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광원/귀일원의 뿌리를 찾아서
- 화순 유적지 순례-
1. 이현필 생가
위치 :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권동부락)
2022년 11월 - 권동 이현필 선생 생가
이현필 선생 생가 - 2001년 사진
이현필(李鉉弼)은 1913년 1월 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권동)에서 농부인 아버지 이승노(李承老)와 어머니 김오산(金烏山)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64년 3월 18일 새벽 3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겸손과 순결의 영성으로 신행일치의 수도적 삶을 초지일관 추구하며 사랑과 섬김을 실천했던 구도자요 한국적 평신도 신앙운동의 선구자였다. 엄두섭 목사는 그를 가리켜 맨발의 성자요, 한국의 성 프랜시스라고 하였다. 그의 신앙을 따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가 동광원이다.
동광원 식구들은 이현필 선생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6ㆍ25동란에 허덕이던 민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고아, 걸인, 나그네 등을 돌보며 하룻밤 재워주기 운동, 십시일반 운동을 펼쳤다. 이현필의 고아운동은 사실 1948년 여순 사건 이후 늘어난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된 것인데 남원에서 훈련받은 이현필의 제자들이 광주로 진출한 후에 1950년 1월 광주지역 유지들이 모여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고 이현필 신앙운동에 참여한 정인세 광주 YMCA 총무가 동광원 원장을 맡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설립된 그해 여름 6.25 전쟁으로 수 많은 고아들이 몰려들어 한 때는 수백명을 돌보기도 하였다.
이현필의 신앙운동이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은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이현필의 영적 감화력 덕분이었다. 이현필의 영적 순결함으로 그가 가는 곳마다 부녀자, 청년 할 것 없이 가족을 버린 채 그를 따랐고, 그들 일행은 탁발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현재 전북 남원의 동광원 본원을 비롯해 화순, 광주, 벽제 등 전국 각지에 동광원의 분원들이 세워졌고, 제자들이 순결, 청빈, 순명을 원칙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2022년 11월 봉선동 귀일원
1954년 고아원이 폐쇄된 후 동광원 식구들이 광주 봉선동에 자리 잡고 살면서 오갈 곳이 없는 환우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60년대 중반에 동광원 식구들이 가진 모든 토지와 재산을 모아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귀일원에서 은퇴한 식구들이 늘어나자 남원으로 이동하여 동광원 본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일생을 바쳐 귀일원을 세우고 헌신하다가 은퇴 후에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 새로운 터를 닦고 시작한 곳이 남원의 동광원 본원이 된 것이다. 이렇게 현재의 기독교 동광원 수도원이 사실상 귀일원의 모태였던 것이다.
이현필의 일생을 볼 때 그 삶이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22세 때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는 서른 살 위인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로부터였다. 감리교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정경옥 박사는 이세종을 가리켜 “한국의 성인”이라고 신학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처럼 살았고 일제시대 당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 속에서 지냈다. 또한 밤에는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가까운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이세종의 성경공부반에서 이현필이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세종의 수제자가 되었고, 이세종의 인정을 받았다. “내가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 봤지만 내 말을 가장 빨리 이해하는 사람은 이현필 뿐이다.”하고 하였다.
이현필은 25세 때부터 28세까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면서 이세종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를 따르는 수도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는 30세 전후로 지리산의 오감산이나 서리내에 들어가서 깊이 기도하였다. 산에 깊이 파묻혀 금식과 말씀 묵상의 생활을 하였고, 이때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생활훈련을 시켰다. 장소는 남원에서도 몇 십리 들어가는 지리산 골짜기 서리내라는 곳과 그 앞산을 타고 내려오면 갈보리라고 불리는 동산이었다. 서리내에서 행해진 교육은 보름씩 산 속에서 행해졌으며 말씀과 경건훈련과 노동이 함께 이루어졌다. 갈보리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량이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들었다. 이현필은 특히 복음의 핵심으로 겸손과 순결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갈보리와 서리내는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식구들이 훗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현필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청빈과 검소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 자신 스스로 짚신과 고무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옷에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하루에 한끼도 먹지 않는 청빈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것이 그가 보았던 예수의 삶이었고 스스로 예수의 거룩한 삶을 본받고자 노력하며 본을 보였다. 그는 스승 이세종과 마찬가지로 식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였다. 그는 산중의 기도생활 중에서 겪은 여러 신비적인 경험에 대하여 일체 침묵하였고 오직 성경만 가르쳤다. 다만 산중의 기도 생활이 매우 은혜롭고 황홀했다고만 하였다. 그와 있으면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그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빈대나 벼룩마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때 교회나 지도자들이 이현필을 금욕주의자 또는 산중파라고 부르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찾아와서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길이 “이것이다, 바로 이 길이다!”하고 소리쳤다.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깨끗하게 가득 쌓인 흰 눈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수도하였다. 거룩한 삶, 수도의 길을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께 주신 은혜를 기뻐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아, 십자가!”하고 찬양 하였다.
거룩한 스승 이세종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이현필 역시 화학산 기도 3년, 지리산 기도 4년, 모두 7년이란 산기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애통하는 사람이 되었고 청빈한 수도자 프란치스코처럼 가난과 겸손의 거룩한 성자의 모습을 이루어 갔다.
이처럼 변화된 이현필의 주위에는 여러 훌륭한 인물과 명사들이 모여 들었다. 호남의 명사요,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서울 중앙 YMCA 총무요, 평화주의자로 20세기 종로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현동완 선생도 이현필을 방문하고 그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광주 YMCA 총무 정인세는 유도 2단에 덴마크 체조 교사이기도 했던 인물인데 YMCA를 그만두고 양복을 벗어버리고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이현필 운동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의 공자요, 작대기 철학자로 이름난 삼각산 도인 유영모 선생은 이현필을 사랑하여 한평생을 이현필과 교제하였고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자진하여 봉사하였다. 1946년 처음 만나서 이현필이 세상 떠난 1964년까지 한결같이 서로 존경하는 도의를 지켰고 진리와 구도를 향한 열정을 나누었다.
무학인 이세종과 초등교육도 제대보 못 받은 이현필, 이에 반하여 당대의 석학이요 스승이었던 유영모, 이들의 만남은 동광원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것이었다. 온몸으로 말씀을 실천했던 이현필과 온몸으로 말씀을 묵상했던 유영모의 만남은 동광원 영성, 한국적 기독교 영성의 새로운 길을 돌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15세에 연동교회에서 세례받은 교인이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교장이었으며 동경 물리대에서 수학한 과학자요 여러 동양 경전을 공부한 유명한 한학자였다. 다석 유영모를 존경했던 현동완 선생이 서울YMCA에서 연경반을 만들어 다석을 강사로 초빙하였다. 현동완 선생이 아니었으면 다석의 연경반 강의가 이뤄질 수 없었다. 다석은 연경반 강의를 통해 수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함석헌도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모가 이현필을 만난 것은 현동완과 정인세와의 관계성 속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