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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에 묻힌 4인의 을사오적 그리고 을사늑약 ( 을사조약 )
이번 주제를 을사오적으로 한 이유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많이 잊힌 4인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을사오적 5명 중 몇 명이나 아시나요? 아마 이완용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들로 인해 대한 제국의 주권이 강탈 당하고 그들로 인해 조상들이 일제에 시달렸음에도 우리는 그들 중 매국의 정도가 가장 심한 이완용 밖에 기억하지 못 합니다. 이런 사실이 안타까웠던 나머지 이번 주제를 을사오적으로 정했습니다. 또한 을사늑약을 들어봤지만 정확히 어떤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권을 빼앗기고 이 조약을 체결하는데 참여한 이들을 을사오적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지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이번 주제에 을사늑약도 포함시켰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 '을사조약'과 '을사늑약' 의 공식 명칭은 조약.)
을사오적이란 1905년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한반도 침략 과정에서 을사 늑약을 체결할 당시 대한제국 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 하였던 위의 다섯 사람을 말합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고종황제 에게 당시 일본 덴노인 메이지_덴노 의 친서를 바칩니다. 이 친서에는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 하여 조치하소서"라 쓰여있었습니다. 덴노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죠.
이 위협이 먹히지 않자 동년 11월 15일 다시 이토는 고종에게 한일협력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은 강압적으로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이토는 당시 대한제국 조정의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이나 매수 등의 회유책 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대신들의 지지를 받게 된 이토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 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측의 의지로 열린 회의여서 분위기는 침통하기 짝이 없었고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고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기에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마 일본 군인들이 궁궐을 둘러싸고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5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초초해진 이토는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_요시미치 와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 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회의장에는 8명의 각료 대신들이 있었습니다. 위의 5명과 대신들 중 수상격이였던 참청 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이들이었죠.
이토는 참을성이 다했는지 직접 종이와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여부 즉 조약 체결에 대하여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를 물으러 다녔습니다. 이때 참정대신 한규설은 무조건 불가를 주장했고 민영기와 이하영은 이에 동조하였습니다.
나머지 5명은 "이게 다 황제( 고종 ) 때문이다!" 라면서 고종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찬성을 하였고 이토는 8명 중 5명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허가를 강요했습니다. 이리하여 을사오적이 탄생하게 됩니다.
아마 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3명을 대단하다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지만 참정대신 한규설 외의 2명은 변질자가 됩니다.
이하영 은 조약 체결 후 가장 적극적으로 일제에 찬동하고 민영기는 후에 대한 제국의 식민지 격하 후 훈장과 작위를 받고 친일파로 살아가는 등 일제의 충실한 개가 되고 맙니다.
심지어 황제를 보필해야 할 궁내 대신 이재극 역시 일제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됩니다.
이 3명을 추가로 을사 3흉이라고 부르는데 이 인간들도 잊지 말고 기억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을사3흉 ㅡ 이하영 민영기 이재극
끝까지 이토 앞에서 강하게 반대 의견을 던졌던 한규설 은 을사오적을 파직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본인이 이토 앞에서 강한 반대 의견을 던졌다는 이유로 참정대신 집에서 축출되고 마니 참 한스럽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간단하게 을사오적들이
어떤 인간들이었는지를 알아봅시다.
첫 번째로 박제순 입니다. 박제순은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 대한 제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입니다. 늑약 전에는 여러 부서의 관직을 지내고 충청도 관찰사도 지내는 등 평범한 관료였고 1899년 조선과 청의 통상조약이나 1901년 조선과 벨기에의 통상조약에 기여하는 등 그럭저럭 외교 문제에서 역할을 하던 지극히 평범한 관료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외부대신이라는 명목하에 학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의 입장에 찬성하여 민족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이 직후 그는 늑약에 반대하여 파직된 참정대신 한규설의 후임으로 참정대신이 되었고 이완용 내각에서 친일에 앞장섭니다. 심지어 후에 한일 합방이라고 불리는 경술국치 때도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경술 국적의 타이틀마저 얻게 되었습니다.
조약 경술국치 후인 1910년에는 조선 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람을 즐기다 1916년 6월 비통하게도 자연사했습니다. 이 인간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너무 편하게 가지 않았나 싶네요.
사실 늑약 체결에 부정적이었거나 반대했었던 입장이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대세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반대했다 하지만 후에 이완용 등의 오적들의 입장에 찬동하였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외부대신이라는 양반이 이토가 겁을 주니 그냥 체결 도장을 찍어버렸다는 것을 보니 역시 큰 인물이 될 인간은 아니었나 봅니다.
참고로 이 인간이 충청도 관찰사로 제직할 당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었는데 그 진압에 앞장섰다 하니 그냥 줏대 없이 대세를 따르는 인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박승유라는 분은 할아버지의 이런 행적을 부끄러워하고 광복군에 입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하니 나이를 먹는다고 무조건 현명해지는 것도 아닌가 봅니다.
두 번째로 이지용 입니다. 이 인간도 매국노의 대표격이라 불리지만 이완용 등의 네임드에게 인지도가 밀린다 하니 안타깝네요.
