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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전교조 역사교사모임 참실대회가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원고이지만 이곳에 올려봅니다. 참! 그 자리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회원가입도 해주셨어요. ^^(파일 첨부는 사진 때문에 용량이 초과되어 안되네요. 편집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올립니다.ㅠㅠ)
내일은 사정이 있어서 아쉽게도 야유회는 참여를 못할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평화를 이야기하다 -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배주영(신광중학교)
1. 양금덕 할머니를 만나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 둘. 양동 시장 근처,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면 있는 반 지하 단칸방이 할머니의 보금자리다. 할머니를 알게 된 것이 꼭 1년 전이다. 광주인권영화제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영화 한편. 그 영화가 게으르게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 있던 나의 마음을 흔들었고 많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일제시대 강제징용 피해 사실이고, 공부의 대상이지, 특별히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위안부 문제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면도 있었다.(수업을 하다보면 그렇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더군다나 아픈 피해 사실이 덜 아프고 더 아프고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그것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내가 어떻게 얼만큼 받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 피해 당사자가 아직 그것도 이 곳 광주에 살고 계신단다. 그리고 그들의 일본정부와 회사를 상대로 한 싸움이 벌써 10년이라고 한다. 왜 그동안 몰랐을까? 할머니가 재판이나 소송관련해서 일본에 다녀온 것만 수 십번이고 그와 관련해 일본에서 광주를 찾은 것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한 일본인 변호사는 광주만 스무 번 넘게 다녀갔다고 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 자리에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우리 이웃에 대한 일에 철저히 무지했다는 부끄러움, 지금의 문제를 과거의 문제로만 외면했다는 부끄러움, 입으로만 얘기한 민주, 인권, 평화란 말의 부끄러움... 이것이 그 자리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후의 시민 모임제안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3월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조심스럽지만 당차게 시작되었다.
2. 전시 체제기 여성 노동력 동원과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과 그에 기초한 여러 법령을 통해 물자, 자본, 노동력을 전쟁에 동원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식민지 조선은 식량, 노동력, 병력의 공급지로 되었고, 조선인의 노동력 동원도 본격화 되었다. 일제는 노동력 부족이 심해지자, 남성노동력은 주요군수산업에 집중배치하고 보충이 필요해진 직종에 여성노동력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되었다. 식량 확보를 위해 농촌 여성의 동원을 강화하였고, ‘근로봉사’나 ‘근로 보국대’단위로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하기도 했다. 1944년에 ‘항공기 증산’을 위해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여성들을 군수공장에 본격적으로 동원하였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이러한 노동력 동원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인 여성만이 아니라 조선인 여성들도 각종 군수공장에 동원되었다. ‘근로보국대’, ‘여자근로정신대’, ‘학도 근로대’처럼 단체로 대(隊)를 지어 동원한 것은 작업 배치, 책임량 할당과 통제의 용이성 때문이었다.
이미 시행되고 있던 여자근로정신대 제도에 법적 근거와 강제력을 부여하기 위해,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근로령>(칙령 제519호)이 공포, 실시되었다. 대상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여성으로 제한하였으나 대상범위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자원’으로 가능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4월경부터 일본지역 군수공장으로 동원되었다. 14~16세에 동원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알선지도’에 따라 2년 기한으로 항공기제작공장, 방직공장, 기계제작공장 등지에 배치되었다. 현재 밝혀진 동원지는 후지코시 도야마 공장, 미쯔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쿄 아사이토 누마즈 공장 등이다. 일본 내 수요와 조선총독부의 협의에 따라 동원인원이 정해지면 도(道)별 할당이 정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원과정에서 드러나는 개입주체들은 학교(교사, 교장)와 지역 관공서(구장, 면직원, 군청 등 지방행정단위, 직업소개소, 경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주로 취업이나 진학 등의 유인책으로 어린 소녀들을 열악한 노동 현장에 투입 시켰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14~16세의 유년 노동자였음에도, 군대식 노동 규율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이는 작은 부상으로 이어졌으며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는 가운데 공포감과 배고픔마저 더했다. 나고야로 동원되었던 이들 중 6명은 지진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귀국 시 일괄해서 준다고 했던 임금 역시 대부분 받지 못했다.
