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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168-6)
02-2077-9000
관람시간 : [월화목금일] 10:00-18:00 / [수토] 10:00-21:00
관람료 무료 (특별전시는 유료)
석조물공원 및 야외정원 관람 안내
관람시간 : 07:00-22:00
먼저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주차공간은 지하주차장도 있고 야외주차장도 있고... 너무 늦지만 않으면 주차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하다.
주차비는 기본요금 2000원에 매 30분당 500원씩 추가되고 1일 최대(06:00~22:00) 10,000원이다.
각종 할인을 활용하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난 3자녀 다둥이카드로 결제해서 50% 할인을 받았다.
야외 한가운데에 거울못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 건물의 모습이 거울처럼 커다란 못에 비춰지게 된 데서 거울못이라 한다.
거울못은 산과 물의 조화를 강조하여 꾸미는 우리나라 전통의 정원 원리를 반영하여 만들었다.
"고려왕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청자정"
박물관 전면 거울못 반도지에 위치한 청자정(靑瓷亭)은 2009년에 건립되었으며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상징물이다.
고려사 기록에 나오는 청자 기와를 지붕에 인 왕궁의 정자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청자 지붕 저 너머로 고려 왕궁의 멋진 모습과 풍류와 여유를 찾던 선조들의 풍류를 함께 더듬어 보기 바란다.
전 흥법사 염거화상 사리탑
통일신라 844년 (문성왕 6년)
국보 제104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1962), 傳 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 傳 興法寺 廉巨和尙 舍利塔
이 승탑(僧塔)은 탑지(塔誌)가 함께 전해져, 승탑의 주인공과 만들어진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탑이다.
신라문성왕(文聖王) 6년(844)에 선종(禪宗) 산문(山門)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대 선사인 염거화상(廉居和尙)(?-844)를 위해 만든 것으로
팔각 집(八角堂)모양에 사천왕 등의 부조상을 새긴 전형적인 승탑의 모습이다.
이후 만들어진 승탑들은 이 승탑을 따라 대부분 팔각 구조에 화려한 부조상을 새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 집 모양의 승탑인 국보로 야외전시장에서 제일 먼저 만나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통일신라 923년 (경명왕 7년)
보물 제362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보물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1963),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855~923)의 묘탑으로 경남 창원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1919년 서울로 옮긴 것이다.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 승탑으로 전체적으로 날씬한 몸체에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변화를 시도한 조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단 하대석을 한 돌로 간소하게 만든 점과 중대석을 넓적한 공 모양으로 한 점이 독특하며,
상대석 연꽃 받침이 매우 화려한 반면 탑신부의 길쭉한 몸돌과 널찍한 지붕돌에는 장식이 절제되어 있다.
모두 잘려나갔으나 지붕돌 끝에 조각된 크고 탐스러운 귀꽃은 당시 석등에 많이 보이는 장식인데
후대 고려시대 승탑으로 이어진다.
보리사 대경대사 탑비
고려 939년 (고려 태조 22년)
보물 제361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 탑비(1963), 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菩提寺 大鏡大師塔碑
이 탑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활동하던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862-930)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대사가 입적한 지 9년이 지난 고려 태조 22년(939)에 세워졌다.
거북 받침돌(龜趺)의 거북 머리가 용머리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탑비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머릿돌(螭首)의 구름과 용은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다.
머릿돌인 이수의 모양이 굉장히 화려하고 받침돌인 귀부(龜趺)의 모습도 세밀하고 섬세하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
고려 940년 (고려 태조 23년)
보물 제365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1963),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및 石棺
이 탑과 석관은 신라 말기로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한 고승 진공대사의 묘탑과 석관으로
1931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 절터에서 옮겨왔다.
진공대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 때에 귀국하여 왕사(王師)가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가 940년(태조 23)에 입적하였는데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을 정도로 대사는 생전에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이 탑은 팔각 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였으나 기단 중간부는 원통형으로 하여 구름과 용무늬를 새겼고.
