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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의 시학'을 위하여
2002년 신춘문예 시 경향
글_이문재시인
전보가 날아오기를 학수고대하던 그때가 언제였던가.
태양으로부터 하얀 비둘기가 날아와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살포시 앉던 엄청난' 꿈을 꾸고 나서 나는 얼마나 큰소리를 쳤던가. 나는 당선을 확신하고 있었다.
당선소감의 첫 문장을 중얼거리며, 친구들과 며칠째 외상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 연말, 나에게 전보를 보낸 신문사는 없었다.
벌써 20년 저쪽의 일이다. 1982년 겨울, 처음으로 도전한 신춘문예에 보기 좋게 낙방하고 나서(심사평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는 신문사에 시를 보내지
않았다.
동인지에 처음 시를 발표하고 나자, 주위에서는 나를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토록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라는 소리는 매우 낯설었다. 신춘문예나 추천, 신인상 등을 통해 등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매년 두툼한 1월 1일자 신문을 펼쳐들었다.
새로운 시와 얼굴을 대할 때마다, 이제 막 시인으로 태어난 그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들 가운데
과연 몇이 시인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주제넘은 우려를 하게 되었다. 그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예비 시인들이 보내온 시들을 심사
하게 되면서, 1월 1일자에 실리는 신춘문예나 계간지 문예공모 당선작에 대한 설레임은 많이 감소되었다. 독자로서 당선작을 읽는 행위는 분명 축제와 같은 즐거움이지만, 심사위원으로서 당선작을 골라내는 행위는 축제를 준비하는 고단함 같은 것이었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계간지는 창간 이후 매년 두 차례씩 시와 소설, 평론 부문에서 신인을 뽑다가 3년 전부터
매년 한 차례로 줄였다. 응모작이 많은 것도 문제였지만,
신인다운 신인을 가려내기가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문예창작학과와 각종 문화센터의시 창작 강좌 때문이었는지, 투고작 수준이 그만그만했다. 이른바 '잘 만들어진' 투고용 시들. 신춘문예도 마찬가지였다.
올해에도 한 신문사 신춘문예 예심을 본 바 있는데, 신인다운 패기와 개성은 드물었다.
니는 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고백(진술), 묘사(비유), 발견(새로움)이라고 보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한 작품 안에서 하모니를 이뤄야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낸다.
그런데 이 세 요소의 공통 분모가 있으니, 바로 관찰력이다.
어떤 시인의 시집 발문에 쓴 적이 있지만, 나는 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고백(진술), 묘사(비유), 발견
(새로움)이라고 보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한 작품 안에서
하모니를 이뤄야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낸다. 그런데
이 세 요소의 공통 분모가 있으니, 바로 관찰력이다.
인간과 세계의 틈새와 이면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 거칠게 말하면, 삶은 관찰의 연속이다. 책읽기도 관찰이며
음악을 듣는 행위도 관찰이고, 연애 또한 집요한 관찰이
다. 대상과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대상으로부터 분리되
어나오는 관찰.
고백이 대상과 일치하는 일차원이라면, 묘사는 보는 자와 대상이 분리되는 이차원이다. 보는 자와 대상과의 거리에서 긴장이 발생한다. 상상력이 활동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고백과 묘사는 발견을 획득하면서 삼차원으로 격상한다. 그러므로 발견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거나 아직 덜 된 시이다. 그런데 고백-묘사-발견은 순차적인 과정이 아니다. 고백-묘사-발견 세 행위는 한 순간에 버무려질 수 있다. 고백-묘사-발견은 매우 기초적인 시창작법이기도 하지만, 시를 분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사용할 수도 있다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이 세가지 '시약 으로 성분 분석을 할 수는 없을까. 10편에 달하는 당선작들을 한
두 가지 흐름으로 정돈할 수 없을 바에야(몇 편의 시를
연민의 시학' 으로 범주화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
우, 여타의 시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 이
갈래지을 수 없음을 나는 시의 풍요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의 시각, 요컨대 발견의 시학' 을 잣대로 삼아 시를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으로 보인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신인들은 과연 무엇을 발견해 낸 것일까
발견의 시학' 을 잣대 삼아 시 감상
2002년 신춘문예 당선작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시는 송유자의 <조치원을 지나며>("경향신문.)
