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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유명한 문사 20명을 골라 경연을 겸하고, 모든 문한의 일은 모두 다 위임하였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밤늦게 서야 파하였는데, 일관이 시간을 알린 후에야 나갔으며, 조석 식사는 내관으로 하여금 손님 대접하듯이 하니, 그 융숭하게 대접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어 가며 서로 권면하여서 뛰어난 재주 큰 선비가 많이 나와서 문원에 유명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조는 병자난(사육신사건) 때에 집현전을 파하고, 문신 수십 명을 골라 예문이라고 겸칭하며 날마다 불러들여 의논하고 생각을 하였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을 설치하고, 본관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매양 선온을 주고 승지를 불러 모아서 같이 마시게 하였고, 또 많은 노비를 주어 심부름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또 조예들로 하여금 모두 은패를 차게 하였다.
게다가 용산강 가에 별당을 짓고 관관을 분번하여 독서하도록 하였고, 또 상사(3월 3일)와 중양 가절에는 주악을 주어 교외에서 유흥으로 즐기게 하였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으로 이름난 자는 세종 때의 성대함만은 못하였다. 《용재총화》 이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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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오로지 불공과 반승(중에게 밥 먹이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우리 태종이 비록 사사 노비를 혁신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으레 공경이나 선비의 집이라도 빈소에는 중들이 모여 앉아 불경을 읽었는데, 이것을 불석이라 하였고, 또 산사에서는 칠칠재를 지내는데, 부자는 다투어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관례에 의하여 갖추어 베풀므로 물과 곡식을 소모함이 심히 컸었다.
또 친척과 붕료들은 포물을 가지고 와서 시주하였는데, 이를 식재라고 하였다. 또 기일에는 중을 맞이하여 먼저 밥을 먹인 뒤에 혼을 불러 제사 지냈는데, 이것을 승재라고 한다.
성묘는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모든 불사에 대해 다 고치면서 그 폐단을 극언하였다. 이로부터 사대부의 집에서는 법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비록 상사와 기일을 당하여도 다만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할 뿐이고, 중과 부처를 공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습하고 폐하지 않는 자는 오직 무뢰한 백성들이었으니, 이들도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 도승의 법을 엄하게 금하여, 주군에까지 단속하여 중으로서 첩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속세로 돌아오게 하니, 안팎 사찰이 모두 비게 되었다. 물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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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를 설치하고 관관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아뢰어 존경각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 이극증이 아뢰어 전사청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을 두어 관중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유림)의 성사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과 어주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과 선사에게 제사 지내고 물러와 하연대에 마련한 장전에 앉으니, 문신 재추가 모두 전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 문신들은 뜰에 열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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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이 영락(명 성조의 연호) 원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을 널리 보아야하는 것인데,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으므로 중국의 서책은 드물게 이르고, 이미 있는 판각은 닳아 없어지기가 쉬우며, 또 천하의 글을 모두 판각으로 하기도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로 본떠 주자를 만들어서 글을 얻는 데 따라 인쇄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고주》ㆍ《시경》ㆍ《서경》ㆍ《좌씨전》의 자본으로 주자를 만드니, 이것이 주자의 시초인데, 그 이름을 ‘정해자’라고 하였다.
세종이 또 경자년에, 주자가 글자가 크고 고르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개주하니, 그 모양이 작으면서 바른지라 이로부터 인쇄하지 않은 서책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경자자’라고 하였다.
또 갑인년에 위선음즐 등서의 자를 본으로 하여 주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큰 편이나, 자체가 매우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의 대자를 쓰게 하고, 드디어 연을 주조하여 주자를 만들어서 강목을 인쇄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이른바 “훈의”라는 것이다.
임신 연간에 문종이 경자자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임신자’라고 한다. 을해년에 세조가 임신자를 녹여 강희안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그 후 을유년에 원각경을 인쇄하고자 정난종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자체가 바르지 못하였다. 그것을 ‘을유자’라고 하였다. 성종 신묘년에 왕형공과 구양공의 문집을 자본으로 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면서도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을 ‘신묘자’라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신판 《강목》의 자본을 얻어 주조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축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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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묘가 폐비 윤씨를 사사하면서 그 전지에 이르기를,
“윤씨는 그 성질이 본래 흉험하며, 인륜에 어긋난 불순한 행실이 많다. 지난번 궁중에 있을 때에 날로 포악함이 심해지고, 이미 삼전(정희왕후ㆍ소혜왕후ㆍ안순왕후)에 불순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방자하게 과인의 몸에 흉처를 내고, 노예같이 대우하는가 하면, 지나칠 때는 족적(자손인 듯)을 삭거하겠다고까지 악담을 한다.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논할 것도 못 된다. 심지어는 역대모후가 어린 아들을 내세우고 정치를 마음대로 한 것을 보고 스스로 기쁨으로 여겨서 항상 독약을 지니고 다니면서 혹 품속에 품고 다니고, 어느 때는 상자에 감추어 두곤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자기가 꺼려하는 자만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과인의 몸에도 해를 끼치려함이다. 또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이는 무도한 죄이다.