해방이 되어도 이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귀국 후에도 끊임없이 일본에서의 경험을 의심하는 가부장적인 시선과 부딪혀 침묵하고 감춰야 했다. 한편 미쯔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되었던 생존자와 그 가족들은 일본 정부와 미쯔비시사를 상대로 1999년 재판소송을 시작하였다. <나고야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소송>은 일본변호인단과 시민단체의 지원 속에서 10여 년 동안 항소를 거듭했지만 2008년 11월 최고 재판소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3.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은 재판이 최종 패소 판정을 받고 결성이 되었다. 재판에 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고들 생각했는데, 그동안 소송을 전적으로 책임졌던 일본의 나고야 지원회는 도쿄 금요 시위를 통해 제 2의 투쟁을 계속해 나갔고 광주도 늦었지만 시민모임의 발걸음을 시작했다. 시민모임은 그야말로 평범한 시민들의 모임이다. 대학생, 교수, 목사, 기자, 시민단체 활동가, 학원 원장, 비정규직 노동자, 취업 준비생 등 직업과 연령도 다양하다. 어느 한분 하나 녹록치 않은 생활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각자 모임에 쏟아 붓는 애정과 열의가 대단하다.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득이 생기는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시민모임이 해낸 일을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시민모임은 오프라인에서 움직이고 있는 회원이 10여 명 남짓, 온라인 회원이 최근 200명이 넘었다.) 이 짧은 시간에 그런 일들을 해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1) 미쯔비시중공업(주) 사죄 촉구 서명운동
나고야소송지원회로부터 지난 5월 미쯔비시중공업(주)에 사죄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제안 받았다. 6월 말에 있을 예정인 미쯔비시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에게 미쯔비시의 잘못된 과거 사실을 알려 미쯔비시를 압박하고 여론을 환기시키자는 의도였다. 한국에서 건너온 서명이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민모임이
<서명 운동> 처음으로 한 일이다. 거리에서, 모임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2만 8천 여 명의 서명을 모아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6월 26일 서명용지는 일본 미쯔비시에 전달되었다.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서명을 권유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칫 무거운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에게 다가가 알려내는 일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귀기울여 들어주고, 가던 길을 멈추고 선뜻 서명을 해 주는 시민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소중하게 다가왔다.
(2)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공동 상영
재일 일본군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의 유쾌한 투쟁 이야기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를 몇몇 단체와 공동상영을 했다.
(3) 일본답사
<도난카이 지진 희생자 추모비> <나고야 인근 지하 군수공장 터> 미쯔비시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은 한국정부도 한국의 학자, 변호사들도 아니었다. 할머니들의 문제가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시민단체 <나고야 소송 지원회>(이하 지원회) 덕분이다. 광주를 수차례 직접 방문해 할머니들을 직접 보살피고 한국의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려내고 문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광주시민들이 나고야 시민들의 투쟁을 격려하고 연대의 결의를 다지는 것은 광주의 마땅한 도리라 생각했다.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3박 4일의 일정동안 군수공장 터, 지진 희생자 위령비 등 당시의 현장을 답사하고 도쿄의 금요 시위에 함께 참가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20여일을 일본에서 더 머무르며 일제 강제 징용 피해지역과 원폭 투하지역을 답사했다. 비단 과거 역사의 문제만이 아닌 피해자 문제를 넘어 역사의 아픔을 통해 배우는 진정한 의미의 반전 평화에 대해 고민하고, 앞으로의 연대를 약속하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4) 미쯔비시 자동차 개장 1인 시위
광주에서 미쯔비시 자동차 판매점이 문을 열었다. 서울, 부산에 이어
<1인 시위를 하고 계신 양금덕 할머니>
인천과 광주에 문을 연 것이다. 과거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한마디 사과도 않는 무책임한 전범 기업이 피해자가 살아있는 광주에 문을 연 것이다. 시민모임은 이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판단했다. 무엇인가 강력한 행동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지난 10월 5일부터 미쯔비시 자동차 판매점 앞에서 1인 시위가 시작됐다. 시민모임 회원도 얼마 되지 않은데 하루 이틀도 아닌 1인 시위가 과연 가능할까 우려스러웠지만 이 일이 광주 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년이면 경술국치 100년이다. 시민모임은 아직 일제 시대의 문제가 끝나지 않은 현재의 문제임을 환기시키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이에 ‘아직 오지 않은 해방 다시 일제강점기를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3차례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10월 29일 첫 번째 강연에서는 근로정신대 피해자이신 양금덕 할머니께서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때로는 눈물을 적시며 해주셨다. 할머니께선 ‘아직 나는 해방을 맞이 하지 않았다’ 말씀하셨다. 11월 3일 두 번째 강연은 친일문제에 대해 전문가이신 정운현 님의 강연이 있었다. 11월 10일 마지막 강연은 일본을 오가시며 일제 피해자 관련 소송을 해오고 계신 최봉태 변호사의 강연이 있었다. 법적으로도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이며 꼭 해결해야할 문제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조목조목 짚어주셨다.
