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구약성경 인용)
요한복음 16장 1-5절『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예수님 당시에 유대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가 이단이며, 그와 함께 하는 자는 모두 유대교에서 출교당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율법에 따라 처형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려 한 것이다. 가장 먼저 순교당한 제자는 야고보였다. 제자들은 죽음의 위험 앞에서 비로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으며, 성령이 와서 증거해 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7-11절『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보혜사(파라크레토스)는 중보자, 위로자, 변호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보혜사는 제자들(성도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5장 26절『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개역개정 번역이 보혜사가 마치 성령인 것처럼 번역되었다. 헬라어를 다시 번역하면, Ὅταν ἔλθῃ ὁ παράκλητος ὃν ἐγὼ πέμψω ὑμῖν παρὰ τοῦ πατρός, τὸ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 ὃ παρὰ τοῦ πατρὸς ἐκπορεύεται, ἐκεῖνος μαρτυρήσει περὶ ἐμοῦ·
『내가 보혜사로 올 때, 아버지로부터 나온 진리의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인데,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보혜사 예수님이 제자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시고, 그 분이 보내시는 성령이 성도의 영적 마음에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성도의 영 속으로 보혜사가 들어오시고, 영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다. 영이 머리에 해당하면, 마음은 뇌와 연결된 신경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순교당하는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당황하고 어쩔줄 모르는 상황이 되겠지만, 보혜사 예수님이 오시면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차질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가 있으므로 이동의 한계가 있지만, 영으로 제자들의 심령 속에 들어오면 제자들이 지역적으로 흩어져 있더라도 동시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혜사(예수)가 제자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면 하시는 일이 바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면, 결국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말이다. 교회 공동체에 모이는 신도들은 저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서로 알 길이 없다. 과거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 언약을 하신 하나님,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을 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 정도로 알고 있다.
그래서 신도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들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에 대해서, 말 못하고 생각도 없는 그런 우상이 아니라, 신도들과 대화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신도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죄를 지으면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히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들이 율법에 따라 잘못을 행했을 때, 심판하는 자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율법에 따라 희생양으로 하여금 대신 심판을 받게 하거나, 또는 돌로 쳐죽이는 그런 일들을 행한 것이다. 그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이 신성모독을 했으므로, 십자가에서 처형하는 일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교회 공동체는 신도들에게 적용하는 교리가 있다. 신도들이 교리를 벗어나면 징계하는데, 그 교리는 성경에 있는 표현도 있지만, 신학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교리를 바꾸고, 적용도 대상에 따라 다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교리가 성경 말씀 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연상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장 20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리를 만들어서 교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말씀한 적이 없으며, 오직 성령이 하시는 대로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복음서나 서신서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만든 내용들이다. 따라서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알고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핵심이 세가지라는 말씀이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신약성경의 모든 부분이 이 세가지로 압축되는 것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듣지도 못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들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도들은 죄로부터 벗어나고,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믿음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돌이키라는 것이다.
신도들은 죄에 대해서 계명을 어기는 것을 죄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거부하므로 성령모독죄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로마서 6장 6-7절과 8장 1-2절의 말씀이다. 로마서 6장 6-7절은『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심이다. 이 탐심이 죄의 몸에 들어있는데, 죄의 몸이 바로 옛사람으로 표현되었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죄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지도 않고 날마다 죄를 용서받는 일은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로마서 8장 1-2절을 적용한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럼에도 날마다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옛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세상(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고 한다. 골로새서 3장 2-3절『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이때 나 라는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나인 것이다. 구약에서 죄인이 죄를 범했을 경우, 희생양을 죽여서, 그 피의 일부를 성소 밖 마당의 제단에 붓고, 살을 제단에서 태웠다. 그리고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서 시은소에 피를 일곱번 뿌려서 죄를 용서받은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갔다.
히브리서 9장 24-26절『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날마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이,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은 날마다 예수를 죽이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심판(크리세오스)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케크리타이)을 받았음이라.』크리세오스(기본형은 크리시스)는 재판이라는 의미다. 판결을 앞두고 심리 등 여러 절차가 진행되는 것이다. 케크리타이(기본형은 크리노)는 선고하다의 의미로 재판의 결과 판정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판결을 받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너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소유로 판결이 났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사탄과 상관없는 자들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악역을 부여한 천사에 불과하다. 신도의 영적 전쟁의 대상은 사탄이 아니라, 바로 육적 자기자신이다. 육적 자아에는 하나님처럼 돠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있다. 이게 바로 죄라는 것이다. 죄가 있으므로, 그 주인이 사탄이 된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선악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을 육체에 가두고, 그의 심령에 성전(옛성전)을 세워,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하늘 문에 닫히고,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둘째 사망에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심령 속 새성전에 들어오신 보혜사 예수님은 재판관으로서 심판자가 아니라, 중보자로서 예수님이신 것이다. 중보자 예수님은 성도를 보호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증언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