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그레이스 / 황선영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진짜로, 내가? 정이랑 지아는 어찌 됐냐고 물었다. 나 걔네보다 공부 잘하는데. 대학도 아니고 고등학교를. 이런 일도 있다는 걸 어디서 어렴풋이 듣긴 했지만 실제 본 적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 최초인가? 창피해 밖에 나갈 수가 없다. 학교도 안 가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두 밤을 그러고 있었다. 지치고 배가 고프다. 초코파이 하나를 까먹으려는데 전화가 왔다. 담임이다. 어디 구석에 있는 여상에 원서를 냈단다. 울며 다시 이불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와 이불을 확 걷는다. 된장국에 만 밥을 입에 억지로 떠 넣었다. 내가 먹겠다고 밥그릇과 수저를 받아 들었다. 할머니는 귤을 깐다. 다 먹고 피아노로 가 앉았다. 악보를 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엄마가 돈 벌러 서울로 가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피아노를 보내왔다. 열두 살 겨울이다. 이 거대한 악기가 어떻게 저 작은 문을 지나 쪼끄만 방에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아저씨 두 명이 묘기를 부리 듯 집어넣었다. 신기하다. 먹을 쌀도 부족한 집구석에 피아노라니. 할머닌 엄마한테 '정신 나간 년'이라고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내게 무슨 음악에 소질이 있다거나 갖고 싶다고 조른 일도 없다. 4학년 여름 방학에 면소재지에 있던 피아노 학원에 다니긴 했다. 선생님은 딱 한 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하네."라고 말했다. <<바이엘 상>> 중간쯤 쳤을 때 학원이 문을 닫았다. 도시로 이사 간단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가만히 '도, 레, 미, 파 솔.'을 눌렀다. 소리가 맘에 든다. 선생님이 떠나면서 준 피아노 책을 폈다. 명곡을 간단하게 편집한 소곡집이다. 천천히 오른손 음만 쳤다. 재밌네. 아빠도 엄마도 없는 외딴집. 바람이라도 불면 텔레비전도 안 나왔다. 흙 마당에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양말을 잘라 인형 옷을 만들기도 하고. 심심한 나에게 소리를 내는 친구가 생겼다. 교회에 가면 반주자 손만 봤다. 이 반주자는 찬송가 405장을 느낌 있게 잘 쳤다.
'부기 학원'이란 델 갔다. 여상에 가면 이런 걸 배운다기에. 자산이 어떻고 부채가 어떻고 하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뭐야, 이것도 산수인가? 더하고 빼고, 이런 것 질색인데. 학교를 졸업해도 취직할 수 없을 것 같다. 남의 재산 계산하는 데 인생을 바치기 싫다. 할인을 해 준다기에 두 달치 학원비를 미리 낸 터였다. 돈이 아까워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다녔다. 흥미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남의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원장님을 찾아갔다. 그만 다니고 싶다고, 환불해 달라고 말했다.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도 눈을 떼지 않고 선생님을 봤다. "꿈이라도 있는 거니?" 으레 써내는 장래희망 칸을 채우려 무언가 적긴 했지. 교사, 기자, 승무원 이런 것. "피아니스트요." 어디까지 쳤냐고 묻는다. "체르니 30번이요." 책상 서랍에서 8만 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피아니스트라. 하하. 너무 웃기다. 그런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깜찍한 말이 나왔는지. 오른손 음을 완벽하게 칠 수 있게 됐을 때 찬송가 뒷면에 나온 코드표를 보며 왼손 화음을 연습했다. 나는 그냥 그 반주자처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노래를 느낌 있게 치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배워 거짓말 한 것을 만회해 볼까? 8만 원을 들고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 "전공하긴 늦었겠죠?" 넌지시 물었다. 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부기 학원 원장님과 같은 말이다. 어디까지 배웠냐고. "<<바이엘 상>>이요." 손가락이 나무젓가락처럼 길고 하얀 선생님이 웃는다. 나도 웃었다.
첫댓글 마지막이 참 맘에 듭니다. 8만원을 들고 피아노 학원에 간 에피소드요.
이젠 느낌있게 잘 치시겠네요. 어메이징 그레이스.
느낌만 있어요. 하하하. 친구들이 그랬어요.
엄마한테 돈 달라 말을 못해서
8만 원, 한 달 배웠네요.
쉽고 재미있게 써 주셔서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글의 제목을 보는 순간 가끔 혼자 건반을 눌러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옛기억을 소환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환불해 달라는 당찬 용기 부러웠습니다.
선생님도 건반을 좋아하시는 군요.
피아노를 양손으로 화음 넣어서 치고 싶어 연습하고 있는데 고모하고 고모부가 자기 딸 그러게 하려고 피아노 학원을 얼마나 보낸지 모른다며 웃었어요. 여동생하고 젓가락 행진곡만 열심히 연습했어요. '어메이징 그레이스' 멋있네요.
하하. 맞아요. 자기가 좋아해야 빨리 늘더라고요.
선생님 젓가락행진곡 들어보고 싶네요.
고마워요!
@황선영 여동생이 잘 치고요 저는 옆에서 보조했어요. 다 잊어 버렸어요.
하하, 순간의 거짓말로 돈을 돌려 받았군요. 순발력이 대단해요. 매번 말하지만 황선영 선생님은 글을 재미있게 쓰는 재주가 있습니다.
전 선생님이 말해 주셔서 글쓴이의 기지를 이해했어요. 고맙습니다.
글을 읽고 어메이징그레이스를 유튜브로 들었어요. 아주 좋네요. 글도, 음악도.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매번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글쓰기 고수네요.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지죠? 알겠습니다.
교수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말하듯이 글쓰기' 고수네요.
선생님 재능 나누셔야.1호 제자로 등록합니다.
강진으로 출퇴근 할까요? 헤헤.
고맙습니다. 정말 힘이 되요.
하하하! 재밌네요. 당차게 학원비 돌려받는 선생님이 참 멋있네요.
저 원래 그런 성격아닌데. 그냥 조용히 안 가고 말았을텐데. 저 땐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이번 주 글을 쓰기 위한 치밀한 계획일지도. 하하.
어메이징 그레이스니까요.
정말 선생님 글 으메이징 합니다. 너무 좋아요.
으째 이라십니까. 저도 곽주현 선생님처럼 대충 썼습니다. 하하하.
또 역시네요. 단번에 휘리릭 읽었습니다. 당차셨네요.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