이다. 밤열차를 타고 조치원을 지나며 갖가지 경계에 갇혀 있는 삶의 국면을 고산자와 비에 젖은 풀잎, 그리고
새울음에 견주는 상상력이 유연하고 활발하다. 고백적인
요소는 거의 없는 대신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시키는 비유가 참신하다. 이 비유는 이미 발견이다. 수첩 속에 있는 지도의 경계선들에서 새장을 보는 시인의 눈은, 조치원이 새장 속에 갇혀 있음을 본다. 발견이다. 새장 속에 같혀 있는 조치원은 시의 후반부에서 "납탄처럼 박혀 있는" 밤열차와 호응하며 구체성을 획득한다. 경계에 갇혀있는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조치원과 새장을 연결시키는 은유의 거리는 가깝지만 납탄과 정차중인 밤열차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다. 이 아득하지만, 기어이 연결되는 두 이미지가 독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가동하게 한다. 사냥감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무거운 납탄과 목적지를 향해 어두운 철로를 달려야 하는 밤기차를 서로 만나게 하는 힘이 시의 힘이다
정차중인 밤열차에 갇혀 있는 나' 는 고산자가 꿈꾸었던 자유. 즉 "지도 밖의 세상"'을 생각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를 옥죄는 세상의 경계를 지우는 것은 밤비와 풀잎이었다. 오랜 가뭄을 견뎌낸 풀잎이 비를 맞으며 "스적스적 일어서"는 것인데, 풀잎은 "논바닥처럼 갈라진 모든 경계선"을 핥는다. 경계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타넘으며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풀잎이
경계선을 핥으며 일어설 수 있는 까닭은 땅이 상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땅의 상처가 바로 땅의 생명력이다.
그리하여 땅 위에 경계가 그어질 때마다 경계는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것이다
유연하고 자유분방한 연상작용은 "말갛게 씻긴 새울
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새울음을 듣는 것은 조치원역에서 있는 열차이지만, 그 열차는 '나' 의 의인화이기도 한 것. '나' 가 듣는 저 맑은 새울음은 독자들에게도 들린다.
시를 읽는 이 또한 모든 경계를 넘어 자유를 꿈꾸는 것이다. <조치원을 지나며>가 발견한 것은 경계를 넘어서려는 자유에 대한 의지이다.
바다에마개를 씌운 새로운 시각
윤성학의 <감성돔을 찾아서>(r문화일보J )도 흥미롭게 읽었다. 빠른 물살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감성돔을 낚으려는 낚시꾼의 내면 세계를 포착하는 언어가 기운에
넘친다.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라는 첫 행은 평이한
진술이지만, 비장감이 전해져 올 만큼 힘이 있는 진술이다. 둘째 연의 문장도 평이하다. 하지만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파도의 깃을 세우면" 에 이르러 바다는 감각적인 육체로 변한다. 2연의 마지막 문장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는 평범한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바다의 변화와 감성돔의 변화가 전해 주는 긴박감이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라는 문장에 와서 끊임없이 부딪히기 때문이리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감성돔 시즌을 맞이하는 낚시꾼의
부푼 기대가 저 단순한 문장에서 팽팽해져 있는 것이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라는 구절에서 이 시는 하나의 발견에 도달한다(시는결국 한 문장이다). 절정이다. 바다 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빠른 물살을 즐기고 있는 감성돔이 자기 자신으로 돌변하면서 시는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감성돔이라는 대상이 '나 라는 주체로 역전하는 것도 신선하지만, 바다에 마개를 씌우고 그것을 뽑아 올려야 한다는 상상력은 '나' 를 잡아채는 힘이 얼마나 강하고, 또 얼마나 재빨라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감성돔을 찾아서>가 새로운 시일 수 있는 까닭은 바다에 마개를 씌웠기 때문이다.
심은희의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세계일보" )는 소통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는 삶이 감당해야 하는 환멸을 그리고 있다. "생은 울렁거림이다"라는 도발적인 첫 행이 시 전체를 지배하면서 "낯선 불행"들의 세목을 복원한다. 노인들의 푸념이나 수작에서 늘어진 가로수를 보고, 할머니의 입가에 걸린 담배에서 과자 봉지를 들고
달려가는 위태로운 어린아이를 보는 '나' 의 생은 멀미를
일으킨다. 기어코 달려나가던 아이는 버스에 치이고, 울렁거리는 '나' 의 생은 어머니의 노동을 떠올린다. 세상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는 '나' 의 시선은 그로테스크해져서, 청소차에서 '낯익은 해골' 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아까부터 누군가 말을 걸어" 오지만 '나' 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 '나' 는 버스에 앉아 있는 '돌부처"인 것이다. 하지만 이 돌부처는 돌 '부처' 가아니라 '돌' 부처이다. 이 돌부처는 누군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일상적 사건(예컨
대 어린아이의 교통사고) 앞에서도 속수무책이다. 돌부처에겐 능동성이 없다. 주체성이 없다. 그러니 불행도
'내 몸의 가장 투명한 부분을 밀치고 들어" 선다. 불행이
다가오는 사태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돌부처는 가만히 앉
심은희의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세계일보 )는 소통 불가능한 시대를 실아가는 삶이
감당해야 하는 환멸을 그리고 있다. "생은 울렁거림이다"라는 도발적인 첫 행이 시 전체를
지배하면서 "낯선 불행"들의 세목을 복원한다.