이지용은 전주 이씨입니다. 이 말은 즉슨 대한제국 황족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인간이 나라를 팔아먹다니 답이 없습니다.
1887년 문과에 급제하고 1895년에는 칙명을 받아 일본을 다녀왔고 경상도와 황해도의 관찰사를 지내자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내는 등 행적이 일본이랑 밀접했습니다. 1904년에는 외부대신으로서 일본 공사에게 1만 엔의 뇌물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고 마침네 1905년 내부대신으로써 을사늑약 체결에 동의하여 나라를 팔아먹습니다. 후에 이것이 원인이 되어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작위와 조선총독부의 고관 자리를 얻게 됩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부를 축적하여 이완용과 부자 랭킹의 정상을 다투던 이 인간은 나라를 판 돈을 도박에 올인했다 합니다.
후인 1928년 이 인간도 편히 가게 됩니다. 사망 직전의 유언이 "일본에 속았다!"입니다만 이게 진정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론 등의 정책에 낚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신세한탄인지는 여러분들의 해석에 맡깁니다.
뭐.그래도 죽을 때까지 "미국이 득세할 것 이니 친미파가 되렴!"이라 자식들에게 말하고 간 이완용보단 훨씬 나은 거겠죠.
세 번째로 이근택 입니다. 이 양반도 마찬가지로 전주 이씨입니다. 성종의 아들의 먼 후손이라 하는데 그래도 황실의 피가 흐르는 양반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 서다니 참 대단합니다.
이 인간은 관직을 시작하게 된 계기마저 더럽습니다. 임오군란(별기군과 구군대의 차별로 인해 구군대 군인들이 일으킨 난) 때 표적이 되어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한 것 때문에 눈에 띄어 #명성황후 환궁 후 벼슬길에 들었다나 뭐라나..
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 그만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합니다.
그 후 관직에 복귀한 후 한성판윤과 의정부 찬정을 등을 겪고 1905년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이완용이 주도한 을사늑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지지 의사를 밝힘으로써 을사오적으로 등극합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한 정부 전복이 실패하니 그냥 나라를 팔아먹어서 전복시키는 대단한 양반입니다. 후에 경술국치 때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역시 조선총독부의 고관이 되었고 역시 비통스럽게 1919년 자연사했습니다.
을사늑약 문서에 이근택이 도장을 찍은 후 집에 귀가하여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집안 권속들과 기뻐하였는데,
부엌일을 하는 하인이 고기를 썰다가 이것을 듣고 칼을 도마에 치며 자신이 역적에게 몸을 의탁하였다고 큰소리를 치며 뛰어나갔고,
또 한 바느질하는 하인도 똑같이 꾸짖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근데 이 양반 을사늑약을 반대했던 한규설의 딸이 이 양반에게 시집와서 사돈관계였고 뛰쳐나간 여자 노비들이 한규설의 딸이 시집올 때 데려온 노비라고 하는데 이근택이 대궐에서 나와 "내가 다행이고 죽음을 면했소!"라며 기뻐하는 이근택을 보고 부엌에서 고기 자르던 칼을 들고 나와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가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라고 말하고 옛 주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자기 집 머슴이나 노비들한테도 주인 취급받지 못한 답 없는 인간입니다.
참고로 우리의 이근택 씨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고 싶으셨다고.
마지막으로 권중현입니다. 그의 온 행적들은 친일과 관련돼있다 말해도 될 정도로 일본과 밀접했습니다.
일찍부터 일본어를 익혀 개화파에 가담하여 친일 개화 관료의 길을 걸었고 1883년에는 일본 주재 서기관을 지내고 1891년에는 인천항에서 사무직으로 일했고 동년 오스트리아와의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참가합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대한제국 관료인지 일본 관료인지 모를 이 양반은 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써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오명을 남겼습니다.
이때의 논리가 정말 대단한데
"대일본제국이 조선의 백성들을 먹여살리고 입혀주신다면야 기꺼이 찬성할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억지 논리로 늑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그대로 을사오적 + 민족반역자로 변신.
늑약 체결 후에는 의병 진압에 앞장서 1908년 일본 정부로부터 또 훈장을 서훈 받고 경술국치 후에는 자작 작위를 받고 역시 조선총독부 고관으로,또 1912년이랑 1915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등 이 양반 어느 나라 사람인지 점점 모르게 됩니다.
더 대단한 건 이러한 행적에 분노한 조선 의사 및 민중들의 습격을 다른 오적들과 함께 하도 많이 받아서 출퇴근 때에도 일본군의 호의 없인 못 다니고 죽을 때까지 암살범의 습격을 받아 도망치면서 그 간악한 명줄을 유지하였다 합니다.
그렇게 계속 친일하던 이 양반 1934년까지 잘 놀고먹다 자연사합니다. 왜 을사늑약에 참여한 인간들은 전부다 편안하게 자연사하는지 비통한 심정입니다.
조약 체결 당시 작성된 대한 제국 측 문서와 일본 측 문서 원본
위의 5명의 엄청난 노력으로 인해 대한 제국을 독립국이 아닌 보호국으로 사실상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어 버린 을사늑약이 체결되게 됩니다. 주요 내용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 박탈 및 통감부 (내정간섭 기관) 설치이니 이렇게 된 것이죠. 일단 늑약의 내용을 봅시다
1.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2.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정부는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3.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4.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5.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어떤가요? 딱 봐도 말도 안 되는 내용 아닌가요?
