도 한 곳으로서 다르지 않으며 꿈의 허(虛)와 생시(生時)의 실(實)의 이사(二事)를 눈으로도 보고·마음으로도 생각하지만 곳은 오직 한 곳이니라. 몸도 오직 일신(一身)으로서, 이(二)의 허(虛)와 실(實)의 일이 있으니 이로써 알았노라. 구계(九界)의 생사(生死)의 꿈을 꾸는 나의 마음도 불계상주(佛界常住)의 생시(生時)의 마음도 다르지 않으며, 구계생사(九界生死)의 꿈을 꾸는 곳이 불계상주(佛界常住)의 생시(生時)의 곳으로서 변(變)함이 없고, 심법(心法)도 다르지 않으며, 재소(在所)도 다르지 않지만 꿈은 모두 허사(虛事)이고, 생시(生時)는 모두 실사(實事)이니라. 지관(止觀)에 가로되「옛날 장주(莊周)라는 자(者)가 있어, 꿈에 호접(胡蝶)이 되어 일백년(一百年)을 지났는데, 고(苦)는 많고 낙(樂)은 적으며, 땀투성이가 되어 놀라서 보니, 호접(胡蝶)으로도 되지 않고 백년(百年)도 지나지 않았으며, 고(苦)도 없고 낙(樂)도 없고, 모두 허사(虛事)이며 모두 망상(妄想)이니라」이상(已上)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3~5쪽이닌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과 함께하는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 편이자 닛코상인... 총본산 니치뇨상인예하님의 편이기에 감사할 뿐입니다.모든게 일념의 소작입니다.
일념 즉 일념삼천이고 생명의 근원이고 일체 생명의 작용입니다.
우리들의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하여 보탑인 南無妙法蓮華經를 묘음으로 봉창하는 순간 의정에 걸친 대우주근원의 일체의 보탑(불성)들이 함께 일제히 솟아나와 장엄하게 각자 자기자신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주변의 일체 생명들도 같은 찰라의 순간에 거대하고 찬란한 대환희의 보탑들로 솟아나와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과 지가 명합하는 순간 즉 南無妙法蓮華經와 하나가 되어 발적현본하는 일념의 순간에 우리들 자신이 찰라에 각자가 본불이 되고 석가불이 되고 다보불이 되고 지용보살의 상수 상행보살이 되고 사대보살이 되고..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이 됨과 동시에 그 불성들을 불러내고 그 모든 공덕을 무상보취 불구자득으로 일시에 물려받고 그 불력과 법력 그리고 위광세력 까지 자기자신의 일신에 고스란히 받게 되며 또 제불 제천의 지킴도 동시에 받게 되어 자유자재.상락아정의 생명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제하는 순간의 일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념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어의구전 790페이지)"라는 대성인님의 지남대로 입니다.
또 이런 일념으로 창제를 하는 그 찰라의 순간에 아래 말씀대로 되는것입니다.이 경(經)의 신심(信心)이라 함은 조금도 사견(私見) 없이 경문(經文)과 여(如)히,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화일부(法華一部)에 배반(背反)하는 일이 없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니라. 부처가 된다고 함은 별(別)다른 일은 아니로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타사(他事)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히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갖추게 되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잠시도 멈추지 않고 대우주 속을 무서운 속도로 끝없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느끼거나 인지하지 못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선 지구 자체의 자전으로 시속 약1500km의 속도로 공간이동을 계속하고 있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는 초속 30km 즉 시속 108000km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고, 은하 중심을 촛점으로는 초속 200km로 시속 70000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속도로 달리더라도 은하를 한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2억 3천만년이나 된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태양계란 것도 은하에 비한다면 망망대해 속의 물방울 하나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고 또 은하라 하더라도 대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조약돌 정도의 크기에 불과한 광활한 공간입니다.