아서 당할 수밖에 없다. 다만 숨이 가빠오고 울렁거릴 따름이다.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는 세계 앞에서, 또는 자기 생 앞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주체의 비극을 발견하고 있다. 생에 대한 환멸의 원인은 무엇일까. 멀미를 동반하는 세상에 대한 적의는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생래적인 생의 멀미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짤랑거리며' 다가오는 불행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 아닐까
늙은 산벚나무는 '거대한 모성" 의미
안차애의 <사냥감을 찾아서>(r부산일보! )는 젊은 언어가 "쿵광거리며 뛰어다닌다". 피어싱으로 성인식을 대체하는 새로운 풍속. 신체의 일부에 상처를 내고 거기에 야생동물을 연상시키는 장식을 하는 피어싱은 매우
가학적이고 동물적이며, 그리하여 원시적인 냄새를 풍긴다. 제도 속에서, 고정관념 속에서, 접속 강박 속에서
다양하고 은밀한 억압과 금기 속에서 식물화하는 현대인들에게 성인식은 잊어버린, 혹은 빼앗긴 동물성(야성)을 돌이켜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멧돼지 어금니를 연상시키는 봉 두 개를 제 몸에 꽃으며 바야흐로' 어른이 되었음을 확인한다. 들소 뿔 모양, 사슴의 목뼈 모양, 상아 모양의 장신구는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는 자기 최면이다
자기 살을 뚫어(피를 보고) 야성을 부착하고 성인이 되자 지천에 널린 "사냥감" 을 찾아 질주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알타미라 동굴 근처의 바람을 잡기도 하고, 친구의 입에서 오츠크해산 고래 한 마리를 포획하기도 한다.
이 모든 '즐거운 놀이' 는 취향이다. 취향. 신세대의 선택기준, 다시 말해 가치관은 이제 취향이다. 이념이나 논리가 아니고 취향이다. '늙은 아버지의 가슴뼈 밑에 숨어사는 느린 곰의 촌스러운 진지함' 을 자기 혀에 박는 것도 취향이다. <사냥감을 찾아서>)는, 아버지를 극복하고 마침내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성인식이 이제는 '취향 의 차원에서 "아주 가학적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보고하고 있다.
임경림의 <산벗나무를 묻지 마라>(r한국일보)는 죽은 어미가 아기를 그리워하는 심경을 산벚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늙은 산벗나무는 온 산을 먹여 살리는 어미이다. 늙은 산벗나무가 먹여 살리는 생명들은 실로 여러가지다. 벙어리 부처에서부터 하늘과 구름, 햇살, 바람새, 여우비, 할미보살, 열매들의 슬픔, 노랑나비.첫 연에서 "먹이고"가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되는데, 이 반복이 리듬을 발생시키는 동시에, 거대한 모성인 늙은 산벚나무의 왕성한 생산력과 그육한 자애로움을 한층 강화한다. 이 산벚나무의 정체는 무엇인가. 산벚나무는 젖먹이 아기를 버려두고 세상을 떠난 어미의 화신이었다.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무엇이 죽은 어미로 하여금 무덤 밖으로 나와 서 있게 했을까. 그것은 퉁퉁 불어터진 젖 때문이었다. 산벚나무는 죽어서도 두고 온 아이 생각에 젖무덤이 부어오른 젊은 어미인 것이어서, 제 아기에게 줄 젖을 짜내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다. 젊어 죽은 어미의 젖은 산은 물론 절 밖으로 홀러넘친다. 절 밖의 세상을 먹여 살린다. 그러므로 산벗나무를 묻지 말라는 것이다. 이 시의 미덕은 연한 녹색을 배경으로 하얀 꽃을 피워내며 스스로 환한 등불처럼 서있는 산벗나무를 젊어 죽은 어미와 연결시킨 테 있다. 무덤 옆에 있는 산벗나무를 아기가 보고 싶어 환생한 젊은 어미로 보는 눈. 죽음을 환한 봄날 한가운데로 호출하는 눈. 젊은 어미의 현신인 산벗나무를 다시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라고 보는 눈. 이 눈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발견하는 눈이다
작은 것들에 대한 시인의 연민
발견하는 눈이 일상적 사물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채향옥은 오래 되어 나달나달한 헌 돈에서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리" 는 훈훈한 인심을 찾아낸다. <헌 돈이 부푸는 이유>(중앙일보)는 얼핏 소품으로 보이지만,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는 능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 있다. 수금해 온 돈이니, 얼마나 여러 군데에서 모아 온 돈일 것인가. 만원짜리 닭은 지폐를 세다가 지폐에 '이상순 침목계 돈" 이란 글씨를 발견한다. 맞춤법이 틀려 있으니( '침목' 이 아니라 '친목' 이 맞다), 글씨체도 세련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글씨가 쓰여진 지폐는 한 장이 아니라 다섯 장이었다.