2항으로 인해 외교권이 박탈되고
3항으로 인해 내정간섭이 공식화되는 등 자주국으로서의 권리들이 침해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대한 제국은 조선통감부의 통감 정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앞으로는 통감부의 감독과 감시를 받아 가며 정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시작의 발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초대 통감은 이 사단을 계획한 이토 히로부미이니 대한 제국은 저항하는 것마저 힘들게 되었습니다.
아마 가뜩이나 열강들에 치이던 대한 제국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늑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외교권 상실만 두고 봐도 늑약이 체결되자마자 대한 제국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가능할 정도로 답이 없는 조약이 이 을사조약입니다.
늑약의 체결은 국내의 여러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이에 항거하여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윤치호-
위는 을사조약 체결의 반대를 주장하며 올린 윤치호의 상소입니다. 위에 언급되었듯이 늑약의 체결로 인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항거하며 나섰습니다. 반대 운동이나 의병활동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5명의 인간들과는 대조되게요.
제일 먼저 유림들이 격노하여 격렬하게 맞섰고 여러 조신들과 유생들도 그 뒤를 이어 윤치호처럼 상소를 올리고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조신들과 유생들은 만국공법(국제법)을 거론하며 5명의 인간들을 명렬히 탄핵했고 조약의 무효성을 강변했으며 일부는 다섯 명을 참수하여 저잣거리에 매달 것을 청했으며 전 세계에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허위성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위의 상소를 쓴 윤치호는 1905년 12월 1일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늑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습니다. 사실 윤치호 이 양반.. 후에 친일파로 변질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친일활동 전이므로 기술하였습니다.
관리이자 의병장으로 유명한 최익현은 즉각 상소를 올려 규탄하고 이완용을 포함한 을사오적을 모조리 죽일 것을 청했으며 아직 외국 공사들이 귀국하지 않았고(후에 공사들이 모두 떠나긴 합니다) 고종이 조약에 국세를 찍은 적이 없으니 원천 무효 임을 강조하며 을사늑약 백지화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늑약에 반대하여 많은 이들이 자결했습니다.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과 민영환 그리고 홍망식 등이 먼저 자결하였고
조병세 라는 분은 상소를 올리며 조약을 규탄하자 일본 헌병들에게 연행되어 강제로 집으로 끌려가게 되자 역시 아편을 먹어 자결 합니다.
또한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암살단도 대거 조직되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을사의병이지요.
위의 최익현도 의병장 중 한 명입니다.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아! 원통하구나. 아! 분하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구나!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언론에서도 저항은 계속됐습니다. 조약에 분개한 장지연은 그 유명한 [ 시일야방성대곡 ]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고초를 치릅니다. 사실 이 양반도 변질자가 되어 친일 성향 글을 마구마구 쓰게 됩니다만. 변질한 이유가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 탄식하여도 그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은 없고 오히려 처벌만 하니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판단은 여러분의 몫
이런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는 동안 고종은 내심 동조하였지만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으며 방조했고 을사의병의 해산을 촉구하면서도 몰래 양반 의병장 등에게 밀지와 군자금을 보냈으며 거병하지 않은 유생들에게도 거병을 촉구하며 사실상 일본에 맞서는 등 저항하는 듯하면서도 순응하는 듯한 뭔가 애매한 태도로 대응합니다. 이런 고종이었지만 조약의 무효성을 인지하고 무효 선언을 하고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등 노력은 하였으나 다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고종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합니다.
을사늑약으로 인해 애국계몽운동이 폭발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각계각층에서 대한 제국의 멸망을 막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만은 상소를 올리거나 글로 저항하던 이들 중 몇은 친일파로 전향하고 의병활동을 하던 이들은 몇 년 뒤 일본의 대대적인 의병토벌로 인해 명을 달리하였고 헤이그 특사나 타국의 친서를 전달하며 늑약의 무효를 주장한 고종은 경술국치 이후 퇴위 되는 등 일제의 치밀한 탄압 때문에 사그라들고 맙니다.
그 후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 을 통해 통감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군대가 #해산 되며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로 사법권 과 교도행정권 이 일본에 위탁되고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로 인해 대한 제국은 일본제국에 합병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라 부르기도 아까운 인간들의 최후는 대부분 편안했고 그들의 자손은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사며 그동안 쌓은 부를 지금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죠.
반면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여러 운동에 참가하는 등의 애국활동을 한 분들의 최후는 안타깝고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궁핍하게 살고 있습니다.
일례로 이완용이 자연사한 것과 최익현이 부당하게 유배를 당한 후 단식투쟁을 하다 몸이 약해 저 죽은 것이 있지요.
아직 우리 사회에는 친일파의 후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조상의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며 사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이완용의 후손들이 토지반환 소송을 하는 등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반성하지 않는 인간들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매국을 한 인간들을 잘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기 않기 위해.
반복되더라도 사전에 막기 위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