(6) 학생독립운동 80주년 기념 전범기업 미쯔비시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광주 학생 촛 불 문화제
올해는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80년 되는 해이다. 학생들은 늘 불의한 시대에 가장 순수하게 저항하는 세력이었고,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던 계층이었다. 비록 지금의 학생들은 과거에 비해 오히려 주체적인 존재로서 존중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의 옳은 것에 대한 추구와 부당한 것에 대한 저항은 오히려 표출 될 곳을 찾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지나간 사실로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문제의식으로 돌리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판단했다. 학생독립운동기념 광주 학생 촛불 문화제를 기획했다. 11월 3일 무척이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80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참여해 연극을 통해, 편지를 통해, 삼행시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
다음은 당시의 학생들이 결의한 <우리의 요구>이다.
- 우리의 요구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80년 전 우리의 선배들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교육에 맞서 온 몸으로 뜨겁게 외치고, 용감하게 일어섰습니다. 다시 80년 후 오늘 이 자리에 광주 청소년들이 모였습니다. 끝없는 경쟁논리에 학교 공부에 치이고,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히며 살고 있지만 오늘만은 세상을 이야기 하고자합니다. 교과서 속의 죽은 역사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살아있는 역사를 이야기 하려합니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 수 있게 해주고 공부를 시켜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13~4살 소녀들을 끌고 가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그 피해 당사자가 청소년이었습니다. 당시 근로 정신대원들은 열악한 노동 현실에 많은 고통을 당했고 정당하게 일한 노동의 대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단지 과거의 지나가 버린 일이 아닙니다. 해방 후에도 64년을 살아내야 했던 피해자들이 할머니가 되어 살아계십니다. 그 분들에게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린 청소년들의 노동 착취를 통해 전쟁 물자를 만들었던 기업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피해 당사국 대한민국은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지 못했습니다.
청소년은 부당하게 노동에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땀 흘린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전쟁 수행으로 축적된 부에 대한 반성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이고 역사입니다.
잘못 채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바로 채워야 합니다. 바로 잡지 못한 역사는 언제고 부메랑이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으로 일어난 비극을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한 과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해야합니다. 이에 여기 모인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우리의 요구․
하나. 미쯔비시는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진심어린 사죄와 합당한 배상을 하라!
하나. 대한민국 정부는 해결되지 않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적극 나서라!
하나. 땀 흘린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를, 노동인권 보장하라!
하나. 세상에 필요한 전쟁은 없다. 모든 전쟁을 전면 반대한다
(7) 근로정신대 사진전
11월 3일 광주일고를 시작으로 근로정신대 관련 사진전을 열고 있다. 근로정신대 문제를 널리 알리고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앞으로 곳곳에서 장기적으로 사진전을 열어갈 예정이다.
(8) 10만 명 서명운동
시민모임은 다시 10만 명 서명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내년이면 한일병합 100년이다이미 많은 피해자들이 여생을 달리했고, 아직 생존해 계시는 80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광주에서도 지난 7월 25일 김혜옥 할머니가 7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무리 하셨다. 어쩌면 이들은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한 서명운동이다.
(9) 도쿄와 서울의 금요시위
<서울의 금요시위> <도쿄의 금요행동>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수요시위를 한 것이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일제시대 강제 징용 피해자들도 지난 1월부터 서울 미쯔비시사 앞에서 매주 금요일 금요시위를 시작했다. 또한 2년 전부터 도쿄에서는 나고야소송 지원회를 중심으로 도쿄 미쯔비시 본사 앞에서 금요행동을 하고 있다. 아직 미쯔비시사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지만, 도쿄와 서울 그리고 광주를 잇는 이러한 행동이 분명 사람들과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있으리라 믿는다.