이상순이란 인물이 계주였을 친목계에 보내는 돈 5만원. 시인이 보기에, 그 만원짜리 다섯 장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한 묶음에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그 결속이 놀라" 워 "경의를 표" 할 정도다.
나' 는 돈 세기를 멈추고 이상순 친목계가 얼마나 인간과 인간 사이를 돈독하게 했을 것인지를 상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반인간화하는 지폐를 이렇게 인간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벙글벙글 넘어가는 닭디넓은 헌 돈"이라는 마지막 구절을 읽고 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헌 돈이 부푸는이유'는 글씨가 쓰여진 만원짜리 다섯장 때문이 아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은 일상적 사물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시인의 마음씨가 헌 돈을 빵처럼 부풀게 하는 것이다. 친목계에 대한 나'의 경의는 살아 있는 모든 것, 아니 작은 것들에 대한 시인의 연민 혹은 연대의식이 아니었을까
이향의 <새들은 으로 날아간다>(매일신문)또한 연민의 시이다. 공단 위를 날아가는 철새 떼는 돈을 벌기 위해 모국을 찾은 조선족 여인 김금화 씨에 대한 은유이다. 쇠기러기가 날아가는 북국은 조선족 여인이 두고 온 고향. 대낮에도 알전구가 켜져 있는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인의 마음은 어느새 고향에 가 있다.
몰래 숨겨둔 적금통장에는 삼만원 미만의 싸락눈이 하얇게 쌓인다" 혹은 "막내의 바짓단도 겨울해만큼 짧아졌는지" 같은 두 구절만으로도 이 시는 이미 시이다. 은유의 힘을 구사할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시선의 이동에 유의하며 읽으면 또 다른 맛이 우러난다. 시인의 시선은 쇠기러기떼가 날아가는 하늘에서 공장 굴뚝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질척거리는 길로 내려온다. 섬유공장 안으로 들어간 시선은 조선족 여인의 꿈속으로 들어가 나비를 보다가 채 삼만원이 안 되는 적금통장을 클로즈업한 뉘. 훌쩍 북국으로 날아가 연초록싹을 태우는 땅 속의 무를 바라본다. 부쩍 키가 큰 막내의 바짓단에서 시선은 다시 공단 근처 갈대가 우는 강둑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쇠기러기떼 날아가는 하늘로 올라간다. 시인의 시선(카메라)을 따라가다 보면 애잔한 흑
백 단편영화를 보는 것 같다.
내가슴"에서 빠져나간 옹이 자국이 곧 "세상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된 것이다.
나무의 상처인 옹이. 삶은 상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면서
문득 한 걸음씩 진화를 거듭한다는 메시지가 단정한 언어에 실려 있다.
'역전' 이야말로 시의 발견
이윤훈의 <옹이가 있던 자리>(r조선일보 )도 <헌 돈이 부푸는 이유>나 <새들은 으로 날아간다>와 함께
묶일 수 있는 시이다.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있다. 옹이가 빠져나간 나무 판자, 늙은 땜장이, 뻥튀기, 길이 굽어드는 곳 등이 풍겨내는 이미지는 변두리의 이미지이다. 낡고 오래 된 것들, 낮고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은 시인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처럼 보일 때가
많다. "권력이 있는 곳에 진실은 없다"는 아나키스트
묘지의 묘비명처럼, 크고 빠른 것들은 부도덕하다. 중심인 것들은 비윤리적이다.
길지 않은 시이지만, 옹이가 있던 자리, 즉 나무 판자의 구멍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을 통해 생성소멸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다. 꽃의 열림과 닫힘은 물론이고 먹고 살기에 지친 "등이 시린 이들" 을 아우르고 마침내 "잠자리에 들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다. 고통으로 점철된 세상에 대한 인식이 바로 "내 가슴에 박혀 있는 옹이였거니와, '나' 는 목관에 못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짐짓 깨달음에 이른다. "내 가슴" 에서 빠져나간 용이 자국이 곧 "세상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된 것이다. 나무의 상처인 옹이. 삶은 상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화하면서 문득 한 걸음식 진화를 거듭한다는 메시지가 단정한 언어에 실려 있다.