아담한 탑신 위에는 곡선이 강한 지붕을 얹고 보개로 장식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탑은 고려 태조의 왕명으로 지어진 것으로서 고려시대 초기 승탑 중 우수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팔각 집 모양을 기본 평면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 중대석은 원통형에 구름과 용무늬(雲龍文)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매우 이채롭다.
이 탑과 함께 발견된 석관(石棺)을 통해, 고승의 시신을 화장(火葬)뿐만 아니라 매장(埋葬)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탑
고려 1017년 이전
국보 제102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1916년 입수(본관 1961)
통일신라 말에서 고쳐 초에 활약한 홍법국사의 사리를 모셨던 탑으로 국사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와 쌍을 이룬다.
홍법국사는 당나라에서 수행하였고,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다.
신라의 탑 형식을 이어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공을 십자로 묶은 듯한 몸돌을 둔 것은 고려 초의 새로운 시도이다.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 탑비
고려 1017년(현종 8년)
보물 제359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1916년 입수(본관 1960)
비의 앞면에는 홍법국사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구양순체의 해서(楷書)로 적혀 있으나,
편마암인 비의 표면이 많이 깎여서 알아보기 어렵다.
홍법국사가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고려 목종은 실상(實相)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1017년 손몽주(孫夢周)에게 비의 글을 짓도록 하였다.
받침돌에 거북 머리 대신 용의 머리를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홍법국사의 탑비로 원래 정토사터에 남아있던 것을 1915년에 홍법국사 실상탑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어있는게 좀 신기해 보인다.
그런데 네 개의 발은 모두 잘리어 나가고 없다. 안타깝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고려 1018-1025년
보물 제190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1963), 圓空國師 勝妙塔
10세기 중반 고려 광종 임금 이후 한동안 승탑이 만들어지지 않다가
현종 임금 때인 11세기에 이처럼 세려된 탑이 만들어졌다.
이 탑은 강원도 원주 부론면 거돈사 터에 있던 원공국사 지종 선사의 탑이다.
이 승탑과 함께 있던 탑비는 현재 거돈사 터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승탑 형식을 이어받아 단정하고 균형 잡힌 팔각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에는 사천왕, 팔부중 등 불교의 수호신을 세련되고 차분한 조각 수법으로 새겼다.
탑신 정면에 있는 문 위에 탑의 이름을 새긴 점은 고려시대에 보이는 새로운 방식이다.
탑신에 표현된 꽃띠 장식은 인근에 세워졌던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 탑에서 표현된 바 있으며,
품격 있는 살창의 모습은 고려시대의 건물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현재의 부도는 지대석(地臺石) 없이 바로 기단이 시작되고 있다.
기단은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분이 팔각이다.
하대석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화형(花形)을 새겨 장식하였다.
윗면에는 갑석(甲石)을 새기고, 16엽(葉)의 복판(複辦) 연꽃이 있으며, 3단으로 된 괴임석이 있어 중대석을 받치도록 되어 있다.
중대석은 상하에 테를 둘렸고, 각 면의 좌우에 1단의 굴곡을 둔 간략한 형태의 안상을 새겼으며
그 안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배치하였다.
상대석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으며,
윗면에는 호형(弧形)을 중심으로 하여 그 상하에 각형(角形)을 새긴 팔각형 괴임을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의 생각을 충분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이 씀에 마음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현화사 석등
고려 1020년 (현종 11년)
이 석등이 있던 현화사는 고려 현종(재위 1009~1031년)이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종 11년에 경기 개성에 지은 사찰이다.
고려의 큰 사찰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케 하듯, 석등의 규모가 크고 당당하다.
현종은 삼각산 삼천사 주지 법경(法鏡)을 현화사의 초대 주지로 임명하고, 칠층석탑과 이 석등을 만들게 하였다.
석등 앞의 배례석(拜禮石)은 출토지를 알 수 없으나,
영주 부석사의 경우처럼 석등을 향해 예를 갖추는 설치물로 함께 전시하였다.
경기 개성 현화사지에 있던 이 석등은 일제강점기 1916년에 박물관인 덕수궁으로 옮겨졌으며,
그 뒤 다시 경북궁 뜰에 이건된 후 해체되어 유물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잡게 되었다.