우리가 속한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와 마젤란 은하 등 20여개의 은하로 이루어져 있는 국부은하군에 속해 있는데 지금 이 국부 은하군 전체가 처녀자리 은하단의 중력에 이끌려 바다뱀자리 쪽으로 초속 600km 시속 2160000km의 속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주 공간 자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빛의 속도로 무한팽창을 계속하고 있으며 수많은 별들이 탄생과 죽음의 윤회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공간을 수천억 은하들이 비산하고 그 무수한 은하들 중에 작은 모래알에 불과한 우리 은하 속 태양계의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시무종 무량무변인 대우주의 근원의 법칙을 깨닫고 그 진리를 남묘호렌게쿄라는 대우주 근원의 리듬과 하나되는 범음성으로 봉창하여 대우주 생명근원의 리듬으로 하나되게 하는 불교의 영지는 진리 그 자체임에 놀라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기도의 근간으로 하여 대우주의 중심축-모든 존재의 근본으로 우리들 각자가 존재하게 되는 근원의 근원 즉 절대 불변인 불변진여의 법성과 하나되는 범음성인 남묘호렌게쿄를 제대로 봉창하면 이 대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대우주의 중심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이자 끝인 주, 사 ,친을 모두 갖춘 무시무종 무량무변의 생명으로 영원히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이 지구촌에 근원의 생명의 빛을 인류에게 선물하기 위해 원해서 태어났습니다.
거창한 말로는 광선유포를 위해 원해서 태어난 지용보살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의 어유명대로 세계광선유포 실현이라는 대업을 위해 그동안의 단련과 고난이 유독 길고도 깊었든 것입니다.
이제 대우주근원의 생명이신 대어본존님과 구원의 본불이신 니치렌대성인님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이 지구촌에 펼칠 때가 되었습니다.
대우주를 관통하는 절대적인 생명의 법칙-생과 사, 성주괴공을 포함하면서도 뛰어넘는 대우주 근원의 생명리듬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묘법 남묘호렌게쿄를 이 지구촌의 사람들이 제대로 불러서 절대적인 생명경애를 회득하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의 근본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이제 다함께 그 일을 완수 할 수 있는 생명상태로 발적현본하게 될 것이고, 실질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일들을 하나 하나 이뤄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일대성교(一代聖敎)를 홍통(弘通)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이처럼 대사(大事)인 법문(法門)을 전교(傳敎) 천태(天台)도 아직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이것도 도리(道理)인 것이니 말법(末法)의 처음의 오백년(五百年)에 상행보살(上行菩薩)이 출세(出世)하여 홍통(弘通)하셔야 할 법문(法門)이기 때문이니라. 깊이 명심(銘心)하고·어떻게 하든 이번에 이 경(經)을 깊이 믿어 명종(命終)의 때·천불(千佛)의 마중을 받아 영산정토(靈山淨土)에 달려가시어 자수법락(自受法樂) 하시라. 신심(信心)이 약(弱)해서 성불(成佛)이 연장(延長)될 때·나를 원망하지 마시라. 비유(譬喩)컨대 병자(病者)에게 양약(良藥)을 주었는데 독(毒)을 좋아하여 복용(服用)하셔서 그 병(病)이 낫기 어려울 때, 나의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의사(醫師)를 원망함과 같이 되리라. 이 경(經)의 신심(信心)이라 함은 조금도 사견(私見) 없이 경문(經文)과 여(如)히,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화일부(法華一部)에 배반(背反)하는 일이 없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니라. 부처가 된다고 함은 별(別)다른 일은 아니로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타사(他事)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히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갖추게 되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 비유(譬喩)컨대 새의 알은 처음엔 물인데 그 물속에서 누가 하는 것도 아닌데, 주둥이나 눈이 생겨나서 허공(虛空)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우리들도 무명(無明)의 알이고 천박한 몸이지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창제(唱題)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삼십이상(三十二相)의 주둥이가 나오고 팔십종호(八十種好)의 개모(鎧毛)가 생겨 갖추어져서 실상진여(實相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되느니라. 이로써 경(經)에 가로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명(無明)의 알속에 있어 지혜(智慧)라는 주둥이가 없다. 불모(佛母)라는 새는 분단동거(分段同居)의 옛집에 돌아와 무명(無明)의 알을 두들겨 부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이란 새를 보금자리를 떠나게 하여 법성진여(法性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한다」라고 설(說)했느니라 취의(取意).