4. 평화의 길
시민모임 회원이신 교장 선생님은 “일본국의 과거사에 정직하고 철저한 반성과 회개”를 요구하는 격문을 하토야마 총리에게 보내셨다. 일본의 확실한 과거사 청산이 “우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평화를 사랑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시민, 일본국의 민주시민에게 세계 평화와 인류공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셨다. 일본이 진정으로 동아시아 평화를 바라고 인정받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당당히 요구하셨다. 일제하 관련 소송을 담당했던 최봉태 변호사는 근로정신대문제는 비단 과거 식민지 백성과 지배국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현재의 문제라 했다. 이것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백성으로 태어나 일제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의미에서 민족문제이다. 또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상급학교로 보내준다는 감언이설로 속였다는 점에서 계급의 문제이다. 나아가 과거노동자로서 그 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문제이며 특히 가부장제사회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때문에 귀국 후 이중 차별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여성문제이자 인권문제이며, 전쟁과 관련된 피해라는 점에서 반전평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유의미한 운동인 것이다. 이것은 시민모임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할머니들을 보살피고 보듬는 것과 더불어 단지 고생한 할머니들이 짠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평화라는, 어찌 보면 너무 흔해 가벼웠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낯뜨거운 낱말이 올해처럼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영상을 보며 수업을 할 때도, 아이들이 쓴 편지를 볼 때도, 일본에서 발에 물집이 잡혀가며 산모기 뜯겨가며 이름 없는 무덤들을 살필 때도, 미쯔비시 자동차 앞에서 쑥스럽게 1인 시위를 할 때도, 학생 촛불문화제 때도 생각이 나는 것은 평화였다. 고요하게, 평온하게 있는 것이 평화가 아니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보장되지 않는다면 치열하게 싸워 이겨내야한다. 그래야 우리 곁에 평화가 오는 것이다.
법정에의 결론으로 이미 진 싸움이라고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가능성을 보고 시작하진 않았다. 이것이 옳은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지금 일본 니시마츠사는 중국인 강제징용자들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와 보상을 결정했다. 일제피해관련 문제에서 늘 발목을 잡고 있는 한일협정 일본 측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이 일본에서 진행 중이다. 일본 측의 문서가 공개된다면 문제는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 예측한다.
운동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 운동의 흐름에서 우리 역사교사모임이 적극적으로 함께했으면 한다. 아니 그래야한다. 근로정신대 문제는 역사의 문제이고 현재의 문제이다. 특히나 14살 어린 학생들을 일본으로 가게 한 당사자가 학교 당국이었고 교사들이었다. 역사 문제이고, 교육의 문제이다.
<열 네 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 영상 학습지
일제시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중노동을 강요당해야 했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1. 양금덕 할머니가 나주 초등학교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2.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1941년 진주만 기습을 단행하며 확대된 전쟁을 무엇이라 하나?
3. 조선여자근로 정신대란 무엇인가?
4. 광주,전남지역에서 끌려간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갔던 일본의 대표적 공업도시와 그 곳에 있었던 일본최대의 군수회사는 무엇인가?
도시:
회사:
5. 그 곳에서 소녀들의 생활은 어떠하였나? 강제로 끌려간 소녀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6.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전쟁에 대해 항복선언을 함으로 전쟁이 끝난 시기는 언제인가?
7. 해방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근로정신대원들의 삶은 어땠을까?
8.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피해보상 관련 소송을 도와주고 있는 일본의 시민단체는?
9. 이들은 일본인인데도 불구하고 왜 할머니들을 도와줄까?
10. 1999년 3월, 미쯔비시와 일본정부를 상대로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손해배상관련 소송 재판 결과는? 또한 판결의 근거는?
재판결과:
판결의 근거:
11. 도쿄금요행동이란?
12. 지금 이곳, 남은 우리들이 해야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학생활동으로 영상을 보고나서 나고야지원회에게,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씀. 나고야지원회 편지는 일본에 전달되어 8월 15일 전후로 열린 <아이치현 전쟁과 평화전>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원본과 함께 전시되고 할머니에게 쓴 편지는 양금덕 할머니에게 드림.