장석원의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대한매일J)는 순환하는 질서, 다시
말해 원환의 상상력을 자신감 있는 어조로 구사한다.
'백송이 꽃을 피운 수련" 곁에서 태어난 "피곤한 바람인 나는 수면 위에서 한 방율의 물로 변신해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수면으로 떨어진다. 수면에서 다시 물 밑으로 가라앉아 수압으로 인하여 오므라들었다가 다시 "백송이 꽃을 피운 수련" 곁으로 돌아간다. 이 시는 존재의 전환이 커다란 원의 원주 위에서 일어난다. 수련의 한숨이자 피곤한 바람이었던 나 는 "구름빛"으로 거듭난다.
천상에서 가벼움으로 다시 태어난 '나' 는 이마와 얼굴에
떨어진다. 이마와 얼굴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대상의
중심이다.
존재의 전환은 원주에서도 일어나지만, 한 바퀴 원을 그린 다음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처음에 수련 곁에서 수번의 한숨으로 태어난 "피곤한 바람'"은 수동적 존재였다. 햇빛이 몸을 데워야 비상할 수 있었고, "오래 된 바람, 흰 손길에 같혜"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 바퀴 순환하고 다시 수련 곁으로 돌아왔을 때 '나 는 능동성을 획득하고 있다. '나 는 여전히 바람이고 장막이지만, 수련 꽃잎들을 부유하게 하는 바람이고 장막이다. 성인식을치러낸 바람이다. 자신의 부모인 수련의 꽃잎을 불려가게 하는 '나 는 이미 스스로 부모가 되어 있다. 이 역전이 바로 이 시의 발견이 아닐 것인가.
김중일의 <가문비냉장고>(동아일보)는 가문비나무와 냉장고라는 이질적 이미지가 충돌하며 스파크를 일으킨다. 자연(생명)과 물질(산업문명) 사이의 길항과 '화해' 를 따라가는 것이다. 고백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화자인 '나' 는 첫 행에서 등장했다가 이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라진 '나' 는 냉정한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며 가문비나무(자연)나 냉장고(산업문명) 사이의 긴장을 주시한다. 묘사는 가문비나무와 냉장고가 갈등하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문명, 다시 말해 인간이 버린 쓰레기를 발견하는 순간, 나무는 즉각 동물화한다. 생명이 위기를 느낀 것이다. 가문비나무는 순환하는 생명의 질서를 은유하고, 버려진 냉장고는 자연을 도구화한 산업문명의 불구성을 지시한다. 이쯤에서 시는 문명 비판론으로 나아갈 것 같은데, 돌연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등단은 발견의 죽음이 시작되는 자리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가는 연인과 늙어가는 무지렁이 남자가 나타나면서 시는 복잡해진다. 급기야 냉장고가 가문비나무에 플러그를 꽃는다. 물질이 생명과 화해하는
것인가. 생명은 문명의 폐기물을 수용하는 것인가. "빙점 아래에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리는" 대목에 이르르면 가문비나무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모호해진다.
냉장고와 가문비나무의 이상스런 화해는 가문비나무의
도발적인 행위에 의해 모호성을 배가한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인데, 이때 냉장고는 푸른 무덤으로 솟아오른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생명의 자진( 티쵸)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가문비냉장고>의 모호성은 다음과 같은 비문에서 예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라는 문장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가. 주어와 목적어는 각각 하나인데, 네 개의 서로 다른 술어를 거느리며 뒤틀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만이 제대로 된 문장이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를 얽매이다니, 가문비나무가 냉장고를 도망가다니, 가문비나무가 냉장고를 붙들린다니. 시에게 주어진 자유가 비문까지 허락하는 것은 아니리라. 가문비나무와 냉장고를 결합시킨 발상은 뛰어나지만, 버려진 냉장고가 가문비나무의 배꼽 아래에 플러그를 꼽는다는 상상력 또한 빼어나지만, 시는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감추고 있다.
시는 발견의 연속이다. 하지만 단순한 연속이 아니다.
한 편의 시에서 이룩한 발견은, 발견으로 인정받는 순간
폐기된다. 발견은 매번 죽는다. 시인은 다시 새로운 발견
(새롭지 않은 발견이 어디 있을까마는)을 찾아헤매야 한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쓰면서 다시 태어나지만, 태어나는 순간, 다시 죽는 존재다. 1월 1일자 신문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신인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시를 발표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동시에 발견의 죽음도 함께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건투하시기를!