유해무신(有解無信)이라 해서 법문(法門)을 알아도 신심(信心)이 없는 자(者)는 결코 성불(成佛)할 수 없으며 유신무해(有信無解)라 해서 해(解)는 없어도 신심(信心)이 있는 자(者)는 성불(成佛)하느니라. 모두 이 경(經)의 의(意)이지 나의 말은 아니로다. 그러므로 이(二)의 권(卷)에는 「신(信)으로써 들어감을 득(得)하였지 자기(自己)의 지분(智分)은 아니다」라고 해서 지혜제일(智慧第一)의 사리불(舍利弗)도 오직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고 신심(信心) 강성(强盛)함으로써 부처가 되었으며 자기(自己)의 지혜(智慧)로써 부처가 되지 않았다고 설(說)하시었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443쪽《빛의 속도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창제의 위대함(어강문서807~808쪽)》
실제로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8분 20초 정도입니다.
즉 따뜻한 햇빛을 지금 쬐고 있지만 사실은 8분 20초 전의 과거의 빛을 지금 쬐고 있는 것입니다.
또 북극성은 450광년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빛의 속도로 달려가도 450년이 걸리는 거리이기에 우리가 밤하늘에 보는 북극성이 자리하고 있어서 사실 450년 전인 조선시대 중기에 출발한 빛을 지금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수한 별빛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지만,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억년 수십억년 전의 빛을 통해 그 별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중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별도 있을 것이고, 빅뱅으로 이제 막 탄생하는 별이라고 인식한 별들이 현재는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현재의 과학과 천문학의 수준으로는 파악할 수도 없는 부분인 것입니다.
어서말씀 곳곳에 삼세상응과 무시무종 무량무변, 삼세상항, 삼세시방, 삼천대천세계 외 사백만억나유타 등이 나옵니다.
즉 시간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에 걸친 무시무종의 삼세와 공간적으로는 삼천대천세계 외 사백만억나유타에 걸친 무량무변을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삼세상응과 삼세상항과 삼세시방에 특히 주목해서 깊이 사색해야 할 것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과 우주대라는 공간 즉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되고 있어서 남묘호렌게쿄라는 창제행에 의해 아래에 언급한 어서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오자(五字) 칠자(七字)의 위대함과 우리들이 이 위대한 제목을 부르는 바로 그 순간 즉시로 전우주에 순식간에 퍼지고 전달되는 장엄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더욱 정성을 다해 진지하게 창제행을 실천해 나가야겠다고 결의하게 됩니다. ※
"대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성불도(皆成佛道)의 요법(要法)이니라."
*법화경이야 말로 일체의 중생들이 모두 성불의 도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법문임.
"지금 말법(末法)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를 홍통(弘通)하여 이생득익(利生得益)이 있는 시(時)이니라. 그러므로 이 제목(題目)에는 여사(餘事)를 섞으면 벽사(僻事)가 된다. 이 묘법(妙法)의 대만다라(大曼茶羅)를 몸에 가지고 마음에 염(念)하며 입으로 봉창(奉唱)해야 할 때이니라."
*이생득익(利生得益):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이익을 얻음.
*이 남묘호렌게쿄 제목에 다른 것들을 섞으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됨.
*지금이야말로 이 묘법의 대만다라 대어본존님을 몸에 가지고 마음에 생각하며 입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제목을 부를 때임. 즉 신.구.의 삼업으로 대어본존님을 모시고 항상 생각하면서 제목을 엄숙하게 불러나갈 때임.