보신각 종
조선 1468년 (조선 세조 14년)
보물 제2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옛 보신각 동종(1963), 舊普信閣 銅鍾, 普信閣鍾
조선 세조世祖 14년(1468) 원각사圓覺寺(현재 탑골공원)에 걸기 위해 만든 종이다.
절이 없어진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광해군 11년(1619) 보신각으로 옮겨져
오전 4시에 33번(파루罷漏), 오후 10시에 28번(인정人定) 울려 한양 도성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다.
하나의 몸체에 양쪽으로 용머리가 달린 장식 고리인 용뉴(龍鈕)가 달려 있으며,
몸통 한 가운데는 세 겹의 굵은 띠가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모양의 종은 고려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만들어진다.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33번을 쳐서 새해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종이 미세한 균열이 생겨 1985년 종의 보호를 위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새해맞이 타종을 위해 보신각에 걸어둔 종은 성덕대왕신종의 복제품으로,
보신각 동종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면서 1986년 새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복제품이면 보신각 종을 복제해야지 왜 성덕대왕신종을 복제한 거지?
이러면 나중에 족보가 꼬이게 되는 거 아닌가?
장명등(長明燈)은 대문 밖이나 처마끝에 달아 두고 밤에 불을 켜는 등이나
무덤 앞이나 절 안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을 의미한다.
장명등은 하나의 등불로 수없이 많은 등불을 켠다는 뜻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사용된다.
문인석(文人石)은 문관 형상으로 만들어진 돌이다. 무관 형상의 무인석(武人石)과 대비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문인석을 많이 세웠는데 각종 문헌 자료에 석인(石人)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부분 문인석을 의미한다.
태실(胎室) 석함(石函)
조선시대 왕가에서는 자손이 태어나면 아기의 태(태, 탯줄과 태반)를 항아리에 넣어
좋은 곳(길지, 吉地)에 안치하여 태실을 조성하던 전통이 있었다.
이 석재는 태항아리를 보관하던 태실 석함으로 윗 뚜껑 옆면 4곳에 큼직한 돌기(사이, 四耳)가 있고,
몸돌(신석, 身石) 중앙부에는 태항아리를 안치하였던 네모난 공간이 있다.
석양(石羊)은 무덤을 지키는 양모양의 돌이다.
석양은 조선시대에 귀신을 쫓거나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뜻으로, 묘 앞에 돌로 제작한 양을 쌍으로 조각하여 세워두었다.
석양과 더불어 호랑이 모양이 돌인 석호(石虎)와 함께 배치하는데, 석호 역시 능(묘)를 지키는 수호물의 역할을 하였다.
석호는 땅 위의 잡것을 석양은 땅 속의 잡것을 누른다고 한다.
온녕군(溫寧君, 1407-1454) 석곽(石槨)
이 석곽(石槨)은 경기도 양주(楊州) 금표(禁標) 지역 안의 온녕군(溫寧君) 묘에서 나왔다.
온녕군은 조선 태종(太宗)의 일곱째 왕자이다.
무덤에서는 고려 왕실의 무덤과 달리 구리 수저 한 벌과 분청사기 항아리 둘, 접시 두 개만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 왕실의 검소함을 엿볼 수 있다.
뚜껑에 해당하는 덮개(개석)가 깨진 것처럼 보이나
왕조실록 세종2년에 사실 석곽 개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사람이 다칠 수 있으니,
1420년 태종이 개석을 반으로 쪼개어 쓰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애민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수많은 나비들이 나무에 내려앉은 듯...
산딸나무의 꽃은 여름을 알려주는 꽃이다.
중간에 앉아 쉴 공간도 많고 우거진 숲의 그늘이 시원해 걷는 것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이제 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통일신라 758년 (경덕왕 17년)
국보 제99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김천 갈항사지 동ㆍ서 삼층석탑(1962), 金泉 葛項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경상북도 김천의 갈항사 터 동·서쪽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16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온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야외에 전시중이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 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밑면에는 5단씩의 받 침을 마련하였다.
