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 막7:1-8
오늘 본문을 보면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주님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 명이 찾아옵니다.이들은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어 온 사람들인데 이들이 온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라는 랍비가 백성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면서 인기를 얻고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볼 때는 기분이 나쁘고 현 질서를 깨뜨리는 파괴자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찾아서 그의 도전을 잠재우고 잠잠케 하는 목적을 갖고 찾아온 것입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예수와 제자들을 살펴보고 있던 그들에게 중대한 건수가 잡혔습니다. 제자들 중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건수를 하나 잡았다고 생각하자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따집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5절) 떡을 먹을 때,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고 위생적으로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냐고 따질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 되어집니다. 어떻게 하다보면 손을 씻지 않고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이 일이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일이나 또 4절에 나오는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는 먹지 아니하며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것은 위생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는 중대한 잘못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문서로 전해진 성문율법과 구전으로 전해진 구전 율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문 율법은 쉽게 모세오경 나아가 구약성경을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글로 된 율법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율법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석해주고 또 구체적 지침을 주기 위하여 40일 동안 모세에게 직접 말로 설명을 해 주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장로들을 통하여 전해져 내려온 것이 장로들의 유전이요 구전 율법인 탈무드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과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하는 탈무드 두 개의 율법을 갖고 있고 우리가 신약성경을 가지고 구약을 해석하듯이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가지고 구약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러면 구전 율법, 조상들의 유전인 탈무드가 왜 필요할까요?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에 대한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무조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모여서 39가지의 금지법을 제정하여 탈무드에 기록하였습니다. 그 39가지 중에 빨래하지 말 것, 때리지 말 것, 염색하지 말 것, 두 글자를 쓰지 말 것, 두 글자로 쓰기 위해 지우지 말 것 등이 있습니다. 결국 탈무드는 토라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만든 해석서인데요, 오늘 본문에 언급된 장로들의 전통이 바로 탈무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전 율법, 장로들의 유전은 율법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이것을 어겼습니다. 오늘 본문 3절 4절에 언급된 것도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장로들의 전통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당국자들이 제자들을 책망한 것은 그렇게 신성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들을 책망하신 것은 이 규정과 그것을 지키는 일에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큰 문제가 있기에 주님께서 그렇게 책망하셨을까요? 먼저는, 남을 정죄하는 잘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을 뿌리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던 이유는 시장에서 이방인들이나 정결예식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과 접촉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시장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으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과 만날 수 있고 접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고 접촉하면 자신들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씻기 위하여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러한 전통에는 자기들은 깨끗하고 거룩하고 이방인들은 더럽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들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했다는 말이 나오는데요(2장)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 기독교인들이 안디옥에 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오래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인데 전통적인 율법과 관습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오자 베드로가 눈치를 보고 이방인들 곁을 떠나갔고 베드로가 그렇게 하니까 남은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에게서 떠나가고 바나바도 외식에 유혹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하는 말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10:28) 합니다. 이방인과 교제하고 식사를 하고 가까이하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더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 속에는 자신들은 거룩한 선민이고 이방인들은 악인이며, 자신들은 구원받은 백성이며 이방인들은 멸망 받을 죄인이라는 생각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위법이고 접촉하면 자신들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6) 하셨고요 하나님도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게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부름을 사양하지 않고 왔노라”하나님이 속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부심을 갖고 거룩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판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이요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둘째는, 전통과 형식에 매달려 위선이 되고 외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본질뿐만 아니라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종교든지 형식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적 형식을 통하여 안정감과 위안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형식에 너무 치우치다보면 어느새 종교의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형식이 더 지나치면 남에게 보이는 위선이 되고 밖에만 꾸미는 외식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고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를 향하여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도 있고 모양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 보면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형식에 얽매이고 형식에만 신경 쓰다가 본질을 잃어버리면 이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시간에는 어떤 악기를 써서는 안 된다든지,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 된다든지 하면 그것은 형식에 매여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하면서 그저 형식적으로 외우기만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마음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모든 전통과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잘못된 형식과 외식은 배격해야 합니다. 사람의 계명이나 교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판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이 되지 않도록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사랑하는 샘물교회 성도들이 되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