"일행(一行)이란 묘법(妙法)의 일행(一行)에 일체행(一切行)을 포함(包含)하였으며, 법구(法具)란 제목(題目)의 오자(五字)에 만법(萬法)을 구족(具足)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그러하므로 삼세시방(三世十方)의 제불(諸佛)도, 상행보살(上行菩薩) 등(等)도, 대범천왕(大梵天王)·제석(帝釋)·사왕(四王)·십나찰녀(十羅刹女)·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산왕이십일사(山王二十一社)·기외(其外)·일본국(日本國) 중(中)의 소신(小神)·대신(大神) 등(等)·이 경(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할 것이니라고, 법화경(法華經)의 제오권(第五卷)에 분명(分明)히 설(說)해져 있느니라. 그림자와 몸·소리와 울림과 같은 것이다, 법화경(法華經) 이십팔품(二十八品)은 그림자와 같고 울림과 같다."
*법구(法具) 즉 법을 갖춤이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 다섯자에 일체법을 빠짐없이 모두 갖춤.
* 구체적으로는 삼세시방(三世十方)의 제불(諸佛)도, 상행보살(上行菩薩) 등(等)도, 대범천왕(大梵天王)·제석(帝釋)·사왕(四王:4대천왕)·십나찰녀(十羅刹女)·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산왕이십일사(山王二十一社)·기외(其外)·일본국(日本國) 중(中)의 소신(小神)·대신(大神) 등(等)이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법화경의 행자들을 지키고 보호해줌. 즉 그림자와 몸.소리와 울림과 같은 것임.
"제목(題目)의 오자(五字)는 체(體)와 같고 소리와 같은 것이니라, 제목(題目)을 봉창(奉唱)하는 소리는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닿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우리들의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제목(題目)이라는 대음(大音)에 넣어서 봉창(奉唱)하므로 일대삼천계(一大三千界)에 도달(到達)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몸 즉 체(體)와 같고 소리와 같아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을 봉창하는 소리는 전우주에 닿지 않는 곳이 없음.
*빛의 속도는 1초당 30만km로 지구에서 달 까지 가는데 고작 1.3초 밖에 걸리지 않지만, 소리의 전달 속도는 온도가 높은 곳에서는 조금 더 빠르고 낮은 곳에서는 조금 더 느려지지만 평균 1초당 340m 정도 밖에 되지 않기에 전우주에 소리가 전달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자체가 몸 즉 체(體)와 같고 소리와 같기 때문에 우리들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을 봉창하는 그 순간에 즉시로 전우주에 곧바로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임.
*특히 우리들이 작은 목소리로 불러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題目)이라는 대음(大音)에 넣어서 봉창(奉唱)하게 되기 때문에 일대삼천계(一大三千界) 즉 전우주에 도달(到達)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는 것임.
어서문서 본문 중 807~808쪽 참조
"대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성불도(皆成佛道)의 요법(要法)이니라. 그러므로 대각세존(大覺世尊)은 설시(說時) 미지고(未至故)라고 설(說)하시어 설(說)해야 할 시절(時節)을 기다리시었다. 예(例)컨대 두견새가 봄을 그냥 보내고 닭이 새벽을 기다렸다가 우는 것과 같으니라. 이는 즉(卽) 시(時)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이지시고(以知時故) 명대법사(名大法師)라고 설(說)하셨느니라, 지금 말법(末法)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를 홍통(弘通)하여 이생득익(利生得益)이 있는 시(時)이니라. 그러므로 이 제목(題目)에는 여사(餘事)를 섞으면 벽사(僻事)가 된다. 이 묘법(妙法)의 대만다라(大曼茶羅)를 몸에 가지고 마음에 염(念)하며 입으로 봉창(奉唱)해야 할 때이니라. 이에 따라서 일부(一部) 이십팔품(二十八品)의 정상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서품(序品) 제일(第一)이라고 제호(題號)를 붙였느니라.