종사에 관계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대의로 차마 끊지 못하고, 다만 서인으로 폐하여 그 친정집에 있게 하였던바, 이제 외인들이 원자가 점차로 자라남을 봄으로써 전후의 분규되는 일이 대부분 이것으로 말썽이 될 것이다. 비록 당시에 있어서는 깊게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후일의 화는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흉험한 성질로써 후일 위복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여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니, 한의 여후와 당의 무후의 화를 머리 들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일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일찍 대계를 정하지 못하였다가 국사가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서 내가 실로 종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구익부인은 죄가 없어도 한 무제가 오히려 만세의 계책을 세웠는데, 항차 이같이 흉험하고 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고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사사하였으니, 종사대계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소문쇄록》이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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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인년 10월 4일에 당양공주가 죽었는데, 예조에서 아뢰기를,
“공주가 죽어서는 조시를 정지하는 일이 없다.”
고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하루의 조회를 정지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사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송 나라 장공주가 죽었을 때에 5일의 조회를 정지한 일이 있다.”
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같을진대 지금이라고 어찌 그렇게 아니 하리요.”
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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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명나라 헌종의 연호) 계유년 5월에 경상 감사가 예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영해부(지금의 경북의 영덕군)에 지화가 났는데,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화광이 있으며, 나무를 던지면 불이 일어난다. 길이가 8척이요, 넓이가 20척이나 된다.”
고 하였는지라,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를 상고하게 하니,
“진의 혜제 원희 연간에 지연이 있었고, 조의 석호와 후진의 부견 때에, 그리고 당의 정관 때에 백주(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지화가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영해에서 이 같은 해염이 있었으며, 또 문종 때에는 상주에서 지화가 있었다.”
고 하는지라, 내신 이효지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불에 탄 석괴를 가지고 왔는데, 숯같이 검으며, 불에 넣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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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진년 9월에 봉상시에서 김양경의 시호를 올렸는데, 공위공ㆍ편숙공 그리고 제극공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물으니, 대답하기를,
“김양경은 평소에 마음이 치우친 병통이 있었으므로 시호 역시 그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과 윤계겸의 시호를 정할 때에 고치고자 하였으나, 후폐가 있을까 두려워서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정직한 사람이 그 붕우들의 사사 청탁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모두 그 마음을 편급하다고 하며, 조의 또한 쏠리듯 따라가니, 정직으로써 편급의 시호를 얻는 것을 어찌 옳다 하겠는가. 내가 이 시호를 고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하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봉상시에서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어찌 편급하다고 칭호하겠습니까. 대개 편급으로 득명한 자는 그 부당한 일을 가지고 편벽되게 고집부리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김양경의 편급한 병통은 생각하건대 공론이 모두 그러한 것 같으니, 이제 만일 고쳐 정하면 후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봉상시에서 의진한 6자(공위ㆍ편숙ㆍ제극) 중에서 임금께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공숙공이라고 어필로 써서 내렸으니, 일에 공순하게 하고, 위에 봉공하는 것을 공이라 하며, 마음가짐이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이라고 한다.
갑진년 11월에 봉상시에서 이계손이 시호를 의진하였는데, 장경공과 정헌공이라 하였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장이라 하고, 뜻 이루기를 힘쓰지 아니함을 정이라고 한다.
김 문간공이 마침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이계손은 영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과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회기불권은 김구와 김말 같은 사람에게 타당합니다. 이계손으로 말하면, 감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진흥시켰을 뿐이고, 스스로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같은 시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계손은 사람됨이 재상의 체모가 있어서 선인군자입니다만, 장 자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른 좋은 시호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술의불면도 맞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일찍이 죄를 얻어 귀양간 일이 있으므로 정 자는 불가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경헌공이라고 써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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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명나라 헌종의 연호) 병오년에 직제학 김흔은 그의 외증조되는 성개가 쓴 위징의 십점소를 드리면서 아울러 규경을 삼으라는 차자를 올렸더니, 임금은 전에 입었던 흰 비단 첩리(속옷)와 흑서피(서는 쥐와 같다.)의 신을 주고, 또 금전지에 손수 쓴 글을 보냈다. 그 글에
“전번에 보내준 차자와 위징 소축은 깊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의 시귀가 된다. 일찍이 그대의 부친이 그대에게 권면하기를, 위 정승으로 자부하도록 하였고, 그대가 또 나에게 권하여 당우와 같은 정치를 하라고 하니, 이는 아비는 그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현숙하지 못하나, 어찌 그를 감히 잊으리오. 그대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서 상주어 표창하니, 항시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라.”
고 하였다. 그 글씨는 혜정하나, 굳이 취할 바가 없었으나, 김흔은 공조 참의로, 그 아버지인 김우신은 단양 군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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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 빈을 납궁하였는데, 아침부터 풍우가 심하게 이는지라, 그 빈부인 좌참찬 신승선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속은 혼일에 풍우가 있는 것을 꺼린다고 하나, 무릇 바람으로써 동하게 하고, 비로써 윤택히 하여 만물이 자람에 있어 풍우의 공이 아님이 없다.”
라고 하였다. 전하여 듣는 것이므로 비록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로 제왕의 말이로다. 정오부터 날씨가 개고 청명하였다. -충민공 《잡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