기둥과 면석 등에는 정혈(釘穴)이 있는데 여기에는 금동판(金銅板)의 장식을 따로 부착하였던 자리로 추정된다.
두 탑은 규모는 크지는 않으나 조화로운 각부 구성을 보이며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았다.
한편 동탑의 기단부에는 758년(경덕왕 17)에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져 있어 제작연대를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탑처럼 2단의 기단부와 3층의 탑신부로 이루어진 탑이 일반적인 형태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 탑이 있던 길항사는 통일신라 초기 절인 감은사처럼 하나의 금당에 두 탑이 있는 배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글을 통해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영묘사 언적법사 세 남매가 이 탑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홍제동 오층석탑
고려 11세기
보물 제166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이 석탑은 서울 홍제동 사현사(沙峴寺) 터에 있던 탑으로
고려 정종(靖宗) 11년(1045년) 사현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새김법과 새롭게 유행한 탑신 받침의 덧붙임,
그리고 벽 테두리 장식 등에서 고려 전기 석탑의 조형미가 드러난다.
천수사 오층석탑
고려
하층기단(下層基壇) 덮개돌(갑석 甲石) 아래 부재는 없어졌다.
각각의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 처마에는 각 층마다 3단의 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풍경의 일종인 풍탁(風鐸)을 단 작은 구멍이 네 개씩 남아 있다.
탑 꼭대기 장식인 상륜부(上輪部)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고달사 쌍사자 석등
고려 10세기
보물 제282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1963), 驪州 高達寺址 雙獅子 石燈
두 마리 사자가 불발기집(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에서부터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여느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4면에 둥글넓적한 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아래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올라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남계원 칠층석탑
고려 11세기
국보 제100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1962), 開城 南溪院址 七層石塔
이 석탑은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 부근의 남계원 절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왔고
2005년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운 것이다.
전체적인 탑의 기틀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나 몸체가 되는 탑신의 층수가 많아지고,
추녀 끝에서 지붕 밑이 들려지며 전체적으로도 묵직한 조형 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점 등에서는
고려 석탑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 탑 안에서는 1283년(고려 충렬왕 9)에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는 쪽물을 들인 종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紺紙銀泥寫經] 일곱 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천수사 삼층석탑
고려
탑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는 2층 기단 형식이다.
탑신부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과 2층 탑신 아래에는 굄돌이 놓여져 있다.
지붕 처마 층단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지붕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탑의 꼭대기에 해당하는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 장식만 남아 있다.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2기
고려 1388년 (고려 우왕 14년)
보물 제358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1963), 原州 令傳寺址 普濟尊者塔
이 승탑은 고려시대 말기에 활동한 고승 보제존자의 묘탑으로 1388년(우왕 14년)에 세워진 것이다.
보제존자는 나옹화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이 탑은 강원도 원주시 영전사 절터에 있다가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이 탑은 일반적인 승려의 묘탑과 달리 석탑모양의 쌍탑을 이루고 있는데
이처럼 고려시대 말기에는 승탑도 석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조형에서는 짜임새 있고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보제존자 즉 나옹화상은 신륵사에도 보제존자석등(보물 228호)이 있는데,
제자들이 나옹화상의 사리를 나누어 영전사와 신륵사에 각기 묘탑을 세워 봉안한 것이다.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의 사리탑으로, 모두 2기이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는데, 보통 승려의 사리탑과는 달리 석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안흥사 오층석탑
통일신라 말~고려 초 10세기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탑신 높이는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며, 처마 밑 층단받침은 네 단인 5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섯 단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다.
탑의 세부 수법이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띠며,
균형 잡힌 비례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펴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인다.
미르는 용(龍)을 뜻하는 옛말로 박물관이 위치한 용산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미르폭포', '미르못', '미르다리'가 있는 박물관 정원은 우리의 전통조경을 엿볼 수 있도록 꾸민 공간이다.
미르폭포에서 조금 더 길을 따라 이동하면 용산가족공원으로 연결되어 이동할 수 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전시 관람 시작시간이 10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용산가족공원을 한바퀴 둘러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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