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서품(序品) 제일지사(第一之事) 현지전(玄旨傳)에 가로되, 일체경(一切經)의 총요(惣要)란 이른바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이니라. 또 가로되, 일행일체행항수(一行一切行恒修) 차삼매문(此三昧文), 말하는 바의 삼매(三昧)란 즉(卽) 법화(法華)의 유상(有相), 무상(無相)의 이행(二行)이니라, 이 도리(道理)를 알고 법화경(명심(銘心)하여 명심(銘心)하여 조심하십시오. 더욱더 미워하는 사람들이 노릴 것이외다. 밤의 주연(酒宴)은 절대로 하지 마시라, 다만 아내와 같이 술을 마신다면 무슨 부족(不足)이 있겠느뇨, 타인(他人)과 주간(晝間)의 주연(酒宴)도 방심(放心)하지 말지어다. 술을 떠나서는 노릴 틈도 있을 수 없느니라. 거듭 거듭 조심하시라, 공공근언(恐恐謹言).
사주군이입차법문면여동죄사(主君耳入此法門免與同罪事), 에몬노조전답서(左衛門尉殿答書) 미노부에서 53세에 술작 1133쪽"말법(末法)에 와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를 홍통(弘通)하는 자(者)는 남녀(男女)를 가리지 말지니라. 모두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의 출현(出現)이 아니고서는 부르기 어려운 제목(題目)이니라. 처음엔 니치렌(日蓮) 한 사람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불렀으나 이인(二人)·삼인(三人)·백인(百人) 이렇게 차례로 불러서 전(傳)하느니라. 미래(未來)도 또 그러하리라, 이 어찌 지용(地涌)의 의(義)가 아니리오. 더구나 광선유포(廣宣流布)의 때는 일본일동(日本一同)으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게 될 것은 대지(大地)를 과녁으로 하는 것과 같으리라.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에다 이름을 세우고 몸을 맡기시라. 석가불(釋迦佛) 다보불(多寶佛)·시방(十方)의 제불(諸佛)·보살(菩薩)·허공(虛空)에서 이불(二佛)이 서로 수긍(首肯)하여 정(定)하신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오로지 말법(末法)의 영법구주(令法久住) 때문이니라."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 1360쪽 말씀처럼.."나의 제자(弟子)들은 시험(試驗)삼아 법화경(法華經)과 같이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수행(修行)하여 이번에 불법(佛法)을 시험할지어다 .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선시초(撰時抄)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 291쪽
정장(淨藏)·정안(淨眼)은 법화경(法華經)을 가지고 사견(邪見)의 자부(慈父)를 인도하고, 제바달다(提婆達多)는 부처의 적(敵)이라,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經)들에서 버림을 당하고 임종(臨終)이 나빠서 대지(大地)가 갈라지며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지만 법화경(法華經)에서 소환(召還)되어 천왕여래(天王如來)는 기별(記別)을 받았으며, 아사세왕(阿闍世王)은 아버지를 죽였지만, 부처가 열반(涅槃)할 때 법화경(法華經)을 듣고 아비(阿鼻)의 대고(大苦)를 면(免)했느니라.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의 본의(本意)는 무상(無上)이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무상중(無上中)의 극무상(極無上)이니라. 이 묘법(妙法)을 가리켜 무상보취(無上寶聚)라고 설(說)하셨느니라, 보취(寶聚)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의 제바라밀(諸波羅蜜)의 보(寶)를 모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無上寶聚)를 신로(辛勞)도 없고 행공(行功)도 없이 일언(一言)으로 수취(受取)하는 신심(信心)이며, 불구자득(不求自得)이란 이것이니라, 자(自)의 자(字)는 십계(十界)이며, 십계(十界) 각각(各各)이 득(得)하느니라, 제법실상(諸法實相) 이것이니라, 그러한 까닭으로 이 문(文)은 묘각(妙覺)의 석존(釋尊)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골육(骨肉)이니 깊이 깊이 이것을 생각할지어다 운운(云云).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7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