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디엠(Carpe diem)
2년 만에 화순 세량지에 다녀왔다. 봄에 사진사들에게 인기 만점인 곳이라 했다. 벚꽃과 호수에 비친 그림자를 담으려는 이들이 줄을 선단다. 숲 해설가 동기 모임에 이런저런 핑계로 참석하지 못했는데 모처럼 시간이 맞았다. 점점 시들해지는 모임이라 광주까지 가기도 망설여졌는데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를 일이어서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마침 진도에서 오는 이의 차도 얻어 타고 갈 수 있었다. 그이도 오랜만이어서 목포에서 만나 점심 먹고 출발하자고 했다. 기꺼이 지갑 열 수 있는 지인이 있다는 거에 고마움을 느끼며 맛있게 먹었다. 다른 선생님이 따뜻한 커피로 행복을 보탰다. 이 가을이, 내 곁의 사람들이 화사하게 빛나는 오후를 선사했다. 셋이 시끌벅적 이야기꽃을 피우며 가니 화순에 금방 도착했다.
다섯 명이 사부작사부작 걸었다. 도토리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 요즘에는 주워가는 사람들이 없나 보다. 아직 나뭇잎은 새파란데, 땅바닥에 뒹구는 참나무잎과 도토리만이 가을을 알린다. 누리장나무 남색 열매가 새빨간 꽃받침 위에서 보석처럼 빛나 눈길을 끈다. 걷다 보니 유독 오동나무가 많이 보인다. 저걸로 과연 딸 시집보낼 수 있을지 잠시 설왕설래해 본다. 길옆 둔덕에는 흙이 흘러 내려 뿌리가 다 드러나 위태롭게 서 있는 나무들도 있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아 애처롭다. 어느 쪽 뿌리에 더 힘을 실을까 가늠해 본다. 노란 산국과 하얀 까실쑥부쟁이만이 황량한 길을 밝혀준다.
우리 모임의 회장님은 중학교 교사로 정년 퇴임했다. 그는 꾸준히 마라톤을 뛰고 있고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는 취미 부자이기도 하다.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해서 언젠가 글쓰기를 같이 하자고 한 적도 있었다. 세밀화를 아주 잘 그렸는데 목디스크로 쉬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디카시(디지털카메라로 사진 찍고 거기에 짧은 자작시를 넣는다고 한다.)’를 배우고 있단다. 두 편을 출품해야 한다고 사진을 보여준다. 이제는 나무도 나보다 훨씬 많이 안다. 정년 뒤의 삶을 놀랍도록 여유롭게 즐기며 산다. 아마도 평생을 열심히 일한 덕분일 게다.
세량지를 한 바퀴 돌고 나니 해가 기울어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저녁 예약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공원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쉬었다. 두 사람은 나보다 연장자인데 유연성이 뛰어나, 여러 동작을 선보이기에 마음껏 웃었다. 맛있는 저녁까지 먹고 나서야 근처에 장례식장에 들를 생각을 했다. 동기의 부친상이 있었는데 마침 같은 지역인 화순이었다. 일부러는 오기 힘들어도 이왕 이렇게 오고 모였으니 들여다보자고 다시 차를 돌렸다.
노곤해진 몸이 졸음을 불러왔다. 내일도 산에 가기로 해서 글 쓸 시간이 없다. 어떻게 할까?그냥 건너뛸까? 에라 모르겠다. 걱정은 되지만 두통을 핑계 삼아 소파에 누웠다. 게으름을 만끽하는 내 장기를 살리며 습관처럼 채널을 돌리는데 이비에스(EBS)에서 ‘세계의 명화’를 방영하고 있었다.
<<스위트 노벰버(Sweet November)>>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일밖에 모르는 남자 넬슨과 말괄량이 여자 새러가 우연히 만나 사랑을 키워나가는 이야기다. 한 달을 주기로 남자를 바꾸는, 기괴하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녀의 연애 방식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너무 적극적이고 반협박적인 동거 제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성공이 무너지고 여자 친구의 결별까지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일에 쫓겨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그녀와 함께하며 알아간다. 그러면서 둘은 지상 최고의 행복을 만끽한다. 하지만 여자의 불치병은 사랑의 상처를 낳는다. 여자가 시간이 없어 하는 이유가, 꼭 11월이어야만 했던 게 납득된다. 죽음을 앞두고 몰래 떠나려다 들킨 여자에게 남자는 절박하게 매달린다. 그러나 그녀는 확고했다. 절정으로 치닫는 이별 장면에서 그 남자와 평소 즐겨 했던 ‘까막잡기(눈가리개를 쓰고 다른 사람을 찾는 놀이)’처럼 목도리로 그의 눈을 가린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그녀의 마음을 그는 결국 받아들인다.
졸음에 겹던 몸과 마음이 깨어나면서 영화에 빠져들었다. 인생이 뭘까?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맞을까? 우리가 진정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지만 아직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그 남자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새삼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언젠가는 내 눈에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이 들어오길 바랄 뿐이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 시에 가까워진다. 내일은 또 다른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영화의 여운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첫댓글 세량지가 좋다는 말을 들어 꼭 가보고 싶었는데 거기 가면 선생님과 같은 따뜻한 감성을 느끼고 선생님처럼 담아내볼 수 있을까요. 하하
걷기 좋아요. 근처에 있는 쌍교 숯불 갈비도 맛있고요. 예쁘게 읽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화순 세랑지는 사진가들에게 풍경 찍기 좋으나 그냥 작은 연못입니다. 뭐 시엔에이 기자가 경치 좋은 곳으로
소개해서 그렇게 유명해졌다 합니다. 꽃피는 봄날 새벽 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은 볼 만합니다.
저도 처음에 작은 연못 같아 실망했어요. 그래도 둘레길은 걷기 좋았어요.
선생님의 귀한 글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낍니다. 고맙게도 세랑지라는 근사한 곳도 추천 받습니다. 단풍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한번 다녀 오세요.
세량지. 가고픈데 여즉 못 가봤네요. 그리 멀지도 않은데. 충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영화도 봄시롱.
히히, 그랑게요.
내일은 또 다른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는 소녀 같은 조 선생님, 그리 긍정적이시니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으신가 봅니다. 이 가을도 늘 화사하시길 빌게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더 소녀 같아요.
역시 숲 해설가 다우십니다. 선생님 글도 숲속에서 노니는 듯 신선함으로 다가오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세랑지! 여행의 뒷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저도 그곳에 다녀온 후 내 모습을 상상하며 곱게 익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분명 선생님의 내일은 또 다른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생님의 향기가 느껴지는 제목, 그 표현이 너무 아름답네요.
현재를 붙잡아라, 오늘을 즐겨라.
인생 뭐 있나요? 이제는 진지하게 사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단순하게 카르페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