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21-25 십자가는 고통과 성숙을 선물한다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왔을 때,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주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었던 대로 말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던데요.”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이 궁금하셨던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칭찬과 축복을 쏟아내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7-19)
분위기가 너무 좋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몸을 돌리시고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라고 분노하셨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은 조울증이 있으셨던 것일까? 감정 기복이 심하신 분이셨을까? 아니면 베드로가 버릇없게 굴었던 것일까?
베드로의 고백으로 좋은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난다”(21)고 말해주셨다. 여러분이 만약 제자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싶은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말에 무게중심을 둔 사람은 슬플 것이고, 살아난다는 말에 방점을 둔 사람은 기쁠 것이고, 모두를 받아들인 사람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다.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말에 꽂혀버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 베드로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 싫었다. 예수님을 보호하고 싶었다. 제자로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제재를 했고[막았고], 이런 참담한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는 예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걱정이었다. 강력하게 말해서라도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몸을 돌리시고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라고 강력하게 꾸짖으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반석 베드로라고 이름도 지어주셨다.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고,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베드로를 사탄,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을까? 앞에서 너무 띄워 주었더니 너무 버릇이 없어서? 선을 넘는 것 같아서? 아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사탄이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뜻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어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은 고난을 받고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탄은 이 생각[사람의 일]을 예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데 사용했다. 예수님의 신변을 생각하도록 하여 예수님의 뜻을 무너뜨리려 했다.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것이다. 고후 11: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약 4:4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 바울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눈물로 호소했다.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익히 들었던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제자는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님을 자기 생각대로 이끄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는 존재이다.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사람의 일]를 부인하는 선행작업이 필요하다. 평생 해 오던 자기의 것을 부인해야 하니 십자가[고통]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주어진[얹힌/태인] 십자가를 저야만[고통을 견뎌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듯이 그 당시 십자가 형벌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자신이 직접 지고 처형장까지 갔었다. 이것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을 알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정욕과 탐심;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분쟁, 분열, 분냄, 당 짓는 것, 이단, 시기, 투기, 원수 맺는 것, 술 취함, 방탕 등. 기도로 몸부림을 치며 부르짖음으로써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자기를 부인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평생 쌓아온 나라는 존재가 없어질 것 같아 염려가 찾아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누구든지 제 목숨[자아/자기]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자아/자기]을 잃으면 찾으리라(25) - 찾으리라는 완전하고 충만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성숙된 나를 발견한다.
이런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옛날 선배 목사님에게 목회에 대한 불평을 했더니 “죽은 개는 짖지 않는다. 발길로 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말에 동의했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믿고 닮고 싶은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이 작업을 하셨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예수님이 잡혀가셨을 때, 제자장의 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같은 패라고 말했다. 부패한 본성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예수님을 부인해 버렸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인도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들이다. 십자가는 고통이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요 죽음이다. 고난 없이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았다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목소리만을 내는 사람들은 아직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 때문에 아파도 하고 기뻐도 하고 눈물도 흘리기도 하며 동거 동락한다.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사는 사람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내가 죽어지고 썩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