<나고야 지원회에 보낸 편지>
<할머니에게 드린 편지>
11. 3 학생독립운동 기념 광주 학생 촛불문화제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학생들에게 행사를 안내하고 참여 희망자를 받았다. 20여명의 학생들이 신청했고, 학생들의 제안으로 그 시대를 재연하는 짤막한 연극도 준비했다. 앞서 무대에 나가기 쑥쓰러운 학생들은 집회에 필요한 피켓을 만들고, 할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를 준비하기도 했다.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연극>
<촛불 문화제 모습>
<학생들의 소감문>
3-1 조화빈
학교 수업 시간에 조선근로정신대에 대해서 영상으로만 보고 이야기로 듣기만 했는데, 막상 집회에 참여하게 되자 조금은 두렵고, 무섭게도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집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황을 했었다. 그 동안 내가 봐왔던 집회는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지금 이곳에 모인 인원은 약 50명도 되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실망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집회는 추운 날시 속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미쯔비시 차 타지 말고 BMW 타고 다니자.”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이 구호가 왜 그렇게 웃긴지... 그 다음은 조선근로정신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우리가 준비해온 무언극과 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읽어주었다. 또 그 자리에서 미쯔비시라는 단어로 만든 사행시도 발표하고 선물도 받았다. 그런데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계시던 양금덕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나와 얼굴에 흐르는 모습에 나는 무언극에 집게 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다시한번 그때의 조선근로정신대였던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그 때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자 나도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무언극에 집중했다. 또 혜리가 쓴 편지를 낭독할 때에는 어찌나 안쓰럽게 우시던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다음엔 정말 해보고 싶었던 촛불집회도 하고 사물놀이와 함께 미쯔비시가 물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회사 앞을 돌았다. “미안하다”는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비록 재판에서는 졌지만 일본에서도 아직 양심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할머니를 돕고 있는데 무관심한 일본 정부와 덮어버리기만 하는 우리나라 정부가 정말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벌써 재판에서 진 뒤 1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양금덕 할머니께서는 “악착같이 살아서 꼭 사과를 받겠다!”고 하셨다. 정말 이제 더 이상은 사과를 받지 못한 체 돌아가시는 할머니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에 또 집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50명이 아닌 500명, 5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모두 할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서 외로우신 할머니들의 작은 위로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고 아픈 역사인 만큼 제2의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적어도 근로정신대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값진 것을 배워 정말 행복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정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 일본이 빨리 할머니들에게 잘못을 사과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는 우리의 가슴에 상처는 내는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3-1 서동민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활동에 참여했다는 게 정말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시위에 나가서 부당한 일에 대해 소리치고 항의했던 게 정말 인상 깊고 보람있는 일이었다. 그런 곳에 가서 연극을 했는데 연습을 많이 못하고 가서 연극이 약간 미흡하고 못했던 거 같은데 아쉽다.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양금덕 할머니를 뵙게 되었다. TV에서 보던 분을 실제로 보게 되어 신기하기도 했고 우시는 모습을 봤는데 내 마음도 좋지 못했다. 우리 나라의 역사가 조금 꼬인 탓에 아무 잘못 없는, 그 시간 때 쯤이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쉬고 계셔야할 한 분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나와계시니 안타깝고 그랬다. 앞으로 우리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이런 잘못된 일들을 고쳐나가야할 필요를 느꼈다. 얼른 미쯔비시사가 잘못을 뉘우치고 지금이라도 보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3-2 허치인
저는 어느 때와 같이 국사수업을 받는 도중 선생님께서 미쯔비시 중공업 광주지점 앞에서 열리는 일종에 시위 같은 것에 참가해 볼 사람을 신청을 받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난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당연히 손을 들었다. 그래서 그 시위에 참가 하게 되었다. 미쯔비시 할머니들은 이 시위에 참가하기 전에도 미리 동영상으로 생활을 눈에 보았다. 정말 불쌍하신 할머니들이다 일제한테 돈 한 푼도 받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하시고 계셨다. 그래서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할머니들을 위해 힘이 조금이라도 보태드리고자 참가 하는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극을 하기로 됐는데 일제가 할머니들을 차별하는 것에 대한 연극이었다. 무언극에서 나의 역할은 나레이션을 하게 됐다. 난 떨리는 마음으로 할머니들께서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 ? 다른 학교학생들이 봤을 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까 ? 많이 걱정했지만 모두 알아들은 눈치들이었다. 처음에는 무언극 때문에 떨려서 우왕좌왕 했지만 다시 한번 미쯔비시를 보니 어이가 좀 없었다. 광주시청 앞에 떡하니 차를 가져다놓고 파는 것이다. 다른 학교에서 막 연설을 하는데 정말 진심어린 마음으로 따라서 했다. 미쯔비시 물러가라 ! 미쯔비시 타지 말고 BMW 타고 살자 !!정말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해가 떨어질 무렵 촛불들을 나눠 주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미쯔비시를 비판 하는 미쯔비시 4행시도 발표하고 친구가 중앙에 나와 미쯔비시를 비판했다. 그리고 양금덕 할머니를 실제 눈앞에서 보게 됐는데 우리한테 고맙다고 우시는 것이다. 정말 눈물이날 정도로 슬펐고 양금덕 할머니께 힘내라는 말밖에 해드릴 수 없었다. 나는 그시위에 참가한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 시위에 참가해서 양금덕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힘을 내셨다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양금덕 할머니들 말고도 다른 할머니들도 끝까지 미쯔비시에 대항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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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실천속에서 자신이 지켜봐 온 시민모임 활동에 대해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많은 선생님들한테 소개될 기회도 갖고 고생하셨습니다.
생생한 기록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